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예산처 장관, 통계청장, 조달청장 등을 역임한 정통 경제 관료 출신 김병일씨가 ‘선비정신’의 전도사로 변신했다. 현재 경북 안동에 머물며 한국국학진흥원장과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겸하고 있는 그는 “국학과 선비문화는 낡아빠진 어제의 것이 아니라 오늘을 넘어 내일을 준비하는 기반” 이라고 역설한다.
● 1945년 경북 상주 출생<br>● 서울대 사학과 학사,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 미국 USC행정대학원 수료.<br>● 제10회 행정고등고시 합격<br>● 1997~1998년 통계청장, 1999~2000년 조달청장, 2004~2005년 기획예산처 장관<br>● 황조근정훈장, 청조근정훈장
“안동에는 사람이 오르기 좋은 아기자기한 산이 많습니다. 사람이 살기 좋다는 뜻에서 보면 말 그대로 명당이지요. 산천이 인걸을 만드는구나 싶어요.”
안동 자랑으로 운을 뗀 김 원장은 사실 안동과 전혀 연고가 없는 인물이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뒤 줄곧 서울서 학교를 다니고 공직 생활을 했다. 국학이나 선비문화와도 무관한 삶을 살았다. 1971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재정경제원, 통계청, 기획예산위원회, 조달청, 기획예산처 등을 두루 거친 경제통.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한 것이 선비문화와 연결지을 만한 유일한 끈이라면 끈이다.
“그래도 역사 관련 책을 많이 읽고, 역사 탐방도 하곤 했습니다. 안동도 그런대로 자주 왔고요. 퇴계 이황 선생 탄생 500주년이던 2001년에 안동에서 문화 행사가 많이 열렸어요. 당시 제가 기획예산처 차관이었습니다. 좋은 기회다 싶어 사업 점검을 겸해 기념행사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선비정신의 顯現
김 원장이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으로 취임한 건 우리 역사와 고전에 대한 흥미 때문인지 모른다.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회가 그를 이사장으로 선임한 때는 2008년 1월. 그는 한사코 거절했으나 거듭된 이사회의 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고 했다.
“우리 전통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시는 분, 지역 사회에 몸담고 있는 분이 이사장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수련원을 발전시키려면 제 공직 경험이 필요하다는 어르신들의 뜻을 받아들여 부족하나마 직분을 다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당시 수련원은 안동 인근의 학생과 교사들에게 우리 것을 가르치는 구실을 하고 있었다. 한국국학진흥원 부설기관인 국학문화회관을 빌려 수련생을 위한 숙박시설로 활용했다. 2009년 한국국학진흥원장을 맡아 원장 관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되기 전까지, 그 역시 수련생들과 함께 그곳에서 묵었다. 가끔은 퇴계 종택 신세를 진 적도 있다. 쉽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일단 시작한 이상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알아야 면장도 한다’는 생각에 직접 수련원 강의를 듣고 현장 체험도 했어요.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고, 의미 깊더군요. 아내에게 수련을 권하고, 차례차례 지인들도 초청했습니다. 주변 반응 역시 썩 괜찮았어요. 이 좋은 체험을 더 많은 이가 할 수 있도록 수련원 문호를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미국발(發) 금융위기에서 비롯된 국내 경기 침체도 한 계기가 됐다. 선비수련원의 프로그램이 어려움에 빠진 회사를 다시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회사가 어려울수록 구성원의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리 수련을 통해 직장인들이 세상을 바르게 보고 공동체가 개인에게 바라는 소양을 익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기존의 교육 대상이던 교사, 공무원, 학생뿐 아니라 각계각층 오피니언 리더와 직장인까지 수련에 참여할 수 있게 했습니다.”
수련원 이용자들은 각종 전통 의례를 체험하고 도산서원과 유교문화박물관, 이육사문학관 등을 방문하는 한편 퇴계 종택에서 종손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갖는다. 김 원장은 이들의 입교식, 퇴교식뿐 아니라 현장 체험과 분임 토론에도 자주 참여한다.
