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대선구도가 복잡한 것은 야권 때문이다. 일찌감치 박 후보로 확정된 새누리당과 달리 야권은 아직 대표선수가 누군지조차 알 수 없다. 민주당 대선 후보가 문재인 의원이 될 가능성이 커진 것도 9월 들어서다. 선출된 민주당 후보와 안 원장이 언제 후보단일화를 할지도 아직 모른다. 비슷한 양상이었던 10년 전 대선 때는 11월 말에야 단일화가 성사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야권의 경우 안 원장 독주체제에서 문 후보의 급상승으로 양강체제로 재편됐다는 사실이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9월 11, 12일 전국 유권자 1500명에게 ‘야권후보 단일화 때 누구를 지지하겠느냐’고 물은 결과, 문 후보가 43.7%로 안 원장(33.9%)을 10%p정도 앞섰다. 야권 단일후보 선호도에서 문 후보가 앞선 것은 처음이다. 9월 8일 동아일보와 리서치앤리서치(R·R) 여론조사에선 안 원장 43.0%, 문 후보 40.4%였다. 3일 리얼미터 조사에선 안 원장(43.7%)이 문 후보(34.6%)를 멀찌감치 따돌렸다. 문 후보의 약진이 눈에 띈다.
문 후보 지지율이 왜 급상승하는 걸까. 가장 간단한 해석은 민주당 지지층이 큰 이변이 없는 한 대선 후보로 사실상 공식화된 문 후보로 결집하고 있다는 것. 선거 또는 경선이 막바지에 이르면 지지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1등 후보 쪽으로 쏠리는 ‘밴드왜건 효과’가 민주당에서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선 민주당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후보를 포함한 다자구도 지지율 조사를 아예 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들이 잊혀갈수록 문 후보 지지층은 두꺼워진다.
보수층 逆선택이 변수
보수층이 박 후보의 상대로 안 원장보다 문 후보를 만만하게 여기고 그를 치켜세우는 ‘역(逆)선택’을 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8일 동아일보 여론조사에서 새누리당 지지자의 46.0%가 문 후보, 33.6%가 안 원장을 ‘단일후보로 지지한다’고 응답한 반면 다자대결 지지율에선 안 원장이 여전히 문 후보를 앞서고 있는 점은 역선택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단일화는 어차피 안 원장과 문 후보의 양자대결로 치러지는데다, 일반 국민을 참여시키는 방식이라면 실제 단일화 과정에서도 역선택이 나타날 것이므로 문 후보로선 어쨌거나 호재다.
1년 동안 애매모호한 화법으로 국민을 감질나게 해온 안 원장에게 식상한 사람들이 문 후보로 옮아가는 현상도 엿보인다. 이른바 ‘안철수 피로감’이다. 7월 24일 리얼미터의 다자대결 조사에선 안 원장 28.2%, 문 후보 10.0%였으나 9월 11, 12일엔 안 원장 23.3%, 문 후보 20.3%로 격차가 크게 줄었다.
‘피로감’을 넘어 ‘안철수 실망감’도 있다고 본다. 정준길 전 새누리당 공보위원이 안 원장의 여자와 돈 문제를 거론하며 불출마를 협박했다는 논란이 한창이지만, 어쨌든 언론이 안 원장을 검증할수록 뭔가 나오는 건 사실이다. 철거 판자촌 재개발아파트 입주권(딱지) 매입, 2003년 1조 원대의 분식회계 혐의로 구속된 최태원 SK 회장에 대한 구명 탄원, 포스코 사외이사 관련 ‘거수기’ 및 스톡옵션 거액 차익 논란, 안철수연구소(현 안랩) 초창기 가족의 임원 재직, 1999년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발행해 1년 만에 최소한 300억여 원의 주식평가 이익 등 ‘얘깃거리’가 고구마줄기처럼 나온다. 일부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없는 것도 있지만 안 원장이 그동안 글과 말을 통해 워낙 ‘도덕군자’인 양 해왔기 때문에 ‘말 따로 행동 따로’란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안 원장의 지속적인 ‘민주당 김빼기 작전’이 역효과를 낳았다는 분석도 있다. 문 후보가 한창 치고 올라오던 9월 11일 안 원장이 ‘민주당 대선후보 선출 며칠 뒤’라는 시점을 못 박아 출마선언 예고편을 내는 등 문 후보가 호재를 만난 때마다 어김없이 안 원장의 김빼기가 시도됐다. 안 원장의 최대 강점은 ‘비정치인’ ‘순수’ ‘청렴’이란 이미지인데, 실제로 하는 걸 보니 ‘안철수도 여느 정치인 못지않게 정치적이구나’란 인식이 생길 수 있다.
단일화 무산 시 필패
안 원장과 문 후보의 단일화 게임은 초반부터 달아오를 가능성이 높다. 문 후보가 정당 대선 후보 선출 직후 지지율이 오르는 ‘컨벤션 효과’를 타고 날아오를지, 뒤따르는 안 원장의 출마선언이 이를 성공적으로 제압할지에 따라 초반 기선잡기 승부가 갈릴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단일화 방식과 시기다.
새누리당과 민주당 모두 당내 경선에서 ‘룰 전쟁’을 치렀다. 하물며 민주당 안과 밖 후보의 경선은 훨씬 많은 변수가 있는 만큼 룰 싸움은 더욱 치열할 것이다. 민주당은 ‘정치혁명’이라고 자랑하는 모바일투표를 도입하려 하겠지만 안 원장이 동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민주당 전당대회와 대선 후보 경선을 지켜본 안 원장으로선 모바일투표가 조직동원력에 좌우된다는 걸 꿰뚫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직력에서 안 원장은 민주당의 상대가 못 된다. 민주당이 요구하는 ‘안 원장의 입당’도 실현 가능성이 낮다. 안 원장이 지지를 받는 큰 이유가 ‘기존 정치세력과의 거리두기’와 ‘진영논리 탈피’인데, 입당하는 순간 정체성이 무너질 수 있다. 안 원장이 입당하면 어떤 식으로든 ‘민주당 당원’의 의사를 단일화에 반영하지 않을 명분이 없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민주당이 모바일투표와 입당을 고수하는 한 안 원장은 단일화에 응할 리 없다. 단일화를 안 하면 대선은 필패(必敗)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민주당으로선 두 가지를 관철하기 어려울 것이다.
두 사람의 담판으로 한쪽이 양보하는 ‘아름다운 그림’도 그려볼 수 있다. 둘 다 권력의지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다. 안 원장은 1년 전 박원순 후보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한 경험이 있다. 문 후보는 당내 경선 룰 싸움에서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결선투표를 전격 수용하는 결단을 보여준 바 있다.
어떤 방식으로 단일화할 것이냐는 룰의 문제는 단일화 시점에서의 지지율에 좌우된다. 두 사람의 지지율이 상당한 격차로 벌어지면 낮은 쪽이 경선 없이 양보할 수도 있다. 어느 한쪽이 양보하는 상황이라면, 그 기준은 문 후보 쪽이 더 까다로울 것이다. ‘개인 안철수’는 손만 털고 나오면 그만이지만 문 후보는 자칫 존립 위기를 감수해야 하는 제1야당 소속이기 때문이다. 지지율이 오차범위 내 접전이거나 이런저런 경선 방식에 따라 우열이 달라진다면 양측은 단일화 룰 전쟁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가령 단일화 경선에서 새누리당 지지자를 배제할지 여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