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호

“기득권에 저항한 자, 죽어라!”

정치범의 탄생

  • 이창무│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입력2012-09-21 09: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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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와 바빌로니아에서 마침내 법이 만들어졌다.
    •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법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은 법에 따라 처벌됐다. 처벌받은 사람 중에는 예수와 소크라테스도 있었다.
    • 그들은 정치범이었다. 법은 모호했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기득권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합법’이라는 이름 아래 짓밟혔다.
    5월25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오나시스 재단 주최로 열린 한 행사가 주목을 받았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고 독배를 마신 지 2400여 년 만에 소크라테스 사건 모의재판이 열린 것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그리스, 미국에서 모인 10명의 판사와 변호사가 배심원단을 구성했다. 이들은 소크라테스의 유죄 여부를 검증하면서 고대 재판의 의미를 재조명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섰다. 시인 멜레토스를 포함한 아테네 시민 3명이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은 501명. 법정 통로에는 물시계가 있었다. 재판을 저녁식사 전에 끝내야 했기에 발언 시간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재판 결과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가 처벌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느꼈다.

    재판이 시작됐다. 원고를 대표해 멜레토스가 고발 이유를 밝혔다. 소크라테스의 혐의는 두 갈래였다. 하나는 아테네의 국가적 가치를 경멸하도록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타락시켰다는 것, 다른 하나는 아테네가 인정하는 신들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멜레토스의 고발이 끝나자 소크라테스가 물었다.

    “누가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멜레토스는 ‘법’이라고 대답했다. 어떤 사람을 말하느냐고 다시 묻자 멜레토스는 ‘재판관’이라고 고쳐 말했다. 소크라테스가 원로원까지 들먹이며 젊은이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되묻자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만 빼고 어떤 아테네 시민도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배심원들은 소크라테스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발인들과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재판 시작부터 승소할 생각이 별로 없는 듯 보였다. 생사를 초월한 듯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쓸모 있는 사람이라면, 살고 죽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오히려 자신이 옳은 일을 하는지, 잘못을 저지르는지에 대해 고민할 것이오. ‘이른바 현자(賢者)’들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뿐이지 ‘진짜 현자’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소…나는 결코 선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피해가려 하지도 않을 것이오…다시는 젊은이들을 가르치지 않겠다는 조건을 달아 풀어주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소. ‘아테네의 시민들이여, 나는 결코 철학을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오.”

    탈옥 거부한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결연했다. 결과는 유죄였다. 배심원 501명 중 280명이 소크라테스의 유죄를 인정했다. 당시 아테네 법정은 형량을 정하는 논의에 피고도 참여할 수 있었다. 형량과 관련해 2차 변론이 시작됐다. 다급해진 제자들은 소크라테스를 설득했다. 소크라테스가 전쟁에 나가 용맹하게 싸운 점 등 그동안 아테네에 기여한 공로를 감안해 유배형이나 금고형을 받을 수 있도록 배심원들을 다독일 것을 스승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눈 한번 찔끔 감아달라는 거였다. 유배형은 정치범이 주로 받는 형벌이었다. 잠시 유배 갔다 수년 뒤 조용해지면 돌아와 제자리를 찾는 게 보통이었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 금고형 역시 소크라테스가 70세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형식적 처벌에 그칠 공산이 컸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배심원단에게 선처를 부탁하기는커녕 배심원들이 보기에 터무니없는 요구를 서슴지 않았다. 자신이 아테네의 영웅 칭호를 받아야 하고 죽을 때까지 무상으로 식사를 제공받아야 한다는 얘기까지 꺼냈다. 배심원단은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법정의 권위를 일부러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의 요구 조건은 아테네 시민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였기 때문이었다. 전쟁 영웅이나 올림픽 우승자가 누리는 보상이었다. 곧이어 형량이 정해졌다. 배심원 가운데 360명이 사형 판결에 동의했다. 1차 판결 때보다 분위기가 더 나빠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그의 목숨을 재촉한 꼴이 됐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이 끝나고 곧바로 감옥에 수감됐다. 사형 집행 전날 밤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리톤이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탈옥을 권유했다.

    “불공정한 판결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감옥을 지키는 이들을 매수해놓았으니 나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제안마저 거절했다. 밤이 늦도록 소크라테스와 크리톤은 탈옥 문제를 놓고 승강이를 벌였다.