코리아 프리미엄
그는 우리의 선비문화가 무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 보였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구분짓는 것은 경제력의 차이가 아니라 정신의 차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김 원장은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그들의 정신을 따라잡아야 한다고 했다. 선진국의 상품과 서비스에는 프리미엄이 붙는다. 유럽 프리미엄, 일본 프리미엄이 대표적이다. 똑같은 상품이 유럽 혹은 일본에서 생산됐다는 이유만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반면 우리의 재화와 용역에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한국산’이라는 꼬리표가 상품 가치 하락으로 이어진다. 김 원장은 이 원인이 바로 ‘정신의 부재’라고 지적했다.
한국 선비문화의 본산지 경북 안동에서 ‘선비정신’의 부활을 역설하는 김병일 한국국학진흥원장
그가 말하는 선비정신의 요체는 나를 낮추는 ‘겸손’과 남을 배려하는 ‘공경’이다. 그 안에 담긴 효도는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반드시 보답하는 인간관계 원리를 배우는 첫걸음, 동시에 내가 잘해야 남에게 존경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김 원장은 이러한 근본을 배우지 못하면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이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프로그램 중 그가 직접 진행하는 ‘현대사회 엘리트와 선비정신’ 강의의 주제이기도 하다.
“선우후락(先憂後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근심을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즐거워할 일은 나중에 즐거워한다는 뜻이지요. 나라가 위난에 처한 때 앞에 나선 의병장처럼 엘리트들은 공동체를 우선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퇴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김 원장은 선비정신을 이야기하며 퇴계 이황에 관한 옛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줬다. 선생이 안동에 있고, 아들 내외는 서울서 생활하던 시절의 일화다. 손주며느리가 종손을 얻었는데 젖이 돌지 않아 애를 먹었다. 마침 안동에 있는 여자 노비가 같은 시기에 애를 낳았다. 그를 서울로 올려 보내 달라는 기별이 왔다. 노비가 주인의 소유물 취급을 받던 과거 사회에서는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퇴계는 내 아이 살리자고 남의 아이 젖을 끊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노비의 아이가 좀 자라고 나면 그때나 다시 생각해 보자고 했는데 결국 선생의 종손은 얼마 안 가 세상을 뜨고 만다.
“퇴계에게는 대를 잇는 것보다 세상 모든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 더 큰 가치였던 것이지요. 퇴계의 그 정신은 후손에게 대물림되며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퇴계 종택을 지키고 있는 이는 퇴계의 16대 주손 이근필 선생. 여든이 다 된 나이지만 이 선생은 지금도 나이 어린 방문객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앉는다. 손수 쓴 ‘예인조복(譽人造福)’이라는 글귀를 선물하는데, 다른 사람을 칭찬하면 복이 돌아온다는 뜻이다. 이 선생은 종종 방문객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지만 퇴계의 삶과 가문의 내력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수련생들이 종택을 방문할 때면 김 원장이 따라다니며 설명을 거들어야 할 정도라고 한다. 겸손과 공경의 덕목을 지키며 사람의 길을 걷고자 했던 옛 선비의 모습, 그대로다.
“수련생들은 어르신의 이런 태도를 통해 선비정신을 마음으로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생생히 깨달음을 얻은 뒤 사회로 돌아가면 자연스레 남과 나누고 싶어지지 않겠습니까.”
한창 대화를 나누는 중 김 원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누군가 동명이인과 착각하고 잘못 걸어온 모양이었다. 인자한 기색으로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통화를 마친다.
“저보다 연배가 한참 어린 사람인데 얼마나 무안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예전에는 이런 작은 것을 살피지 못했어요. 수련원에 와서 남을 헤아리는 예절을 하나둘 배워가는 중입니다.”
심신 채우는 마음 공부
마침 경제 얘기를 좀 해보려던 차에 제동이 걸렸다. 안동까지 간 김에 전직 장관으로서 요즘 국가 경제정책에 대한 김 원장의 견해를 듣고 싶었다. 그러자 ‘부재기위 불모기정(不在其位 不謀其政)’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공자가 노나라 정계에서 은퇴한 후 누군가 정치 상황을 묻자 한 말이다.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를 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역시 김 원장 나름의 겸손과 공경에서 나온 대답인 듯싶었다.
