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곤 땅값 서울 뺨쳐… 1평 7000만원
- 미국-중국이 격돌하는 인도양의 전략적 요충
- ‘투자 1위’ 중국, ‘영향력 1위’ 일본, 한국은…
- 한류 덕분에 한국인 호감도 급상승
활기찬 휴양도시 삥우린 풍경.
“저는 한국인이에요. 태국과 말레이시아에서 10여 년간 사업을 했답니다. 이번에 미얀마에 가는 이유는 살 집을 구하기 위해서죠. 진작 구했어야 하는데 미적거리는 바람에 좋은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쉽네요. 요즘 미얀마 집값이 폭등했거든요. 미얀마는 저에게 기회의 땅이 될 거예요.”
‘롤렉스 청년’은 중국계 미얀마인이다.
“저는 미얀마 사람입니다. 그렇게 안 보인다고요? 정확히는 ‘버미스 차이니즈’, 즉 화교 집안이에요. 미얀마는 저의 사랑하는 조국이랍니다. 부모님은 양곤에서 보석 비즈니스를 하고 계셔요. 저는 화교 학교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대학을 나왔고 현재는 화장품 사업을 합니다. 미얀마의 한류 붐을 혹시 아시나요? 정말로 뜨겁습니다. 많은 여성이 한국에 가서 성형수술을 하고 싶어 해요. 놀랍다고요? 미얀마에도 부자는 정말 많아요.”
전기 없는 야생 도시
미얀마 양곤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삼성전자 휴대전화 광고.
1시간 50분 만에 비행기는 양곤 공항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비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우기(雨期)와 건기(乾期)가 명확하게 구분된다. 특히 6월부터 9월까지는 거의 매일 비가 내린다. 한국인 사업가는 이렇게 말했다.
“미얀마를 직접 보면 깜짝 놀랄 거예요. 치안이 훌륭하고 경제 내공도 탄탄합니다. 쌀과 보석을 국경무역을 통해 중국과 교환하는데,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답니다. 미얀마는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풍요로운 나라예요.”
양곤 국제공항의 입국 수속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비자를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쉽게 통과할 수 있다. 비자 발급 수수료는 미얀마 정부가 재정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미얀마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내국인보다 생활비가 최소 2배가량 더 든다. 외국인은 각종 입장료는 물론이고 버스요금, 심지어 거주용 전기료도 현지인보다 2배가량 더 내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기자는 한 교민의 집을 숙소로 이용할 예정이었는데 집주소와 연락처를 수첩에 적어놓지 않은 것. e메일에 기록이 남아 있는 터라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인터넷만 연결되면 해결되는 일인데, 국제공항인데도 와이파이(Wi-Fi)가 터지지 않았다.
미얀마 한인 사회는 사람 수가 1000명 남짓밖에 안 된다. 공중전화로 한국인을 찾아 기자가 신세를 지기로 한 교민의 집주소와 연락처를 수소문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공항에는 ‘놀랍게도’ 공중전화가 없었다. 사설 전화를 이용해야 하는데, 업체 직원이 모두 퇴근했다는 것이다. 공항 경비원이 기자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안.녕.하.세.요”라고 서툰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면서 휴대전화를 빌려줬다. ‘한류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군데 전화를 걸어봤지만 기자가 찾는 교민의 연락처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인터넷 카페에 가보라”고 조언했다. 공항 앞에 모여 있는 택시기사들은 시내까지 10달러를 받는다고 했다. 물가를 생각하면 엄청난 폭리다. 칠흑같이 어두워진 도심을 헤매다 찾아간 인터넷 카페에는 한국에서 10여 년 전에 쓰던 중고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인터넷에 접속하려는 순간 컴퓨터 전원이 갑자기 꺼졌다. 정전이었다. 그렇게 20여 분을 기다렸을까. 전기가 복구됐다. 이튿날 만난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고 덕담을 건넸다. 보통은 다음 날 아침까지 ‘먹통’이 된단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도착한 교민의 집도 컴컴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손전등에 의지해 샤워를 하는 기분이 무척이나 묘했다.
