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북포용정책 2.0 발표한 햇볕정책 전도사
- 임동원, 단둥에서 北 노동당 중앙위 인사 접촉
- “셋이 함께 압록강변 둘러봤을 뿐” 부인
- “北, 12월 대선용 新북풍 준비 중” 전망 많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2009년 8월 4일 금강산에서 이종혁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을 만났다. ‘신동아’는 이날 대화를 녹취한 문건을 입수했다. 셋의 대화에서 임동원 전 장관에 대한 북한의 신뢰감과 북한이 남한의 대북정책을 들여다보는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원동연 : 김대중 선생은 잘 계십니까?
현정은 : 많이 안 좋으신가봐요. 폐렴이….
이종혁 : 그 나이에 그만큼 유지하는 것도 대단하시지. 이번 노무현 사고를 보면서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원동연 : 임동원 선생은 잘 계십니까?
임동원 방북 원한 北
현정은 : 네 잘 계시고요. 6·15 행사 가서 뵈었습니다.
원동연 : 임동원 선생이 평양에 오시는 것은 어렵겠죠?
현정은 : 현인택 장관을 만나니까 먼저 정권 사람들이 푸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시더라고요.
원동연 : 결과적으로 남북관계가 풀리게 돼 있으니 통 크게 나와야 하지. 저렇게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건대 청와대에 똑바른 보좌관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오바마 보십시오. 먼저 정권 대통령(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우리한테 보내서…. 그렇게 통이 크게 나와야 하는데, 임동원 선생이 온다고 해서 대번에 북남관계를 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평양 방문해서 좀 휴식하고 가는 그런 차원인데, 그렇게 과민반응을 하면 앞으로는 북남사업은 못하죠. 저렇게 통이 작은 사람하고 앞으로 북남사업을 하겠는가. 조그만 사건이 나면 또다시 끊기고 그러면 안 되거든요. 다른 거는 미국 사람들한테 배우면서 그런 거는 왜 안 배우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종혁 : 설상 임동원 씨가 와도 남북관계 풀라고 이야기를 하지 욕을 하겠습니까?
원동연 : 그걸 이해를 못하니 안타까운 게 있는데, 남쪽 당국이 임동원 선생한테 그런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 이상은 임동원 선생이 와서 크게 풀릴 게 있겠습니까? 너무 근시안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이명박 정권 취임식 때 그때까지 일체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비핵·개방·3000 대북정책을 공식 채택해서 발표하고, 핵 문제 해결되지 않으면 북남관계는 없다. 한미관계로 푼다. 모든 북남관계를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미관계를 하겠다. 이렇게 완전 직설적으로 하다보니 (갈등이) 시작된 건데….
현정은 : 제가 비핵·개방·3000을 북에서 안 좋아하니 쓰지 말라고 했는데 외교안보수석이 김병국 교수라고 제 친구 동생이라 말을 전했는데 안 믿더라고요. 그건 좌파 교수들이 하는 이야기라고 하면서요. 북하고 MB식 대화를 하겠다고 하더군요. 먼저 정권하고 다르게 하려는 의욕을 느꼈어요.
이종혁 : 똑같을 수야 없겠죠. 다르다 하더라도 내색을 하지 않고 하면 되겠는데 자꾸 미리부터 말을 그렇게 하니까.
원동연 : 좋은 건 이전 정권 것이라도 받아들이고 그리고 다음에 더 잘할 수 있는 것들도 있는데, 무조건 전 정권 것은 모조리 안 하겠다고 하는 건….
