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호

“다음 목표는 국제사이클연맹 회장”

亞사이클연맹 회장 최초 3選 조희욱 MG테크 회장

  • 최호열 기자│ honeypapa@donga.com

    입력2013-06-20 16: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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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상 최초로 아시아사이클연맹 회장 3선 연임 성공,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사이클연맹 수석부회장 당선…. 조희욱 MG테크 회장의 이력이다.
    • 그로부터 한국 사이클의 미래와 드라마 같은 인생 역정을 들었다.
    “다음 목표는 국제사이클연맹 회장”
    아마추어 스포츠의 꽃은 올림픽이다. 올림픽 시상대에 올라 메달을 받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메달을 주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과 국가원수 등 메달 수여 자격을 엄격하게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은 모두 28개의 메달을 받았지만, 메달을 준 한국인은 단 1명뿐이었다. 아시아사이클연맹 회장이자 국제사이클연맹 수석부회장인 조희욱(67) MG테크 회장이 그 주인공. 한국의 유일한 IOC 위원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수영 부문 시상자로 나설 예정이었지만 박태환 오심(誤審) 여파로 불발됐다.

    조희욱 회장은 아시아사이클계의 대부로 통한다. 1996년부터 10년 동안 대한사이클연맹을 이끈 그는 2005년 아시아사이클연맹 회장에 당선된 이후 2009년과 지난 3월 연이어 회장으로 선출됐다. 3회 연임은 아시아사이클연맹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한국인이 아시아경기단체 회장을 3차례 연임하는 것도 그가 처음이다. 또한 조 회장은 2009년 국제사이클연맹(UCI) 총회에서 아시아인으로선 최초로 수석부회장에 선출됐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 사이클 무대의 중심에 우뚝 선 것이다.

    인터뷰를 위해 서울 성수동 MG테크 회장실에 들어서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십 점의 그림과 사진이 전시돼 있어 마치 갤러리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게다가 고풍스럽게 세팅된 야외 테라스, 물고기가 노는 작은 연못, 새들이 지저귀는 새장…. 그저 앉아만 있어도 절로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조 회장은 60대 후반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력이 넘쳐보였다. 허벅지 근육이 젊은이 못지않게 단단했다. “사이클을 많이 타는 모양”이라고 하자 “사이클은 잘 못 타고 헬스자전거는 잘 탄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우리 세대가 대부분 그랬지만, 저도 어린 시절 무척 가난해서 자전거를 살 엄두를 못 냈어요. 하루는 자전거를 타던 동네 부잣집 아이를 온종일 뒤에서 밀어준 뒤 빌려 타려는데 그 아이가 싫다며 울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 도망간 기억이 있어요. 그 후로도 자전거를 배울 여유가 없었죠. 그래서 지금도 사이클 이론은 많이 아는데, 타는 건 익숙하지 않아요.”



    평창과 바꾼 ‘꿈’

    ▼ 사이클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요.

    “아는 분으로부터 대한사이클연맹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처음엔 사양했는데 ‘국가를 위해 일해달라’는 말에 더는 거절할 수 없더라고요. 당시 사이클연맹은 몹시 부실한 상태였어요. 회장에 취임해 10년 동안 1년에 5억 원씩 지원하면서 나름대로 사이클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고 자부합니다.”

    ▼ 당시 한국 사이클 수준은 어느 정도였나요.

    “도로경기는 경쟁력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트랙경기가 좀 나았어요. 트랙경기에 집중 투자해 아시아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땐 사상 처음으로 4위를 했어요. 조호성 선수가 3위로 달리다 마지막에 추월당해 4위로 밀렸는데,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너무 아쉬워요. 임기 중에 ‘투르 드 코리아’ 대회를 창설한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처음엔 국내 대회로 시작했지만, 제가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부 지원을 대폭 늘려 국제대회로 성장시켰죠. 국회의원이 좋긴 좋더군요. 말 한마디만 하면 정부 부처에서 지원을 해주니까요(웃음).”

    ▼ 아시아사이클연맹 회장을 3번이나 연임할 수 있었던 배경이라면.

