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보성에서 벌 치고 천연염색하며 경옥고 만드는
- 이성래씨 부부는 창조적으로 살아간다.
- 남이 버린 것도 고쳐서 금도끼로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
- 마음이 가난하고, 지혜를 배우는 것을 소중히 한다.
- 아름다움을, 자연을, 전통을, 순수를 사랑한다.
박정신·이성래씨(오른쪽) 부부.
초은당 사랑채에서 하루를 묵는 호사를 누렸다. 초은당 사랑채는 다섯 평이 안 되는 아주 자그만 집이다. 집이라기엔 너무 작은 별채지만 이토록 호사스러운 공간을 나는 이전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방바닥은 쪽물 들인 한산모시를 발랐고 그 위에 세 번 ‘콩댐’을 하고 다시 ‘들깻댐’을 했다는데 빛깔은 깊은 바닷속처럼 검푸르다. 손으로 만지면 모시올의 질감은 느껴지되 까칠한 게 아니라 들깨기름이 먹어 매끄럽고 온화하다. 전기 조명은 아예 없앴고, 대신 촛불을 켠다. 사기호롱을 넣은 옛날 나무초롱도 한 귀퉁이에 걸렸다.
세 평 정도의 방과 한 평이 채 안 되는 마루와 곁에 달아낸 자그만 화장실과 툇마루로 구성된 집은 이집 주인 이성래(42)씨가 손수 지었다. 남의 힘 들이지 않고 제 손으로 제 집을 짓는 인간은 굳세고 진지하다. 나는 제 손으로 집을 지은 이를 여럿 만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악수하는 손이 억세고 눈빛이 침착했다. 서투른 일반화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눈앞에 당면한, 매우 구체적이지만 철학적인 명제다. 크기와 형태와 재료와 쓰임과 비용을 두루 고민해야 하고 그러자면 제 삶을 찬찬히 둘러볼 수밖에 없다. 화두를 들고 면벽하는 것만큼의 집중과 천하를 주유하는 것만큼의 너른 눈을 필요로 한다.
손수 다섯 채 집 짓다
산업화 이후 사람들은 대개 제 물건을 스스로 만들지 않는다. 전문가에게 맡기고 비용을 지불한다. 제가 쓰는 그릇, 제가 사용하는 연장, 제가 입는 옷, 제가 덮는 이불을 만들기도 쉽지가 않은데 하물며 집이랴. 이토록 모든 것이 분업화된 시대에, 정성스러운 준비와 노동과 지식이 필요한 집짓는 일에 비전문가가 뛰어들기는 버겁고도 비효율적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해내겠다는 생의를 낸 사람들은 여간 아닌 뚝심과 배포를 가진 이들일 것이다. 아무튼 초은당 주인 이성래씨는 2004년 보성 산골짝의 차밭 끝자락으로 들어온 이후 해마다 한 채씩 총 다섯 채의 집을 지었다.
“짐승도 새도 제 새끼 낳을 굴을 제 힘으로 짓지 않습니까. 인간만이 집을 못 지을 리가 없지요.”(이씨)
옳은 소리다. 하긴 도시인이라고 제 집을 짓지 않는 건 아니다. 집지을 돈을 버느라 뼈가 휠 뿐! 그러나 이성래씨의 집짓기는 노동이되 창조였다. 그래서 즐거웠고 벅찼다고 한다. 살림집 20평, 작업실 17평, 사랑채 5평, 쪽 발효실 겸 창고 하나, 정자 하나. 집 주변을 돌아가는 4개의 아름다운 굴뚝과 돌담을 혼자 힘으로 짓고 쌓았다.
