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호

삼성·현대·SK 경영권 승계로 본 북한 후계구도의 미래

로열패밀리 권력투쟁 향방과 과도체제의 ‘변심’이 최대변수

  • 이승열│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연구위원 summer20@naver.com│ 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0-09-17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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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시화하고 있는 평양의 후계체제 구축작업은 과연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까.
    • 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바로미터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장자 상속이라는 대원칙을 버리고 셋째와 다섯째를 후계자로 택했던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삼성과 현대, 과도체제를 겪은 SK의 사례가 그것이다.
    • 이들 기업 승계의 이면을 해부해보면 권력 세습이라는 엄청난 프로젝트의 속성과 역학관계, 김정은 후계체제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변수들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2010년의 늦여름, 사람들은 평양을 주목했다. ‘9월 상순’으로 예정됐던 당대표자 대회를 통해 북한의 3대 세습이 현실화될지 모른다는 예측 때문이었다. 김정일의 셋째 아들 정은이 김일성과 김정일, 즉 만경대와 백두의 혈통을 잇는 3대 세습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물론 북한의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은 이제 시작일 뿐, 앞으로도 기나긴 과정이 남아 있다. 지금 당장에는 그 성공과 실패를 예단하기가 쉽지 않지만, 관심이 쏠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이를 가늠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로 요약된다. 왜 셋째 아들인가. 김정일에게는 성혜림에게서 낳은 장남 김정남과 고영희에게서 낳은 둘째 아들 김정철이 있다. 김정은은 고영희의 둘째 아들이라는 게 그간의 정설이었다. 더욱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로 결정되던 1970년대, 그는 삼촌인 김영주나 계모인 김성애, 이복동생인 김평일 등과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장자 승계’라는 전통적 원칙의 덕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논리로 보자면 김 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 혹은 고영희의 첫아들인 김정철이 후계자로서 더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김정일은 막내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했다는 것일까.

    장남을 제친 3남의 후계자 등극, 이는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은 그림이다. 조선의 세 번째 왕인 태종은 자신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에게 안정적인 보위를 물려주고자 치밀한 후계전략을 세웠다. 태종 자신이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골육상쟁의 피를 본 뒤 왕위에 올랐으므로 자신의 아들에게는 이 같은 불행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은 1,2차 왕자의 난이 잘못된 세자(막내인 방석) 책봉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보았다. 태조 이성계의 후계자로 방석을 내세운 계모 신덕왕후의 외척들과 왕권보다 신권을 강화하려는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의 음모 때문이라는 생각이었다.

    자신의 장자인 양녕대군에게는 이러한 문제점이 모두 내재해 있었다. 양녕대군 주변에는 태종의 부인인 민씨를 비롯해 외척세력인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있었고, 자신의 측근인 이숙번과 조영무 등이 이들과 강한 정치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1404년 태종은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바로 2년 뒤 건강을 이유로 선위(禪位)를 선언한다. 선위는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철회되지만, 이후 계속된 태종의 선위 파동은 결국 태종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양녕대군의 즉위를 서둘렀던 민무구 형제의 죽음을 불러왔다.

    태종은 1418년 장남인 세자를 폐위하고 삼남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두 달 뒤 태종의 선위를 통해 조선의 네 번째 왕인 세종의 즉위식이 열린다. 그러나 이때의 즉위식은 세종의 후계 구도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태종은 세종의 치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신의 창업공신 이숙번과 조영무 등을 쳐내고 충녕대군의 외척세력까지 제거함으로써 강력한 왕권을 아들 세종에게 물려주는 데 성공한다.



    김정일 위원장의 선택이 세 아들 중 가장 충실한 아들을 선택한 결과인지 혹은 권력투쟁에 가장 능한 아들을 선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요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씨는 김정일이 자신과 얼굴과 체형이 닮은 김정은을 제일 마음에 들어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분명한 것은 김정은의 간택이 결코 우연일 리 없고, 철저하게 구성된 각본이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문제는 ‘과연 어떤 각본이냐’는 것이다.