    “생명을 포기하는 것은 미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나아가 죄악일 수 있으며 수치심을 느껴야 합니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를 살리고자 갖은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대신 소크라테스는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닭 한 마리 빚진 것이 있는데 꼭 갚아주게”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大)철학자의 마지막 유언이 빚 갚아달라는 생뚱맞은 것이었기에 이를 두고 현재까지 해석이 분분하다. 고대 아테네에서 아스클레오피스는 치료의 신(神)이고 수탉은 병에서 회복했을 때 감사의 표시로 바치는 제물이었다. 니체가 말했듯이, 소크라테스가 생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의미로 이런 유언을 남겼을 소지가 크다.

    많은 이가 지금껏 궁금해하는 것은 ‘소크라테스는 왜 법정에 서야 했는지’ ‘도대체 어떤 죄를 졌기에 사형까지 당해야 했는지’일 것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이 그렇듯 이 재판 역시 당시 아테네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재판이 열릴 무렵 아테네의 사정은 몹시 좋지 않았다. 두 차례에 걸친 스파르타와의 펠레폰네소스 전쟁 때문이었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가 시칠리아 원정에 나서면서 스파르타와의 두 번째 전쟁이 시작됐다. 아테네는 참전한 알키비아데스를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아테네로 소환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도망가 아테네 군대의 중요한 정보를 알려줬다. 유능한 장군과 정보를 스파르타에 넘겨준 아테네는 결국 전쟁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전쟁 패배로 인해 아테네는 극도로 피폐해졌다. 또한 난민들이 성안으로 이주하면서 성내 인구가 폭증했고 이로 인해 도시 환경이 극도로 열악해졌다.

    전쟁의 패배는 정치적 변동으로 이어졌다. 군사정변이 두 차례 일어났다. 권력을 잡은 이들을 참주라고 불렀다. 30명의 참주가 아테네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참주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던 아테네 시민들은 포악한 참주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제를 되찾았다. 하지만 화려했던 아테네의 전성기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정치 상황은 계속 불안했고 시민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스파르타에 매년 거액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악법도 법인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줄곧 아테네 정치를 비판했다. 소크라테스는 “신발 만드는 일에도 전문가가 필요하게 마련인데, 국가 관리자와 법관을 왜 전문적 교육을 통해 양성하지 않고 선거를 통해 뽑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사회 현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평화로울 때는 이러한 비판이 별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나쁘게 된 것과 관련해 속죄 내지는 화풀이 대상이 필요한 상황에서 소크라테스야말로 그것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배하는 데 원인을 제공한 알키비아데스와 민주제를 흔들었던 참주정권의 핵심 크리티아스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는 사실 또한 아테네 시민들의 마음을 동요케 하는 데 적잖이 작용했다.

    소크라테스 재판과 떼놓을 수 없는 게 ‘악법도 법이다’란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는 기록은 없다. 소크라테스가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독배를 들이켰다는 사실과 관련해 누군가 지어낸 말로 이해된다. 일부 학자들은 ‘악법도 법이다’란 주장은 정부와 관변 학자들이 ‘잘못된 법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준법정신을 강조하고자 소크라테스의 ‘압도적 권위’ 빌려 꾸며낸 말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도 악법을 지키느라고 목숨까지 잃는데 보통사람이 법을 지키는 것이야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이다.

    다수 학자는 소크라테스가 유죄 및 사형판결을 스스로 유도한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독배를 준 것은 아테네 시민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자신”이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미국의 진보 언론인 I F 스톤 역시 ‘소크라테스의 재판(The Trial of Socrates)’이란 책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학설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을 견디지 못해 죽음이라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왜 죽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에 호기심을 갖게 하고 죽음의 원인이 연구 대상이 되게 해 결과적으로 자신의 철학이념을 퍼뜨리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전주의 학자 워터필드는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아테네의 고질적 병폐를 치유하길 원했다고 분석했다. 자진해 ‘희생양’이 되어 아테네가 오랜 논란을 불식하고 좀 더 조화로운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게끔 했다는 것이다. 뒤르켐(Emile Durkheim)이 말하는 이른바 ‘이타적 자살(altruistic suicide)’인 셈이다. 정치철학자 그린버그(N. A. Greenberg) 역시 도망을 거절하고 죽음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법률에 복종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은 천박해 보인다. 죽음을 경멸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비인간적으로 보인다…(죽음을 받아들인 것은) 명예의 빚을 지불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유죄라는 주장도 적지 않다. 이 같은 견해를 내놓은 대표적인 사람이 헤겔이다. 헤겔은 아테네 법정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옳았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단의 판결에 대해 자기 양심의 법정에서는 무죄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어떤 국민도 결코 양심의 법정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한 국가의 제1원리란 국가가 법이라고 인정한 것 이외의 더 높은 이성, 양심,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철학적 순교라고 칭송한 영국의 철학자 J S 밀도 아테네 법정이 “정직하게 소크라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고 봤다.

