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호

‘보수 軍心’ 아이콘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

“의존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싸워서 이기냐 지냐를 따져야지!”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7-02-06 15: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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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작권 단독행사하면 필연적으로 전력 약화
    • 유사시 미국 독자행동 막기 위해서라도 전작권 묶어둬야
    • 북한, 저렴한 인건비와 무기 생산단가로 한국보다 전력 우세
    • 친미, 반미 그만두고 용미(用美)로 국익 챙겨야
    • 38선 분단 책임은 미국 아닌 못난 조상에게 물어야
    • 일본군 경험 차용했다고 국군에 정통성이 없다니…
    • 장성진급비리 수사 때 사표 낸 건 ‘투서질’에 교육책임 느꼈기 때문
    • 12·12 때 순직한 동기 묘 앞에서 통곡한 ‘죄’로 진급 불이익
    ‘보수 軍心’ 아이콘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

    ▼ 1944년 서울 출생<br>▼ 배재고, 육사 25기<br>▼ 1995년 6사단장<br>▼ 1997년 육본 인사참모부장<br>▼ 1998년 수도방위사령관<br>▼ 2000년 합참 작전본부장<br>▼ 2002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br>▼ 2003~2005년 육군참모총장

    인터뷰 도중 상대의 말을 가로막거나 자르는 사태가 몇 차례 발생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기자 : 어떤 나라든 군 작통권(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는 게 정상이죠. 한미 공동행사든 아니든 현재 우리의 작통권 구조는 비정상 아닌가요? 미국의 다른 동맹국들 예를 봐도…

    남재준 장군 : 잠깐, 그걸 비정상으로…

    기자 : 아니, 기본적인 형태로 보면…

    남 장군 : 비정상이라고 단정하면 5000년 역사를 부정하는 얘기가 되기 때문에…



    기자 : 5000년 역사를 부정하다니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남 장군 :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얘기합니다. 전쟁을 떠나서는 역사를 얘기할 수 없어요. 역사를 보면 무수한 나라가 서로 동맹을 맺지 않았습니까. 군사동맹을 맺으면서 자국의 생존을 도모해온 것이 인류 역사의 본질입니다….

    기자 :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동맹이 비정상이라는 게 아니고요. 동맹을 맺은 상태에서 유사시 도와주면 되잖아요. 꼭 전작권(전시작전통제권)으로 묶여 있어야 동맹이 가능한가, 그게 의문이라는 거죠.

    외국의 경우 군 장성은 전역 후에도 장군으로 불린다. 물론 예우 차원이다. 이 기사에서는 그 관례를 존중해 남재준(南在俊·63) 예비역 대장의 호칭을 ‘남 장군’으로 통일하기로 한다.

    남 장군은 예상한 대로 전작권 환수에 대해 강한 반대 논리를 펼쳤다. 일부 질문에 대해서는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그를 ‘참여정부’와 대립한 ‘보수 군심(軍心)의 아이콘’이라 부른다면 과한 표현일까.

    참여정부 첫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그가 2006년 12월26일 역대 군수뇌부 기자회견에 나와 노무현 대통령의 안보정책을 비판하는 성명 발표에 동참한 것은 뜻밖이었지만, 그의 성격을 감안하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그는 모임 참석 직후 ‘동아일보’ 기자가 전화를 걸어 “현 정부에서 육참총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모임 참석이 부담스럽지 않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군인은 조국을 위해 충성하고 신명을 바치는 것이지, 특정 정당이나 정부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그런 소신으로 평생을 군에 바쳤다.”

    “군인에게 가장 명예로운 죽음은 戰死”

    인터뷰는 1월8일 오전 그의 집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전역 후 첫 공식 인터뷰다. 그는 정초 심한 독감을 앓았다고 했다. 아직 다 낫지 않아 이날 아침에도 병원에 다녀왔다는데, 흡연은 상관없는지 탁자에 담뱃갑과 재떨이가 기세 좋게 자리잡고 있었다. 얼굴에는 특유의 홍조가 깃들어 있었다.

    의도적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그의 재킷 색깔은 군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체크 무늬의 회녹색이었다. 그 안에 푸른색 와이셔츠에 녹색 니트를 받쳐입었다. 자색과 청색이 교차하는 넥타이는 완고하고도 단단해 보였다.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중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차림이었다.

    ‘전형적인 군인’ 소리를 듣는 남 장군은 현역 시절 윗사람 눈치보지 않고 할 말을 하는 소신파로 정평이 났다. 그가 유난히 강조하는 ‘군인정신’은 육참총장 재임시 그를 정권과 불편한 사이로 만들었다. 그는 현 정부의 주요 개혁정책 중 하나인 군 사법개혁에 공공연히 반대했다. 국방 문민화 등 국방개혁에도 다른 목소리를 냈다. 군검찰이 장성진급비리 수사를 진행하며 육군본부를 압수수색하자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하는 배수진으로 맞서기도 했다.