    이를 좀 더 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현미경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우선 장자 상속이라는 대원칙을 버리고 셋째와 다섯째를 후계자로 택했던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삼성가(家)와 현대가(家)가 있다.

    이들이 후계자를 선택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김정은의 후계자 선택 과정 역시 김정일 위원장 혼자만의 결정이 아니라 북한 체제의 미래를 둘러싼 로열패밀리들의 치열한 권력투쟁의 산물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다. 여기에 고(故) 최종현 회장 이후 손길승 체제를 넘어 최태원 회장으로 경영권 이양을 이뤘던 SK의 경우는, 과연 김정은 체제가 현재 운위되는 이른바 장성택 과도체제를 넘어 순항할 수 있을지 가늠할 바로미터가 된다. 이름하여 ‘한국 대기업의 경영권 승계과정으로 유추해 본 북한 권력승계의 방정식’이다.

    쫓겨난 ‘왕세자’의 운명

    삼성·현대·SK 경영권 승계로 본 북한 후계구도의 미래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씨.

    삼성가에서 이맹희씨는 과연 어떤 존재였는가.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인 이병철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씨가 삼성그룹의 후계자 선정과정에서 셋째 아들인 이건희 회장에게 밀려난 후 벌어진 일련의 일들은 쫓겨난 ‘왕세자’의 운명이 어떤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삼성을 일시적으로나마 넘겨받았던 이맹희씨는, 1966년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던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이른바 ‘한비 사건’-을 계기로 후계자 자리를 넘겨준 후 회사에서뿐 아니라 가문에서도 내쳐지는 신세가 됐다. 장남이지만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생일행사에도 참석할 수 없는 몰락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창업공신들의 반발이었다. 이맹희씨가 경영권을 물려받은 직후부터 불거진 이러한 반발은, 경영권을 잠시 맡아 그룹의 일시적인 위기를 잘 넘겨달라는 이병철 회장의 뜻을 이맹희씨가 잘못 읽었던 게 원인이었다. 그룹을 자신의 체제로 무리하게 재편하려 했던 것이 화근이 된 셈이다. 당시 이병철 회장이 장남에게 물려준 경영권은 대리경영을 통해 후계자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 절대적인 대권을 부여한 게 아니라는 것을 그는 잠시 잊고 있었다. 결국 ‘한비 사건’으로 인해 장남과 차남이 실각하면서 삼남인 이건희씨가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새롭게 등장했다.

    셋째 아들의 후계자 등장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취약성은 이병철 회장에게 고민을 안겨주었다. 이병철 회장은 무엇보다 이맹희씨가 자신의 사후에 ‘삼성그룹의 장남’이라는 명분을 들고 다시 돌아올 가능성에 무척 신경을 썼다. 이 때문에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장남의 후계자 컴백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제거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그를 사회적으로 완전히 격리해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드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후 이맹희씨는 산간벽지와 미국, 일본 등을 떠돌며 삼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2001년 5월1일, 김정일 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이 아들과 두 명의 여성을 대동하고 도미니카공화국의 가짜 여권을 소지한 채 일본 나리타 공항으로 입국하려다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세계에 타전됐다. TV를 통해 공개된 김정남은 뚱뚱한 풍채에 거만한 표정을 지은 모습이었다.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었다”고 입국 사유를 밝힌 그는 67시간 만에 일본에서 추방되어 중국 베이징 공항에 내렸고, 이후 북한에 들어가지 못한 채 중국, 러시아, 홍콩, 마카오 등을 여행하며 낭인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김 위원장의 눈 밖에 나 후계자 자리에서 멀어졌다는 게 대체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과연 그게 전부였을까. 일본 밀입국 사건이 그를 후계자 신분에서 밀어낸 결정적인 계기였을까. 이는 단지 대외적인 명분이었을 뿐 이미 김정남은 후계자의 자리에서 멀어져 있었다고 보는 게 훨씬 설득력 있다.