양곤의 황량한 풍경
“불과 수개월 전만 해도 도심까지 차로 15분이면 달려갔어요. 그런데 이제는 1시간이 걸리네요. 도로 공사가 연거푸 이뤄지는 데다 자동차 수가 폭증해서 그렇습니다.” 김균배(56) 미얀마중앙사회교육원 원장은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2011년 미얀마가 국제사회에 빗장을 열면서 중국, 일본에서 들여온 중고차가 순식간에 거리를 가득 메웠다. 15년 넘게 미얀마에서 생활한 김 원장도 일제 자동차 한 대를 구입했다. 자동차, 휴대전화를 비롯한 소비재 수요가 급증세라고 한다.
명문대학인 양곤대 주변 풍경은 당혹스러웠다. 1930~50년대에 지은 빌딩이 완공 이후 단 한 번의 페인트칠도 안 한 것처럼 낡은 외관을 한 채 서 있었다. 비가 그친 도로는 울퉁불퉁했다. 도처에 웅덩이가 파여 있었다. 길에는 시커먼 매연을 내뿜는 구식 자동차가 내달렸다. 자동차 운전자는 대부분 롱지(Longyi)라는 이름의 전통 치마를 입은 사내들이었다.
현대식 문화도 곳곳에서 엿보였다. 늘씬한 서구 미녀가 모델로 등장한 화장품 광고판과 삼성 갤럭시S 광고판이 이곳에도 세계화의 격랑이 몰아치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노점 가판대 위로 줄지어 선 30여 종의 미얀마어 신문이 이방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올해 미얀마에서 일어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언론 시장’의 활성화라고 한다. 개방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김 원장이 한 사내의 사진을 가리켰다.
“1960년대의 미얀마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국제사회에서 위상이 높았어요. 저기 보세요. 식당에 걸려 있는 유엔 사무총장 우 탄트(U Thant)의 사진 보이죠?”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미얀마는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이면서 전 세계 티크목재의 75%를 생산하는 나라였다. 일본을 제외하면 아시아 최대 부국이었다. 제3대 유엔 사무총장(1961~ 1971년) 우 탄트를 배출하기도 했다.
1962년 우 네 윈(U Ne Win)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곤 50년 동안 미얀마 식 사회주의와 군부독재가 이어졌다. 서방 세계는 금수조치를 단행했다. 미얀마의 지난해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1000달러 수준이다. 김 원장은 “거대한 변화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인구가 70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국토 크기는 한반도의 3.5배고요. 게다가 지하자원이 풍부합니다. 인도와 중국을 잇는 환상적인 위치에 터를 잡았고요. 국제사회가 미얀마의 개혁·개방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분명 크게 바뀔 거예요.”
미얀마 투자의 명암
“미얀마는 현재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국가예요. 그런데 정부에 돈이 없어요. 또한 미얀마 사람들은 외국인의 미얀마 시장 진출에 대해 원초적 두려움을 갖고 있죠. 하지만 미얀마가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졌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김근향 코트라 미얀마지사 부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 각국에서 미얀마 투자 붐이 일고 있다. 미얀마는 지난해 3월 30일 떼인 세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개방의 전주곡을 울렸다. 곧이어 4월 1일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야당인 민족민주동맹(NDL)이 압승하면서 개방의 봇물을 터뜨렸다.
2005년 미얀마 군정이 수도를 양곤에서 네피도로 이전한다고 발표했을 때 서방 세계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폐쇄적이면서 친중(親中)적인 군사정권을 연장하고자 꼼수를 부린다는 시각도 나왔으나 수도 이전은 긍정적 효과가 작지 않았다. 국내 정치의 중심이 네피도로 이전하면서 양곤은 치열한 정치 갈등에서 벗어나 경제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미얀마에서 중국 독주를 우려한 미국이 지난해 금수조치 완화를 시사하면서 양곤을 중심으로 한 해안지역의 개방 속도가 빨라졌다. 한국 기업들도 미얀마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김 부관장의 설명이다.
“단적으로 올해 초 대한민국 30대 대기업의 거의 모든 해외사업 담당자가 미얀마를 다녀갔습니다. L그룹은 총수까지 미얀마를 찾았고요. 9월에는 마침내 인천-양곤 직항로가 열립니다.”
