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을 비판하고 부정하고 초월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려는 예술가의 시선으로 서울을 바라본다.
- 서울은 활기 있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곳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가난한 도시다.
파리 6구에 있는 한 카페의 오후 풍경. 작가 필립 솔레르스가 가끔씩 이 카페에 나타난다.
2002년 파리로 떠났다 서울로 돌아온 지 10개월을 맞이했다. 처음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더니 이제 점점 모든 것이 당연하게 보인다. 큰일이다. 이러다가는 이방의 도시에 살다 돌아온 사람의 시선으로 서울의 낯선 장면 101개를 제시하겠다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을 것 같은 걱정이 앞선다.
서울 풍경을 계속 새로운 눈으로 보기 위해서 나는 예술가의 시선을 가지려고 애쓴다. 시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무용이든, 예술은 지금 여기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예술작품을 만들기 위해 예술가는 현실에 용해되어 그 일부가 되기를 기꺼이 거부한다. 예술가의 정신, 시인의 혼은 현실을 비판하고 부정하고 초월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려는 지향성이다.
1990년대 초에 나온 하일지의 소설 ‘경마장 가는 길’에는 말(馬)은 한 번도 나오지 않고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R이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서울 생활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생활을 하다가 이렇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다.
“나는 이 서울이야말로 송두리째 하나의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흡사 내가 허구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야말로 남과 다르게 현실을 비판적으로 관찰하며 당연한 것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정신 상태다. 작가들만이 아니라 화가들도 현실을 다르게 표현하기 위해 상투적인 시각을 벗어나려고 애쓴다. 파리의 죄드폼(Jeu de Pomme),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추상화가 이우환이 1년에 6개월씩 도쿄와 파리를 오가는 생활을 하는 이유도 ‘당연의 세계’에 빠지지 않고 현실과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풍경 #46 사라진 옛 추억의 그림자
정중동(靜中動)이라는 말이 있다. 대세가 조용한 가운데 어떤 움직임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도시 생활에서 정중동의 상태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동중정(動中靜)의 상태,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한가한 구석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파리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도심은 복잡하지만 센 강 양안을 이어주는 생루이섬의 강변이나 시테 섬의 도핀 광장에 들어서면 고요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서울 도심에선 그런 구석을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은 그야말로 동중동(動中動)의 상태에 있다.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또 다른 움직임이 있다.
서울을 ‘괴물도시’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서울이 너무 빨리 변하기 때문이다. 괴물은 자주 그 모습을 바꾸어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린다. 빠른 변화는 마치 기억과 추억을 거대한 쇠뭉치로 깨부수고 그 조각들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듯하다.
서울에 내가 즐겨 다니던 카페나 식당이 몇 곳 있었다. 명동과 종로 2가에 있던 ‘한일관’은 내가 파리에 살다가도 서울에 오면 꼭 들르는 식당이었다. 그런데 이 식당이 어느새 사라졌다. 얼마 전 강남에 새로 생긴 한일관에 가서 갈비탕을 먹었다. 돌로 지은 새 건물에서 옛 분위기를 찾아보기는 어려웠지만 주인이 종로 한일관의 옛 주인이어서 음식 맛을 그런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장사진을 이루는 삼청동 수제비집이나 시청 뒤의 북어국 집은 옛날 그대로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아주 예외에 속한다.