    김정남은 김정일 위원장이 아버지에게서 권력을 물려받았던 당시의 선례에 따라 1990년부터 ‘황태자’로서 후계수업을 착실하게 받아왔다. 김 위원장이 그를 당 회의실로 데려가 가운데 자리를 가리키며 “네가 커서 큰소리칠 자리다”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것. 김정남은 1990년 조선컴퓨터센터(KCC) 설립을 주도하는 등 IT 및 군사 분야에서 주요 직책을 맡았고, 김 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탈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이징에 비밀거점을 마련해놓고 탈북자들의 강제송환을 총괄하기도 했다.

    선대 측근그룹의 힘

    삼성·현대·SK 경영권 승계로 본 북한 후계구도의 미래

    8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4박5일 방중 행로.

    그랬던 그가 후계자 지위에서 멀어진 결정적인 이유는 계모인 고영희와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과거 김정일 위원장이 승계 과정에서 벌어진 계모 김성애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김정남은 김정일과 성혜림 사이에서 1971년 5월10일에 태어났지만, 부모의 동거가 극비였던 까닭에 따지고 보면 사생아였다. 김일성 주석이 김정남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4년 후인 1975년 무렵으로, 이를 몰랐던 김 주석은 1973년 아들을 김영숙과 결혼시킨 바 있다.

    청년 김정일의 공식 결혼은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성혜림에게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안겼다. 신경쇠약에 걸린 성혜림은 이후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주로 살게 되었고, 기쁨조 출신으로 알려진 고영희가 김정일의 세 번째 부인으로 등장하게 된다. 김정철과 김정은의 생모로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여인이다. 김정남에게 계모인 고영희와 동생인 정철, 정은의 등장은 후계자 지위를 흔들 수 있는 크나큰 위협이었다. 김정일에게 계모 김성애와 김평일, 김영일의 존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1980~89년 스위스에서 유학생활을 한 김정남은 귀국 후에 병중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버리고 계모와 살림을 차린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영희와 두 아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아버지의 무관심을 더욱 못 견뎌 했다고도 한다. 이때 김정남의 지위를 흔드는 결정적 사건이 터졌다. 1996년 김정남의 이모인 성혜랑이 서방으로 망명한 것이었다. 성혜림의 모스크바 생활과 언니 성혜랑의 망명은 김정남의 입지를 극단적으로 좁게 만들었다. 고영희는 사생아라는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정남보다 자신의 아들인 정철에게 후계자의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때부터 고영희는 우선 김 위원장의 최측근이던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와 적극적으로 연대했고, 2002년 8월부터는 인민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고영희에 대한 개인 우상화 작업이 시작됐다. 고영희를 우상화하는 것은 단순히 그녀를 치켜세우는 게 아니라 그녀가 낳은 아들 김정철을 후계자로 밀어 올리기 위한 치밀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탄탄하게 진행되던 김정철 후계체제 구축은, 그러나 2004년 6월 유방암을 앓던 고영희의 죽음과 “후계자 논의를 중단하라”는 2005년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사실상 수면 아래로 잠복하게 된다.

    김정남이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체포된 사건은 고영희에게 김정남의 후계자 지위를 빼앗을 명분을 준 기회였다. 고영희가 사망한 이후에는 간혹 평양을 드나들고 있지만, 밀입국 사건 이후 그가 외국생활을 주로 하는 것에는 큰 변화가 없다. 아직은 본국에서 전해지는 거액의 용돈으로 호화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듯하지만, 김 위원장이 사망한 후에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신세로 전락할 공산이 커 보인다.