“혼자라니 어불성설입니다. 혼자 한 게 아니지요. 처음엔 임신한 아내가 도와줬고 나중엔 걸음마를 시작한 딸이 도왔어요. 여기저기 얻어들은 말들과 이제껏 살면서 봐왔던 모든 아름다운 물건과 읽었던 책들과 지금껏 만났던 여러 스승이 함께 저를 도운 것입니다. 그 힘을 모아 지은 것이지 어찌 혼자 힘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어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집지을 재료는 거의 우리 동네 사람과 친척들이 거저 준 거예요. 이 집 짓는 데 총 여덟 채의 집이 들어갔어요. 쓰고 남은 천을 모아 쪽 보자기를 만들 듯 헌 집에서 나온 재료들을 모아 ‘재활용’한 집이에요. 그러니 지금은 여기 없는 고향사람들이 모두 함께 초은당을 지은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흐뭇한 계산법도 있구나. 정 필요할 때는 목수를 몇 번 샀고 모자라는 나무와 흙을 조금 샀지만 돈 들여 구한 재료는 그리 많지 않다.
“본채 천장을 만드는 데 새 나무가 좀 들어갔고 벽을 바르는 데 석회가 좀 들어갔고 뒷문으로 쓴 두꺼운 느티나무 널문을 100만원이나 주고 샀지요.”
대신 굵직한 기둥과 벽돌과 문짝과 기와는 대개 헌 집 허무는 데서 주워오거나 얻어오거나 품삯으로 벌어온 것들이다.
“이 반질반질한 기둥은 외삼촌네 집을 허물면서 나왔고 이 오래된 흙벽돌은 이웃집 무너진 터에서 주워왔고 저 기와는 다산초당을 헐 때 거기서 일하고 품값으로 얻어온 겁니다. 이 마룻장은 우리 동네 제일 부잣집 마루인데 집을 새로 지으면서 버리는 걸 어머니가 얻어오셨고 저 굴뚝에 얹은 기와는 광주문화센터 허물 때 가져온 겁니다.”
옹기 속에서 아름다움을 배우다
남이 버리는 걸 주워 쓰자면 취사선택할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낡은 것이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버리는 것이라고 무조건 새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성래씨는 낡은 재료들로 드물게 정갈하고 안온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버려진 재료로 기품 있는 집을 지을 수 있는 힘과 기운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런 힘이 이성래씨에게 깃든 내력이 궁금했다.
그는 보성읍 쾌상리 출신으로 군산대학교에서 도예디자인을 전공했다. 물감 만지는 것보다 흙 만지는 것이 좋아서 택한 도자기였다. 졸업하고 그가 찾은 곳은 당시 ‘뿌리 깊은 나무’에서 운영하던 공예업체인 징광옹기였다.
“이 지역에 옹기가마가 많이 있어요. 미력옹기는 사람이 너무 많길래 징광옹기로 갔지요. 거기 샘이 깊은 물 한창기 사장님의 동생인 한상훈 선생이 계신다는 것도 모르고 찾아갔어요. 전 스승 복이 아주 많은 사람입니다. 두 형제분은 한국의 전통 문화를 위해서라면 돈을 낙엽처럼 태울 준비가 되신 분들이었지요. 눈썰미가 빼어나고 열정과 성질도 대단하셨어요.”
징광옹기는 광명단 바르지 않은 전통 옹기를 만들면서, 비단과 무명을 야생의 풀과 뿌리로 염색하는 자연염색을 하고, 야생차를 뜯어 전 과정을 사람 손으로 작업하는 옛날식 덖음차인 ‘징광잎차’도 만드는 곳이었다. 징광에서 그가 배운 것은 아름다움의 본질이었다. 옹기뿐 아니라 염색과 차 만드는 기술도 같이 배웠다.
“한상훈 선생님이 첫마디에 ‘네가 지금까지 배운 지식, 기술, 습관을 다 버릴 각오가 돼 있느냐’고 물으시데요. 그러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다 버릴 자신이 있다고 했지요.”
거기서 그는 3년간 호된 도제교육을 받는다. 한상훈 선생은 정작 구체적인 기술을 설명하지는 않으면서 “이 베에 푸른빛을 들여봐라. 이 풀을 씹어봐라, 이 흙을 치대봐라” 하는 식으로 염색과 옹기제조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만들었다.
