- 지난 5·31 지방선거의 최대 피해자는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일 듯하다. 당의 참패는 곧 그의 참패이기 때문이다. 1996년 국회의원이 된 이래 최연소 최고위원, 열린우리당 의장, 통일부 장관 등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그에게 최대의 시련이 닥친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고난을 극복한 역사가 있어야 한다. 정 전 의장은 지난 실패를 딛고 대권에 다가갈 수 있을까.
정동영(鄭東泳·53)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2001년 소설가 공지영과 인터뷰하면서 한 말이다. 뛰어난 언변으로 대중을 휘어잡으며 친화력 있고 대중적 인기가 높은 지금의 정동영을 생각하면 다소 뜻밖의 고백이다.
정동영은 본래 내향적 사고형 인간이다.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 원리원칙을 고수한다. 신출내기 사건기자로 일하던 1979년 2월 정동영은 열네 살 소년의 죽음을 보았다. 전북 고창이 고향인 소년은 사흘 전 상경해 신발공장에 취직했다. 소년은 작업장 입구에 멈춰 있는 화물 운반용 승강기에 올라탔는데, 그 순간 승강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소년은 엉겁결에 뛰어내렸는데, 문이 닫히는 바람에 그만 승강기 틈 사이에 끼었다. 고용주의 책임이 컸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무시하고 어린 소년에게 일을 시켰고, 승강기 안전관리도 소홀히 했다.
정동영이 열심히 기사를 쓰고 있는데 선배 기자가 와서 취재내용을 방송에 내보내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 회사 중역이 친척이라고 했다. 정동영의 머릿속엔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권력자의 비리에 대한 비판은 고사하고, 공장에서 비명횡사한 어린 소년의 죽음조차 보도할 수 없다면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힘, 돈, 인정의 벽 앞에서 이렇게 쉽게 무릎을 꿇을 거라면 나는 기자가 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가 너무 비참했다. 그러나 비참한 만큼 비장해졌다.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 기사가 못 나간다면 차라리 기자를 그만두겠습니다.” 정동영의 완강한 태도 때문에 소년의 죽음은 그날 밤 ‘뉴스데스크’에 선배 기자의 리포트로 단독 보도됐다.
내향적 사고형은 분석적, 논리적이며 치밀해 매사에 빈틈이 없다. 1991년 1월 LA 특파원이던 정동영은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이 이라크 공습을 개시하기 일주일 전, 이라크와 인접한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파견됐다. 전쟁을 목전에 두고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었다. 유엔 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군사적 제재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것과 최후 협상을 다시 벌일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정동영은 요르단으로 떠나기 전, 미국 유수의 신문 및 방송, 잡지에 보도된 뉴스를 종합하고 면밀히 분석했다. 군사 전문가나 국제정치학자의 의견도 청취했다. 덕분에 요르단에 도착하자마자 현지 분위기를 토대로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최후통첩 종료일인 1월18일의 공세가 확실하다는 것. 이런 결론을 바탕에 깔고 D데이 닷새 전, 나흘 전, 사흘 전 하는 식으로 카운트다운을 하며 현지 분위기를 한국에 전했다. 그리고 폭격 당일 낮에는 이라크와 요르단 국경 근처의 사막에서 단정적으로 보도했다.
“미국과 다국적군의 공습을 몇 시간 앞두고 있습니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오기 전에 바그다드는 화염에 휩싸일 것입니다….”
