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호

온종일 본관 아닌 관저 머물러 특정인 ‘비밀접촉’ 경호상 불가능

‘의문의 7시간’, 박 대통령은 어디에?

  • 동정민 │채널A 청와대 출입기자 ditto@donga.com

    입력2014-08-21 15: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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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4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어디에 있었는지가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일본 ‘산케이신문’이 이를 대통령의 사생활과 엮어 가십 기사로 다루면서 외교 문제로까지 번졌다. 세월호 참사 첫 보고를 받은 오전 10시부터 중앙재난대책본부를 방문한 오후 5시까지 박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온종일 본관 아닌 관저 머물러 특정인 ‘비밀접촉’ 경호상 불가능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7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세월호 침몰사고의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청와대 대통령실 기관보고에 출석했다.

    7월 7일 국회 운영위원회장.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에게 물었다.

    “대통령이 처음 서면보고를 받은 (세월호 참사) 당일 오전 10시, 대통령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 위치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김 비서실장의 이 한마디 답변이 논란의 단서가 됐다. 대통령이 비서실장도 모르게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마침 그 즈음 증권가 정보지(지라시)에는 박 대통령과 정윤회 씨의 사적인 관계에 대한 루머가 퍼졌다.



    정씨는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던 1997~2004년 비서실장 격으로 활동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 시절 각별했던 고(故) 최태민 목사의 사위였다. 7월 14일 정씨가 부인과 이혼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다. ‘결혼 생활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다’는 등 흔치 않은 이혼 조건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입방아는 더욱 거세졌다. 김 비서실장이 세월호 침몰 당일 대통령의 행적을 몰랐던 것이 사생활, 혹시 정씨와 관련된 때문 아니냐는 억측이 제기됐다.

    7월 18일자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의 ‘대통령을 둘러싼 풍문’이라는 제목의 칼럼은 논란을 더욱 키웠고, 그 논란에 기름을 부은 건 생뚱맞게도 일본 산케이신문이었다. 산케이신문은 8월 3일자 ‘박근혜 대통령 여객선 침몰 당일 실종, 누구와 만났을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박 대통령과 정씨가 사적인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도했다. 산케이신문은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신문으로 최근 유흥수 주일대사 내정 엠바고(보도 유예)를 고의로 어겨 청와대 출입 등록이 말소된 상태였다.

    조윤선 정무수석비서관과 윤두현 홍보수석비서관은 나흘 뒤인 8월 7일 청와대 기자실을 찾아와 이례적으로 “산케이신문에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고 강력 대응을 천명했다. 그리고 다음 날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당일 청와대 경내에 있었다”고 해명했다. 논란이 시작된 지 한 달 동안 쉬쉬하다 뒤늦게 청와대가 해명에 나섰지만 한번 불붙은 논란의 불길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들은 박 대통령은 4월 16일 하루 종일 청와대 경내에 있었고 정씨와 만난 일도 없다고 얘기한다. 그동안 대통령의 행적이 논란이 된 적은 거의 없다. 경호상 대통령 동선(動線)은 공식 일정 외에는 밝히지 않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 그러나 이번에 예외적으로 대통령의 동선이 관심을 받게 된 건 정권이 자초한 면이 크다.

    5시간의 잘못된 보고

    가장 큰 원인은 대통령이 당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5시간 넘게 잘못된 보고를 받았다는 데 있다. 박 대통령은 오전 10시 김장수 당시 국가안보실장으로부터 세월호 사고가 발생했다는 첫 번째 서면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15분 뒤 박 대통령은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세한 상황을 확인한 뒤 해양경찰청장에게 내릴 지시를 전달한다.

    김 실장은 해경청장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헬기를 타고 있던 터라 통화가 되지 않았다. 이에 국가안보실은 해경에 “단 한 명도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 여객선 내의 객실, 엔진실 등을 포함해 철저히 확인해 누락되는 인원이 없도록 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전달했다. 그리고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10시 30분 관련 내용을 기자들에게 브리핑했다.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 시각은 300여 명의 탑승객이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뒤였다. 그 이후 거의 30분 단위로 국가안보실과 비서실은 박 대통령에게 서면 및 구두 보고를 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해경, 안전행정부 등 곳곳에서 보고를 받았는데 그 보고 내용이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한동안 해경의 보고는 탑승객 370명이 모두 구조됐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핵심 라인은 세월호 당일 점심식사를 하면서 “그나마 천만다행”이라며 안심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구조자가 172명뿐이고 300명이 넘는 인원이 배 안에 남아 있었다는 건 당시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

    오후 1시 42분 처음으로 해경이 청와대에 불안한 보고를 올린다. “370명이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일부 중복이 있었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오후 2시 36분 해경은 “(구조자가) 166명”이라고 정정했다. 청와대에 최초로 진실이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구조자가 그렇게 줄어든다면 나머지는 모두 배 안에 갇혀 있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박 대통령에게 정확한 보고가 이뤄진 것은 세월호 참사 첫 보고 후 5시간이 지난 뒤였다.