“한 선생님은 옹기의 기본형태가 뚝배기라고 하셨습니다. 뚝배기 모양에서 찻잔도 나오고 장독도 나온다고요. 뚝배기의 선을 하루 100번씩 그렸어요. 그런 후 옹기의 형태를 훤하게 꿰게 되니까 물레 앞에 앉히시데요. 머리보다 몸으로 형태를 익히게 하셨던 거지요. 한 번 몸 틀이 잡히면 잊어버리는 것이 없다고요. 1997년 서울에서 징광옹기전을 할 때 구워낸 옹기의 선은 다 제가 잡아놓은 거였어요.”
벽(碧) 빛을 찾아서
이성래씨의 서재.
“쪽염색이 제일 어렵지요. 봄부터 쪽을 길러서 가을에 물을 들이는 거니까 1년을 꼬박 기다리는 작업이거든요. 선생님은 쪽을 알면 다른 염색은 절로 알게 된다고 하셨지요. 쪽은 흰빛의 천이 옥빛이 되다가 청색이 되다가 남빛이 되어가는 변화의 단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염색입니다. 남빛에서 한 단계 더 나간 푸른빛을 우리는 벽(碧)이라 불렀어요. 흰빛에서 벽빛까지 과정을 들여다보면 고된 염색과정의 힘겨움을 다 잊을 만큼 황홀했어요.”
그러니까 초은당 사랑채의 장판빛, 검은 듯 가라앉은 푸른빛이 바로 쪽에서 얻은 벽색이란 얘기다. “홍화의 붉은빛에도 치자의 노란빛에도 다 그런 변화의 단계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게 너무 한순간에 지나가버려 쪽처럼 뚜렷하지가 않아요. 선생님은 비뚤어진 선을 아름다움으로 쳐줬어요. 그게 가장 큰 배움이었던 것 같아요. 반듯하게 만들려고 하는 긴장이 아름다운 것이지 반듯하게 만들어진 결과물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고 하셨지요.”
그런 언질은 그가 아름다움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손으로 매만진 정성 어린 노동이 미(美)의 최상을 이룬다는 것도 깨달았다.
“도구를 써서 반듯하게 만드는 짓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라고 하셨죠.”
도자기든, 집이든, 가구든 너무 매끈한 면과 반듯한 선은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자연스럽지 않은 까닭이다. 자로 그은 듯 반듯한 것은 자연의 선이 아니다. 자연은 적당히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하다. 자연을 닮은 선과 면이 우리를 푸근하게 만든다.
한창기 선생에 이어 한상훈 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어쩔 수 없이 그도 징광을 떠났다. 징광에 늘 찾아와 요가를 가르치던 분 중에 윤두병 선생이 계셨다.
“모리거사라고 부르던 분이셨어요. 기인이셨죠. 도솔사에서 승려생활을 하다 환속하셨고 독재에 항거하다 옥고도 치르셨다고 들었어요. 태극권과 수박도를 하셨어요. 그분을 따라 경남 거창으로 갔지요.”
스승을 찾아 떠나는 순례였다. 배움이 목말랐다. 아름다움을 위해 살고 싶은데 가진 것이 없었고 방법도 몰랐다. 눈과 몸이 반쯤만 만들어진 상태여서 목마름이 더욱 컸다. 그의 눈에 모리거사는 호연지기를 가진 어른이었다. 별명으로 쓰는 모리(某里)는 ‘어떤 마을’이란 의미로 하늘 아래 모든 곳을 내 집으로 여긴다는 의미였다. 그는 거창에서 지향이 비슷한 이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했다. 거기서 이씨가 새로 만난 스승이 김광현 목사였다.