서울을 떠나 외국에 몇 년 살다 돌아오면 예전에 다니던 식당이나 찻집은 사라지고 다른 업소가 들어와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같은 찻집이나 식당이라도 주인이 달라져있어 전체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지 못한다. 이대 앞의 ‘가미’, 혜화동의 ‘마전터’ 등의 식당은 아직 남아 있지만 주인이 바뀌어 음식의 맛도 예전과 같지 않고 장소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연대 앞의 ‘독수리다방’과 ‘백양다방’, 동숭동 대학로의 ‘오감도’나 ‘마로니에’같은 경양식집, 이대 앞의 ‘미뇽다방’ ‘파리다방’, ‘아메리카’와 ‘멕시코’ 등의 경양식 집들은 지금 다 사라지고 이름도 없다. 대학로의 ‘학림다방’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파리에는 내가 1980년대 유학생 시절에 다니던 카페들이 지금도 옛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어떤 곳은 실내장식을 다소 바꾸었지만 여전히 낯익은 구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장소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분위기, 다시 말해 그 장소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다. 뤽상부르 공원 옆의 ‘로스탕’ 카페, 생쉴피스 광장 앞의 ‘카페드라메리’, 생루이 섬의 ‘에스칼’, 뤼데제콜의 ‘르 소르봉’, 소르본 광장 앞의 ‘에크리트와르’ 등의 카페는 같은 자리에서 옛 분위기를 꿋꿋이 지키고 있다. 그래서 그곳에 가면 내가 여전히 나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서울이 아니라 파리에서 내가 나라는 느낌을 받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풍경 #47 육교를 건너며
요즘 서울에선 육교가 대부분 사라지고 있지만 새로 생기는 곳도 있다. 강남 고속터미널 남쪽에 있는 메리어트호텔과 가톨릭서울성모병원 사이에 들어선 푸른색 아크릴 장식의 아름다운 육교가 대표적이다. 다리 이름은 ‘센트럴 시티 브리지’다. 낙엽이 지던 지난해 늦은 가을의 어느 날 나는 메리어트호텔 쪽에서 성모병원 쪽으로 육교를 건너고 있었다. 어느 할머니 한 분이 힘겹게 육교 계단을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 뒤를 따라오던 젊은 여성이 “할머니 좀 도와드릴까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니야, 괜찮아… 고마워!” 하면서 지지대를 잡고 열심히 계단을 걸어올라갔다.
그날 내가 본 그 젊은 여성은 어린 시절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는지도 모른다. 어떤 동기에서건 잘 모르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민 그 젊은 여성의 마음이 전달돼 나는 일순간 흐뭇함을 느꼈다.
파리에서는 그런 광경을 볼 수 없다. 자기 일로 바쁜 파리 젊은이들의 눈에는 힘겹게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노인들도 독립적이어서 젊은이들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노인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끝까지 독립된 개인의 자리를 지키려고 한다. 그들은 남의 도움을 받는 상태를 수치로 여긴다. 그걸 모르는 어느 한국 유학생이 지하철 계단에서 좋은 마음으로 프랑스 할머니의 무거운 여행 가방을 들어주려고 했더니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도둑놈 취급을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풍경 # 48 의자 위의 가부좌
서울에 와서 카페에 가보면 탁자 위에 책을 펴놓고 공부하는 사람이 많다. 카페를 사무실처럼 쓰는 사람들을 카페와 오피스라는 말을 합쳐 ‘카피스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카피스족 가운데 신발을 벗고 의자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여성들을 흔히 보게 된다.
옛날 한식집에서 좌식 생활을 할 때는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아파트가 주요 주거 형태가 된 시대에 태어난 젊은 여성들이 의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은 내 눈에 매우 생소해보였다.
일차적으로는 남녀평등을 내세운 여성운동의 영향으로 젊은 세대 여성들은 여자로서의 조신한 몸가짐을 해야 한다는 전통적 굴레에서 벗어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의자 위에서 방바닥에 앉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그런 자세로 앉아 있는 여성들은 대체로 그 장소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다. 그런 자세가 편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좌식생활을 해오면서 형성된 습관이 요즘 세대 여성들에게까지 전달되었단 말인가? 그런 자세가 DNA 속에 암호로 들어 있다는 말인가?
가부좌만이 아니다. 서울에서는 여성들이 식당이나 카페에서 하이힐을 벗고 구두 위에 발을 걸치고 있는 모습도 가끔씩 눈에 들어온다. 고생한 발에 잠시 휴식을 주자는 배려인 것 같다. 그런데 파리에서 살다온 나에게 그 풍경은 매우 이채롭고 한국적이다. 파리 사람들은 결코 공적 공간에서 신발을 벗지 않는다. 누구라도 공공장소에서 신발을 벗고 있다면 무례한 야만인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 여름 나는 신발을 벗는 것보다 더한 무례도 여러 차례 보았다.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도서관 로비에서 아예 신발을 벗은 채 주위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편하게 드러누워 있는 사람들의 풍경을 보게 된 것이다. 냉방이 된 도서관 로비에서 낮잠을 즐기는 아저씨도 있고 함께 누워 있는 젊은 남녀도 있었다.
