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권보호는 ‘다수주의’의 한계 극복하려는 시도
- 대법원장의 인권위원 추천권 없애야 하는 까닭
- 의회가 주도하고 시민이 감시하는 투명한 인권위 구성
- 아름다운 문화 국가를 위한 인권교육 필요성
2001년 5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법조계 종교계 시민단체 등 인권 분야 국민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인권위원회법 공포문에 서명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 당시 인권위 설치를 공약한 뒤 이를 지켰다.
인권은 어쩌면 그 성격이 예술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인권도 예술처럼 소수자의 입장에서 다수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소수의 신념이 다수의 윤리로 변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의 발전이라고 한다. 1970년대에 널리 인용되던 ‘소설은 왜 읽는가’라는 김현의 유명한 에세이가 있다. “이 세상이 과연 살 만한 세상인가, 강한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고 그는 자문자답했다. 예술의 역할은 인간성의 이름으로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다. 1970년대 미국 법학계에 강하게 일었던 ‘법과 문학’ 운동도 당시를 지배하던 ‘법경제학’에 대한 지적 항거의 성격이 강했다.
인권은 다수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다. 언제나 현실은 규범을 앞선다. 인권의 의미를 법전 속에서나 구하는 사람은 살아 움직이는 현실에 둔감하기 십상이다. 아직도 판·검사는 자신들이 인권의 수호자임을 자처한다. 그러나 많은 국민은 이들을 오히려 인권의 탄압자로 부르기를 즐긴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은 전통적으로 ‘좌파’ 세력의 정치철학과 담론을 대변한다는 정서가 있다. 이 지면을 통해 필자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불식시키려 노력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인권은 좌도 우도 아니고, 진보도 보수도 아니며, 인류 보편의 상식이다. ‘좌파’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믿을 만한 정의도 없다. 만약 소수자의 입장에 서서 주류 사회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좌파라면 예술가나 지식인은 응당 좌파라야만 한다. 인권위는 좌파정부의 유산이 아니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 재임 중에 탄생했지만 만약 1997년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가 당선됐더라도 마찬가지로 탄생했을 기관이다. 1993년 유엔이 총회 의결로 나라마다 설립을 권고한 바와 같이, 당시의 세계적인 추세였기 때문이다.
‘우파’라고 해서 인권을 경시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인권을 좌파의 이데올로기라고 매도하는 우파 쪽에서는 스스로의 인권 항목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과도한 인권은 사회 발전에 부담이 된다” 등의 소극적·방어적인 담론밖에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여태껏 시대에 끌려다닌 것이다. 한때는 복지도 좌파의 선동적인 구호라며 냉소하던 한나라당이 ‘새누리’로 당의 간판을 바꿔 달면서 입장을 달리해 복지를 시대의 화두로 수용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인권위의 헌법기관화
세속의 편리한 평가대로라면 나는 3년 남짓한 재임 기간 ‘좌파’ 정부와 ‘우파’ 정부에 나누어 근무했다. 그래서 인권과 인권위에 대한 두 정부의 대조되는 태도를 몸으로 느꼈다. 이 특별한 체험을 국민과 나누겠다는 생각으로 회고록 집필을 시작했다. 이제 글을 마감하면서 국민에게 제언을 드리고자 한다. 지난 10년간의 성과와 시행착오를 성찰해 새로운 10년의 청사진과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고. 대한민국 인권문제는 인권위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누구도 인권 탄압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인권위에 어떤 역할을 맡길 것인지에 대한 국민적인 합의가 절실한 시점이다.
첫째, 무엇보다 먼저 인권위가 어떻게 독립기관의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가, 이 근본적인 문제부터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만약 국제적인 기준이 요구하는 ‘독립기관으로서의 인권위’가 우리 형편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문제는 간단하다. 이명박 정부의 기본 입장이기도 했는데, 인권위법을 개정해 독립성을 부정하면 된다. 국무총리 산하에 설치된 국민권익위원회처럼. 그러나 그것은 국제 사회의 기대와 지난 10여 년간 쌓아온 인권위의 업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 새 정부와 국민이 분명히 알고 결정할 일이다.