“그분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목회를 하는 목사가 아니라 흙을 파서 농사를 짓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땅목사’이셨어요. 그분은 나라는 소우주를 자연이라는 대우주와 하나가 되게 풀어놓으라고 하셨지요. 자연에 합일하는 정신을 목사님께 배웠어요. 자연 속의 나무와 풀이 우리 몸에 어떻게 약이 되는지도 배우고요. 거기서 다석 유영모 선생의 ‘예수와 기독교’,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 장일순 주교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나님’, 스콧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의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읽었습니다. 참 종교가 뭔지를 알았어요.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이성래씨가 말하는 책은 그냥 독서용 책이 아닌 것 같다. 머리맡에 놓고 책장이 반질반질 닳게 매만지면서 정신을 흡입하는 양식이랄까. 책 제목을 하나씩 말하는 데서 그런 몰두와 애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지금도 그 책은 초은당 찻방에 귀하게 꽂혀있다. ‘뿌리 깊은 나무’가 출판했던 민중자서전도 거기 꽂힌 책 목록 중 하나다.
아내 박정신씨도 김광현 목사 댁을 드나들던 이였다. 대학 졸업 후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두 살 위 오빠가 사고로 세상을 뜨는 바람에 인생의 좌표를 잃은 채 기우뚱대던 처녀였다. 그는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구들방 치료를 위해 거창에 머물던 중이었다.
“김 목사님 댁에 갔더니 연주 아빠(이성래씨)가 차를 내오더라고요. 차 한 잔에 지극 정성을 들이는 모습이 도대체 이 세상 사람 같지가 않았어요. 조심스럽게 차를 따르는 모습이 그날 제 눈에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 같아 보였습니다.”
박정신씨는 오빠를 잃고 방황하다 도법 스님의 실상사 귀농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농촌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연 속에서 농사짓고 살면 몸과 마음에 스민 절망과 우울이 풀릴 것 같았다. 서른이 넘은 동갑내기 처녀총각은 서로에게 진지하게 이끌린다. 농촌에서 살고 싶은 박정신에게 농촌에서 살 준비가 완료된 이성래가 ‘신선처럼’ 때맞춰 등장한 것이다.
서로 존경하는 부부
딸 연주양(아래)은 자연의 변화와 소리에 유난히 민감한 아이다.
“저 사람은 외골수라고 할 만하게 순수해요. 옳다 싶으면 옆도 뒤도 안돌아보고 거기에 몰입하지요. 일상 하나하나에 깊은 정성을 들여요. 허투루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신혼 초에 다툴 일이 있었는데 제가 마음 상해하니까 저 사람이 나무 막대기를 두 개 만들어 와서 방 안으로 들이밀어줘요. 모리거사님으로부터 막대기로 발바닥 치기를 한창 배우고 있을 때였는데 하나로는 발바닥을 치고 다른 하나로는 자기를 쳐서 분을 풀라고 하더군요. 그 막대기를 보고 있자니 우습기도 하면서 마음이 절로 풀리더군요.”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을 본 김광현 목사는 둘을 불러 앉혔다. 그리고 ‘아버지가 될 몸’과 ‘어머니가 될 몸’에 대해서 가르쳤다. 김 목사는 두 사람에게 혼인해서 아이를 가지려면 적어도 1년 전부터 몸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빠가 먼저 체력을 기르고 술 담배를 끊고 청정한 음식을 먹으며 명상과 단전호흡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엄마도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기 몸을 건강하고 편안한 상태로 유지할 것을 권했습니다. 태어나서 3년보다 태중 1년이 더 중요하고, 그보다는 또 아이가 생기는 날 부모의 몸과 마음 상태가 더욱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술에 취하거나 기분이 상하거나 감정이 균형을 잃어서도 안 되며, 감사도 자각도 없이 아이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하셨지요. 우리 둘 다 목사님의 말씀에 수긍했고 철저히 지켰어요.”(박씨)
그래서 태어난 아이가 연주다. 연주는 자연의 변화와 소리에 유난히 민감한 아이다. 밝고 건강해 부모에게 웃음과 생명력을 안겨준다. 집 앞 대나무 가지에 앉아 우는 새를 ‘그지그지새’라고 명명한 것도 연주다.