나라마다, 세대마다 몸가짐이 다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공적 공간과 자기만의 사적 공간에서의 몸가짐은 구별돼야 한다. 예절이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다. 남의 시선이나 불편함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 좋을 대로 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두고 ‘개념이 없다’는 표현을 쓰는데 그때 ‘개념’이라는 말은 공적 장소에서 타인을 의식하고 배려하는 최소한의 ‘예의’인 듯하다. 옛날에는 ‘개념’이라는 말 대신 ‘공중도덕’이라는 말이 쓰였는데 그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풍경 # 49 횡단보도 신호등 앞에서
서울과 파리의 횡단보도 앞 풍경에는 차이가 있다. 파리의 보행자들은 빨간불일 때도 차가 없으면 그냥 길을 건넌다. 경찰이 바라보고 있어도 버젓이 길을 건넌다. 경찰도 아무 말 안 한다. 자동차 운전자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고 횡단보도 앞에서는 속도를 줄인다.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는 셈이다. 1980년대 초 유학생 시절 그런 모습을 보면서 혼돈감에 빠지곤 했다. 선진국 사람들은 교통질서를 잘 지킨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선진국이라고 생각되는 프랑스 파리 사람들이 교통신호를 안 지키는 게 너무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지도교수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게 되었다. 빨간불이었다. 그런데 세계적인 학자가 무턱대고 길을 건너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도 그의 뒤를 따랐다. 저쪽에서 트럭 한 대가 조금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걸 본 지도교수는 “멈춰! XX야!(Arrete! Merde!)”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는 것이 아닌가? 교수의 머릿속에는 빨간불 파란불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고 자동차가 나중이라는 생각이 박혀 있는 듯했다.
서울 도심의 쌈지공원 점심시간 풍경.
서울 사람들은 신호등을 철저하게 잘 따른다. 차가 없어도 빨간불이면 침착하게 기다린다. 동네 2차선 도로의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인데 차가 없었다. 나는 파리에서의 습관대로 그냥 길을 건넜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다들 나를 외계인 쳐다보듯 했다. 파리는 사철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빈다. 그 가운데 횡단보도 신호등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이다. 내가 어린 시절 “선진국 사람들은 교통신호를 잘 지킨다”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선진국은 바로 일본이었던 것 같다. 도쿄에 가보면 일본사람들은 정말 교통질서를 잘 지킨다.
그런데 중국 관광객들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파리사람들 뺨치게 교통신호를 안 지켰다. 아무 때나 막무가내로 길을 건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2008년 올림픽이 끝나고 난 후 파리의 중국 관광객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옷차림이나 행색만 달라진 게 아니라 교통신호도 꼬박꼬박 잘 지키게 된 것이다.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해 중국에서도 “선진국이 되려면 공중도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캠페인이 요란하게 진행되었던 모양이다. 이제 파리에서 무단횡단, 가래침 뱉기, 쓰레기 버리기, 노상방뇨 등 공중도덕을 위반하는 중국인은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한중일 세 나라는 ‘선진국’이 되었다. 그러나 파리지앵은 여전히 빨간불에도 길을 건너고 아무 데나 담배꽁초를 버리고 음주운전을 하고 불법주차를 한다. 프랑스는 그런 점에서 선진국이 아닌지 몰라도 그런 작은 위반을 벌금으로 처벌하지 않는 나라임은 분명하다. 국가의 강제력을 최소화하고 시민의 권리를 최대화하려는 프랑스 혁명 이후 사회 운영의 법칙이 아직도 건재하다.
풍경 #50 샴푸와 첫사랑
내가 ‘파리의 밤 생활’을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밤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 화려한 네온사인 간판을 단 유흥업소들이 밀집한 ‘피갈(Pigalle)’이라는 동네를 제외한다면 파리의 밤은 무척 고요한 편이다. 서울의 밤이 파리의 밤보다 몇 십 배 화려하다. 서울에선 어둠이 내리면 건물 외벽을 화려한 조명 장치로 장식하는 건물이 늘어나고 있다. 압구정동의 어느 백화점 건물은 밤이 되면 건물 자체가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반짝인다. 서울의 밤은 세계 어느 대도시의 밤 못지않게 밝고 화려하다. 대로변 건물 벽이나 옥상에 설치된 커다란 전광판들이야말로 서울의 밤을 불야성으로 만드는 조명 장치다. 전광판 위를 흐르는 화려한 이미지와 문장들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보다 더 빠르게 바뀌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전광판과 더불어 네온사인 간판도 서울의 밤을 들뜨게 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서로 보색을 이루는 붉은색과 초록색 글자들이 반짝이고 깜빡이며 운전자나 보행자의 눈길을 빼앗는다.
서울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밤늦게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택시가 한남대교를 넘자 어느 나이트클럽의 네온사인 간판이 눈앞에 명멸했다.