대한항공이 9월 13일 인천~미얀마 직항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관광객, 비즈니스맨의 미얀마 방문이 폭발적으로 늘 것으로 보인다.
미얀마는 개혁·개방을 검토하는 북한을 제외하면 가장 마지막으로 열린 새로운 시장이다. 양곤 시내 호텔만 둘러봐도 미얀마 투자 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올해 초 100달러가량이던 최고급 호텔의 하루 숙박료는 8개월 만에 3배로 뛰었다.
어느 고급 호텔에서나 일본인이 눈에 띄었다. 미얀마는 중국 윈난(雲南)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10년 넘게 중국이 미얀마 투자국 1위를 지키고 있다. 중국은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통로라는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미얀마를 ‘끔찍하게 아껴왔다’. 미얀마와 북한은 중국의 세계 전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충지다. 하지만 양곤에서만큼은 일본이 빠른 속도로 중국을 추격하고 있다. 김 부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인의 관심이 뜨겁습니다. 세인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가 올해 4월 정상회담을 한 직후부터 일본인이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특히 1968~1987년 일본이 미얀마에 제공한 차관 중 3000억 엔(약 4조2000억 원)에 대해 부채를 탕감하고, 일본이 차관 공여를 재개하기로 한 것이 결정적이었어요.”
일본의 미얀마에 대한 관심은 전 방위적이다.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는 물론이고 지하자원, 금융업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양곤 곳곳에 일본 은행들의 지점이 설치된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일본은 1942~1945년 미얀마를 점령해 지배한 역사를 갖고 있기도 하다.
영국, 태국, 홍콩도 주목할 만한 미얀마 투자국이다. 한국 기업의 미얀마에 대한 관심은 이전엔 봉제·의류산업 중심이었다. 미얀마는 1인당 인건비가 아직 월 80달러 수준에 그쳐 200~300달러에 달하는 다른 아시아 저개발국에 비해 제조업 경쟁력이 높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직접 투자는 ‘가스’를 제외하면 미미한 실정이다. 2012년 상반기 미얀마에 투자한 29억5400만 달러 중 24억 달러가량이 대우인터내셔널의 미얀마 가스전 투자다.(표 참조)
미얀마 투자는 아직은 리스크가 상당하다. 전기, 도로, 항만 등 사회간접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전력난이 심해 봉제, 의류 등 수공업을 제외하면 제조업 공장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어렵다. 통계도 엉망이다. 공개된 자료는 최소 2년 전 것이다. 예컨대 공식 인구로 알려진 6000만 명은 10년 전 통계다. 이밖에도 외국인에게 불리한 투자 법규나 노동법 상 걸림돌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김 부관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미얀마에서 사업을 하려면 돈을 싸들고 와야 했어요. 스스로 길도 닦고 전기도 끌어와야 했고요. 그러니 외국인 투자가 늘어날 리 없었죠. 하지만 가까운 장래에 외국자본의 투자가 용이해지는 쪽으로 환경이 바뀔 것으로 예상됩니다.”
“양곤의 땅값이 6개월 만에 4배로 뛰었습니다. 코트라 사무실도 변두리로 이사 가야 하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예요.”
김 부관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코트라 무역관은 양곤에서 가장 번화한 보족(Bojoke) 아웅산시장 사거리의 ‘사쿠라 빌딩’에 자리 잡고 있다. 양곤 제1의 비즈니스 빌딩이다. 김 부관장은 급등한 부동산 가격에 혀를 내둘렀다. 놀라지 마시라! 양곤시내 중심가 땅값은 3.3㎡당 7000만 원 안팎이다. 국민소득을 감안하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액수다. 물가 역시 매년 10% 넘게 오르고 있다.
땅값이 왜 비싸진 것일까?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미국, 유럽의 핫머니가 대거 유입됐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부 장관의 역사적인 미얀마 방문 이후 경제 제재조치 완화 기대가 높아지면서 투기자금이 미얀마로 들어오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얀마 부유층의 자전(自轉)거래 탓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토지 소유자들이 개혁·개방 분위기를 타고 호가를 대폭 올렸을 뿐 거래를 동반하지 않은 지가 상승이라는 것이다.