“연주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배에 대고 ‘옴~’소리를 냈어요. 아이가 배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라고 내는 소리였지만 그러고 있으면 우리 둘이 더 편안하고 충만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연주가 태어날 날을 기다렸어요.”(박씨)
초은당 세 식구는 날 감격하게 했다. 우리 나이로 올해 마흔셋이 된 부부와 7살짜리 유치원생 연주, 그들은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실천할 줄 아는 이들이다. 연주는 납작한 나무판에 홍화를 우린 물감으로 ‘사랑해요’라고 써서 식탁 위에 올리고 엄마는 매화와 제비꽃과 진달래를 따서 나물무침과 마늘 짱아찌 위에 꽃수를 놓고 아빠는 아궁이 불에 삼발이를 올려 식후에 마실 모과차를 뭉근하게 끓인다. 다들 그런 일들이 몸에 배어 전혀 소란하지가 않다.
지금 그들의 생업은 천연염색·경옥고·야생차 만들기와 토종벌치기다. 이들 부부는 곧 초은당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 사랑채를 개방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토종벌은 개체수가 자꾸 줄어들어 종을 지킨다는 의무감에서라도 더 열심히 키운다고 했다.
장작도 보기 좋게 쌓아야
“꿀이 생산되는 만큼만 경옥고를 만들고 있어요. 경옥고 만드는 법은 가야산 백학동의 노곡 임기종 선생에게 배웠어요. 저는 가는 곳마다 진짜 스승을 만나는 큰 복을 타고 났습니다. 노곡 선생은 김광현 목사님이 소개하셨지요. 일꾼이 필요하다 해서 2000년부터 겨울 석 달간은 가야산 중턱에 머물렀지요. 지게로 나무 해서 불 때는 게 일이었어요. 한번 불을 때면 3일 연속해서 때고 하루를 식혔다가 다시 하루 불을 때서 총 5일이 걸리는 작업입니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법제를 충실히 따르는 것인데 마음을 정성스럽게 가지지 않으면 약이 안돼요. 산중턱이니 전기도 없고 나무해서 불 때는 데 그 시간이 그렇게 평화스럽고 좋았습니다.”(이씨)
경옥고는 인삼과 지황과 백복령을 고아 토종꿀에 섞어 만드는 귀한 약제이고 이제 그게 초은당의 생업이 되었다. 경옥고 만드는 작업실조차 어찌나 정성스럽고 정갈한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지런해진다. 초은당은 흐트러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장작까지 정연하게 쌓여 있다. 뽕나무는 뽕나무대로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돌담을 쌓듯 알뜰하게! 초은당에 들른 이들은 집 앞에 쌓인 장작을 보고 일단 감탄한다.
-곧 허물어서 불을 때고 말 텐데 왜 저렇게 장작을 알뜰하게 쌓지요?
“그래야 쌓는 내가 기분이 좋잖아요. 지나다니면서 보는 눈도 즐겁고!”
그는 일상에 정성을 들이는 게 몸에 배었다. 아무리 사소한 일도 사소하게 취급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겁내지 않고 노동 자체를 즐긴다. 덕분에 삶의 마디마디에 큰 스승이 턱턱 나타나는 것이리라.
노곡 선생을 통해 만난 스승은 김훈이라는 디자이너였다. 김훈은 광주에서 천연섬유로 옷을 만들던, 감각이 매우 빼어난 디자이너였다.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은 등반 안내인과 고용주 사이였지만, 곧 선후배 사이로 발전한다. 거창에 있으면서 그가 생업으로 택한 일이 등반 안내인이었다. 히말라야가 아니라 지리산 종주에도 짐을 지고 올라갈 안내인을 찾는 이들이 있다. 왜소해 보이는 체격의 그가 등반 안내인이라고? 30㎏이 넘는 배낭과 카메라 가방을 메고 그는 지리산을 벌처럼 가볍게 날아다녔다.
