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중순 호텔 식당에서 만난 권씨의 표정은 밝았다. 옷차림이 편해 보였다. 검정 재킷에 받쳐입은 베이지색 폴라티가 그가 감당해온 세월의 무게를 덜어주고 있었다. 건강을 물어보았다.
“많이 좋아졌어요. 다만 당뇨가 아직 조절이 잘 안되고 망막염이 생겼어요. 또 백내장이 왼쪽 오른쪽에 조금씩 있는데 수술할 정도는 아니고. 그동안 걸음을 잘 못 걸었어요. 발이 붓는 증세입니다. 요즘은 많이 좋아져서 틈나는 대로 산보를 하고 일주일에 한번 골프도 치고 있습니다. 구치소 있을 때는 불면증,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았는데 요즘은 그 증상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가 불편해할 질문을 바로 꺼냈다.
-그동안 권고문(권노갑씨 주변에서는 그를 이렇게 부른다)을 두고 말이 많지 않았습니까. 국민들에게 긍정적 이미지보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 많이 심어주었는데요. 권고문께서는 자신의 존재가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에 부담이 된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까.
“없어요. 나는 당당하고 떳떳해요, 대통령을 위해 내 일생을 바쳤기 때문에. 언론에서 뭐라 떠들어도 의심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믿습니다. 대통령을 위해 버팀목이 되겠다, 내가 무얼 하겠다는 욕심보다 대통령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것이 일생의 목표였고 행동지침이었기 때문에 누를 끼친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다.
대통령도 그런 생각을 안 했어요. 밖에서 그런 말이 들어오면 권노갑은 그런 사람 아니라고 말씀해 왔어요. 지난번에 대통령께서 ‘너 외국 나가라’고 하기에 ‘제가 왜 외국에 나갑니까. 무얼 잘못했다고’ 하면서 대통령 말에 처음으로 반대했잖습니까. 나도 가족이 있고 아들이 있습니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가족에게 누를 끼치겠습니까.”
-대통령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알았다고만 하셨어요. ‘자네가 잘못해 나가라는 게 아니라 왜곡된 여론이 혹시라도 정부에 부담이 되면 안 되니까 그런 것’이라며. 하여튼 국정을 농단했다느니 무슨 게이트에 연루됐다느니 비선을 통해 인사를 다했다느니…. 이렇게 헛소문으로 나를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부정적 이미지가 부각된 겁니다.”
권씨의 목소리가 조금 격앙됐다. 생각보다 두터운 방어벽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여론의 공격이 부당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박지원이 집에 찾아와 외유 권유
권씨에 따르면 김대통령이 외유를 권유한 것은 지난해 3월. 전 국정원 2차장 김은성씨의 옥중 탄원서로 분당 파크뷰 특혜분양 의혹이 불거지고 최규선 게이트가 꿈틀거릴 무렵이다.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집으로 찾아와 대통령의 뜻이라며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박실장에게 대통령 뜻이라면 나가겠다고 말했어요. 성명서까지 준비했지요. 그런데 나도 가족이 있지 않아요? 미국에 있는 아들이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가 무슨 잘못 있냐. 나가면 안 된다’고 만류했어요. 지금 나가면 오히려 국민들한테 더 오해받는다고. 가족들이 강력히 반대해 생각을 바꿨죠.”
권씨는 청와대에 안 들어간 지 2년이 넘었다고 말했다. “소원해진 것이냐”고 묻자 “그런 게 아니라 특별히 만날 이유가 없어서”라고 했다. 대통령에게 할 얘기가 있으면 한광옥(청와대 비서실장 역임) 최고위원이나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측근에 따르면 권씨와 대통령의 관계는 거의 단절된 듯하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오래 전부터 만나는 건 고사하고 전화통화도 하지 않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