    중도 사퇴하거나 경질될지 모른다는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그는 2년 임기를 채우고 2005년 4월 전역했다. 현재 충남대 평화안보대학원에서 군사학 강의를 맡고 있다. 지난해 2학기엔 전쟁사를 강의했는데, 올해 1학기엔 군사전략을 가르칠 예정이다. 수강생은 대부분 군 장교라고 한다.

    ▼ 군복을 벗으니 어떤가요. 세월이 더 빨리 가는 것 같습니까.

    “우스갯소리로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얘기를 합니다. 나는 뭐 과로사할 정도는 아니고 적당히 바쁜 것 같습니다. 현역에 있을 때도 별다른 취미가 없다보니 부대 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독서하고, 시간 나면 좀 걷는 게 다였어요. 지금도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어 별 차이를 모르겠어요. 다만 군 업무를 안 하고 강의 준비를 한다는 것말고는.”

    ▼ 가끔은 좀 허전하실 것도 같은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 살아간다는 것이 항상 똑같을 수는 없잖아요. 후배들한테 이런 얘기를 합니다. 직업군인의 끝은 군복을 입고 죽든가, 군복을 벗든가 둘 중 하나다. 그런데 군복을 입고 죽는 것은 전사(戰死)를 하든가 사고사나 병사(病死)를 당하는 경우다. 그중 전사가 가장 명예롭지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으냐. 그렇다면 죽는 것보다는 영예롭게 군복을 벗는 게 낫지 않으냐고. 내 경우 군복을 벗고 나왔어도 전쟁사나 군사전략에 대해 계속 공부하기 때문인지 허전하다는 느낌은 거의 없어요.”

    그는 요즘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다. 독서목록이 그답다. 손자병법, 육도삼략(六韜三略), 삼국사기, 삼국유사, 열국지, 춘추좌전(春秋左傳)…. 하나같이 병서나 역사서다. 예전에 깊이 있게 읽지 못한 책들인데, 시간을 갖고 천천히 다시 읽으면서 깊은 의미를 느끼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자동으로 증원되지만…”

    ▼ 전작권 환수에 반대하는 이유가 뭔가요.

    “반대다 아니다를 떠나 먼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한다는 표현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것입니다. 환수라는 표현은 그것을 미군이 가졌다는 전제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조 기자도 알다시피 SCM(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국방장관 회의)과 MCM(한미군사위원회·합참의장 회의)이 있지 않습니까. 양국 대통령 지시를 받는 SCM과 MCM은 만장일치제입니다. 한미연합사령관은 SCM과 MCM에서 합의된 전략지침에 따라 (연합군을) 지휘하지 임의로 미국의 지시를 받아 작전통제권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전시작전권의) 공동행사지 단독행사가 아닙니다. 따라서 전시작전권 환수라는 용어는 부적절하죠.”

    ▼ 그렇지만 연합사령관을 미군이 맡고 있으니 실제로는 전작권을 미군이 행사한다고 보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따지자면 (한국군 대장이 맡는) 연합사 부사령관이 (전시에) 한미연합군의 지상구성군사령관을 맡으니 미군 56만명이 한국군의 지휘를 받는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해군과 공군은 미측이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고. 어느 일방이 아니라 양측이 함께 지휘하는 겁니다.”

    그는 “중요한 건 단독작전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싸워서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라며 전작권 환수의 논점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시작전통제권 단독행사라는 표현이 나오자 곧바로 제기된 문제가 과연 한국군에 단독작전 능력이 있냐 없냐였어요. 그런데 이는 적절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전쟁의 목적은 승리하는 것이니 싸워서 이기냐 지냐가 중요하지, 혼자 싸울 수 있냐 없냐는 중요한 게 아니죠. (한국측의) 전시작전권 단독행사는 한미연합사 해체를 의미합니다. 지금은 한미연합작전계획에 따라 유사시 한반도에 들어오는 미군이 증원됩니다. 그런데 한미연합사 해체는 전시증원전력 문제를 대단히 불확실하게 만들어버립니다.

    ▼ (웃음) 제가 듣기로는 두세 차례 진급에서 탈락하셨다는데….

    “두세 차례가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진급 탈락을 가장 많이 한 장교지요.”

    ▼ 또 육군대학에서 학생들 앞에서 전두환 장군을 비난했다고 들었는데요.

    “개인을 욕한 게 아니에요.”

    ▼ 그럼 어떤 말씀이었죠?

    “군인은 자기 군복의 명예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군복에 내 손으로 흙을 묻힐 수는 없다, 이게 내가 얘기했던 전부요.”

    ▼ 흙을 묻힐 수 없다고요?

    “때를…, 더러움을 묻힐 수 없다.”

    “안중근 장군의 정신을 이어받아…”

    참모총장 재임시 그가 부하들에게 가장 강조한 것도 군인정신이었다. 당시 육본에 근무했던 한 장교는 남 총장 시절에 대해 “장교의 도덕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정착됐던 시기”라고 평가했다. 남 장군을 ‘멋있는 군인’으로 기억한다는 이 장교는 “남 총장은 장교들에게 늘 ‘누가 뭐래도 군인의 갈 길을 가자’고 강조했다”고 회고했다.