    셋째에게 권력을 넘겨준 옛 후계자의 운명. 삼성가의 장남 이맹희의 말로와 김정일의 장남 정남이 걸어가는 길은 이렇듯 닮은 대목이 많다. ‘수업 중인 후계자’라는 과도기적인 위치에서 선대(先代)의 공신그룹이나 측근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벌어진 탈락이라는 점에서도 대동소이하다. 이러한 구도는 후계자 선정의 가장 큰 몫을 당연히 선대 지도자가 쥐고 있지만, 그 구축과정에서 측근그룹이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후계자 자질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선대 측근들과의 분란은 곧 부친의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는 까닭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후계구축작업은 선대 권력 엘리트 그룹의 공동추인 혹은 협조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뜻도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지만 실제로는 권력 엘리트가 모두 참여하는 집단작업인 셈이고, 장남이라는 명분이나 개인적인 능력은 오히려 부차적이라는 뜻이다. 권력 주변인물들의 이해관계를 총체적으로 재정의하는 권력승계라는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현재 권력 엘리트들의 저항은 후계자 지위 자체를 흔들기에 충분한 힘을 갖는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원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김정은으로의 후계구축 과정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 지금 북한 권력의 핵심을 구성하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시 못할 지분을 갖는다는 뜻이다. 특히 장남이라는 명분을 바탕으로 언제든 복귀하려 시도하지 않겠느냐는 선대의 우려가 이맹희씨에게 부여했던 가혹한 운명은 김정남의 미래 역시 어두울 수밖에 없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부분이다. 쫓겨난 왕세자의 운명인 셈이다.

    ‘왕자의 난’과 우암각 사건

    삼성·현대·SK 경영권 승계로 본 북한 후계구도의 미래

    2001년 3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장례식에서 입관식을 지켜보고 있는 현대가 삼형제. 왼쪽부터 정몽구 현대차 회장,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정몽준 의원.

    2000년 벌어진 현대그룹의 이른바 ‘1,2차 왕자의 난’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후계구상을 둘러싸고 둘째 아들 정몽구(MK) 회장과 다섯째 아들 정몽헌(MH) 회장이 벌인 숨 가쁜 대결의 장(場)이었다. 현대가(家) 왕자의 난의 핵심인물은 단연 MH다. 가문의 실질적인 장자인 정몽구 회장에 비해 승계 정통성이 부족했던 MH가, 아버지의 측근이던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 등의 파워엘리트와 함께 부친의 숙원인 대북사업을 승계해 현대의 적통 후계자로 경영권을 승계하려 했던 것이 그 골자였다. 주지하다시피 결국 정주영 명예회장은 MH의 손을 들어주고, 이른바 1차 왕자의 난은 MH의 일방적 승리로 끝이 난다.

    사실 현대가의 기본적인 후계구도는 그룹을 5개 소그룹으로 나누고 이 중 MK는 자동차 그룹을, MJ는 중공업 그룹을, MH는 전자, 건설, 금융 및 서비스 그룹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MH는 형과 동생에게는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라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럽지 않은 기업들이 돌아간 데 비해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 초라하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대북사업을 계속 추진하려면 상대적으로 부실했던 전자, 건설, 금융으로는 여력이 충분치 않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1차 왕자의 난에서 상처를 입었던 MK는 이를 계기로 자동차 소그룹 분리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그룹의 유일한 회장으로 등극하는 데 성공한 MH는 한발 나아가 그룹의 후계구도를 아예 새로 짜기 시작했다. 허울뿐인 현대그룹 회장보다는 현대자동차라는 우량 계열사를 확보해 실질적인 파워를 거머쥐려는 계획이었다. 결국 MH의 2차 왕자의 난은 현대자동차 그룹의 경영권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핵심이었고, 이를 위해 그는 부친을 전면에 내세워 계열사에 대한 지분정리를 주도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전면 등장은 최대 수혜자인 MH가 최대 피해자인 MK의 반발을 저지할 수 있었던 사실상 유일한 힘이었다. MH의 마지막 승부수는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를 그룹 차원으로 확대해 정주영 명예회장과 MH 자신, MK ‘3부자의 동반퇴진’을 꾀하는 카드였다.

    그러나 3부자 동반퇴진은 자동차 그룹을 뺏기지 않으려는 MK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고, MH 자신 또한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다. 결국 이때의 계획이 정주영 명예회장만 외롭게 퇴진하는 ‘현대판 고령장’으로 마무리되면서 현대그룹은 원래의 후계구도대로 분할됐고, 이후 대북사업에서 재기를 시도했던 MH는 대북송금 수사과정에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결국 현대가의 후계구도를 둘러싼 일련의 흐름은 MH의 죽음과 이익치, 김윤규 등 측근그룹의 퇴진으로 사실상 마무리된다.