    “아시아는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이클 종목에 투자할 경제적 여력이 없어요. 이런 나라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죠. 연회비부터 없앴어요. 경기용 자전거 한 대 살 여력이 없는 나라로부터 회비를 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대신 한국, 일본, 중국, 대만처럼 웬만큼 사는 나라들에 회비를 더 내도록 했죠. 그리고 국제사이클연맹으로부터 지원금을 많이 받아내 낙후된 나라에 사이클을 제공하고 지도자도 파견하는 등 사이클 저변을 넓히는 데 주력했어요. 이런 활동이 지지를 이끌어낸 배경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국제사이클연맹 수석부회장에 올랐습니다. 회장 선거에 도전할 계획은.

    “내심 올 9월에 열리는 총회에서 회장 선거에 도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요. 그런데 현 회장인 펫 매퀘이드가 IOC 위원이에요. 지난해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도시를 결정할 때 평창으로선 한 표가 아쉬운 상황이었잖아요. 정부에서 저더러 매퀘이드 회장을 설득해달라고 하더군요. 제 개인적인 꿈보다는 국가가 우선이라 생각하고 회장을 만나 담판을 지었죠. 평창을 지지해준다면 나도 회장 선거 출마를 보류하겠다고. 그 친구가 약속을 지켰으니 저도 약속을 지켜야죠.”

    사이클과 인생

    ▼ 아시아 사이클이 세계 수준과는 차이가 많지요?

    “지난해 런던 올림픽에서 18개 금메달 가운데 14개를 유럽이 가져갔어요. 아시아는 카자흐스탄이 유일하게 1개를 가져갔죠. 유럽은 국가적으로 사이클 붐을 조성합니다. 모든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홍보하고 국민의 관심도 뜨겁습니다. 이에 비해 아시아는 사이클에 무관심한 편입니다. 카자흐스탄이 정부에서 프로팀을 관리할 정도로 집중 지원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 우리나라 수준은 어떻습니까.

    “아시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각종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지만, 올림픽에서는 아직까지 메달 하나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런던 올림픽에서 시상을 하면서 영국이 금메달을 7개나 휩쓸어가는 것을 보니 오기가 발동하더군요. 우리나라도 꼭 메달을 딸 수 있도록 저부터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뭐가 부족하다고 봅니까.

    “기본적으로 사이클 강국이 되려면 도로종목이 강해야 합니다. 도로종목이 강하려면 도로에서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급격한 산업화로 도로운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미비해요. 과거 한때 도로 부문에서 세계 수준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은 적도 있는데, 여건이 못 받쳐줘서 세계와 큰 차이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산을 확보해 사이클 전용도로를 만드는 등 인프라를 늘려야 합니다. 정부가 좀 더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우리 선수들의 자질을 봤을 때 조만간 세계 수준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트랙경기장이 있는 곳이 창원, 광명, 부산, 서울 정도인데, 더 많이 늘려야 합니다. 우선은 저변을 확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선수도 나오는 법이죠.”

    ▼ 좋은 선수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인기 종목이 아니어서 선수 발굴이 어려워요. 사이클을 잘하려면 우선 심폐기능이 남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현재 대한사이클연맹 회장인 구자열 LS그룹 회장에게 협회 차원에서 전국을 다니며 초중고등학생들의 심폐 기능을 체크해 뛰어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해서라도 유망주를 육성하라고 충고하곤 합니다.”

    ▼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한국 사이클의 메달 전망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그다지 밝지는 않지만, 지금부터라도 연맹 차원에서 경기력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면 메달권에 드는 선수가 한두 명은 나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제 소원 중에 하나가 우리 선수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거예요. 저는 대한사이클연맹 회장을 할 때도 아시아경기대회나 장애인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사비를 털어 포상금을 줬어요. 아시아사이클연맹 회장이 된 후에도 올림픽 사이클에서 메달을 따는 아시아 선수에게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내심 우리 선수가 메달을 따기를 기대했는데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만 지급하게 돼 개인적으로 참 아쉽더군요. 우리 선수가 꼭 받으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삶은 덤”

    ▼ 사이클의 매력이 뭔가요.