당초 인권위는 국가에 대해 ‘쓴 소리’를 하는 기관으로 탄생했다. 그래서 기존의 정부권력구조 밖에 설치한 것이다. 설립 당시 우리 헌법에 이를 직접 반영할 기회가 없었지만, 헌법 개정이 용이한 나라에서는 인권위를 헌법기관으로 설치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부터 헌법 개정 필요성이 제기돼왔다. 초점은 5년 단임 대통령제를 4년 중임 또는 권력분점형 대통령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헌 논의에 앞서 보다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보자. 왜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가? 현재의 대통령제로는 국정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닌가? 그러면 국정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제대로 섬기는 데, 다시 말하면 국민의 기본권을 효과적으로 보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듯 자명한 원리가 우리 헌법의 근간이 되는 조항에 천명돼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헌법 제 10조)
인권위를 헌법기관으로 승격시키고, ‘인권기본법’을 제정해 자유로운 인권국가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 위에 현재의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대한 대대적인 손질도 필요하다. 인권위가 스스로 규칙을 제정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조직 및 인사에 관한 사항을 위원회 규칙으로 명시하고 위원장에게 소속 직원 임면권을 부여해야 한다. 예산 편성에 최대한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예산을 삭감할 경우에도 의견제출권을 보장해야 한다. 인권위의 기능을 키워주면 정부가 국제적인 신인도를 끌어올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인권위 바로 세우기
준(準)국제기구로서 인권위의 역할도 챙겨줘야 한다. 인권위가 각종 국제인권조약의 국내이행을 주도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이치다. 그럼에도 다른 국가기관의 견제로 인해 여태껏 제 역할을 공인받지 못하고 있다.
인권위가 여느 국가기관과 다른 점은 시민사회와 폭넓은 협력 내지는 협치의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는 점이다. 유엔의 인권 메커니즘이 그렇다. 모든 정부기구 회의에 비정부기구(NGO) 참여를 보장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비판적인 시민사회를 탄압하고 적으로 돌렸다. 반면 정부에 우호적인 단체를 지원해 이들이 비판적인 시민단체를 견제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효과는 미미했다. 이 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인권위의 ‘시민단체적 성격’을 불식해야 한다고 믿고 시민단체 출신 직원을 표적 삼아 박해를 가했다. 인권위가 제 기능을 수행하려면 인권 상황에 대한 국민평가단을 운영하고, 인권 관련 민간기구와 교류를 활성화해야만 한다. 근래 들어 유명무실하게 된 정책자문위원회, 전문위원회, 정책협의회의 기능을 정상화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모든 국민은 거주 지역과 무관하게 균질의 공적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우리나라의 수도권과 지방 사이에는 인권의식의 격차가 매우 크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사무소의 역할이 중요하다. 현재 인권위는 부산·광주·대구, 세 곳에 지역사무소를 두고 있다. 필자는 인권위원장 재직 시절 지역사무소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본부와 지역인권사무소 사이의 수평적인 협력관계 구축, 조사권한의 확대, 현장성의 강화, 지역사회와의 협력체제 구축 등 풀뿌리 민주주의와 인권의 정착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방침은 정반대였다. 2009년 3월, 인권위 조직축소를 강행할 때 정부의 당초 안에는 지역사무소를 전면적으로 폐지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가까스로 폐지를 막아낸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인권위는 11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대통령이 4인, 국회가 4인, 대법원장이 3인을 선출 또는 임명할 권한을 가진다. 그런데 대법원장이 인권위원을 지명하는 것은 민주헌정의 원리상 문제가 있다. 외국에서도 고개를 갸웃한다.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고,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사법기관에다 국민의 인권을 보호할 인권위원의 선임권을 주는 것은 민주적 정당성에 중대한 흠이 있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대법원장이 인권위원 후보자를 지명하는 과정에 아무런 가시적인 검증 절차가 없다. 이 점도 절차의 투명성, 공개성을 강조하는 국제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사법 중심 인권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설립한 인권위에, ‘사법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데 훈련된 사람’을 충원하는 데 있다. 대법원장의 지명에 의해 인권위원이 된 법률가들은 인권위 결정에도 법원의 판결과 동일한 기준을 요구하는 습관이 있다. 강제력이 없는, 건설적인 제안에 불과한 인권위의 결정을 법적인 집행력이 부여되는 판결과 동일하게 여긴다면 사법기관과 별도로 인권위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입법·행정·사법 등 전통적인 정부의 3부처에 인권위 구성권을 배분한 배경에는 ‘위원회’라는 이름의 정부기구에 다양한 배경의 구성원을 참여시킨다는 명분이 있었다. 통상의 위원회라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인권위의 경우는 배경과 상황이 다르다. 인권은 법 이전의 문제다. 때때로 법은 인권의 가장 강력한 적이 되기도 한다. 물론 최종적으로 법을 통해 인권이 실현되지만, 인권이 법에 구속되면 발전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하지 못하고 미래를 향한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한다.