    지난 6월 한 국내 언론은 “2009년 4월말 김정남이 ‘어린놈이 날 죽이려 한다’는 말과 함께 마카오에서 싱가포르로 피신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국가안전보위부가 저질렀다는 이른바 ‘우암각 습격 사건’이다. 이 무렵 김정남은 고모부인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에게 도움을 청했을 뿐 아니라, 이후 해외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의도적으로 “후계에 관심이 없다, 조용히 살겠다”는 취지의 말을 반복했다.

    기사가 사실이라면 궁금증은 하나로 모인다. 왜 김정은이 김정남을 죽이려 했다는 것일까. 실질적인 장남인 김정남이 자신의 후계구도에 여전히 위협적인 세력이기 때문에 그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의도였을까. 그러한 개연성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조금 다른 차원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정은은 누구의 아들인가

    같은 6월 ‘중앙선데이’는 김정남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김정은이 고영희의 아들이 아니라 고영희 사망 이후 김정일의 네 번째 부인 역할을 하고 있는 김옥의 아들”이라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김정남 지인의 말을 본인에게 확인하는 차원이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김정남이 김정은의 출생의 비밀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뜻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보도였다. 앞서의 ‘우암각 사건’이 사실이라면 그 원인으로 유추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키워드인 셈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네 번째 부인으로 불리는 김옥은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한 후 1980년대 초 기쁨조로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김 위원장 집무실의 타자수가 되었고 내연의 관계로 발전했다. 소문의 골자는 김옥이 1984년 남자 아이를 출산했는데 이 아이가 바로 정은이라는 것이다(북한 당국은 최근 김정은의 출생연도를 1982년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한다). 김정남에 이어 또다시 사생아를 낳은 김정일이 정은을 부인인 고영희의 아들로 입적시켰고, 북한 내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장성택과 그의 처 김경희 등 극소수뿐이라는 이야기다.

    사실상 확인이 불가능하긴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김옥이 김 위원장의 네 번째 부인 역할을 하면서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서는 시기와 김정은이 후계자로 부상하는 시기가 비교적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에서 쉽게 넘기기 어렵다. 일종의 정황증거인 셈이다. 김옥은 고영희가 죽은 2004년 6월 이후 김 위원장과 동거에 들어가 해외순방에도 동행하는 등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다. 이후 로열패밀리로서 권력의 중심에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은 2008년 8월 김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로 알려져 있다. 병상을 장악해 김 위원장의 의사를 외부에 전달하고 외빈을 접견하는 등 장성택 부부와 함께 김정일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김옥이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9년 1월 김정은이 후계자 지명을 받았다는 소식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난 8월 김 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중국 방문에 김정은이 비밀리에 동행했고 김옥 또한 정상회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보도가 연이어 나왔다. 그림으로만 보자면 김정은은 아버지, 생모와 함께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의 혁명유적지를 방문하는 상황이 연출된 셈이다.

    이와 함께 2009년 4월 김정일 위원장의 통치자금을 비롯해 노동당의 재정을 관장하는 재정경리부장에 김효가 승진 임명됐다는 소식도 눈여겨봐야 한다. 재정경리부 부부장을 지낸 김효는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12기 대의원에도 선출됐다. 김효는 다름 아닌 김옥의 아버지다. 정은의 후계자 내정 이후 김 위원장의 통치자금과 당의 재정을 관리하는 핵심보직에 부친이 발탁될 만큼 김옥의 영향력이 커졌음을 시사한다.

    ‘왕비의 난’?