“현금을 얼마나 들고 왔나요? 며칠이나 머물 건가요?”
미얀마에서 15년 넘게 건설업에 종사한 K씨가 기자에게 대뜸 이렇게 질문했다.
남쪽이 아닌 북쪽을 보라
미얀마에는 한창 건설 붐이 일고 있다. 어디서나 건설 현장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현금을 인출할 곳이 없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미얀마에서는 은행에서 이자를 지급하는 게 아니라 보관료를 받습니다. 금융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아요. 한국계 금융사가 재빨리 진출해 시장을 선점해야 해요.”
K씨는 북쪽 지방을 가보라고 권했다.
“양곤에 있어봤자 별로 볼 게 없어요. 북쪽으로 가보십시오. 미얀마 경제의 활력을 느끼려면 만달레이(Mandalay)를 가봐야 합니다.”
만달레이는 미얀마의 고대 수도다. 중국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양곤에서 자동차로 10시간 거리다. 버스요금은 2만2000짯(KYAT·약 4만 원). 도로 상태가 부실해 버스 좌석이 안마의자처럼 흔들렸다. 오후 7시 양곤을 출발한 버스는 이튿날 오전 5시 만달레이 동북쪽 도시 삥우린(Pyin Oo Lwin)에 도착했다.
“어디서 왔어요? 영어 할 줄 알아요?”
버스 옆 좌석에 앉은 한 미얀마인이 말을 걸었다. 이 미얀마인도 화교 피가 섞여 있었다. 타이완에서 중국어를 배웠다고 했다. 미얀마의 국제화는 화교계가 담당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는 보석 상인이었다. 미얀마는 소문난 옥(玉), 루비, 사파이어 산지다.
“요즘에도 옥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나요? 얼마 정도 해요?”라고 물었다.
“옥은 중국에서 싹쓸이해가죠. 등급에 따라 천차만별이에요. 얼마 전 옥 22kg이 30억 원 정도에 거래가 이뤄졌어요.”
미얀마의 대중교통.
“확실한 것은 중국 자본이 엄청난 속도로 미얀마로 밀려들어오고 있다는 거예요. 국경도시 무세(Muse)에 가보면 변화하는 미얀마를 더욱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미얀마는 남부 해안보다 중국 쪽 산악지대가 더욱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방영이 끝난 후 1~2년 안에 미얀마 TV에서 한국 드라마를 방송해요. 공중파 3사에서 하루에 3, 4편씩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어요. 요즘엔 ‘뿌리 깊은 나무’가 방영 중이랍니다.”
한 현지 교민의 말이다. 미얀마 젊은이들에게 한국은 친숙한 나라다. 거리에서 한국 가수나 배우가 모델로 등장한 광고판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미얀마의 3대 공중파 방송인 MRTV, MYD, MRTV4는 경쟁적으로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다.
미얀마는 오랫동안 외부로 통하는 문을 잠근 국가이기에 서방 세계의 문화 콘텐츠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한류 드라마에는 폭력과 섹스 장면이 상대적으로 적은 데다 미얀마 문화와 동질성이 적지 않다. 한류 덕분에 미얀마는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 한국산 문화 콘텐츠가 CD로 제작돼 유료로 팔리는데, ‘자막본’이라고 불리는 이 CD는 공중파 방송이 닿지 않는 미얀마 구석구석으로 한류를 전파하고 있다.
중국으로 가는 파이프라인
한류 덕분에 한국어학과의 인기가 높다. 한국산 소비재도 덩달아 잘 팔린다. 한국의 유통기업들도 발 빠르게 미얀마 진출을 모색 중이다. 한류는 한국이 ‘투자 1위’ 중국, ‘영향력 1위’일본과 미얀마에서 벌이는‘경제 삼국지’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다.
삥우린은 영국 식민지 시절 만달레이의 더위를 피해 고원(高原)에 건설한 휴양도시다. 해발고도 1100m 넘는 곳에 위치해 있다. 미얀마 군부독재의 ‘발전소’로 불리는 육·해·공군사관학교가 이곳에 터를 잡았다.