    그에게 재임 중 가장 역점을 뒀던 복무지침을 묻자 아니나다를까, 장교단의 정신 정립을 첫 번째로 내세웠다.

    “정말로 조국을 위해 헌신·봉사하는 군 간부가 되자, 광복군이신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안중근 장군의 정신을 이어받아 위국헌신(爲國獻身)하자고 했죠.”

    ▼ 비사교적이라는 평이 많던데요.

    “그건 맞을 거예요.”

    ▼ 친구도 많지 않고. 안 좋게 표현하면 외곬이라는 얘긴데요.

    “남들처럼 활발하게 어울리지는 못하지요. 함께 근무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나를 두고 바늘로 이마를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들 하는데, 함께 근무해본 사람들은 ‘가슴이 엄청 뜨거운 남자’라고 그럽디다.”

    ▼ 골프 안 치시죠? 그것 때문에 부하장교들이 눈치를 많이 봤다는데….

    “그건 자신있게 답변하겠는데, 내가 골프를 안 쳐서 부하장교들이 엄청 좋아했어요.”

    ▼ 거꾸로네요.

    “왜냐하면 골프 칠 기회는 한정돼 있는데, 내가 쓰면 자기네가 못 쓰잖아요. 오히려 내가 골프 배울까봐 걱정한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 정부에서 육참총장을 지낸 군 원로로서 노 대통령에게 충언을 해달라고 주문하자, 그는 “개인 자격으로 대통령께 충언하는 건 적절치 못하다”며 거절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서는 “군사학을 심도 있게 체계적으로 공부하겠다”고 밝혔다. 천생 군인이다.

    ‘보수 軍心’ 아이콘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
    평화적인 집단과 호전적인 집단이 서로 대등하거나 다소 전력 차이가 있을 때는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우리가 북한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유지해야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을 수 있고 평화통일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한미연합사 해체는 어떤 의미에서든 전력 약화를 초래합니다. 압도적 우세에 따른 전쟁억제력이 상당히 감소되기 때문에 전쟁의 개연성을 높이거나 굴복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아직은 전시작전권 단독행사를 말할 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 전작권 단독행사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가 이르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 뒤집어 말하면, 여건이 충족되면 단독행사에 찬성할 수 있다는 건가요.

    “언젠가는 가능하겠지요. 남북에 평화가 정착돼 전쟁 위험이 없는 상태라면.”

    작통권 이양의 출발점은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을 넘긴 일이다.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가 탄생하면서 유엔군사령관이 갖고 있던 한국군의 작통권은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위임됐다.

    전작권 환수 논란은 참여정부에서 처음 불거진 게 아니다. 작통권 환수는 1987년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대선공약이었고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꾸준히 추진됐다. 우리 군은 1990년엔 1995년에, 1992년엔 1997년에, 1995년엔 2000년에 작통권을 환수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1994년 평작권(평시작전통제권)이 환수된 것은 그러한 지속적 논의의 부분적 결실이다. 남 장군은 “지난 정권에서 논란이 된 작통권은 전작권이 아니라 평작권이었다”며 둘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의 임무가 평시엔 전쟁 억제이고, 전시엔 싸워서 이기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모든 군사작전의 개념은 평시와 전시로 구분됩니다.”

    “그 답변은 언론인 몫이죠”

    하지만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군의 방침이야 어쨌든 전작권 환수가 여론의 도마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전작권 환수 반대 여론을 주도하는 보수언론들은 당시엔 환수에 적극 찬성하는 논리를 전개했다. 한 신문은 1990년 2월17일자 사설(‘작전권 이양과 정전위 대표’)에서 “전시라 해도 굳이 미군측에 작전통제권을 의탁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며 “안보에 관한 인식과 발상의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고 전작권 환수를 촉구하는 논조를 보였다.

    또 1995년 11월4일자 ‘한미안보협의의 시의성’이라는 사설에서는 “지난해 12월 한국군 1군과 3군의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함으로써 우리의 작전능력이 제고되는 방향으로 나가는가 했더니, 이번에 다시 전시·평시를 막론하고 한국군이 갖고 있던 2군의 작통권 가운데 전시작통권은 한미연합사에 넘겨주기로 했다니 한마디로 자주안보 추세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전작권 환수를 자주안보와 연결시켜 군의 태도를 비판하기도 했다.

    ▼ 예전 언론보도를 보면 격세지감이 드는데요.

    “언론에 종사하는 분이라 더 잘 알겠지만, 언론이라는 것은 당시 시대상황을 반영하지 않습니까.”

    ▼ 시류를 반영한 보도라는 말씀인가요.

    “그 답변은 제가 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언론인의 몫이지요.”