    “사이클 경기에는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힘껏 페달을 밟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아요. 끈기와 용기로 쉬지 않고 노력했을 때 목표에 도달하고 쾌감을 느낄 수 있어요. 인생도 마찬가지죠. 게다가 사이클은 무릎 부상의 위험이 없어 나이 든 사람도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전신운동입니다. 또한 자전거를 타면 차를 타고 다닐 때는 볼 수 없는 풍광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다음 목표는 국제사이클연맹 회장”

    조희욱 회장이 지난해 런던 올림픽에서 사이클 종목 입상자에게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조 회장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다. 고학으로 대학에 입학한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 군사정권 시절엔 야당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일하다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실업자가 됐다. 어렵사리 겨우 취직은 했지만 이번엔 회사가 부도나 또 실업자 신세가 되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직접 회사를 차려 건실한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국회의원 배지까지 달았지만 미련 없이 정치를 그만두고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그러면서도 한국과 아시아의 사이클 발전을 위해 뛰었다.

    ▼ 베트남전 때 위기를 맞았다면서요.

    “백마부대원으로 1969년부터 1971년까지 1년6개월 동안 복무했습니다. 무전병이었어요. 전투에 참가하면 다른 군인들은 자기 위치를 지키면 되지만, 저는 지휘관 가까이에 있으면서 적의 동태도 살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군보다 늘 50m 정도 앞에 있었죠. 그런데 전투에서 제일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이 통신병입니다. 통신병이 없으면 전체가 고립되니까요. 어느 날 전투 중에 적의 기습공격을 받았는데, 상대방이 저를 정조준해 쏘는 게 보였어요. 아, 이제 죽었구나 싶었는데 천만 다행으로 총알이 무전기 박스에 맞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앞으로의 삶은 덤이니 나보다 사회와 국가를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MG테크는 어떤 회사인가요.

    “일반 소비자는 우리 회사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을 겁니다. 명찰이나 이불, 한복 등에 실로 글씨나 그림을 새겨넣는 기계가 자수기인데, 저희는 컴퓨터 자수기를 생산, 판매하고 있습니다. 수출도 하고요. 미국,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에서 쇠고기를 수입 판매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 헬스장이나 사우나, 지하철 등에서 볼 수 있는 사물함도 만들고 있습니다. 플라스틱이라 가벼우면서도 튼튼해 반응이 좋습니다. 3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으며, 연 매출은 6000만 달러(약 690억 원)쯤 됩니다.”

    ▼ 사업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대학 때 전공이 정치외교였습니다.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데모도 했죠. 졸업 후엔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유신이 선포되면서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실업자가 됐죠. 작은 회사에 겨우 취직해 다니다 화신그룹에 스카우트돼 일본 전자제품과 공업용 재봉기를 수입 판매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8년쯤 지났을 때 화신그룹이 부도가 나면서 1980년 타의반 자의반으로 회사를 만들어 무역업에 종사하게 됐습니다. 처음엔 회사 이름을 ‘무궁화무역’이라고 지었는데, 무역을 하다보니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워 하더군요. 그래서 2000년에 MG테크로 바꿨습니다. 처음엔 주로 독일 재봉기를 들여와 판매했습니다.”

    후회 없는 의정생활

    ▼ 어려운 일도 많았겠군요.

    “재봉기를 팔려면 섬유회사를 뚫어야 했습니다. 당시 섬유산업이 호황일 때라 수요가 많았거든요. 하루는 백양(現 BYC)에 물건을 팔러 갔는데 경비가 잡상인 취급을 하고 안 들여보내는 거예요. 그래도 담당자를 만나 설득을 해야겠다 싶어 경비원 몰래 담을 넘다가 잡히고 말았어요. 얻어맞았죠. 그런데 그 회사 사장님이 제가 맞는 걸 본 거예요. 전에 만난 일이 있어 기억을 하셨던 모양이에요. 경비실로 전화를 걸어 저를 데리고 오라고 하더군요. 코피를 흘리며 들어가서는 ‘기계 팔러 왔다’고 하니까 미안하다며 자기 회사뿐 아니라 쌍방울, 태창 등 다른 회사까지 소개해줬어요. 그때 큰 도움을 받았죠.”

    그는 단지 외국 제품을 들여다 파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기술개발을 통해 직접 자수기를 제작했다. 그의 사무실 한 켠엔 자체 기술로 처음 생산된 1호 자수기가 전시돼 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다음 목표는 국제사이클연맹 회장”

    태국왕실 훈장을 받는 조 회장.