삥우린에는 영국식 건축물과 저택이 가득했다.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이곳 역시 부동산값이 매우 비싸다. 웬만한 주택은 값이 100만 달러에 달한다. 삥우린에서 만달레이까지는 택시로 1시간가량 걸린다.
만달레이-삥우린-라쇼(Lashio)-무세는 대(對)중국 교역로다. 이 길을 따라 중동, 아프리카, 인도양의 가스와 석유가 파이프라인을 타고 중국 윈난성의 성도 쿤밍(昆明)으로 공급된다. 지금도 새로운 파이프라인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이선진 전 인도네시아 대사의 설명이다.
“미얀마산 가스를 중국으로 공급하는 파이프라인이 완공되면 중국은 시베리아 파이프라인, 중앙아시아 파이프라인에 이어 제3의 자원 수송선을 확보하게 됩니다. 또한 중국은 미얀마를 통해 인도양으로 나가는 지름길을 확보하려고 해요.”
중국에서 건너온 화물차들이 중국산 물건을 가득 싣고 도로를 내달렸다. 미얀마를 살찌운다는 중국-미얀마 접경의 활기는 생각보다 대단했다.
만달레이는 인도, 중국, 태국 문명이 교차하는 곳으로 3국의 문화가 어우러져 있다. 물론 경제권을 쥔 이들은 화교다. 만달레이 중심가의 쇼핑센터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도심에는 거대한 공사장을 연상케 할 만큼 신축 중인 건물이 많다. 하지만 이곳도 전기가 부족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중국이 BOT(Built Operate transfer·30년 동안 중국이 사용하고 미얀마에 귀속) 방식으로 건설한 메콩강 유역의 수력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는 중국으로만 공급되고 있었다.
빠르고 강하게 변하는 미얀마
“올여름에는 만달레이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어요. 우리에게도 전기를 달라는 거였죠. 밤에 에어컨을 켜면 잠시 뒤 ‘퍽’하고 꺼지기 일쑤였다니까요.”
만달레이에서 한국국제협력단(KOICA) 단원인 우연주(29) 박종화 씨(40)를 만났다. 이들은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사업가, 선교사 몇몇을 제외하면 미얀마 북부에서 한국인을 찾기 어렵다.
미얀마에서 생활한 지 1년 반째인 우 단원은 아동복지를 전공했다. 미얀마의 아동 노동은 국제사회가 문제 삼는 핫이슈다. 아이들 사이에서 미얀마어를 구사하는 한국인 봉사단원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박 단원은 굴지의 건설사에서 현장 소장으로 일하다 미얀마에 왔다.
“만달레이 공대에서 교수와 학생에게 토목과 건축에 대해 강의하고 있습니다. 잠재력이 큰 나라임을 실감하고 있어요.”
두 단원처럼 현지에서 경험을 쌓은 인재들은 미얀마 진출 과정에서 한국의 자산이 될 것이다. 이튿날 새벽, 만달레이 공항으로 출발하면서 단원들에게 ‘미얀마(Myanmar)’라는 말의 뜻을 물었지만 누구도 답하지 못했다.
만달레이 공항은 노란머리 외국인들로 북적였다.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우연주 단원이었다.
“미얀마는 ‘빠르고 강하다’란 의미랍니다. 사전에 그렇게 설명되어 있네요.”
우 단원이 보낸 문자 메시지를 읽으면서 김상길 미얀마중앙사회교육원 총무의 얘기가 떠올랐다.
“미얀마는 영국의 지배를 70년이나 받았습니다. 그것도 가장 싫어하는 인도인에 의한 간접통치였어요. 미얀마인은 어느 민족보다도 자존심이 강합니다. 영국과 인도에 대한 반감이 미얀마식 사회주의를 만들어낸 겁니다. 오랫동안 국가의 문을 걸어 잠근 것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해요.”
미얀마는 영국, 인도의 식민지배라는 트라우마를 조금씩 극복해나가고 있다. 미얀마는 과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와 높은 문화 수준을 자랑하던 곳이다. 지정학적으로 미국-중국이 격돌하는 전략적 요충이기도 하다. 미얀마의 저력은 언제쯤 터져나올 것인가. 미얀마는 ‘빠르고’ ‘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