인권위원의 자질
인권위원 개개인의 자격요건에 대한 합의가 없는 것도 문제다. 인권위법은 막연하게 ‘인권문제에 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고 인권의 보장과 향상을 위한 업무를 공정하고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자’(제 5조 2항)로 규정할 뿐이다. 2009년 7월, 현병철 위원장은 스스로 인권에 ‘문외한’임을 인정해 두고두고 구설에 올랐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의 일이다. 대통령이 임명할 인권위원 자리가 하나 비었다. 청와대에서 내정자를 통보해 왔다. 그가 정식으로 임명받기도 전에 인권위 사무실에 나타나 거드름을 피운다는 소식을 접했다. 위원장인 나를 만나겠다는 요청은 없었다. 설사 그가 요청했더라도 내가 거부했을 것이다. 그는 지방의 한 언론사와 연관이 있는 목사라고 했는데, 이명박 후보의 선거캠프 주위를 얼쩡거린 인물이었다. 그의 내정 소식이 알려지자 각종 비리로 얼룩진 추문이 드러났고 마침내 청와대는 내정을 통보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세세한 이유를 댈 필요도 없는, 함량 미달의 부적격자였다.
며칠 후 한 ‘거물급’ 목사의 이름이 통보됐다. 뜻밖이었다. 새 정부 출범과 동시에 내가 사임하는 것을 전제로 위원장 후보로 거론되던 분이다. 그가 위원장도 아닌 비상임위원으로 인권위에 합류하는 것은 인권위의 위상을 크게 높이는 결과가 될 것이다. 나는 속으로 환영했다. 그런데 그 목사는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한 일이라며 몹시 불쾌해했다고 한다. 또다시 청와대는 없던 이야기로 해달라는 통보를 해왔다. 정권 초기의 인사 난맥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우리나라가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지 10년째를 맞은 2007년 12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열린 ‘사형제폐지국가 기념식’ 광경. 최근 강력 범죄 억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형 집행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마침내 경기도의 한 목사가 청와대의 임명장을 받고 출근했다. 그 또한 비리와 인권유린의 전력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의 임명 소식에 분노한 장애인 단체가 출근을 저지하기 위해 인권위를 항의 방문했다. 나는 그의 출퇴근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했다. 어쨌든 정식으로 임명된 사람이기에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그는 회의석상에서 자신이 청와대에서 ‘파송됐다’는 말을 했다. 기가 막혀서 정색을 하고 공개적으로 주의를 주었다. “당신은 독립기관의 위원임을 명심하라”고. 나의 경고에 당황한 그는 즉시 사과했지만, 그 후에도 근본적인 태도가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수시로 청와대와 소통한다는 말을 자기 입으로 자랑하고 다녔다. 속말로 도대체 ‘개념이 없는’ 인권위원이었다.