당시 국내에서 이렇듯 확신에 찬 보도를 내보낸 방송사는 MBC뿐이었다. 대개 공습이 일어날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로 나눠 양다리를 걸친 보도가 일반적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그의 보도는 모험에 가까웠다. 그러나 정동영은 자신있었다. 실제로 현지시각 새벽 1시를 기해 일제히 함포 사격이 시작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비굴할 정도로 헌신적인 사랑
내향적 사고형은 끈기가 있고 집념이 강하다. 1991년 이라크 공습 때 정동영은 당시 사담 후세인이 바그다드에 고립돼 있는 동안 외부세계의 유일한 연락 창구인 후세인 요르단 국왕을 인터뷰하려고 했다. 전쟁 전에는 후세인 국왕이 CNN, ABC 등과 인터뷰를 했지만 공습 후에는 노출을 꺼려 쉽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 특파원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다. 한국 교포가 후세인 왕의 주치의라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특파원 모두가 이 노인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노인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포기하는 기자가 늘어났다. 하지만 정동영은 아침, 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하며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래도 노인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로부터 열흘쯤 지나 노인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동영 특파원이요? 국왕에게 내 조국의 기자 수십명이 취재하러 와 있는데 그중 MBC 기자들은 아직도 바그다드에 남아 있다고 전했소. MBC에 시간을 내주시면 한국 국민에게 좋은 뉴스를 전달할 수 있다고 부탁하자 국왕이 흔쾌히 허락하셨소.”
“고맙습니다!”
정동영은 전화통을 붙들고 절을 했다.
내향적 사고형의 단점은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하다는 것. 사랑에 빠지면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비굴할 정도로’ 헌신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아내 민혜경씨와 결혼할 때 정동영은 이러한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민씨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러나 정동영은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다. 연애 시절 정동영은 이런 일기를 썼다.
“그녀가 한번 웃어주면 내 가슴은 환해졌고, 찡그리고 차갑게 대하면 내 가슴은 얼어붙었다. 꿈에서 스며든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 잠에서 깨어난 것이 몇 번이던가. 그러나 나는 확신했다. 내 마음이 이토록 너를 원하거늘 어느 날엔가 너도 나의 진실을 거두어들이리라.”
정동영은 ‘뜯어보기가 질릴 정도’로 연애편지를 보냈고, 학교 기숙사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잘 만나주지 않는다고 친구와 함께 민씨의 기숙사에 가서 고래고래 이름을 부르며 난리를 치기도 했다. 민혜경씨는 연애시절의 정동영이 “숨 막힐 정도로 집요했다”고 회상했다.
이러한 열정에도 민씨는 정동영을 받아주지 않았다. 오지 말라는 대학 졸업식에 기어코 찾아가 꽃다발을 건넸으나 결혼에 반대하는 부모님이 곁에 있다는 이유로 꽃다발을 내던지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헤어졌지만, 2년 뒤 다시 만나 결혼을 약속했다.
수줍거나 자상하거나
그러나 민씨의 부모는 계속 반대했다. 정동영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사직서까지 내고 매일 집으로 찾아가 밤 12시까지 버티면서 승낙을 받아내려 했지만 민씨 부모는 완강했다. 결국 민씨를 납치하듯 설악산으로 데리고 가서 이틀을 보낸 뒤에야 허락을 받아냈다.
내향적 사고형은 낯선 사람 앞에서는 수줍어하지만 친한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등산을 하다 정동영을 알아보고 중년 여성들이 반갑게 말을 건네면 정동영은 수줍은 총각처럼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나눈다.
그러나 아내나 어머니, 그리고 아들에게는 매우 자상하다. 바쁘게 직장생활을 할 때도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와 대화하고, 이불을 펴드렸다. 어머니가 손가락 끝이라도 다치면 직접 반창고를 붙여줬다.
정동영은 감각이 그렇게 발달한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의 부인이 음대 3학년 여학생이던 시절, 정동영은 두 번째로 만난 그녀에게 거창한 이념을 전도하러 나간 사상가나 된 듯 인간의 자유와 이념, 독재정치와 왜곡된 사회상에 대해 설파했다. 그러다 “운동도 좋고 이념도 좋지만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정신을 차려야 되지 않겠어요?”라는 ‘불의의 일격’을 맞았다.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동시대의 학생으로서 어쩌면 그렇게 부르주아적인 사고에 빠져 있을 수 있는 거요?”라며 벌컥 화를 냈다. 여학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갔다.
정동영 전 의장은 5·31 지방선거 패배를 책임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자리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다.