    ‘만들어진’ 증인

    소크라테스가 사형 판결을 받고 죽은 뒤 400여 년이 지나 또 다른 역사적 재판이 열렸다. 이번에는 예수가 주인공이었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르는 마지막 저녁식사에서 자신이 그날 밤 제자 중 1명의 배반으로 인해 로마군에 잡혀갈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예수는 그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땅에 엎드려 기도한 후 잠든 제자들을 깨웠다.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니라.”(마태복음 26:46)

    이윽고 로마 군인들이 대제사장들과 함께 찾아왔다. 유다가 예수에게로 오더니 입을 맞추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신호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저항하려 하자 예수가 말렸다. 예수는 조용히 끌려갔다.

    예수가 예루살렘을 찾은 때는 유월절 축제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이었다. 예수는 제자 몇 명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자신이 메시아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성전으로 갔다. 예수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고 좌판과 의자를 뒤엎었다. 평소의 예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성전에서 설교를 마친 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태복음 24:2)

    예수의 이 말은 곧바로 유대인의 귀에 들어갔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을 소집해 예수의 언행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논의했다. 예수를 심판한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71명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유대 사회의 최고 법원 역할을 했다. 산헤드린에서는 율법 및 종교 관련 사안을 다뤘다. 신성을 모독하거나 이단 혹은 주술 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있는 사람을 상대로 재판을 열어 사형을 선고할 수도 있었다. 물론 로마 지배하에 있던 시기에는 처벌 이전에 로마 총독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산헤드린에서 유죄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증인이 최소한 두 명 이상 있어야 했다. 예수 재판 때는 두 명의 증인을 찾기 어려웠다. 예수의 행동이 신성모독이라거나 이단, 주술에 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증인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를 처벌하려면 증인을 ‘만들어내야’ 했다.

    예수를 붙잡아온 이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갔다. 두 사람이 “예수가 하나님의 성전을 헌 뒤 사흘 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라고 거짓으로 증언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사실이냐고 캐묻자 예수는 답하지 않았다. 대제사장이 다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요구했다. 결정적인 질문이었다. 만약 아니라고 부인하면 사람들의 비웃음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고 인정하면 신성모독으로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태복음 26: 64)라고 답했다. 자신이 메시아라고 떳떳이 밝힌 것이다. 메시아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신성모독이 곧바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신성모독이란 하나님이 모세에게 알려준 ‘야훼’란 이름으로 하나님을 직접 부를 때 해당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예수는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 빌라도 앞에 끌려왔다. 총독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자 예수는 “네 말이 옳다”고 대답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

    당시에는 명절에 죄수 1명을 석방하는 관례가 있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한 무리는 살인죄를 저지른 바라바를 풀어줄 것을 간청했다. 빌라도가 “예수에 대한 처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자 이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했다.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은 목소리를 더욱 높여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로마법에 따르면 정치범은 십자가형에 처해야 하므로 신성을 모독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빌라도에게 예수는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예수의 재판 역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가 살았던 유대 지역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유대인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는데도 그들에게 동화되지 않았다. 유일신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은 언젠가 메시아가 나타나 그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스스로 ‘메시아’라 밝히는 이가 나타났다. 예수였다. 그러나 유대인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기 어려웠다. 당시 유대인은 예수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로 여겼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유대인 처지에서는 매우 심각한 잘못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예수는 율법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예수는 공개적으로 죄인들 세리들과 함께 식사했고, 문둥병자를 만졌으며, “모든 음식이 다 정결하다”(마태복음 7:19)는 유대인이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도 했다.