인권위원의 임명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개선돼야 한다. 외국의 경우 의회가 주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의회 내에 후보추천위원회를 설치해 후보자를 공개 모집하고 검증 절차를 거친다. 우리의 경우 차관급인 상임위원도 인사청문회 대상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위원 정원을 축소하더라도 임기를 늘리고 위원 전원을 상임으로 전환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화의 나라
민주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교육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권의식의 증진은 교육과 홍보를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새삼 김구 선생이 쓴 ‘백범일지’의 구절들이 되살아난다.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된다. …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 …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로지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1947년, 그 곤궁하던 시절에 이런 정치철학을 편 지도자였기에 더욱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다. 대저 문화란 무엇인가? 명망 높은 미국의 인문학자 앤드루 델방코(Andrew Delbanco)는 문화를 집단적 심리학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고통, 욕망, 불안, 공포와 같은 단편적이고 불완전한 감각들을 하나의 스토리로 조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스토리가 어디엔가 연결되고 그럼으로써 인생의 최종 정착점인 죽음으로까지 항해하게 해줄 때, 그 스토리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삶을 지탱해주는 이런 이야기들이 오랜 시일에 걸쳐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정착되면 그것을 문화라고 부른다.” 백범이 ‘한없이 가지고 싶어’ 하던 문화도 이런 것이 아닐까? 다시 ‘백범일지’의 구절을 옮긴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돈이다. 바야흐로 경제 제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주기적인 선거가 정착되면서 정치권력은 부침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본의 힘은 난공불락이다. 지난 8월, 서울서부지방법원이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면서 동시에 법정구속해 정치권과 세인의 찬사를 받았다. 그동안 무소불위로 여겨진 ‘자본’의 힘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계의 ‘열등감을 먹고 자란 야생의 괴물’ 김기덕 감독의 작품 ‘피에타’가 최근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은 것도 자본주의와 돈의 비극을 너무나도 적확하게 두드렸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셰익스피어의 수많은 경구 중 오늘날의 현실에서 가장 가슴에 와 닿은 경구는 다름 아닌 자본의 본질을 꿰뚫은 구절이다. “금전은 최고의 군인이다. 결코 패배를 모르니까.” (‘윈저의 아낙네들’ 2막2장 166행) 이는 기독교 성경을 비롯한 모든 종교 경전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돈을 사랑함이 만 가지 악의 근원이니….” (‘디모데 전서’ 6장 10절) ‘인권은 경제의 적이다!’이런 관념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사회가 당면한 가장 큰 적이다.
인권위가 설립 초기부터 교육·홍보의 일환으로 역점을 둔 사업 중 특기할 것은 영상물 제작이었다.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인권위는 특별한 ‘제작자’였다. 그동안 인권위는 5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다. 국가기관이 만드는 영상물은 정부홍보물에 불과하다는 통념을 깬 중대한 성과다. ‘별별 이야기’로 불리는 애니메이션 시리즈와 ‘시선 시리즈’로 불리는 단편영화들을 만들었다. 비정규직, 입시지옥, 미혼모의 학습권, 장애인, 탈북자, 체벌, 급식, 다문화 등 우리 사회의 그늘진 인생에 주목한 작품들이다. 국제인권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작품도 많다. 장편 ‘날아라 펭귄’(2009)은 자녀의 외국어 교육과 조기유학에 가히 집단 ‘멘붕’ 상태에 빠진 한국 사회를 풍자한 영화다. 새 시대에 걸맞은 참신한 아이디어와 세련된 영상기법으로 찬사를 받았다. 인권위 영화로 데뷔한 뒤 그 경력을 활용해 상업영화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배우도 있다. 인권위 영화 사업에 참여한 감독과 배우도 자부심을 키웠다. 젊은 감독들은 영화감독을 인권위 영화에 참여한 사람과 참여하지 못한 사람으로 구분한다고 한다.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영상물의 위력은 인권감수성의 저변확대로 나타났다. 초중등학교 학생과 교사 중에 인권위의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고, 대부분 세상 문제에 눈을 뜨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2009년, 조직 축소의 여파로 인권위의 교육·홍보 기능이 크게 축소됐다. 인권감수성이 높은 직원이 많이 쫓겨나거나 떠났다. 남은 직원들의 사기도 크게 떨어져 있다. 막연히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하고 기다린다.