    “대처 늦은 건 아니다”

    오후 4시 10분 김기춘 비서실장은 긴급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했다. 그곳에서 박 대통령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대통령은 그 건의를 받아들여 오후 5시10분 본부를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처음에 구조 인원 발표된 것하고 나중에 확인된 것하고 무려 200명이나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그런 큰 차이가 날 수 있습니까”라고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구조자 통계도 못 내는 정부의 위기대응 시스템에 대통령은 크게 낙심했다고 한다.

    야당은 참사 당일 긴박한 상황에서 회의 한 번 주재하지 않고 책임자로부터 대면보고 한 번 받지 않았다는 지적을 끊임없이 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그런 지적이 있을 수 있지만 대통령도 5시간 동안 잘못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제대로 보고받은 뒤 현장을 찾는 데까지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대처가 늦은 건 아니다”고 해명했다.

    재난 사고가 터지면 대면보고보다 구두보고나 서면보고가 더 신속한 경우가 많다.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 고위직에 있었던 이는 “재난 상황에서 대통령이 회의를 빨리 소집할 경우 보고 준비를 하느라 오히려 인력이 분산될 수 있다. 상황은 빠르게 보고하되 현장 구조 작업에 더 집중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처음부터 상황을 제대로 보고받아 탑승객 300여 명이 세월호 안에 갇혀 죽음을 맞는다는 걸 알았다면 대처가 더 빨랐을 것이라는 게 청와대 측의 뒤늦은 후회다. 당연히 ‘의문의 7시간’과 같은 논란도 없었을 것이다.

    의혹을 증폭한 두 번째 원인은 김기춘 비서실장의 국회 답변. 김 실장은 7월 7일 박영선 원내대표가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자 “모른다”고 답했다.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댄 발언이었지만 그 발언은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행적이 한 달 넘게 입방아에 오르게 된 실마리가 됐다.

    김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동선을 모른다고 답하자 당장 세간에서는 ‘문고리 권력’ 소리를 듣는 3인방(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 이재만 총무비서관)이 비서실장보다 더 센 실세라는 의혹이 증폭됐다.

    하지만 김 비서실장은 박 대통령의 동선을 모두 알았다고 한다. 심지어 의문의 7시간 동안에 대통령을 직접 만나 이야기도 나눴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런데도 그는 왜 대면보고를 하지 않았다고 국회에서 답변해 야당에 공격의 빌미를 줬을까. 대면보고를 하지 않고 서면보고, 유선 구두보고만 했다는 김 비서실장의 답변 탓에 대통령이 세월호 대형 참사에 안일하게 대처했다는 지적은 더 커졌다.

    세월호 참사 당일 김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만난 것은 정식 보고 형태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때문에 김 비서실장이 그날 대통령을 만난 것을 구두보고로 여겼을 수 있다. 또 김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국회에서 소극적으로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답변일 수도 있다. 어찌됐건 김 비서실장의 답변은 청와대로서는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여권 관계자는 “김 비서실장이 ‘모른다’가 아니라 ‘경호상 어디 계셨는지 대답할 수 없다’고 답하며 ‘대통령은 당일 청와대 내부에 있었다’ 정도로만 솔직하게 답을 했다면 논란이 잦아들었을 거다. 대통령을 보호하고자 둘러댄 김 비서실장의 발언이 오히려 논란을 키워버렸다. 첫 단추를 잘못 꿰니 한 달 넘게 억측이 난무하게 됐고 그 억측을 바로잡으려 해도 쉽지가 않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관저 스타일’?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7시간 동안 어디에 있었을까. 주로 관저에 머문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청와대 본관으로부터 걸어서 5분 정도 올라가는 위치에 있는 관저는 퇴근 후 대통령이 사적으로 머무는 곳이다. 흔히 관저 하면 잠을 자는 침대만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관저에는 침실 외에 업무를 보는 집무실이 따로 있다.