“체력이란 눈에 보이는 근육이 아니에요. 자연 속에서 만들어진 몸과 헬스클럽에서 만든 근육은 힘쓰는 게 다르다고요. 야생동물이 겉보기에 근육이 발달했나요, 어디? 근육이 안 보여도 자연에 길든 몸은 필요할 때 절로 대단한 힘을 발휘하거든요.”
1 이성래씨 집의 초은당 편액. 2 정갈한 식탁. 3 재활용품으로 만든 굴뚝. 4 야생차.
고향 보성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그를 김씨가 적극 지원한다. 땅을 찾고 집을 짓는 것을 시종 곁에서 거들어줬다.
“집지을 때 김훈 선생은 머리고 연주아빠는 손발이었어요. 마루판을 어떻게 깔면 좋을지 창과 문을 어떤 위치에 달면 좋을지 참 많은 아이디어를 주셨지요.”(박씨)
이씨는 남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던 땅을 마음에 들어 했다.
“제가 워낙 가진 것이 없으니까 이 땅이 눈에 들어왔을 겁니다. 원래 계곡을 따라 난 계단식 논이 있었는데 묵혀놓아서 대숲이 됐더군요. 널찍한 개울 건너 있으니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거지요.”
1000평을 2000만원 주고 산 뒤 대숲을 정리하니 동쪽으로는 너비 4m의 수량 풍부한 개울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1.5m 정도로 사철 돌돌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맑은 계곡을 면한 땅이 나왔다. 자연이 이들 부부를 위해 일부러 감춰놓은 듯한 아름다운 땅이었다. 대나무는 밭을 이뤘고 송악과 자귀나무와 산벚나무와 매화와 오동과 때죽나무가 개울가에 여러 그루 자라고 있었다.
“때죽나무 향기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꽃은 종처럼 아래를 향해서 피는데 떨어질 때는 꽃송이가 위로 올라오지요. 5월이 되면 땅바닥에 온통 때죽나무 꽃이 하얗게 덮인답니다. 꽃 모양이 망가지지 않고 떨어져서 동백처럼 바닥에 깔린 꽃을 보는 것도 장관이랍니다.”
부부가 입을 모아 때죽나무 꽃을 찬미하는 소리 사이로 꿀벌이 잉잉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 배경으로 매화가 화르륵 떨어질 때 나는 잠깐 여기가 천국인가 착각한다.
손가락을 잃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에 천국 같은 시간만 있으랴. 그럴 리 없다. 3년 전 이성래 부부는 호된 몸살을 치렀다. 장흥이 한방 특구로 지정되고 보성에 경옥고 연구소가 들어섰는데, 전통 기술을 가진 이성래씨가 거기로 가게 됐다.
“대량으로 생산하니 방앗간 같은 분쇄기계를 썼어요. 경옥고는 정성이 먼저라 티끌 하나도 들어가서는 안 되거든요. 그런데 그냥 놔둬도 되었을 텐데 잡티 하나를 꺼내려고 손을 넣었던 게 탈이었어요.”
감정 없이 돌아가는 기계에 감각 빼어난 손가락을 잃는다. 순식간에! 그것도 오른손가락을 세 개씩이나! 그 무엇보다 제 몸을 믿고 살아온 삶이었다. 손가락을 잃으니 그는 예전의 몸 틀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우울에 시달려 한 2년 사람 만나는 것도 극구 피했다.