    성혜림이 고영희로 인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처럼 고영희 역시 김옥의 등장으로 인해 불안감에 시달렸다. 김옥은 고영희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김 위원장의 해외방문에 동행하는 등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정은이 실제로 김옥의 아들이라면, 김정남이 사실상 후계구도에서 멀어진 이후 고영희의 아들인 정철과 김옥의 아들인 정은 사이의 후계경쟁이 극도로 치열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굳이 이름 짓자면 ‘왕비의 난’인 셈이다. 그리고 그 절정은 2003년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 6월 김 위원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대남 정책의 사령탑 역할을 했던 노동당 비서 김용순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김용순은 김정일의 최측근이자 고영희의 최측근이었다. 1998년 미국으로 망명한 고영희의 동생 고영숙은 자신의 언니가 정철의 후계 가능성을 김용순과 적극적으로 상의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용순의 사망 직후인 2003년 9월 고영희 역시 교통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치는 중상을 입는다. 유방암이 재발해 치료를 받고 있던 고영희는 이 사고로 인해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2004년 결국 사망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북한 내부에서 당시의 교통사고가 김옥이 호위사령부 경비운수부 라인을 은밀히 동원해 고영희 승용차의 브레이크 라이닝을 파괴해 암살을 시도한 음모였음이 새롭게 밝혀졌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는 점이다. 김 위원장의 추가 조사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이 그대로 묻혀버렸다는 것.

    왕비의 난의 또 다른 축은 고영희 측의 반격이었다. 2003년 7월 김 위원장의 매제인 장성택 당시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김 위원장의 자강도 현지시찰 이후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 이후 그는 당 중앙위 검열에서 종파행위와 권력남용 행위로 가택연금당했고, 지방에 유배돼 1970년대 이후 두 번째로 ‘혁명화’ 처분을 받았다. 당시 장성택의 낙마를 주도했던 인물은 역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었던 리제강으로,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고영희의 최측근이었다.

    장성택은 한때 김정남의 강력한 후원자였으며, 정남이 후계자 지위에서 멀어진 후에는 고영희-리제강과 적대적 관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시 말해 고영희와 리제강에게 장성택은 정철로의 후계구도 구축에 가장 큰 위협이 될 인물이었다. 거꾸로 정은의 후계자 지위가 확정되고 장성택이 그 후견인으로 자리매김한 이후인 지난 6월 리제강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은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다.

    생전의 고영희는 성혜랑의 망명과 일본 밀입국 사건 이후 정남을 밀어내고 정철을 중심으로 후계구도를 새롭게 짜려고 시도했다. 결국 정남을 밀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새로 등장한 김옥과의 권력투쟁에서는 패배했다. ‘고영희의 난’이 ‘김옥의 난’에 의해 제압당한 셈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해외에서 떠돌고 있는 정남보다는 국내에 머물러 있는 정철의 운명이 훨씬 위태로워 보인다. 부친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이미 권력의 핵심에서 벗어난 그는 이미 ‘곁가지’ 신세다. 그의 미래 위로 사면초가에 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던 정몽헌 회장의 운명이 겹쳐 보인다면 과한 생각일까.

    과도권력의 숙명

    2003년 9월22일 최태원 SK㈜ 회장이 보석으로 석방됐다. 계열사 보유주식을 맞교환하는 과정에서 취한 부당이득과 계열사 분식회계, 계열사 주식 이면계약 등의 혐의를 받고 구속된 지 7개월 만이었다. 최 회장의 석방은 그가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의 장남으로서 다시 경영 전면에 나설 수 있는 1차적인 환경이 조성됐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당시 SK에는 과도체제였던 손길승 회장 체제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998년 최종현 회장이 타계한 후 SK는 전문경영인인 손길승씨가 그룹 회장직에 올라 ‘오너와 전문경영인 투톱 체제’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됐다. 이른바 ‘과도적 경영권’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게 이 무렵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최 회장이 아들의 후계에 대해 별다른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데서 찾을 수 있다. 선대 회장의 갑작스러운 유고와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후계체제 사이에서 최태원 회장이 그룹 전체를 맡을 역량을 갖출 때까지 이를 후원하고 관리할 과도권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삼성·현대·SK 경영권 승계로 본 북한 후계구도의 미래

    2001년 11월15일 SK C&C 데이터센터 준공식에서 SK 최고임원진이 준공 버튼을 누르고 있다. 왼쪽부터 SK C&C 변재국 사장, SK㈜ 최태원 회장, 손길승 회장, SK건설 문우행 사장.