    예수가 율법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는 명백하게 율법을 어긴 것이었다. 예수가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오래된 병자를 고친 것은 안식일 법을 어긴 것이었으며, 예수를 고발하는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복음 5:17)고 말한 것은 신성모독의 문제로 사안이 확대됐다. 예수는 중풍환자를 치료했으며 한 여인에게 향유를 붓고는 죄 사함을 얻었다고 선언했다. 자신이 환자를 치료하는 능력과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예수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감히 죄를 사할 수 있느냐?”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기득권을 위협한 예수

    산헤드린 재판에서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의 메시아 주장에 자신의 옷을 찢으면서 신성모독을 주장한 것은 평소 예수가 유대교 율법을 무시하고 불경한 말을 해왔기 때문에 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 유대교에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 말고도 있었고, 그들이 모두 사형 판결을 받았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예수는 단지 유대교 권위를 훼손하고 자신들의 이익에 위협이 되는 존재일 뿐이었다.

    일부 학자는 산헤드린 재판 자체를 부정한다. 유대교에서는 야간에 재판을 하지 않는 데다 복음서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의 제자들이 재판 과정을 확인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예수가 당시 기득권 세력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예수를 혁명 지도자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유대교의 잘못된 인습을 타파하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인을 해방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는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체제 전복을 꾀할 수 있는 인물로 봤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온 뒤에도 그를 곧바로 체포하지 않았고 대제사장과 그의 무리가 예수를 잡아 데려왔을 때도 예수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럼 점에서 예수가 정치적으로 로마에 큰 위협을 주는 인물로 인식됐던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예수를 위험 인물로 판단했다면 빌라도가 제자들을 비롯한 예수의 지지자들을 그대로 두었을 리 만무하다. 고대 국가에서 반란이나 정변과 관련한 사안에서 주모자와 관계된 이들은 철저하게 조사해 가혹한 처벌에 처했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예루살렘을 떠나 로마로 돌아간 뒤 누군가 예수에 대해 묻자 그가 예수를 기억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다만 빌라도를 위시한 로마 통치자 처지에서는 예수가 강조한 평등 사회 구현과 빈민 구제 등 여러 가지 개혁적 주장이 예수가 로마에 치명적 위협이었느냐를 떠나 궁극적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기존 질서와 기득권 계층에 이해와 관련해 거슬리는 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예수 역시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떤 점에서는 고의로 죽음을 초래한 측면도 있다. 예수가 성전에서 소동을 일으키고 성전의 붕괴를 말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행동과 언사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예수가 몰랐다고 하기 어렵다. 실제로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를 체포하고 산헤드린 재판을 열게 된 것에는 예수의 성전 소동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범죄의 순기능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귀신의 왕, 사탄과 같은 존재인 ‘바알세불’에 사로잡힌 거짓 예언자로 매도한 것은 예수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처벌을 합리화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귀신 들린 거짓 예언자를 처형한 것은 유대교 율법에 따른 합법적 결정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예수와 소크라테스는 기득권의 심기를 거슬렸다. 기존 사회질서를 흔들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예수가 사형에 처해진 가장 큰 이유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고, 꽉 막힌 현실을 극복해 이상(理想)으로 나아가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수와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기득권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합법’이라는 이름 아래 짓밟혔고, 소크라테스와 예수는 ‘범죄자’로 매도됐다.

    고대 국가에서 왕권과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소크라테스와 예수 역시 죽음으로 저항을 실천했다. 그리고 세상은 달라졌다, 그들이 예상한 것처럼.

    범죄에 살인이나 절도만 있는 게 아니다. 범죄는 복잡하고 다양한 얼굴을 가졌다. “성자(聖者)들만 사는 곳에서도 범죄는 필요하다”는 뒤르켐의 말 뜻은 예수와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죽음을 통해 명확해진다.

    범죄는 사회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하나의 동력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 예수,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같은 ‘범죄자’가 없었다면 인류 역사는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5월 26일 소크라테스 모의재판의 평결은 유·무죄가 5대 5로 갈렸다. 동수(同數)이므로 결국 소크라테스는 방면되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났다. 석방 판결이 나왔지만 둘로 나뉜 배심원들의 의견은 팽팽하게 대립했다. 고대 아테네의 배심원이 법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는 평범한 시민이었던 데 반해 올해 모의재판의 배심원은 모두 법률전문가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 2400여 년 후 그가 인류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알고 재판에 임한 배심원의 선택이기에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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