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년 6월 대통령 친서를 호텔에 놓아둔 채 장쩌민 중국주석(왼쪽)을 면담한 김중권 민주당 대표
그 중에서도 특히 필자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중국 지도자들의 뛰어난 외교 능력이었다. ‘대국’답게 통 크면서도 정교한 외교술은 타산지석으로 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필자가 5년 동안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보고 느낀 바를 토대로 중국 외교의 강점과 한국 외교의 문제점을 살펴본다.
실수연발, 조세형·김중권 대표의 訪中
1999년 6월 조세형(趙世衡)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방중 하루 전날 한나라당 서상목(徐相穆) 의원의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조대표의 방중 계획이 취소되었다. 중국은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직접 조대표를 맞기로 하는 등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조대표가 방중 일정을 일방적으로 취소했으니 중국 정부로서는 여간 황당한 일이 아니었다. 중국측은 “이제부터 한국 정치인은 장주석을 예방할 수 없다. 한국 정치인들은 제대로 약속을 지킨 적이 없었다. 날짜도 맘대로 바꾸고 온다고 했다가 당일에 오지 않는다고 알려오는 등 제멋대로다. 일본인들은 6개월 전에 결정한 약속도 그대로 지킨다”며 강력히 항의했다.
결국 권병현(權丙鉉) 주중대사가 나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사태를 수습했지만 그로 인한 파장은 적지 않았다. 조대표의 방중 취소는 국내의 정치적 사안을 국가간 약속보다 더 중요시한 우리 외교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2001년 6월에는 민주당의 김중권(金重權) 대표 일행이 중국을 방문했다. 2년 전의 조세형 대표 사건으로 김대표의 장주석 예방은 실현되기 쉽지 않았는데 우여곡절 끝에 홍순영 대사가 간신히 성사시켰다.
당시 김대표가 장주석을 만나야 한다고 내건 명분은 김대중 대통령의 친서 전달이었다. 그런데 막상 장주석을 만나러 간 김대표는 친서를 숙소에 놓고 오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친서는 나중에 별도로 전달했지만 상당한 창피를 당했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귀국한 김대표 일행은 장주석과의 면담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일행 중 그 누구도 장주석과 김대표의 대화를 기록하지 않았다. 장주석과 사진 찍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대화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국제전화로 주중 한국대사관 직원을 불러 대화내용을 물어보아야 했다. 국제전화는 100% 도청되는데….
김영삼(金泳三) 전(前) 대통령만큼 한국 정치인의 한계를 ‘학실’히 알려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6월6일부터 18일까지 하얼빈공대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일개 지방대학의 초청을 받아 방문하는 것은 중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하여튼 그는 중국에 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김 전 대통령 측에서 장쩌민 주석을 면담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마침 6월7일 인민외교학회의 초청을 받은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이 중국에 와, 8일 장주석을 만나기로 예정돼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무리한 요구를 받은 중국측은 고심 끝에 장주석과 노 전 대통령의 면담을 취소하는 방식으로 김 전대통령의 면담 요구를 거절했다. 장주석은 이때 지키지 못한 노 전 대통령과의 면담 약속을 2002년 11월20일 인민대회당에서 접견함으로써 지켰다.
지금도 필자는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왜 중국을 방문했는지 궁금하다. 대학의 초청을 받아 방문했으면 그에 맞게 행동하면 되는 것이지 왜 계획에도 없는 장주석 예방을 고집해 다른 사람의 일정까지 방해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당시는 남북정상회담을 목전에 두었던 시기였다. 때문에 주중 한국대사관은 장주석이 노 전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중국의 입장을 밝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이해 못할 행동으로 무산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