제18대 대통령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일찌감치 전열을 정비한 여당 박근혜 후보의 행보가 탄탄하게 느껴진다. 언제나 그랬듯 야당의 내부갈등은 우려를 자아낸다. 민주당 경선이 끝나면 심한 후유증이 일지 않을까, 당 차원의 결속이 흐트러질 위험이 농후하다는 전망이다. 통합진보당은 분당(分黨)의 길을 밟고 있다. 당선보다는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독자적인 후보를 낼 것이라고 한다. 좀 특이한 법률가 강지원 변호사가 출마를 선언하고 ‘매니페스토’라는 새로운 형식의 선거운동을 선보이겠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변화는 기존의 정당정치에 식상한 젊은 세대를 등에 업고 정식 출마를 선언하지 않은 후보, 안철수가 대선 판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 12월의 최종 승자가 될 것인가, 아직은 예측하기 힘들다. 다만 모든 후보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 누구도 종합적인 인권관(觀)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민사회가 주도해 ‘인권을 주제로 본 12월 대선의 쟁점’을 정리했지만(박래군·김미화, ‘대선독해 매뉴얼’(2012)),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인권문제가 정면으로 거론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득표보다는 감표 요인이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일 수도 있다. 인권은 유권자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게다가 인권의 범주가 명확하지 않다. 넓게 보면 인권문제에 속하지 않은 주제가 어디 있겠냐만, 국민의 뇌리에 각인된 인권 관념은 그 폭이 몹시 좁다. 밀실에서 벌어진 고문이나 영장 없는 체포와 같은 과거의 전형적인 국가폭력에 한정된다. 또한 오늘날 인권문제는 다른 쟁점 속에 흡수돼 독자적인 주목을 받기 어렵다. 이를테면 복지는 사회권이라는 인권의 문제이지만 그렇게 이해하는 정치인도 유권자도 거의 없다. 1997년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국가인권기구의 설립’을 100대 선거공약 속에 포함시킨 것은 실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次惡을 고르는 길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사형제라는 세계적인 인권의제에 대해 입장을 밝힌 유일한 후보가 새누리당의 박근혜 의원이다. 그의 종합적인 인권철학은 알 수 없지만, 박 의원은 나주 아동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사형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선거를 앞둔 시점에 국민의 공분을 십분 표심으로 전환하겠다는 정치적 계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명국가의 세계적인 추세는 사형제를 폐지하는 것이다. 유럽연합의 경우 사형제 폐지가 가입의 전제조건이다. 우리나라도 지난 12년 동안 사형을 한 건도 집행하지 않아 ‘사실상의 사형폐지국가’로 분류돼 있다. 법전에는 남아 있지만 실제로는 적용되지 않는, 죽은 법이나 마찬가지다. 이 시점에 사형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뜻일까? 같은 철학을 공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명박 대통령도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이제 박 의원 정도의 대한민국 지도자는 국제 사회도 유념하면서 언행을 챙겨야 할 때다.
어떤 세력의 주도인지는 모르지만, 선거를 앞두고 ‘인권은 곧 무질서’라는 그릇된 관념을 부추기는 이들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과 음주난동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근래 들어 모든 방송은 성폭력 문제를 나라 제일의 의제로 끌어올렸다. 한 언론사의 주도 아래 탄생한 ‘주폭(酒暴)’이란 단어 안에는 그릇된 음주문화의 개선을 위한 국민계몽 운동이나 건설적인 제언보다는 강력한 처벌을 통한 질서유지를 촉구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하다. 이런 선정적인 의제에 가려 보다 중요한 선거 쟁점은 희석되는 느낌이다.
당초 필자가 회고록을 집필한 동기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한국의 인권 상황과 인권위의 문제를 알리고 싶은 충정 때문이었다. 글을 연재하는 동안 몇 분의 독자가 반응을 보여 왔다. 어떤 분은 여전히 사실보다는 입장이나 진영논리에 입각해 강한 비난을 퍼부었고, 또 어떤 분은 중립적인 관점에서 진상을 알려줘 고맙다고 했다. 침묵으로 일관한 대부분 독자의 반응이 궁금하다. ‘동물 농장’의 저자, 조지 오웰의 에세이 ‘작가와 리바이어든’(1948)의 구절이 떠오른다. “대결의 시대에는 자신의 충동을 왜곡시키지 말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정당이라는 기계나 집단이데올로기에 굴복하는 것은 작가로서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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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두 개의 악 가운데 어느 쪽이 덜 악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행위일 뿐이라는 자조 속에 인간 세상의 원리와 함께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보인다. 인권을 내세워 정치를 흔드는 것도 악이고, 정치를 내세워 인권을 탄압하는 것도 악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두 개의 악 중 하나를 택하라면 그래도 전자를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귀중한 지면을 할애해준 신동아에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