“제가 잘한다 하면 국민이 좋아하겠습니까. 반대로 잘못한다고 하면 공무원들이 좋아하겠습니까. 국가 경제와 글로벌 경제는 잘 다룰 수 있는 동료와 후배가 많다고 생각해서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입니다. 경제는 현재 경제에 골몰해 있는 분들께 맡겨야지요.”
현직에서 물러나 또 다른 인생을 살고자 했던 그는 장관 퇴임 후 3년간 그냥 쉬었다고 했다. 뉴욕 마라톤에 출전해 완주를 하고, 한문 서당에 나가 사서를 배웠으며, 역사 관련 모임을 꾸려 여행을 다니는 등 몸과 마음을 새롭게 채웠다. 그는 지금도 시간이 나면 서당에 나가 ‘시경’을 읽는다. 1주일에 두 번씩 국학진흥원 내에서 열리는 ‘소학’ 강좌에 참석하기도 한다.
국학 자료를 수집, 연구, 보존하는 한국국학진흥원 앞에 선 김 원장.
“50~60대 주부들이 이제 더 이상 살림하기 싫다고들 하지요. 저도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 공부할 게 많은데 부족한 제가 계속 자리에 붙잡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하지만 이제는 제가 선 자리에서 틈나는 대로 선현들의 삶을 돌아보며 마음 공부를 하려 합니다. 옛사람들의삶이 오늘날 나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생각하지요. 퇴계 선생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 담고 있는 심오한 세계를 모든 사람이 알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라는 권유는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 원장은 자신보다 이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적임자가 나타나면 언제든 물러나 다시 자신에게 열중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진흥원 직원들이 “당신만큼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말린다고. 그는 “지금으로서는 시간을 잘 쪼개 생활하는 수밖에 없겠다”며 웃었다.
국학의 대중화
국학 자료를 수집, 연구, 보존하는 기관인 국학진흥원장으로서 할 일도 많다. 국학 자료 수집과 연구 결과의 대중화가 주요 임무다. 개인이 꽁꽁 싸매고 있어 보존과 연구가 어려운 국학 자료를 가능한 한 빨리 발굴, 연구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김 원장의 집무실에는 국학자료 수집현황 그래프가 붙어 있었다. 최근 들어 실적이 눈부시게 증가하고 있음이 보였다.
“국학진흥원에는 현재 문서, 책, 목판 등 28만권의 기록유산이 있습니다. 소유권은 민간에 남아 있고, 보존과 연구만 우리가 담당하지요. 문중, 향교, 서원 등을 방문해 자발적으로 자료를 기탁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원장 취임식 대신 국학진흥사업 계획 설명회를 열었을 만큼 이 일에 깊은 관심을 쏟고 있다고 했다. 국학을 대중화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하고 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할머니에게 전래동화를 듣게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사업 등 각종 대중 사업을 펼치고 있다. 부설기관인 한국유교문화박물관에서 열리는 각종 전시, 한국인성교육연수원의 연수 프로그램, 국학문화회관의 체험교육 등도 대내외의 호응을 얻고 있다.
“다음 세대에게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옛것을 현재의 삶을 발전시키는 데 활용해 미래의 디딤돌로 삼아야지요. 국학진흥원이 국민에게 우리 DNA 속에 존재하는 참 가치를 제공하는 기관이 되었으면 합니다.”
김 원장은 선비문화와 국학진흥의 가장 큰 수혜자는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수련원 생활과 국학 공부를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랬던 것과 같이, 더 많은 사람이 옛사람들의 정신을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보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제 돌이켜 보니 세상에 내 맘대로 되는 건 나밖에 없습니다. 같은 시간에 술을 마시겠다고 결정하는 것도 나, 책을 읽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나입니다. 같은 일에 시비를 거는 것도 나, 칭찬을 하는 것도 나 자신이고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어떻게 하려는 마음은 부질없는 것 같습니다.”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선입관을 안고 선비문화수련원이나 국학진흥원에 방문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처럼 자신을 뼈아프게 돌아보게 된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반성은 가까운 관계로까지 퍼져나가게 된다. 김 원장은 수련을 마치고 가족, 이웃, 동료를 떠올리며 눈물을 보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그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세계와 연결된 개인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었다. 우리 옛것이 해묵은 것으로만 느껴진다면, 그건 오히려 현재의 우리 삶이 낡아빠진 채로 방치되어 있는 탓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