‘첫사랑.’
핑크빛 네온사인이 반짝였다. 그때 나는 내가 여전히 한글공동체에 속하는 사람임을 직감했다. 나이트클럽의 이름으로 ‘첫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것 같았다. 요즈음은 영어를 쓴 간판도 많이 생기고 있지만 만약에 ‘첫사랑’ 대신 ‘First Love’라고 써 있었다면 간판이 갖는 흡인력은 한참 줄어들었을 것이다. 나이트클럽 안에서는 선남선녀들이 휘황찬란한 불빛 아래서 서로 몸을 맞대고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첫사랑의 아련한 기억을 되새기면서….
택시는 고속터미널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나이트클럽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샴푸.’
이번에는 네온사인이 아니라 전광판 위에서 ‘샴푸’라는 글씨가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전광판을 보자 옛날에 보았던 영화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안성기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그 영화에서 칠수와 만수라는 이름의 두 젊은 노동자가 전광판을 설치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첫사랑’에 뒤이어 나온 ‘샴푸’라는 나이트클럽의 이름은 신선함, 개운함, 깨끗함, 청결함, 향기, 설렘이라는 느낌을 환기시킨다. 만약에 한글전용론자의 주장에 따라 나이트클럽의 간판에 ‘샴푸’라는 말 대신 ‘물비누’라는 말을 썼다면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훨씬 약해졌을 것이다.
이제 서양에서 물 건너온 제품과 그것을 일컫는 단어들은 우리 생활 속에 아주 깊이 들어와 있다. 샴푸라는 영어는 이제 우리말처럼 되어버렸다. 아무튼 서울의 밤이 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 그 어느 대도시보다도 강렬한 밤의 분위기를 연출한다면 그건 빠르게 움직이는 전광판의 이미지들과 네온사인 글자들의 끊임없는 명멸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게 내 생각이다.
풍경 # 51 숲속의 결혼중매
가을이 왔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시원한 바람이 반갑다. 서초구 서래마을에는 프랑스 사람들이 모여살고 프랑스 학교도 있다. 서초구는 파리시와 자매결연해 매년 문화행사를 벌이기도 한다. 국립중앙도서관 위에 새로 조성한 공원에 ‘몽마르트 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오후 6시 도서관 열람실을 나와 이 공원에 올라가면 프랑스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간간이 프랑스어로 말하는 소리도 들린다. 나는 이 공원을 한 바퀴 돈 다음 서초대로 위에 설치된 ‘누에다리’를 건넌다. 해가 지면 이 다리에도 화려한 조명이 들어온다. 다리를 건너면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서리풀근린공원’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 산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간다. 요즈음은 가을 풀벌레 소리가 한창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산길을 걸으며 풀벌레 소리를 들을 수 있음은 나에게 커다란 위안이자 기쁨이다.
그런데 이게 또 웬 일인가? 어느 날 저녁 산길을 걷는데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커다란 현수막이 걸렸다. 고요한 산길의 분위기를 깨는 그 플래카드는 어느 결혼중개회사의 광고였다. ‘빠른 성사! 중매 잘한다! 성사 잘한다! 소문!’ 현수막 위에는 초혼과 재혼으로 구별된 남녀의 직업과 나이가 열거되어 있다. “의사, 변호사, 약사, 한의사, 남자 31~45세, 여자 27~42세….” 이 중매 회사의 사장은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공공기관에 다년간 재직했으며 KBS ‘아침마당’생방송에도 출연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시내버스 옆구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고, 인터넷 사이트들에서도 느닷없이 출몰하는 결혼중개회사 광고를 숲 속에서 맞닥뜨리다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 남녀가 다양한 기회에 다양한 방법으로 자유롭게 만나 교제할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아졌고, 알게 모르게 조용한 성(性)해방이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자유로운 연애가 보장된 시대에 결혼중개업이 성행하고 있음은 언뜻 모순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면 결혼중개업이 성행하는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연애는 부담 없는 상대를 만나 ‘쿨(cool)’하게 즐기고 결혼은 안전하고 미래가 보장되는 배우자를 찾겠다는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는 듯하다. 프랑스의 젊은 남녀는 자유롭게 만나 자유롭게 즐긴다. 그리고 마음에 맞으면 쉽게 동거에 들어간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낭만적 사랑의 각본이 작동한다. 처음 만났을 때 ‘쿠 드 푸드르(Coup de foudre·천둥번개 혹은 첫눈에 반함을 뜻함)’ 현상이 없는 남녀간의 결합은 생각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 중매회사가 매긴 점수에 따라 배우자를 찾아 결혼하는 것은 일생일대의 수치이며 모욕이다.