    ▼ 전력 약화, 유사시 증원의 불확실성을 우려하셨는데, 미국측은 그 부분에 대해 문제될 게 없다고 여러 차례 천명했거든요. 지난해 9월 부시 대통령이 노 대통령과 한 정상회담에서 그 점을 재확인했고, 그전에 미 국방부 고위관계자는 ‘미군의 변화’를 언급하면서 그 문제를 미군의 세계적인 재배치와 연결해 설명했습니다. 또 버웰 벨 주한미군사령관, 즉 한미연합사령관은 “2009년까지 3년간 한국군의 조직적인 훈련과 연습을 통해 전작권 전환이 가능하다” “한국의 경제, 군사, 사회 발전 정도에 맞게 공동의 지휘관계보다는 신속하게 독자적인 지휘관계로 전환하는 게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미국의 이런 태도에 비춰 한국의 군 원로들이 미군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과거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간 미국이 몇 차례 한국 의사와 관계없이 주한미군을 감축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죠. 어느 나라든 자국의 이익을 우선합니다. 그럼 한번 봅시다. 지금 한미연합사 체제에서는 연합작전계획에 따라 시차별 부대전개목록이라는 게 있어요. (유사시) 자동으로 전력이 증원되지요. 100% 보장됩니다. 그런데 (연합사가 해체되면) 어느 정도 줄어들지는 모르지만 (전력 증원이) 100% 보장되지 않으리라는 건 분명합니다.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지요. 역사상 많은 나라가 자국의 안전보장을 지키는 데 동맹이라는 보편적인 형태를 이용했습니다. 그것이 다 의존적인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의존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죠. 우리가 한반도에서 전쟁을 확실히 억제할 수 있느냐 없느냐, 최선의 방법이 뭐냐는 것을 생각해야죠.”

    “믿어도 계약서 쓰면 더 확실”

    ▼ 한미동맹에 대해 상호 굳건한 믿음이 존재한다면 그런 우려가 많이…

    “좋습니다. 이렇게 얘길 해봅시다. 우리가 어떤 약속을 할 때 계약서를 쓰고 그걸 법적으로 공증하지 않습니까. 서로 믿으니 계약서가 불필요하다고 하지는 않지요. 계약서가 담보가 되는 거지요. 계약서를 쓴 상태와 쓰지 않은 상태 중 어느 쪽이 더 확실성이 높겠습니까.”

    ▼ 지금 미국이 전략적 유연성이니 뭐니 해서 자기네 필요에 따라 한국 정부의 전작권 행사 요구에 적극 응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미국이 원해서 벗어나겠다면 어쩔 수 없지 않나요?

    “한미방위조약도 한국이 적극 원해서 맺어진 거죠.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하려고 할 때마다 한국 정부가 엄청 노력해서 묶어두곤 했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였기에 주둔하도록 한 겁니다. 진정한 동맹이란 쌍방의 이익에 어떤 공통점이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 그런 논리에 비춰봐도 한미 간 공통 이해관계에 뭔가 이상이 생긴 것 같지 않습니까. 미국도 미군의 세계적인 재배치와 관련해 빼고 싶어하는 눈치고요.

    “미국의 생각이 그러니 우리도 우리 이익을 포기하겠다는 건 타협이나 협약이 아니죠. 예를 들어 조 기자와 내가 어떤 사업을 논의할 때 서로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회의도 하고 협의도 하는 거죠.”

    ▼ 어쨌든 미국도 우리 정부와 뜻을 같이하고 큰 틀에서 합의한 마당에 자꾸 반대하는 것에 어떤 실익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반대가 아니라 상호 공동의 이익을 찾는 범위에서 우리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거죠.”

    전작권 환수 논란의 한가운데에 남북한 전력 비교가 있다. 늘 그랬듯 노 대통령의 거침없는 발언이 논쟁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었다. 지난해 12월23일 노 대통령은 평통(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해 전직 국방부 장관들을 비롯한 군 원로들을 ‘대통령 성토’의 깃발 아래 뭉치게 만들었다.

    “근 20년간 북한의 10배가 넘는 국방비를 쓰고 있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한국의 국방력이 북한보다 약하다면, 1970년대를 어떻게 견디어왔으며, 그 많은 돈을 우리 군인들이 다 떡 사 먹었느냐, 옛날 국방장관들 나와서 떠드는데 그 사람들 직무유기한 것 아니에요? 그 많은 돈을 쓰고도 북한보다 약하다면 직무유기한 거지요?”

    이 문제는 노 대통령의 언급이 아니더라도 평소 궁금하던 터였다.

    ‘보수 軍心’ 아이콘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

    남재준 장군은 요즘 예전에 깊이 있게 읽지 못했던 병서와 역사서를 다시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다.

    ▼ 지난 20년간 한국이 북한의 10배 넘는 국방비를 지출해왔고 경제력은 북한의 33배라 하는데 왜 아직 한국군이 열세라는 건지 설명해 주시죠.