1991년 이라크 취재를 마치고 요르단으로 돌아가던 중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취재하던 정동영은 국민의 정서를 읽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벌판에 들어선 천막을 보면서 ‘미국적 시각이 아니라 아랍인이 생각하는 전쟁의 의미를 취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팔레스타인 부락으로 들어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라크의 후세인을 메시아 혹은 해방자로 여기며 숭앙하고 있었다. 정동영은 천막에 앉아 장작불을 피워놓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마당에 낙타가 있었다. 불현듯 낙타를 타고 독립에 대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염원을 보도하면 실감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낙타를 탄 채 마이크를 잡고 “팔레스타인 사람이 생각하는 후세인은 한국의 시청자가 보는 후세인과는 다르다”는 리포트를 신나게 해댔다.
이 화면이 방영된 뒤 방송사로 비난 전화가 쇄도했으며 YMCA 같은 시민단체에서도 신랄한 비판이 쏟아졌다. “정동영 기자가 스타 의식에 젖어 전쟁 중인 나라에서 볼썽사납게 낙타를 타고 마이크를 잡았다”거나 “사담 후세인을 영웅시하다니,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냐?”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이 일로 정동영은 회사로부터 구두 경고까지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각을 발달시키기 위해 무척 애를 썼던 것 같다. 제5공화국 초엽인 1983년, 언론 자유가 극도로 위축돼 있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아닌 사건이나 사고 소식도 사회불안을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로 축소 보도됐다. 중요한 뉴스를 중요하게 다루지 못하자 정동영은 답답함과 무기력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전담하게 된 5∼6분 동안 그날의 뉴스거리를 낭비 없이, 가능한 한 핵심을 다 집어넣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했다. 많은 양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기사를 압축해 썼고, 빠르게 전달하려고 끊임없이 연습했다. 1분에 3건의 단신을 다루면서 1건당 20초 정도를 할애했다. 이를 위해 조·석간 신문을 섭렵하는 것은 물론 각 부서에서 전달되는 기사를 통독한 뒤 자신이 읽기 편하도록 핵심을 뽑아 다시 썼다. “보도국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코너를 4년 정도 맡아 했는데, 이는 정동영이 뉴스 전달자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는 기회였고, 자신을 훈련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뉴스 앵커 시절에는 오프닝 코멘트가 잘 떠오르지 않으면 혼자서 끙끙대다가 대학 은사인 최상용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럴 때면 최 교수는 언제나 난마처럼 얽힌 논리의 매듭을 명쾌하게 풀어주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줬다고 한다.
“야마가 뭡니까?”
이렇게 노력한 결과 정동영의 감각은 많이 발달했다. 이런 감각은 외향화한 성향을 보인다. 정동영은 핵심적인 사항을 잘 파악하고 간결하게 요점을 정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통일부 장관으로 재직할 때 정동영은 ‘빠른 시간에 핵심을 간파해 정리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통일부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회의 참석자들은 “정 장관은 조용히 여러 사람의 말을 듣는 편인데, 마지막에 핵심을 뽑아낼 때 보면 깜짝 놀란다”고 했다. 각 실·국장을 포함한 간부에게 업무보고를 받을 때 정동영은 “그래서 ‘야마’가 뭡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야마’는 사안의 핵심을 지칭하는 말로 기자들 사이에 통용되는 은어다. 현안에 대해 세세한 사항을 일일이 설명하지 말고 핵심만 알기 쉽게 보고하라는 얘기였다. 보고받는 도중 키워드라고 생각되는 단어가 보이면 동그라미를 치고, 중요한 문장이나 기억할 만한 문장이라고 여기면 밑줄을 ‘쫘악’ 긋는 것도 그만의 독특한 습관이다.
이와 같은 성격적 특성으로 보아 정동영은 카를 융의 심리학적 유형 가운데 내향적 사고형이다. 선천적으로 감각이 많이 발달하지는 않았으나, 후천적인 훈련을 통해 감각을 발달시켰다. 이런 감각은 외향화한 성향을 보여줬다.