풍경 # 52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서울에서는 운동장이 없는 학교를 상상할 수 없다. 학교 대문을 들어서면 일단 커다란 운동장이 펼쳐진다. 그러나 파리의 학교에는 운동장이 없다. 수업 시간 사이나 방과 후에 아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작은 마당이 있을 뿐이다. 물론 그곳에서 간단한 놀이를 하기도 한다. 파리의 초·중·고교 학생들은 체육시간이면 학교 부근에 있는 공용 운동장을 사용한다. 군대 연병장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운동장을 갖춘 학교의 풍경은 일제강점기의 산물이다. 학교 운동장은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려는 동네 사람들에게 개방되기도 한다. 어쩌다가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가보면 오래전 어린 시절의 동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운동장 한구석에는 예전처럼 철봉대와 모래밭, 미끄럼틀 등 운동과 놀이를 겸할 수 있는 시설들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는 학교도 있다. 가을이 되면 학교 운동장에서 운동회가 열릴 것이다. 그리고 가을 소풍날에는 똑같은 학교 운동장에 아이들이 타고 갈 관광버스가 들어올 것이다.
학교 운동장 안쪽에는 국기게양대가 있다. 거기에는 검은 대리석 위에 ‘국기에 대한 맹세’가 적혀 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광복 이후 생긴 민족주의 담론이 지속되고 있다. 물론 프랑스 학교에도 프랑스 삼색기가 걸리는 날이 있고 항독(抗獨) 레지스탕스 운동의 역사를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프랑스 학교 교육은 민족주의보다는 세계시민의식을 강조하는 보편주의를 지향한다. 모든 프랑스 학교의 정문 위에 적혀 있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가치는 프랑스라는 국가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보편적 가치다. 그 세 가지 가치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역사를 안으로부터 비판하는 원칙이 되기도 한다.
풍경 #53 납북자와 민방공 훈련
어느 날 오후 지하철에서의 일이다. 지하철 플랫폼과 전동차 안의 윗벽에 상품광고가 아닌 색다른 광고가 붙었다. ‘6·25전쟁 납북피해/ 가슴에 묻은 세월만큼/ 큰 희망을 얻었어요!/ 대한민국 정부가 6·25전쟁 때 납북자 신고를 받습니다./ 문의전화 1661-6250 국무총리실 6·25전쟁 납북 진상 규명위원회.’ 납북 당사자 가족들이 납북 피해신고서, 가족관계증명서, 제적등본, 납북경위서 등을 작성해 제출하면 정부가 나서서 납북자의 생사를 확인해주고, 살아 있으면 상봉을 주선하고 나아가서는 송환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안내문이었다. 그렇다. 우리나라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은 분단국가이고 아직도 분단은 지속되고 있으며 남북한은 휴전선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다.
지하철 출입구를 나오는데 민방공 훈련이 시작되었다. 모든 자동차가 길가에 정지해 있고 보행객들은 다시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 대피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방송은 북한의 가상 폭격기가 서울 하늘 상공을 날아가고 있다는 장면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 세계적으로 안전하고 자유로운 서울이 북한으로부터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있음을 새삼 상기시킨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북한 고위 관리의 위협 언사도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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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에 걸쳐 전쟁을 벌였던 프랑스와 독일은 이제 유럽연합을 이끌어가는 쌍두마차가 되었다. 전쟁 위협이 없기에 민방공 훈련도 없다. 그런데 파리에도 전쟁의 기억을 알리는 소리가 있다. 내 기억이 틀릴 수도 있는데 매달 첫째 월요일 정오에는 파리 곳곳의 소방서에서 ‘웨앵’하는 사이렌을 여러 차례 울린다. 그건 화재가 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아니라 전쟁이 없으니까 안심하라는 평화의 신호라고 한다. 원 참! 지금 이 세상에 전쟁이 없다는 소식을 그렇게 알리다니 우스운 일이다. 그래도 그건 프랑스의 오래된 전통이라고 없애지 않고 계속한다. 이제 파리지앵에게 그 사이렌 소리는 전쟁이 없다는 신호가 아니라 지나간 옛날을 상기시키는 추억의 소리가 된 듯하다. 민방공 훈련이 없어지거나 추억의 행사가 될 날은 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