    박 대통령은 주말 내내 관저에 머물며 보고서를 읽고 수시로 수석비서관들에게 전화를 하기도 한다. 평일에도 공식 일정, 비공식 접견이나 보고가 없을 경우 종종 관저 집무실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본관, 관저, 비서동 어디든 집무실이 있고 그 집무실에는 언제든 수시로 참모들과 연락할 수 있는 장치가 있기 때문에 굳이 본관에서만 근무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급한 경우 참모들을 관저로 불러 보고를 받기도 한다. 김 비서실장도 국회 답변과정에서 “비서진은 출퇴근 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청와대 경내에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집무실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온종일 본관 아닌 관저 머물러 특정인 ‘비밀접촉’ 경호상 불가능

    청와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박 대통령.

    관저에 자주 머무는 건 대통령의 스타일과도 관련이 있다. 박 대통령은 대선 전에도 일정이 없으면 서울 삼성동 자택에서 하루 종일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1980년 이후 사실상 감금 생활을 해왔고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한 것이다. 게다가 함께 사는 가족이 없는 박 대통령에게는 조용히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관저가 본관 집무실보다 유용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통치교육을 받아온 박 대통령은 비상상황에 대처하는 훈련이 잘돼 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별다른 일정이 없어도 머리를 단정히 하고 기본적인 화장을 하는 습관도 있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급한 일이 터지면 언제든지 외부에 나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공식 일정이 없을 때는 관저에서 업무를 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밤새 원고를 직접 고쳐 쓰거나 과음을 했을 때 관저에서 휴식을 취하며 업무를 챙겼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에 반해 기업문화가 몸에 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출퇴근 시간이 명확했다. 이 전 대통령은 정권 초반, 오전 6시 정도에 본관 집무실로 출근했다. 대통령이 일찍 출근하다보니 더 일찍 출근해야 하는 비서진의 고충이 커 김윤옥 여사의 건의로 출근 시간이 오전 7시경으로 늦춰지기도 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관저에서 신문을 오래 보도록 하기 위해 전날 저녁 신문 가판을 대통령에게 넣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본관이나 관저 모두 비서동과는 떨어져 있어 대통령이 어디에 있든 비서진이 보고하는 데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다만 심리적으로 관저보다는 본관이 편하다는 게 일선 비서진의 얘기다. 여성 대통령의 특성상 남성 참모들이 보고차 수시로 관저에 드나들기 부담스럽다는 얘기도 나온다.

    ‘만만회’와 ‘만회상환’

    정씨는 2004년 3월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로 당선되자 “앞으로는 공식적인 비서실장과 함께 일하시라”고 그만뒀다. 당시 박 대통령은 그를 붙잡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지금까지 10년 동안 박 대통령의 배후에 정씨가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야당이 주장하는 배후 실세 ‘만만회’(박지만 EG 회장,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씨) ‘만회상환’(이 비서관, 정씨, 윤상현 의원, 최경환 기획재정부 장관)에서도 꼭 빠지지 않는 인물이 바로 정씨다.

    흔히 문고리 권력 3인방의 배후에 정씨가 있다는 소문도 많다. 3인방 중 정호성 비서관과 이재만 비서관은 정씨가 비서실장을 할 때 뽑은 이들이다. 실제로 2004년 비서실장에서 물러난 직후에는 대통령이나 보좌진과 꽤 왕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07년 대선 경선에서 패배하고 2008년 이후에는 3인방 보좌진과도 사실상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3인방 보좌진은 늘 마음 한구석에 정씨에게 제대로 연락 한번 못하는 데 대한 미안함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2004년까지 국회에 머무는 동안 기자들과도 꽤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를 기억하는 기자들 사이에서는 ‘매너 좋은 신사였다’는 평이 많다. 그러나 2004년 이후에는 기자들과도 일절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7월 9일자 ‘중앙일보’에 김진 논설위원이 정씨와 만난 내용이 실려 관심을 끌었다. 정씨는 “대선 이후 박 대통령과 접촉한 건 당선 후 대통령이 나에게 전화를 한 번 한 게 전부다. 7년 전에 사실상 나는 ‘잘린 것’이다. ‘만만회’는 소설이다. 실체가 없다는 걸 그들도 알 것이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조사해달라”며 배후설을 해명했다.

    3인방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정의로 보면 이들이 나에게 연락하는 게 도리인데, 나는 섭섭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억측은 많지만, 다각도로 취재한 바에 따르면 정씨와 대통령 혹은 3인방과의 접촉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정씨가 신이냐. 대통령은 아무리 비공개 일정이라도 혼자 움직일 수 없다. 경호팀과 경찰이 다 알게 되는데 만약 대통령이 정씨를 한 번이라도 만났으면 소문이 나게 돼 있다. 대통령도 여성인데, 이런 악의적인 소문은 여성에 대한 인권 유린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사생활만큼 세간의 이목을 끄는 사안도 없다. 정권 5년 내내 정씨와 관련된 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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