정동영의 장점은 현실에 구애하지 않고 이상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자질이다. 정동영은 2001년부터 당내에서 ‘시대적 개혁 과제 해결의 선봉장’ 역할을 맡았다. 개혁 과제는 ‘밀실정치와 1인 보스정치의 타파’였다. 그는 2001년 내내 쇄신의 선봉에 섰고, 그 과정에서 ‘국민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통령 앞에서 한 유일한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2001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이 당 총재직을 사퇴한 다음날, 정치개혁 공청회에서 “대통령이 떠난 민주당을 살릴 방법은 10만명이 참여하는 국민 경선제밖에 없다”며 “대선후보 경선제 도입”을 처음 주장했다. 대부분의 간부들은 “이상적이지만 현실성이 없다”며 동조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실시된 국민경선제는 결국 ‘이회창 대세론’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엄청난 성과로 이어졌다.
때론 독선의 위험이…
정동영은 위기 상황에서 순발력을 발휘해 기민하게 대처했다. 열린우리당 의장이던 2003년 3월 정동영은 뛰어난 순발력으로 위기를 넘겼다.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에 있던 열린우리당 당사를 양평동 농협공판장 자리로 이전할 때의 일이다. 당시 ‘창당 과정에 불법자금이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정동영은 새벽 6시에 당직자들을 소집했다. “당장 짐을 싸라, 창고든 천막이든 닥치는 대로 찾아라, 다섯 명씩 조를 짜 움직이라”고 지시했다.
그날 밤 정동영은 쥐들이 바글거리는 창고에 손전등을 비추며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당사 이전을 결정했다. “떠나자”고 했을 때부터 이전하기까지 2주일도 채 안 걸렸다. 그 틈에 ‘불법자금 투입설’은 사그라졌다. 그는 “위기가 발생했을 때는 극약처방뿐”이라고 했다.
정동영은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해 문제가 뭔지를 짚어낸다. 그리고 상황에 걸맞은 정책을 도출한다. 정동영이 통일부 장관으로 있던 2005년 9월, 한국의 핵물질 실험 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떠올랐다. 당시 외신은 한국 정부가 핵을 보유하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9월13일, 이사회 보고에서 한국의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정동영은 하루 전인 12일, NSC 상임위원회를 열어 한국의 핵 투명성을 거듭 강조했다. 9월18일에는 핵 투명성 유지 및 국제협력 강화, 핵 비확산 국제규범 준수, 핵의 평화적 이용범위 확대 등 ‘핵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4원칙’을 밝혔다.
결과적으로 IAEA는 한국의 핵물질 실험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지 않은 채 가장 강도가 낮은 의장 요약보고 수준에서 마무리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의 핵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대응은 비교적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그의 단점은 독선에 빠지기 쉽다는 점이다. 그는 때로 ‘내가 생각하는 것은 항상 옳다’고 여긴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당의장에 선출된 뒤에도 다소 독선적인 행태를 보였다. 일부에선 ‘정동영 독재’라는 말도 나왔다. 공식적으로 열린우리당은 당의장과 원내대표 쌍두마차 체제로 움직였다. 그러나 새 지도부를 선출한 1·11 전당대회 이후 힘의 균형이 무너져 당의장인 정동영에게 힘이 쏠렸다. 정동영의 말 한마디로 없던 당론이 생겨나고, 당론이 바뀌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4년 중임 개헌론 소동도 정동영의 당내 파워를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었다. 이날 열린우리당 정책위원회는 정책위원회 공약개발 워크숍을 열어 총선 10대 핵심공약을 조율할 예정이었다. 사전에 공개된 자료에는 2007년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실시하는 것을 포함,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핵심공약으로 정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워크숍 시작 직전, 4년 중임제 개헌론은 핵심공약에서 삭제됐다. 문제의 자료집을 검토하던 정동영이 정세균 정책위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총선을 앞두고 개헌론을 거론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중임제 개헌론을 삭제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총선 공약은 정책위 워크숍에 이어 공약심사위원회 검토 과정 등 여러 단계의 토론과 검토를 거친 뒤 최종 결정된다. 그런데 당의장 말 한마디에 핵심공약 아이디어가 나타났다 사라지자 당에서는 “정 의장의 독주가 지나친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정동영은 자극에 예민하기 때문에 충동적이고 독선적인 정책을 내놓을 수 있다. 당의장 시절 정동영은 재래시장을 찾았다가 전국재래시장 대표자협의회를 구성하고 특별법 제정을 추진했다. 그는 당장 재래시장에 대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것이 민생(民生)정치라고 본 것이다. 여당 대표가 민생에 관심을 갖는 것은 중요하지만, 좀더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즉석에서 해법을 찾으려고 하면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정책결정이 나오게 마련이다.