    “북한이 본격적으로 군사력 증강을 시작한 시점이 1960년대 초반입니다. 우리는 1970년대 후반부터이고. 1980년대 후반에 국방비 투자 무게가 거의 비슷해졌고, 그후 20년 가까이 우리의 국방비가 북한을 추월했습니다. 그런데 남북한 국방비를 제대로 비교하려면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인건비에서 워낙 큰 차이

    첫째, 북한의 경제체제와 대한민국의 경제체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계획경제체제이고 우리는 자유시장경제체제입니다. 북한은 자력갱생, 자급자족 같은 구호를 내세우고 군에서 외화벌이사업도 하고 영농농장도 운영합니다. 인건비도 훨씬 저렴해 같은 병력을 유지하더라도 비용이 훨씬 적게 들지요. 그러니까 국방비를 계상하는 시스템이 우리와 다르다는 거죠.”

    그가 두 번째 비교 기준으로 제시한 것은 무기 생산단가다. 그의 계산방식으로는 이렇다. 북한 노동자의 월급은 북한 돈으로 3000원. 달러 환율이 1대 145이므로 환산하면 약 20달러다. 한국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240만원. 편의상 1대 1000의 환율을 적용하면 2400달러에 해당한다. 20대 2400. 한국의 노임이 북한의 120배라는 계산이 나온다.

    “전차 한 대를 생산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북한은 국영광산에서 철광석을 캐내겠지요.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세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인건비지요. 그 다음엔 제련소로 넘어가겠지요. 역시 국가가 운영하는 제련소니 인건비나 제련 비용, 에너지 비용 외에는 들어가는 게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생산단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인건비예요. 우리나라 기업이 중국으로, 베트남으로 진출하는 것도 다 값싼 인건비 때문이지 않습니까. 복잡하게 많은 걸 따지지 말고 인건비 하나만 놓고 따져보자는 거죠. 20달러짜리 노동자 100명이 한 달 동안 전차 한 대를 생산한다면 2000달러의 인건비가 들어가겠죠. 반면 2400달러짜리 노동자가 같은 기간에 같은 일을 한다면 엄청난 비용이 들지 않겠습니까. 무기 종류에 따라 생산단가가 다르지만, 대체로 (한국의) 7분의 1~20분의 1에 불과합니다. 같은 제품을 만들더라도.”

    ▼ 한마디로 저비용, 고효율이라는 얘긴가요.

    “그게 아니라 공산주의 경제체제 덕분에 우리보다 훨씬 싼값에 무기를 생산해낸다는 거죠. 국방비도 그래요. 가장 큰 게 인건비예요. 병사 한 명 유지하는 비용이 엄청나게 차이 나죠.”

    세 번째로는 장비 성능의 문제점을 꼽았다.

    “우리는 장비가 오래되면 교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부분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기 때문에 수리 부속이 없으면 장비 유지를 못하거든요. 외국에서는 장비 만들어놓고 시간이 지나면 그 생산라인을 폐쇄하고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면 한국에 있는 장비는 저절로 낡은 게 되지요. 그런데 북한의 경우 자체 생산라인을 갖췄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수리부속 조달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계속 그 장비를 유지할 수 있지요. 많은 사람이 북한 장비는 낡아서 고철덩어리 아니냐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예를 들어 예전에 인기 좋았던 포니2 승용차의 생산라인이 지금도 돌아간다면 차가 계속 나올 것 아닙니까. 구형모델일 뿐이지 못 쓰는 고철덩어리는 아니잖아요.”

    ▼ 무기 성능을 비교해봐야겠죠.

    “북한이라고 신형 무기를 개발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걔들도 꾸준히 개발하고 있어요. 전차도 계속 업그레이드하고 있고….”

    ▼ 같은 종류의 무기라도 우리가 저쪽보다 성능이 앞선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인데요.

    “유사한 성능의 무기를 서로 비교하면 간단히 알 수 있죠. 전차를 북한군이 3700대, 우리가 2500대 갖고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가 가진 전차 2500대는 다 신형 K1M1이고, 북한 것은 전부 구형 T-55이냐? 아니지요. 우리도 구형 전차와 신형 전차를 함께 갖고 있어요. 쟤들도 T-55도 있고 T-60도 있고 T-72도 있거든요. 그 비율을 따져봐야지요.”

    “아직도 북한이 2대 1로 앞서가”

    ▼ 그렇게 따지면 재래식 전력도 우리가 열세라는 거죠?

    “정부 발표대로라도 지상군 전력은 북한군의 80%라는 것 아닙니까.”

    ▼ KIDA(한국국방연구원) 발표 말이죠?

    “예.”

    2004년 국방연구원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주한미군을 제외할 경우 한국군은 종합전쟁수행능력에서 북한에 뒤진다. 육군은 80%, 해군은 90%로 열세이고, 공군만 103%로 앞서 있다. 남 장군이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며 보충설명을 곁들였다.

    “‘제인연감’(영국의 세계적인 군사전문지)에 따르면 2005년 북한의 국방비가 19억달러입니다. 우리는 210억달러이고요. 저들의 경우 국방비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50%이고 전력투자비가 50%입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75%가 인건비, 전력투자비가 25%예요. 그러면 2005년 기준으로 저들의 전력투자비는 약 10억달러이고, 우리는 50억달러입니다. 그런데 무기생산 단가가 우리의 10분의 1이므로 실제 북한의 투자효과는 그 10배지요. 그러면 100억달러 대 50억달러예요. 아직도 저들이 2대 1로 앞서간다는 얘기죠. 그러니 저들이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못하잖아요. 물론 돈 때문만은 아니지만, 우리 국방비가 핵무기를 개발할 정도는 아니죠.”

