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중국, 일본과 러시아의 일부를 포함하는 ‘동아시아의 중심(core) 국가’들은 이러한 흐름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다른 지역 블록과 경쟁하는 동시에 동남아지역과 협력하는 경제·정치 공동체가 지역 국가들이 그릴 수 있는 미래의 비전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이상과 별개로 각국이 군사적 역할 강화와 경제력 향상,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를 추구하면서 곳곳에서 갈등을 빚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일본의 센카쿠열도(釣魚島) 분쟁,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 왜곡 등은 각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엿볼 수 있는 징후다. 이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간 한국 정부는 여러 가지 이론 틀을 제시했다.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라는 조어를 유포하면서 동북아 중심 국가를 지향했고, 김대중 정부는 북한문제와 연결하고 아세안과 협력할 것을 구체화하면서 동아시아의 허브로서 ‘한반도 중심론’을 내세웠다. 노무현 정부는 최근 ‘동북아 균형자론’을 주장하고 있다.
‘균형자’의 선례, 광개토대왕

중국 지린성 지안시의 광개토대왕릉. 2004년 중국정부가 대대적으로 벌인 유적정비사업으로 주변의 가옥 400여 채가 철거되고 장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국가의 발전전략, 특히 국제질서의 변화와 연관된 전략을 수립하려면 과거로부터의 연속성 및 다음 정권 혹은 다음 세대를 염두에 둔 연속성을 전제해야 한다. 당연히 가능한 여러 모델을 만들어 이를 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공론장을 통해 공유하고 각각의 효율성을 따져보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모델은 무엇인지, 실패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책이 가능한지 시뮬레이션을 거치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발전전략 틀을 검토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특히 노무현 정부가 주장하는 ‘동북아 균형자론’을 비판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이론적인 배경을 마련하는 작업으로, 필자는 서기 5세기경 고구려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맡은 역할을 염두에 둔 동아지중해(EastAsian·mediterranean sea)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적 관계를 다시 한번 성찰해보고 그 토대 위에서 고구려가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중핵 조정’ 역할을 되돌아봄으로써 우리가 ‘균형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간 수천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동아시아 각국의 세력 경쟁은 이 지역이 지중해적 형태와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다.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동아시아가 서구 중심의 세계화에 대응하며 독자적인 영향력을 형성하려면 먼저 이 ‘동아지중해 공동체’라는 인식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이 인식 틀을 따라가 보면, 약소국인 한국이 그 질서 속에서 단순한 종속변수가 되지 않으려면 최소한 중핵 조정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동아지중해 중핵 조정 역할’을 실현해 지역의 강국이 된 나라가 바로 고구려다.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한반도에 존재한 국가 가운데 가장 큰 영토와 충실한 정체성을 갖고 있던 성공한 나라다. 장기적으로 한국이 달성해야 할 목표들을 십수세기 전에 추진했고, 실천했으며, 또 실패한 경험도 간직하고 있다. 반 도사관(半島史觀)에 갇혀 외세 의존적인 경향이 심한 지금의 한반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주지하다시피 고구려 중흥기의 초석을 놓고 대들보를 세운 인물은 광개토대왕이고, 이를 계승해 완성한 인물이 장수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