“저 사람이 비로소 일을 쉬더군요. 느긋하게 아무 일도 안하니 저는 되레 좋을 적도 있었지만요.”(박씨)
“이른 봄날이었어요. 날마다 사람이 아무도 안 오는 뒷산 득음정으로 올라가 멍하니 물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게 일과였거든요. 개울의 징검다리를 지나는데 뭔가 하얗고 자그만 것이 물에 닿을락 말락 흔들리는 게 보입디다. 늘 훌쩍 건너뛰는 징검다리인데 그날은 그것 때문에 쭈그리고 앉아봤어요. 그건 냉이꽃이었어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작은 꽃을 매달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냉이꽃! 전 그 자리에 퍽 쓰러졌습니다. 냉이꽃도 이렇게 살려고 애쓰는데 인간인 내가? 고작 손가락 셋을 잃었다고 절망을 해? 그날부터 다시 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별 불편 없을 정도가 됐어요, 하하.”(이씨)
아직도 그는 모르는 이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기는 주저하지만 다른 부분은 거의 극복했다.
“염색도, 경옥고도 내가 최고라고 자부심이 치솟을 때였거든요. 염색은 흐르는 개울물에 흔들어서 하는 게 최고인데 이 땅의 조건이 딱 그렇지 않습니까. 사철 수량이 풍부하고 물도 맑으니 여기서 염색하면 다른 곳과는 다르게 나오지요. 그건 겸손하게 감사할 일이지 으스대며 자랑할 일은 아니거든요. 그걸 자랑하고 싶어 근질거렸으니…. 내 손가락을 탁 ‘쳐분 것’ 같어요. ‘낮아져라. 중요한 것을 찾아라,’ 그런 뜻으로 누군가 나를 아끼려고 저 위에서 탁 쳐불었다니깐요.”
이쯤 되면 초은당 주인은 이미 젊은 선사의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세련된 안목을 전수한 김훈 선생도 유명을 달리했다. 그 김훈 선생의 소개로 다시 이어진 스승이 시인 황청원이었다. 초은당 당호도 황 시인이 지었고 ‘초은당은 참으로 귀한 풀들을 모아 건강한 삶을 꿈꿉니다’라는 해제와 글씨도 그가 썼다.
“황청원 선생에게 배운 생각이 참 귀해요. 사람들은 이미 있는 축복을 다 누리지도 못하면서 만날 신에게 축복을 달라고 기도한다고 하셨거든요. 있는 것을 누리는 것만 해도 차고 넘치는데 말입니다. 내 눈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고 내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황 시인에게서 새삼 배웠습니다.”
젊은 선사
이성래씨는 머리를 길러서 꽁지머리로 묶고 다닌다. 거기에도 나름대로 터득한 철학이 있다. “단순하게 생각을 한곳으로 모으려면 머리칼을 밀어버리는 게 나아요. 저도 한때 그렇게 밀고 다녔거든요. 확실히 사람이 심플해지더군요. 그런데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면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이 느껴져요. 세상을 섬세하게 잘 느끼려고 머리칼을 길러서 묶는 거지 멋 부리려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초은당 사랑채엔 화병에 넘치도록 진달래를 꽂아뒀다. 좁은 마루 위에서 꽃들이 욕심 없이 환하다. 초은당 사랑채는 이성래씨가 한껏 멋 부려 지은 집이다. 묵은 흙벽돌이 생기면 딱 그만큼만 벽을 쌓고, 길 잘든 마룻장이 생기면 딱 그만하게 마루를 짜 넣었다. 더 좋은 재료가 생기면 욕심이 생겨 벽을 허물기를 세 번이나 했다.
“집짓는 데도 가장 어려운 것이 욕심을 줄이는 일이었어요. 크기나 구조를 욕심 부리는 게 아니라 낡은 재료의 멋을 마음껏 살리는 욕심이었죠. 이만하면 됐다, 여기서 멈추자, 고 자신을 설득하곤 했습니다. 근데 그게 참 어려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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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초은당 건너마을에서 보성덤벙이를 만드는 송기진씨의 보성요에 잠시 들렀다. 이성래씨의 대학 후배라는 송기진씨의 말이 맘속에 자꾸 맴돌았다.
“초은당 형은 이제 스승이 불필요한 듯해요. 스스로 자기 스승이 된 것 같습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