    최종현 회장은 그 후원자로 손길승을 선택했고, 이후 손 회장은 주요 계열사 사장단 모임인 ‘수펙스(SUPEX) 추구협의회’ 의장을 맡으면서 그룹 전체의 경영과 대외관계 업무를 담당했다. 최태원 SK㈜ 회장은 그룹의 핵심 계열사 대표이사를 맡아 주로 그룹의 안살림을 챙기는 그림이었다. 즉 최 회장이 그룹 내에서 자신의 경영체제를 확고히 하는 동안 손 회장은 그의 후원자로서 대외적 환경을 조성했다. 손 회장이 그룹 회장직을 맡으면서 당시 38세로 어렸던 최 회장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1~2년가량만 회장직을 수행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러한 권력구조의 특징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러나 미처 예상치 못했던 여러 대내외 여건은 손 회장 체제를 연장시켰다. 1~2년이라던 과도체제는 최태원 회장이 보석으로 풀려난 시점까지 5년 넘게 이어졌고, 분식회계 문제로 상처를 입은 최 회장을 대신해 상당기간 계속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왔다. 과연 손길승 회장이 그간의 공언대로 최태원 회장에게 그룹 경영권을 순순히 넘길 것인지를 두고 갖가지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손 회장 역시 분식회계 문제로 유죄판결을 받았음에도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는 게 의혹의 진원이었다. 재계에서는 “최 회장이 보석으로 석방됐으니 SK는 당분간 엄청난 소용돌이를 겪을 것”이라거나 “최 회장이 없는 틈을 타서 밀고 들어온 손길승 회장 계보와 최태원 회장 계보 간의 치열한 힘겨루기가 예상된다”는 이야기가 운위됐다.

    갖가지 소문과 달리 SK그룹은 결국 최태원 회장 1인체제로 이내 자리를 잡게 되지만, 이 또한 예상하기 어려웠던 외부변수 때문이었다. 손 회장 중심의 과도경영 체제가 쉽게 물러난 중요한 배경에는 대선자금 제공 등의 문제로 손 회장이 더 이상 그룹 회장직을 유지할 명분이 없어졌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대선 당시 후계 수업 중이었던 최 회장은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설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치권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점이 일종의 면죄부 기능을 한 셈이었다.

    급작스러운 방중의 이유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보자. 지난 8월25일 저녁 이뤄진 김정일 위원장의 갑작스러운 방중은 26일 오전 지린시의 김일성 모교 방문을 첫 일정으로 시작해 30일 무단장의 김일성 항일유적지 방문으로 마무리됐다. 후진타오 주석과는 베이징이 아닌 창춘에서 정상회담을 했고, 경제시찰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김일성 혁명유적지 탐방에 공을 들였다. 앞서 말했듯 김정은이 동행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고, 이를 통해 김 위원장은 만경대와 백두의 혈통이 3대 세습의 확고한 정통성이라는 사실을 북한의 권력 엘리트들에게 확고히 인식시켰다.

    지난 4월 이미 중국을 다녀온 김정일 위원장이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을 북한에 불러놓은 상태에서 전격적으로 다시 중국을 찾은 것은 분명 이례적이었다. 급작스러운 방문의 이유로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경제 문제다. 중국에 경제적 지원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지만, 김정은의 동행이 사실이라면 후계문제가 더욱 중요한 사안이었다고 결론지어도 무방할 듯하다. 특히 후계자 문제를 중국까지 가져갔다는 것은 본인의 건강 때문에 이 문제를 조기에 마무리 지을 필요를 느꼈다는 이야기가 된다. 후계 공식화가 예상보다 앞당겨질 경우 일어날 수 있는 권력 내부의 불협화음을 최소화하기 위해 중국의 확고한 지지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자신의 건강에 불안감을 느끼는 김 위원장과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김정은 유일지도체제의 구축, 김 위원장으로서는 자신이 후대 승계의 전 과정을 지켜주지 못한 채 사망하는 경우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자연히 발생할 권력공백을 막으려면 과도체제가 불가피하다. 수령에서 후계자로 직접 이어지던 북한의 권력승계가 일단 과도체제로 넘어갔다 다시 후계자에게 이어지는 3단계 과정을 거쳐야 하는 셈이다. 북한으로서도 초유의 권력 실험이다.