    “우리 회사 컴퓨터 자수기 1대 가격이 7000만~8000만 원대입니다. 중국에서 만드는 제품이 3000만~4000만 원대니까 훨씬 비싸죠. 그래도 품질이 다르니까 해외에선 꾸준히 팔립니다. 특히 고급 봉제회사일수록 우리 제품을 선호합니다. 흔히 기업은 30년을 한 세기로 봅니다. 한 세기를 넘기면 안정이 됐다고 봐야죠.”

    ▼ 16대 국회의원도 하셨죠.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국가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추천으로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자민련 원내부총무, 당 재정위원장을 맡아 살림을 책임지기도 하고, 16대 국회에서 대정부 질의를 가장 많이 한 의원으로 뽑히는 등 후회 없는 4년을 보냈습니다.”

    ▼ 왜 재선에 도전하지 않았나요.

    “한나라당 공천을 받기 위해 공천심사를 받으러 갔어요. 지금 국회의장인 강창희 의원이 친구인데, 저더러 공천심사 받을 때 욱하고 성질부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더군요. 그런데 한 젊은 의원이 공천심사위원으로 앉아서는 ‘당신 같은 기업인은 시의원을 하면 되지 왜 국회의원을 하려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 친구야. 그러는 자네는 왜 시의원 안 하고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고 했어요. 공천심사장이 웃음바다가 됐죠. 저는 ‘이런 심사는 못 받겠다’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요. 4년 동안 여한 없이 일을 했다고 생각해서인지 별 미련도 없었죠. 국회의원 한 번 더 하려고 남 앞에서 굽신거릴 생각도 없었고요.”

    ▼ 지금 와서 후회되진 않나요.

    “후회는 없어요. 정치인이라고 국민에게 욕도 안 먹고, 오히려 아시아사이클연맹 회장 일을 잘한다고 태국 국왕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훈장도 받았는걸요(웃음).”

    ‘조희욱 연구발전기금’

    조 회장의 원칙 가운데 하나가 회사 이윤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것이다. 회사가 안정기에 들어선 1990년대부터 꾸준히 장학사업을 펴고 있다. 조 회장의 모교인 중앙대 관계자에 따르면 그가 기부한 총액이 20만 동문 가운데 4번째로 많다고 한다. 모교뿐 아니라 다른 학교와 지역에도 인연이 닿으면 기꺼이 사재를 내놓는다.

    ▼ 중앙대에 ‘조희욱 연구발전기금’이란 게 있더군요.

    “2001년에 모교 교수와 저녁을 먹을 기회가 있었어요. 그 교수 말이, 다른 학교 졸업생들은 모교 교수들이 마음 놓고 연구할 수 있도록 연구기금을 많이 기부하는데 우리 학교 졸업생들은 그런 부분이 약하다는 거예요.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수들이 많이 공부하고 연구해야 학생들에게 더 좋은 내용을 가르칠 수 있잖아요. 그래서 5억2000만 원을 기부해 교수들을 위한 연구발전기금을 만들었죠.”

    ‘조희욱 연구발전기금’은 매년 논문심사를 통해 5~7명의 교수를 선정해 500만 원씩 연구기금을 주고 있다. 그는 올해 2억 원을 더 기부할 계획이다.

    “죽을 때 재산을 가져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많지 않은 재산이지만 자식들이 회사를 운영하는 데 꼭 필요한 정도만 빼고는 사회복지, 특히 장애인 복지를 위한 사업에 기부할 생각입니다.”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국가와 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오는 9월에 열리는 국제사이클연맹 총회에서 수석부회장에 재선임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를 통해 4년 후에는 국제사이클연맹 회장에 출마할 생각입니다. 당선이 된다면 IOC 위원이 되어 우리의 국격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과 이런 저런 인연이 있는 만큼 현 정부가 성공적으로 국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울 방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정치 일선에 뛰어들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습니다.”

    조 회장은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7시 50분이면 출근해 업무를 시작한다고 한다. 저녁에도 헬스클럽에 빼먹지 않고 간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정신으로 ‘하면 된다’와 ‘최선을 다하자’를 모토로 삼아 살아왔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쳤다. 은빛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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