    ▼ 유사시 주한미군이 막아줄 거라는 안보개념 탓에 안이한 국방정책을 펴온 것인가요.

    “아니죠. 현명했지요.”

    ▼ 그간 경제력 규모에 비춰 엄청난 국방비가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나는 동의하지 못하겠는데….”

    남 장군이 또 ‘징그럽게’ 수치를 들이댔다. “우리만 많은 국방비를 지출한 게 아니다”라며. 인구와 국방비를 대비한 그의 계산법에 따르면 한국은 1인당 국방비가 430달러, 싱가포르는 1010달러, 미국은 1300달러가 넘는다나.

    ▼ 어쨌든 그동안 첨단무기 구입이니 자주국방이니 해서 투자를 많이 한 게 사실이잖아요.

    “그 결과가 오늘의 한국군을 만든 것 아닙니까. 내가 사관학교에 입교했을 때만 해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국산은 하나도 없었어요. 심지어 숟가락까지 미제를 썼어요. 지금은 전부 국산화하지 않았습니까. 전차도 만들고 미사일도 만들지 않습니까. 왜 이런 성과는 안 봅니까.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전력 증강이 이뤄졌지요. 그런데 상대는 더 독하게 더 많이 투자해 우리를 앞서고 있는 겁니다.”

    ▼ 2007~2011년 국방중기계획에 따르면 군 현대화사업으로 151조원을 투입합니다. 2011년이 되면 우리가 앞서 갈 수 있을까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죠. 북한도 계속 노력을 하겠지요. 그리고 전력 격차라는 게 돈 한번 들였다고 하루아침에 팍 줄어드는 건 아니잖아요.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거지.”

    ▼ 그러면 대북억제전력이 언제 가능할지 지금으로선 예측할 수 없네요.

    “경제력에 비춰 (앞으로) 재래식 군사력은 경쟁이 안 될 것 같으니 핵무기를 개발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로 전력불균형이 심해졌으며 그 때문에 더더욱 전작권 단독행사가 시기상조라고 힘줘 말했다. 기자는 ‘군사동맹=전작권’의 공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 이라크전을 예로 들어보죠.

    “그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 미국 같은 초일류 강대국도 이라크를 상대로 혼자서는 못 싸웁니다. 그래서 34개 동맹국에 파병 요청을 했고 그 병력을 통합지휘하고 있잖습니까. 작전통제권을 각국이 행사하고 있습니까? 아니지요.”

    ▼ (각국의) 전체 병력을 지휘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토(NATO)도 봅시다.”

    ▼ 나토의 경우 유사시 각국의 일부 병력을 차출해 미군사령관이 연합지휘를 하는 것뿐이죠. 하나의 전장 개념으로요.

    “한반도 자체가 단일 전장이거든요. 단일 전장 내에서 지휘체계를 단일화하는 건 필수입니다.”

    그는 “독일군이 나토에 가입해 있는데 전시작전통제권을 독일이 행사하지 않는다”며 “전쟁 억제 목적에 맞게 지휘 주체가 바뀌는 것”이라고 부연설명했다.

    “이거, 공식적인 질문입니까?”

    그의 부인이 내온 과일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그는 과일엔 손도 대지 않고 대신 부인에게 커피를 더 달라고 했다.

    ▼ 딱딱한 얘기만 계속 하자니 이거 참….

    “좀 쉬었다 하죠.”

    5분가량 쉰 다음 인터뷰를 재개했다. 동북아시대위원장을 지낸 문정인 교수의 전작권 환수 찬성논리,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미일동맹과의 비교 등 전작권과 관련한 논쟁이 한참 더 이어졌다. 일부만 소개하면 이렇다.

    ▼ 작통권을 미군이 가진 상태에서 평화체제를 논의하면 북한과 미국이 협상 당사자가 되고 한국은 주변국으로 밀려난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지금도 북한은, 한국은 자격이 없다며 상대를 안 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도 그렇고 향후 대북한 관계에서의 주도권 문제를 생각해서라도 작통권을 환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요.

    “현재의 한미연합방위체제에서는 양국의 군 통수기구가 합의하지 않는 한 어느 한쪽이 맘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게 해체돼 한국이 단독으로 행사할 경우 북한이 우리를 상대하지 않겠다면 미국이 한국 의사에 반해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어요. 그런 점 때문이라도 한미연합방위체제는 유지돼야지요.”

    ▼ 이 정권이 자주 쓰는 ‘친미 자주’라는 용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답변하고 싶지 않아요.”

    ▼ 아니, 뭐 생각하시는 게 있을 것 아니에요?

    “생각하는 것 없어요.”

    ▼ 총장 될 때 그런 것 구두시험 안 보던가요? 면접하면서.