정동영 전 의장은 연설에 관한 한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것 같다.
카메라만 돌아가면 화려해지는…
방송기자와 앵커로서 17년간 일하면서 그는 성격의 변화를 겪었다. 첫째는 ‘외향화’다. 정동영은 본래 내향적 성격이었는데 방송기자와 앵커를 하면서 점차 외향적 성격으로 바뀌었다. 이를 통해 현실에 대한 판단이나 적응 능력이 발달하고 적극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사건현장을 취재해야 하는 방송기자로 일하면서 정동영은 모든 에너지를 외적인 현실 문제를 파악하는 데 쏟아 부었다. 자신의 내적 문제에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정동영은 내향적 성향의 장점을 제대로 키울 수 없었다.
둘째는 지나치게 감각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정동영은 본래 성격으로는 감각이 발달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분초를 다투는 TV 뉴스를 진행하려면 핵심을 빨리 파악해 정리할 줄 아는 감각이 필요했다. 이를 통해 그는 감각을 많이 발달시킨 것 같다.
그런데 이처럼 본래 감각형이 아닌 사람이 후천적으로 감각이 발달한 경우에는 ‘과보상’을 하게 된다. 강박적인 경향을 띠어 유연하지 못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과장하기도 한다. TV 카메라를 과잉 의식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김근태 의원은 “정 장관은 카메라만 돌아가면 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나는데 나는 카메라만 보면 딱딱하게 굳어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 의원의 말처럼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부적절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2005년 6월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드러난 행동이 그랬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정동영은 평양에서 현지 취재를 한 공동취재단, 그리고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사무국 프레스센터에서 취재를 벌이던 기자들과 한 가지 ‘신사협정’을 맺었다. 즉 ‘인천공항에서는 절대로 기자회견을 하지 않는다. 도착 즉시 청와대로 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한 뒤 남북회담사무국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불 안 가리는 성격
그러나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정동영의 손에는 메모지가 쥐어져 있었고, 김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나온 주요 내용 6가지가 오후 8시20분경 방송 특보를 통해 생중계됐다. 평양에서부터 동행한 한 인사는 공항 도착 직전 정동영이 화장하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했다. 기자들은 “정 장관이 노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삼청동 남북회담사무국에 도착하면 9시 뉴스에 자신의 성과가 전해지지 않을 것임을 의식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통일부는 “국민이 궁금해하기 때문에 내용의 일부를 공개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 해 6월23일 남북장관급 회담 공동보도문 발표도 저녁 9시에 맞춰 이뤄졌다.
정동영의 한 측근은 “정 장관의 장점은 중요한 선택의 시점에서 보여주는 동물적 감각”이라며 “그는 항상 이기는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지나치게 감각에 의존하는 성향으로 자신의 본래 성격인 내향적 사고형의 장점을 발현시키지 못하고 있다. 내향적 사고형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의 철학과 정치적 신념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동영은 ‘콘텐츠가 약하고, 철학과 비전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끊임없이 받았다. 결국 국민에게 본래의 자기 모습과 능력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한 것이다.
내향적 사고형은 대체로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며, 배우려는 자세가 진지하다. 정동영은 학습능력이 뛰어나다. 매일 밤 학계나 통일관련 연구소 전문가들과 서너 시간씩 공부 모임을 가져 주말까지 바빴다. 2005년 1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 참석했을 때 동행했던 NSC 이지현 대변인은 “서울에선 물론이고 현지에서도 공식 일정이 끝나면 정 장관이 끊임없이 자료를 읽고 준비하는 모습을 봤다”고 말했다.