북측 인사들은 이 대화에서 임 장관이 남북관계 경색을 풀 적임자라는 투로 말한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햇볕정책 집행자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정 전 장관은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이어서 북한이 껄끄러워하면서도 대화상대로 인정한다”고 말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햇볕정책 전도사다. 노무현 정부 대북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도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포용정책의 적실성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이 전 장관에 대한 북한의 평가는 생각보다 호의적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부 장관 시절 북한의 기대와 다르게 원칙을 앞세워 북한을 다뤘기 때문이다. 이 전 장관 재임 기간(2006년 2월 10일~12월 10일) 남북관계는 나빴다. 그는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후 대북정책 실패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북한의 핵실험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의 대북 기조를 상징하는 햇볕정책이 사실상 종언(終焉)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2002년 대선 직후인 2003년 1월 27일 임동원 당시 김대중 대통령 대북특사와 이종석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수위원이 서울공항에서 평양행 비행기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임동원, 정세현, 이종석 전 장관이 속한 한반도평화포럼(공동대표 임동원 백낙청)은 6월 26일 ‘2013년 새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분야 비전과 과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엔 남북교역과 남북대화 전면재개, 5·24 대북제재 조치 해제, 금강산관광 재개 및 개성공단 확장,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등의 구상이 담겨 있다. ‘속(續)햇볕정책’이다. 이번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 전 장관은 ‘한겨레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속(續)햇볕정책 발표
“보고서를 만드는 데 과거 우리가 10년간 추진한 포용정책을 기본적으로 참조했다. 그러나 포용정책을 집행하면서 부족했다고 판단된 점을 보완했고, 또 그동안 정세변화도 반영했다. 여기에 이명박 정부의 퇴행에서 배운 교훈도 참조할 것은 했다. 포용정책의 진화, 포용정책 2.0이다. 가장 중요한 게 남북이 이제 평화와 경제, 안보가 선순환하는 구조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긴장이 고조됐고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졌다. 북-중 경협 심화로 대북 압박정책은 안 통하게 됐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평화와 경제, 안보의 선순환 구조라는 개념에 착안했다. 기존의 개성공단을 확대하고, 금강산을 남쪽의 설악산 등 동해안 지역과 연계해 국제관광지로 만들자는 것이다. 또 서해평화협력지대를 설치해 고속 성장하는 중국 동부해안과 묶어내는 황해경제권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 전 장관이 인터뷰에서 언급한 내용은 대부분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던 것이다. 한반도평화포럼은 “대선 공약과 정책을 수립할 때 보고서를 참조하라”고 제안했다. 진보 성향 후보가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면 ‘포용정책 2.0’이 새 정권의 대북정책이 될 소지가 적지 않다. 임·정·이 전 장관이 대북정책을 5년 전으로 되돌리는 과정에서 모종의 역할을 맡을 공산도 크다.
임 전 장관은 6월 7일 중국 단둥(丹東)에서 이창덕 북한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회장을 만났다. 민화협은 통일전선부가 관리하는 기구다. 이 회장은 임 전 장관에게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해나가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 전 장관은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 간부와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들과도 접촉했다고 한다. 한 관계자는 “노동당 중앙위원들이 남측이 우리의 최고 존엄을 건드렸다는 식의 얘기만 잔뜩 하고 돌아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임 전 장관 일행은 북한 주민 접촉 신청을 했다. 남북교류협력법상 사전 승인 없이 북한 주민과 접촉한 사실이 인정되면 최대 300만 원까지 과태료가 부과되지만 처벌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임동원, 단둥서 북측 인사 만나
북한과 각별한 관계인 임 전 장관이 대통령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북측 인사를 접촉한 것은 상징적 의미가 적지 않다. 한 북한전문가는 “북한 처지에서는 한국의 대선 국면이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게 마련이다. 북측은 임 전 장관에게 대선 전망을 물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8월 말 한 대북소식통은 “임동원, 정세현, 이종석 전 장관이 8월 3~11일 중국을 방문해 북측 인사와 접촉한 것으로 안다. 3일 다롄(大連)으로 입국해 단둥을 거쳐 11일 옌지(延吉)에서 한국으로 돌아갔다. 민주당 메신저로 북측 인사를 만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전직 장관 3명이 8월 초 단둥에서 북측 인사를 만난 것으로 안다. 신(新)북풍을 논의하지 않았겠는가”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북풍은 북한이 한국의 대선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간 대선에서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북풍을 활용한 바 있다.