    “(웃음) 국가 간 관계에서 친미니 반미니 하는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잘못됐고….”

    ▼ 우리가 통상 쓰는 표현이니까…

    “용미(用美)지요. 용미.”

    화제를 슬쩍 바꿨다.

    ▼ 38선 획정은 우리 민족의 뜻과 상관없이 외세에 의해 결정됐습니다. 거기서부터 민족 간 대결 운명이 시작된 셈인데요. 38선 분단에 대해 어느 쪽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보십니까.

    “이거, 공식적인 질문입니까?”

    그의 목소리가 무거워지면서 가볍게 떨리는 걸 느끼면서, “예”라고 답해 질문을 철회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우리 조선왕조가 멸망하지 않고 일본의 식민지가 안 되었다면 도대체 38선이라는 게 이 땅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안타깝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우리 조상님 잘못이지, 누구한테 책임이 있어요? 어떤 인간 집단이든 생존과 번영이 궁극 목표입니다. 생존 없는 번영은 있을 수 없어요. 조선왕조가 번영을 위해 생존을 과도하게 희생시킨 결과 식민지가 됐고 식민지가 되다보니 남북분단이 일어난 거지, 그것이 미국의 책임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역사공부를 제대로 못한 거지요.”

    ▼ 저는 미국의 책임이라고 말하지 않았는데요.

    “아니, 일부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하기 때문에…”

    ▼ 아니, 실제로 선 긋는 것을 미국이 먼저 제안했으니까….

    “아버님, 어머님이 결혼하지 않고 자식이 나올 수 있어요?”

    ▼ 아니, 그건…

    “역사라는 건 어느 한 시점을 딱 잘라 얘기할 수 없는 거죠. 만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가 독립국이고 연합군 진영에 가담했더라면 분단이 됐을까요? 반대로, 우리가 독립국으로 일본 진영에 가담했다 패전했더라도 분단은 안 됐겠죠.”

    ▼ 38선이 순전히 군사적 필요성에 따라 그어졌다는 건 인정하시죠?

    “그전에 왜 38선을 그어야 할 군사적 필요성이 제기됐는지를 따져보자는 겁니다.”

    ▼ 가깝게는, 소련군이 이미 북한에 진주했는데 미군은 (한반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미국측 필요에 의해…

    “그건 결과론이고…”

    ▼ 아니, 직접적인 분단의 계기를 얘기하자면…

    “아니지요. 분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는 왜 선 그었냐고 책임을 따지면 안 되죠. 분단의 원인이 무엇이냐. 우리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식민지가 됐기 때문이지요.”

    ▼ 그런 점이 아쉽다는 건데…

    “가장 아쉬운 건 대원군이 -그때가 절호의 기회였는데- 쇄국정책을 펼친 겁니다. 그때 일본은 명치유신을 해 한국보다 20년 앞서갔습니다. 그 20년 앞서간 게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격차가 벌어질지 몰라요. 국가지도자의 한순간 잘못된 판단으로 결과적으로 분단까지 일어난 거죠.”

    그가 분단 문제에 대해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아마도 기자의 질문에 ‘반미적 의도’가 담겼다고 지레 짐작했기 때문일 텐데, 결과적으로 한국군의 친미적 성향을 탐색하려는 기자의 의도가 성공한 건지도 모르겠다.

    ▼ 우리 민족의 책임을 거론하셨는데, 광복 이후 한국군을 창설할 때 중국에서 독립투쟁했던 광복군이 미군정에 의해 배제되고 독립군을 탄압했던 만주군이니 관동군이니 하는 일본군 계열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그 바람에 우리 군의 정통성이 약하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대한민국 국군은 광복군의 정신을 계승했습니다. 그것을 우리 장교들은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헌법에도 임정(臨政)을 계승했다고 되어 있지요? 군사적 경험이 없으니 일본군의 경험을 차용한 것이지, 그 정신을 계승한 건 아니지요. 일본군대도 개화기에 육군은 독일군한테, 해군은 영국군에게 배워와 만든 것이거든요. 6·25 때 그 많은 대한민국의 군인이 천황폐하를 위해 죽어갔습니까? 대한민국 내 조국을 위해 죽어가지 않았습니까.”

    ▼ 당연한 말씀이죠.

    “당연한 질문을 왜 해요?”

    ▼ 아니, 그게…

    “유학 갔다 온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 아니죠. 광복군과 일본군, 만주군은 서로 적이었잖아요. 민족의 적군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우리 군의 중추가 된 것을 외국 사례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죠.

    “아니지요. 그 사람들이 (광복 후에도) 여전히 황국신민사상에 젖어 있었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이제 독립된 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군대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군에 들어간 거죠. 기미가요, 천황폐하 만세가 아니라 애국가와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습니다.”

    아마도 그의 답변은 창군(創軍) 이래 지금까지 군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정통파’의 논리를 대변하는 것일 게다. 좋게 말해 ‘탈(脫)이념적 실용주의 노선’이라고 할까.