    삼성·현대·SK 경영권 승계로 본 북한 후계구도의 미래

    2002년 10월28일 경기 용인시 닭고기 가공업체 마니커를 방문한 북 경제시찰단의 장성택 당시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닭고기 가공에 대한 설명을 주의 깊게 듣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국방위원회 위원이었던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의 부위원장 승진은 큰 주목을 받았다. 김정은 후계의 가시화 이후 권력의 실질적인 2인자로 인정받아온 그가 후계체제의 후원자이자 과도체제의 리더라는 위상을 대내외에 과시한 일종의 이벤트였다. 당대표자 대회를 앞두고 그의 측근들이 당 요직에 임명되는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장성택을 중심으로 하는 과도권력의 등장은 김정일 위원장 사후 혁명위업의 완성과 김정은 후계체제의 완결이라는 대외적 명분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번 등장한 과도권력이 과연 김정은 후계체제 완결이라는 애초의 목표에 머물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북한 권력체제의 특성상 과도권력의 수장인 장성택은 김정은이 수령의 자리에 올라서는 순간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정적(政敵)이 되고 만다. 앞서 살펴본 SK의 경우는 그 가장 적확한 실례다. 더욱이 평양은 이미 김정일 후계 구축의 최대 공신이었던 삼촌 김영주가 김 위원장의 실권 장악 이후 어떻게 제거됐는지 똑똑히 지켜본 바 있다. 권력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장성택은 과연 자신의 죽음을 앉아서 기다리게 될까.

    최대의 복병

    장성택이 주도하는 과도권력은 일정부분 북한 체제의 변화를 시도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김정은으로의 권력이양을 최대한 늦춰가며 중국과 손을 잡고 북한을 새로운 개혁·개방의 장으로 끌고 갈 가능성도 점쳐진다. 중국 역시 북한 내부 정치에 대한 개입을 노골화할 수 있다. 북한이 핵을 가진 채 과거의 수령체제로 복귀하는 것보다는 장성택 체제를 통해 중국식 사회주의 모델을 받아들이는 게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된다면, 일종의 암묵적 합의가 만들어질 개연성은 충분하다. 물론 이 경우 김정은은 장성택과 군부 등 북한의 파워엘리트 사이의 권력투쟁 속에서 희생양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

    SK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 과도권력이 애초의 목표 이상을 욕심내는 것은 리더 한 사람의 변심 때문이 아니다. 과도체제 안에서 힘과 이익을 공유했던 핵심그룹의 멤버들이 ‘세상이 바뀌는 순간’ 닥쳐올 권력상실이나 이후 자신이 놓이게 될 처지에 대해 공포감을 느끼는 순간 새로운 갈등이 배태되는 것이다. 어쩌면 과도체제의 리더 개인은 선대와의 약속을 지킨 미담의 주인공으로 남을지 모르지만 주변 인물들의 경우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정통성을 가진 새 권력이 과도체제의 구성원들을 전면적으로 포용할 가능성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장성택 개인의 성격이나 인척이라는 인연만 놓고 순조로운 3단계 권력이양을 점치기 쉽지 않은 이유다.

    앞서 말했듯 손길승 회장의 과도권력이 최태원 회장 체제로 쉽게 이양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대선자금이라는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면서 더 이상 그룹을 이끌어갈 명분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평양의 경우는 기업이 아니라 국가권력, 그것도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절대권력에 관한 문제다. 단순히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아니라 서로의 목숨 그 자체를 겨누는 싸움이다. 과연 장성택은, 혹은 그의 주변 인물들은, 김정은 후계체제가 완성되어가는 어느 순간 생명의 불안까지 무릅쓰고 권력을 내놓을 수 있을까. 물러서지 않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각오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인 행동 아닐까. 아직 젊은 후계자 김정은의 미래 혹은 북한의 순조로운 권력 세습을 위협하는 가장 큰 복병은 바로 여기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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