정동영의 자동차 팔걸이 위엔 책이 빼곡히 놓여 있다. ‘신경제 용어 사전’ ‘남북관계 주요 법령집’ ‘통일 남북관계 사전’ ‘남북 합의서’ ‘헌법 국회관계법’ 등이다. 연애시절에도 음대 여학생과 사귀면서 ‘음악통론’과 ‘음악사전’을 구입해 정독했다. 통일부는 “통일부 수장(首長)으로 대북 문제와 관련해 고비를 넘기면서 정 장관의 식견이 얼마나 넓어졌는지 외부에선 잘 모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일반인은 “콘텐츠가 없다”고 그를 비판한다. 학습능력은 뛰어나지만 핵심적인 내용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전체를 보는 안목이나 깊이 있는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에게 보여줄 생명력 넘치는 철학이나 신념이 없어 보인다.
그는 선택과 집중에 뛰어나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일에는 에너지를 집중해 전력투구한다. 어려서부터 이러한 성향은 두드러졌다. 그의 중·고교 동창들은 정동영에 대해 “키도 작고 잘 드러나지 않았는데, 운동장에서 누가 물불을 안 가리고 축구공을 차고 있어서 가보면 정동영이었다”고 기억한다.
1980년 5월 한국기자협회가 주관한 축구대회에서도 정동영은 몸을 아끼지 않았다. 머리에 ‘언론검열 철폐’라는 띠를 두르고 공중에 뜬 볼을 향해 헤딩하다가 다른 사람과 부딪쳐 머리를 다쳤다. 뇌진탕에다 척추까지 다친 중상을 입었고, 4시간 넘게 의식을 잃을 정도였다. 이는 내향적 사고형의 특징이다. 싫어하는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좋아하는 것에는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든다.
이러한 열정적 성향은 2004년 1월 제17대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 의장이 된 뒤 크게 빛났다. 의장에 선출된 후 정동영은 ‘몽골 기병론’을 내세우며 선거운동에 뛰어들어 10%대에 머물던 당의 지지도를 38%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은 제1당을 차지했다.
자타 공인 로맨티스트
정동영은 대중에게 깊은 감동을 줄 만한 ‘특별한 것’이 없다. 그의 삶을 보면 지극히 평범하다. 정치인으로 벼락출세한 것은 앵커 출신이라는 점과 뛰어난 연설 솜씨 덕이다. 정동영의 대중적 인기는 이러한 이미지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정치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비상한 능력이 있거나 남들이 겪기 어려운 시련을 체험해야 한다. 그렇지만 정동영은 지금까지 남다른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또 정치인으로서 너무나 순탄한 길을 걸어왔다. 한 여론조사기관 대표는 “정동영의 지지율이 이명박이나 박근혜와 비교해 아주 낮게 나오는 것은 ‘정동영다운 것’이 없어서다”라고 분석했다. 후보 개인의 정체성 내지 특색이 없을 경우 평균을 조금 넘는 지지를 받을 수 있지만 대권에 접근하는 지지율은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정동영은 말솜씨가 뛰어나다. 대중연설도 잘하고, 사적인 대화에서도 강약조절이 자연스럽게 될 정도로 말을 잘한다. 말 재주는 타고난 것으로 보인다. 웅변을 배우거나 말을 잘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한 적도 없는데, 대학교 1학년 때 고려대가 주최한 토론대회에 나가 1등을 했다.
정동영의 대중 흡인력의 바탕엔 그의 ‘말’이 있다. 2000년 8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 나왔을 때는 포효하듯 ‘40대 기수론’을 외치다가 돌연 부드럽고 감성적인 목소리로 돌변했다. “젊은 최고위원을 위해 한 표만 비워달라”고 호소하다가도 “47세는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다”며 반전을 시도했다. 이처럼 빼어난 대중연설 덕분에 정동영은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선출됐다. 반면 “말만 앞선다” “이미지 정치”라는 곱지 않은 시각도 있다.
정동영은 “아침에 새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으면 좋겠고, 눈 뜨면 푸른 산이 눈에 들어왔으면 좋겠다”며 스스로 로맨티스트라고 말한다. 그가 사람을 좋아하고 낭만적인 성향을 지니게 된 데에는 어릴 때의 환경이 영향을 준 것 같다. 특히 사람을 좋아하는 부친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정동영은 자신의 저서 ‘개나리 아저씨’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의 나에게 인간적인 푸근함이 있다면, 그걸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고향 산천의 맑은 하늘과 진한 흙냄새, 가난했으면서도 늘 따스했던 산골 친구들의 눈빛과 그리고 바로 내 아버지이다.”
