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 제주도에서 강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제주도에 숨어 있던 김달삼 등 남로당 세력이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1945년 패전한 일본군이 동굴 등에 숨겨놓고 간 무기로 무장한 이들은 제주 각지에 있는 경찰관서를 습격했다. 당시 제주도에는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9연대장 박진경 대령도 암살했다.
그에 따라 군경의 토벌작전도 강화돼, 1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이 혼란 때문에 제주도의 5·10선거는 무효가 됐다. 대한민국은 제주도에서만 제헌의원을 뽑지 못하고 출범한 것이다. 이러한 4·3사건과 고경택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제주고씨 영곡공파
고씨들은 전체 고씨 모임인 고씨종문회 총본부를 제주도에 두고 있다. 제주에서 만난 고씨종문회 총본부의 고시홍 부회장은 “고경택은 내가 종친회장으로 있는 제주고씨 영곡공파가 맞다”고 말했다. 그가 내놓은 영곡공파 족보에는 ‘고경택(高京澤)’이라는 이름이 올라 있었다. 고경택은 1913년 8월 14일생이고, 부인인 청주한씨는 1915년생이다.
1995년쯤 김정일은 정철-정은-여정 남매를 스위스에 외교관으로 가 있으면서 스위스은행에 개설해놓은 40억 달러에 달하는 김정일의 비자금 계좌를 관리하던 고영희의 여동생 고영숙-박남철(본명 리강) 부부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해 김정남의 친 이종사촌으로 한국에 와 있던 이한영 씨가 한국 언론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는 동유럽 공산정권과 소련이 무너진 이후라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었다.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1998년 2월 고-박 부부는 그들의 자녀를 이끌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덕분에 미국은, 스위스은행에 숨겨진 김정일 비밀계좌를 파악해 북한을 더욱 옥죌 수 있었다. 그때 고영숙은 자신의 아버지를 1913년 8월 14일생인 고경택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영곡공파 족보 기록과 일치한다.
과거의 족보는 사위 이름은 올려도 딸 이름은 올리지 않았다. 족보는 출생신고가 아니라 각 집안에서 아들 이름을 적어 보내온 단자(單子)를 근거로 작성한다. 영곡공파 족보는 고경택이 4남 가운데 3남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고경택보다 열 살 많은 장형 A씨는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의 양자로 가 제주도의 조천면장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조천면은 4·3사건 당시 군경과 격렬하게 대치했던 곳이다.
제주도의 행정자료들에 따르면 A씨는 1940년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제8대 조천면장을 했다. 제주 4·3사건위원회는 ‘4·3장정’(전 6권)이란 책을 냈는데, 이 책에는 면장을 한 A씨가 조천면의 중심지인 북촌리에 살았던 것으로 돼 있다. 북촌리는 4·3사건의 실제적인 주모자 이덕구의 출신지이기에 조천면 중에서도 대치 상황이 가장 격렬해 군경의 토벌작전 등으로 4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밝혀낸 김영중 전 제주경찰서장(71)은 “미안한 이야기지만 해방 직전의 면장은 친일파가 아니면 할 수가 없었다. A씨는 4명의 딸을 둔 듯, 족보에는 4명의 사위 이름이 올라 있다. 그런데 ‘4·3장정’에는 A씨가 18세인 딸을 경찰관에게 시집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4·3사건 와중에 경찰관을 사위로 맞은 것은 좌익이 아니라는 뜻이다. 고경택 집안은 좌익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4·3사건과 무관한 渡日
고경택의 원뿌리가 좌익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A씨의 4남4녀는 고영희에게 실제로는 4촌, 족보상으로는 6촌이 된다. 족보는 A씨의 네 아들도 상당히 연로한 상태임을 보여준다. 김영중 씨는 수소문 끝에 A씨의 한 손자가 제주도에서 공직에 있는 것을 알고 통화를 했으나, 면담은 거절당했다고 한다. 김씨는 “내가 현직 경찰관도 아니고, 연좌죄도 폐지됐는데 안 만나겠다는 사람을 더 이상 추적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고영희의 5촌 조카들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김정은이 외조부를 4·3사건의 주모자로 꾸며 어머니 우상화를 시도할 때, 그가 나서주기만 한다면 김정은은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족보는 고경택이 언제 일본으로 건너갔는지는 밝히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관계자들의 증언과 북한자료는 하나같이 4·3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1929년 만 16세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했다. “제주는 폭이 좁아 그 정도는 다 알고 있다”는 설명이다.
당시 제주도의 삶은 팍팍했기에 젊은이의 4분의 1 이상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일본으로 간 제주인들은 고향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살았다. 족보는 고경택이 청주한씨와 결혼했고, 1935년부터 여섯 아들을 낳은 것으로 돼 있다. 4남까지는 출생연월일이 기록돼 있으나 5남, 6남은 없다. 5남은 후사(後嗣) 없이 사망한 고경택의 바로 아래 동생에게 양자로 보낸 것으로 돼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