    ‘생도 3학년’과 ‘작은 이순신’

    ▼ 많은 사람이 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 중 하나가 인사비리입니다. 남 장군께서는 인사 때 ‘빽’ 써본 적 없습니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한번도 보직이나 진급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누구 찾아가본 일도 없고.”

    ▼ 그럼 천연기념물 아닙니까.

    “맞아요. 그래서 내 별명이 천연기념물이에요.”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별명이 천연기념물말고 두 가지 더 있다고 한다. ‘생도 3학년’과 ‘작은 이순신’. ‘생도 3학년’은 지나치게 원리원칙적이라고 해 붙은 별명이란다. ‘작은 이순신’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군생활하면서 늘 부끄럽게 생각한 것이 내가 이순신 장군보다 턱없이 융통성이 많다는 점이었어요. 그분만큼이나 융통성을 없애려고 굉장히 노력했습니다.”

    ▼ 주변에서 (남 장군에 대해) ‘융통성이 없다’는 얘기가 자주 들리던데요.

    “군인에게 융통성이라는 건 방책의 다양성이지, 처세의 요령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순신 장군은 선조임금이 나가서 싸우라고 했지만 안 나갔어요. 군인의 본분은 싸워서 이기는 건데, 그때 나가면 질 게 분명했거든요. 이긴다는 원칙을 대신할 수 있는 원칙은 없습니다. 이순신은 그 원칙을 지켰지요. 반면 원균 장군은 나갔지요. 원칙을 저버린 겁니다. 융통성을 발휘한 거지요. 그 결과 조선 수군을 전멸시켰습니다. 그런 걸 융통성이라 한다면 나는 융통성이 없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오히려 그간의 삶에서 융통성이 너무 많았던 건 아닌지 반성합니다.”

    남 장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중 하나는, 어느 정도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 육참총장으로서 자신의 소신만 고집해 군의 미래지향적인 개혁과 화합을 저해하고 불필요한 충돌을 빚어냈다는 것이다. 이를 거론하자 “원칙은 한번 무너지면 되돌리지 못한다”는 간명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군 사법개혁에도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 청와대 및 국방부와 충돌했다. 지금도 그 소신은 여전하다.

    “군에 왜 독자적 사법제도가 필요하냐. 군의 특수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상벌권이라는 것은 지휘권입니다. 즉 군이 별도의 사법권을 갖고 있는 것은 지휘권을 확고하게 보장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법권이 지휘체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기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지휘권을 약하게 만드는 거죠. 그래서 반대하는 것이지요.”

    ▼ 그건 지휘권자의 시각이겠죠.

    “지휘권자는 부정부패하고, 못 믿을 사람이고, 무식한 사람이라고 전제한다면, 견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법치주의를 확립한다는 뜻도 있을 테고…

    “그런 것이라면 군 지휘관들에 대한 법률교육을 대폭 강화하면 됩니다.”

    군검찰(국방부 검찰단)의 장성진급비리 수사 초기인 2004년 11월26일 남재준 육참총장은 ‘항의성’ 사표를 제출해 군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 얘기를 꺼내자 그가 말을 가로막았다.

    “거기에 대해 오해가 있는데, 장성진급비리 수사 때문에 전역지원서를 쓴 게 아니에요.”

    “내 손으로 군복에 흙 묻힐 순 없어”

    ▼ 수사 도중 사의를 밝히셨잖습니까.

    “당시 윤광웅 장관한테 확실히 얘기했습니다. 나는 육군의 총수예요. 육군을 책임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 부하장교들이-실제로 부하장교들이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지만-장교답지 못하게, 군인답지 못하게 투서질을 했다니 그 잘못된 교육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역지원서를 제출한다고 말입니다.”

    ▼ 수사에 항의하는 뜻에서 그런 게 아니었나요.

    “언론이 그렇게 보도한 거지.”

    사실 인터뷰 약속을 잡을 때, 남 장군과 기자는 장성진급비리 수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했다.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수사 내용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군사재판인 1, 2심에서는 군검찰의 공소사실이 대체로 인정됐고 관련자들도 유죄판결을 받았다.

    ▼ 한국 현대사에서 두 차례 군사정변이 있었습니다. 5·16과 12·12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그건 역사가가 할 일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니지요.”

    ▼ 군인으로서 군의 정치적 개입에 대해 왜 말씀을 못합니까.

    “우리 헌법 5조 2항에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고 돼 있습니다. ‘준수해야 한다’가 아니라 ‘준수된다’라고 단호하게 표현돼 있어요. 나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군이 정치적으로 중립할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하겠다.’ 바꿔 말해, 정치가 군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국가가 보장하겠다는 거죠.”

    12·12 당시 그는 소령으로 육군대학 교관이었다. 그의 육사 동기로,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던 김오랑 소령은 신군부측의 정 사령관 체포에 저항하다 총격을 받고 숨졌다.

    ▼ 당시 순직한 김오랑 소령의 묘 앞에서 대성통곡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더군요.

    “동기생이 죽었는데 애도를 표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 그 일로 진급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면서요?

    “그런 얘기는 한 20년 후 인터뷰 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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