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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의 눈으로 본 세종의 북방정책

자존심보다 실리를 좇고, 승리 후엔 방어를 도모하다

김종서의 눈으로 본 세종의 북방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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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의 눈으로 본 세종의 북방정책

조선 후기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여연(閭延) 부근.

이 가운데 오랑캐의 추장 이만주(李滿住)는 다시 강성해진 타타르부의 압력에 밀려 파저강(지금의 훈강) 근처까지 내려와 살게 됐다. 이 때문에 여연(閭延) 지역 주민과의 충돌이 잦아졌다. 중국 쪽으로 불쑥 솟아난 백두산 아래의 여연 지역은 오랑캐 접경지대로 우리 조선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태종께서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띠를 두르듯이 요새를 만들어 ‘울타리 국경’을 만드신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유사시에 지형상 좌우의 도움 외에는 배후의 지원을 받을 수 없어서 자칫 고립될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압록강 중상류의 이 지역은 토지가 척박해 농사를 짓기 힘들었다. 백성이 위험을 무릅쓰고 압록강 건너편의 땅을 일구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조정에서도 이를 묵인했다. 묵인할 뿐만 아니라 강 건너편 땅에서 거둔 곡식에 대해서는 조세의 절반을 감면하는(14/09/09) 등 ‘장려’하는 듯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1432년(재위 14년) 9월경 평안도 도절제사 문귀(文貴)는 월경(越境) 농사를 금지할 것을 요청했다. 여진족이 월경 주민을 노략해서 노비로 삼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15/04/02). 하지만 조정에서는 “백성의 생계” 때문에 금지할 수 없다는 대답을 보냈다(14/09/09). 이런 점에서 그해 겨울 오랑캐의 대대적인 약탈은 예정된 것이었다.

1432년 12월 초 이만주는 400여 기(騎)의 오랑캐를 이끌고 여연 지역에 침입해 쑥대밭을 만들었다. 아래쪽의 강계절제사 박초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추격해 붙들려가던 사람 26명과 마소 80여 마리를 도로 빼앗아왔다. 하지만 워낙 예상치 못한 기습인데다 그 규모도 커 우리 쪽 피해가 막심했다. 평안도 감사의 치보(馳報·급히 달려가서 알림)를 받은 상께서는 심히 노여워하셨다. 이 지역에 조심스럽게 형성된 균세(均勢)를 깨뜨릴 수 있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상대가 그동안 조선의 울타리 구실을 한다는 이유로 생필품을 공급받아왔던 여진족이라는 점에서 상의 배신감과 우려는 더욱 컸다.

즉시 비상회의가 소집됐다. “야인들이 이번에 침탈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탈출한 포로의 처분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 상의 판단이었다. 그동안 우리 경내에 들어온 탈출 포로가 중국인이면 중국으로 돌려보내고, 우리나라 사람이면 이내 본고장으로 보냈는데, 여진족이 이에 원한을 품고 변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14/12/09).



상께서는 먼저 중국 황제께 글을 올려 이 사건을 보고[奏文]할 것인지 신료들에게 물었다(의제1. ‘토벌’과 관련해 중국에 보고하는 문제). 이제 중요한 국사에 관해 신료들의 생각을 묻는 것은 주상의 두드러진 정치 방식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였다. “의심스럽고 어려운[疑難] 일이 있으면 아래로 원로대신과 식견 있는 사람에게 물어 그 물정(物情)이 귀착되는 데로”(14/08/21)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판단의 첫째 조건이라고 보셨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거의 모든 사안을 “의논해서 아뢰라”는 상의 정치 방식이 아랫사람에게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신하의 생각을 존중하는 주상의 의도야 고마운 일이지만, 적절하고 타당한 의견을 내놓기 위해서는 늘 맡은 직무를 연구하고 생각해 정통해 있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명나라에 보고한 다음에 토벌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영의정 황희가 반대하고 나섰다. “비록 우리 군사가 중국 땅까지 뒤쫓아 들어갈지라도 방어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진실로 사대하는 의리에 해로움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좌의정 맹사성은 “보고하는 것이 편하겠다”고 말했다(14/12/09). 의논이 길어지자 상께서는 다음날로 회의를 연기했다.

다음날 아침 상께서는 사정전에 납셔서 “어제의 미진했던 일을 의논해보라”고 말씀하셨다. 이 자리에서 맹사성은 “황제께 보고하면 야인들이 듣고 두려워 반드시 복종[畏服]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의정 권진도 이번 일이 중국인 포로를 중국으로 되돌려 보낸 일에서 발단된 만큼 “명나라에 보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허조와 최윤덕은 아예 보고하는 일이나 거병(擧兵)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중국에 보고해보았자 “금수와 다름없는 오랑캐들이 그 일을 두려워하지도 않을” 뿐더러, 국경을 넘어선 거병을 황제가 인준할지도 불확실하다는 것이었다(허조). 설사 황제의 인준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곳은 행병(行兵)하기 매우 어려운 지역”이며, 또 만일 인준을 얻지 못할 경우 저들이 이것을 듣고 더욱 독한 성미를 부릴 것이 뻔한 만큼 “이번 거사는 그치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최윤덕).

그러자 상께서는 “주문 올리는 일이 어렵다면, 오랑캐 경내로 사람을 보내 침입한 이유를 따져 묻는[致問] 것은 어떠냐”고 물으셨다. 이에 대해 권진 등은 지금 여연에서 사변의 진상을 조사하고 있는 홍사석이 돌아온 뒤 다시 의논하자고 말했다. 맹사성은 “사람을 보내 문책하다가 도리어 구류당할 수 있지 않으냐”면서 우선 국경을 튼튼히 하는 데 힘을 모으자고 주장했다. 이조판서 허조 또한 “잠자코 말하지 마옵시고 국경이나 스스로 견고히 하는 것이 좋겠다”며 맹사성의 ‘조용한 외교론’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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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hyunmp@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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