에너지를 내면으로 돌려야
정동영은 필요한 경우 강한 면모를 보이지만, 원래 성격이 강하지는 못한 것 같다. 부드러운 성향은 내향적 사고형의 단점을 보완해 뛰어난 친화력을 갖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장점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면도 있다. 정동영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낸다. 기뻐도, 슬퍼도 눈물을 잘 흘린다. 지도자는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강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부드럽고 낭만적인 성향은 지도자로서는 결점이 될 수 있다.
정동영은 나설 때 과감하게 나서지만 물러날 때도 깔끔하다. 2001년 11월 정동영은 민주당 정풍(整風)운동 과정에서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이에 대해 정동영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2∼3년 동안 이러저러한 고비마다 어떤 선명한 책임이 없었다. 책임을 지는 일도, 책임을 묻는 일도 없었다. 책임을 묻지 않는 문화, 책임을 지지 않는 풍토, 이런 것이 굉장히 나빴다. 이번에도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고 하는데 나도 편치 않았다. 당무회의에서 최고위원 폐지론·무용론이 제기돼 이젠 대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봉책으로 가면 안 된다. 국면을 전환하려고 한다면 더 큰 사태로 번질지 모른다.”
200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이른바 ‘노인 폄훼 발언’으로 비난여론이 들끓자 정동영은 비례대표 후보직과 선거대책위원장직을 사퇴했다. 올해 5·31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참패하자 정동영은 패배에 책임을 진다며 당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정동영은 정치인으로서 뚜렷한 철학이나 신념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자리에 연연하며 권력을 탐하는’ 구시대 정치인과는 다른 참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방선거에서 패한 후 열린우리당 당의장에서 물러난 정동영은 최근 지지율 하락으로 차기 대선에서 여당 후보로 나서기가 쉽지 않다. 가장 큰 문제점은 지나치게 감각에 의존해 내향적 사고형의 장점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이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철학과 정치적 신념을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에너지가 내면으로 향해야 한다. 내면세계로 깊이 침잠할 때 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다. 고층건물을 지으려면 땅 밑으로 더 깊이 기초공사를 해야 하는 것과 같다.
정동영은 방송국에 근무하면서 감각을 많이 보완해 핵심을 잘 파악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도 국민은 정동영을 ‘깊이가 없는 가벼운 정치인’이라고 비판한다. 보기에는 아름다운데 생명력은 없는 ‘꽃꽂이 꽃’과 같다는 것이다.
개혁의 토대는 철학
그는 대선후보로서 아직 준비가 부족한 것 같다. 1996년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17년간 방송기자와 앵커를 하면서 정치지도자가 되려는 꿈도 없었고, 조직의 지도자를 해본 적도 없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철학이나 정치적 신념을 확립하지 못했다.
정치에 입문한 다음 정동영은 초고속으로 출세했다. 그러나 정치 철학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벼락출세’를 하자 주어진 현실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정동영에게는 ‘운 좋게 성공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뿐, 자신을 지지해줄 ‘뭔가 특별한 것’이 없다. 대중은 정동영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뛰는지 잘 모른다.
내향적 사고형의 가장 큰 장점은 개혁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개혁에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개혁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철학은 기초부터 시작해 체계적으로 가다듬어야 한다. 그래야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상황에 적절한 정책을 선택할 수 있다. 위기 상황에서 순발력을 발휘해 융통성 있고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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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 그의 단점은 독선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또 너무 단기적인 이익에만 집착해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정책을 추진할 위험이 있다. 감각적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충동적으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다.
정동영은 이제 53세다. 아직 젊다. 만일 대권의 꿈을 품었다면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공부해 정치지도자로서 자신의 철학을 확립해야 한다. 대통령이 되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자신부터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 이 기사를 작성하는 데는 동아일보 디지털뉴스팀 김아연 정보검색사가 다양한 자료를 검색, 제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