임 전 장관은 한국에 돌아온 후 이해찬 민주당 대표를 만나 방중 내용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표는 2007년 대선 때 북풍의 중심에 서 있었다. 야권의 또 다른 중진도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기술대학원장과 가까운 인사와 함께 북측 인사를 만난 것으로 파악된다.
6월 8일 단둥에서 북측 인사 접촉→6월 26일 ‘2013년 새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분야 비전과 과제’ 발표→8월 3~11일 단둥 재방문→임동원, 이해찬 대화로 이어지는 흐름은 누가 봐도 예사롭지 않다.
이와 관련해 이종석 전 장관은 “중국에 다녀온 것은 맞지만 북측 인사를 만난 적은 없다”고 부인했다.
“두 분(임동원, 정세현)과 함께 3일 다롄으로 들어가 11일 옌지에서 나왔다. 임동원 장관님이 팔순(1934년생)을 앞두고 있어 함께 여행을 간 것이다. 압록강, 두만강 일대를 둘러봤다.”
이 전 장관은 “중국에 다녀온 후 임 전 장관이 이해찬 대표를 만났다”고 말했다.
▼ 세 분 장관이 함께 움직인 것을 두고 뒷말이 나온다.
“우리가 무슨 메시지를 가져가거나 할 위치가 아니다.”
▼ 중국에서 누구를 만났나.
“옌볜대 교수 한 분과 단둥에서 사업가를 만난 게 전부다.”
압록강 풍경
“신동아와는 애증(愛憎)이 있다. 알다시피 동아일보 쪽과는 인터뷰하지 않는다.”
중국을 다시 방문했다 9월 13일 귀국한 정 전 장관 측도 “북측 인사를 접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임 전 장관은 “북측 인사를 만나지 않았다. 이해찬 대표에게 ‘잘 다녀왔느냐’는 문안전화는 받았으나 만나지 않았다”고 답했다.
권토중래 노리는 ‘햇볕’
2007년 대선 때 북한은 유력 정치인을 차례로 평양으로 초청했다. 그해 3월 7일 이해찬 대표가 방북한 것을 신호탄으로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 김혁규 전 경남지사 등의 평양 방문이 이어졌다. 대선 국면에 불어온 북풍이었다. 이 대표는 최승철 당시 통일전선부 부부장과 핫라인을 구축했다. ‘북(北) 최승철의 남(南) 정치인 줄 세우기’라는 비아냥거림도 나왔다. 최 전 부부장은 2007년 한국 대선이 끝난 뒤 직위에서 쫓겨났다. ‘남측의 대선을 잘못 읽은 죄’도 낙마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다수 전문가는 이번 대선에서도 북한이 어떤 식으로든 북풍을 시도할 것으로 본다. 또 북한이 이명박 정부와의 관계 개선엔 나서지 않을 소지가 크다고 분석한다. 남한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경색된 남북관계를 푸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북한이 예상한다는 것.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 대해서도 기대감을 갖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박 후보는 9월 2일 동아일보-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 인터뷰에서 “서해경계 존중하면 평화수역 논의할 수 있다” “남북 경색국면 어떻게든 대화국면으로 바꿔야 한다”라고 말했다.
10년의 햇볕은 북한의 ‘핵(核) 외투’를 벗기기는커녕 오히려 핵무기 수를 늘렸다. 대안으로 나온 압박정책도 북한을 길들이지 못하고 용도 폐기를 앞두고 있다. 햇볕도 압박도 통하지 않은 것이다. 햇볕정책 3인방이 들고 나온 ‘햇볕정책 시즌 2’는 핵 외투를 벗길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역전의 용사들이 권력교체기를 앞두고 모종의 역할을 하며 권토중래를 도모하는지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