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미년 들어서도 이른바 ‘갑질’논란은 여전하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유행했던 ‘갑오년과 함께 갑(甲)들의 세상이 가고 을(乙)들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덕담은 말 그대로 덕담에 그칠 듯싶다. 오히려 갑질을 넘어 초(超)갑질, 슈퍼 갑질의 시대가 도래한 듯하다.
갑질 사건은 올 들어서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백화점에 온 모녀 고객이 아르바이트 주차요원 4명을 무릎 꿇리고 폭언을 퍼부은 사건에 이어, 이마트 VIP 회원이 경비원을 폭행하는 일도 있었다. 또 롯데마트는 제품 홍보를 위한 시식 행사 비용 전액을 납품 업체에 떠넘기는 갑질을 자행하다 적발됐고, 소셜커머스 업체 위메프는 수습사원 11명을 2주일 동안 혹사하고 전원 해고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최근 한 달간(2014년 12월 8일~2015년 1월 10일) 트위터와 블로그를 통해 주고받은 글들을 ‘갑질’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 추출 건수가 무려 8만323건에 달했다. 갑질이라는 단어가 그만큼 보편화했다는 얘기다. 한편으로는 전근대적이고 반인권적인 갑질에 대해 우리 사회가 분노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네가 뭔데 내 위에 서려고…”
‘갑질’에 대한 언급량 추이를 보면, 조현아 전 부사장의 구속영장 발부와 동생 조현민 전무의 ‘복수 문자’가 공개된 12월 31일을 기점으로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틀 후 조 전무가 자신이 대표이사로 있는 회사 건물 1층 커피숍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영업을 못하게 한 사실이 추가로 폭로되면서 ‘갑질’ 언급량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평소 1000~2000건에 머물던 것이 이날 하루에만 4000건을 훌쩍 넘겼다. 뒤이어 백화점 쇼핑 모녀의 아르바이트 주차요원 폭행 사건, 이마트 VIP의 경비원 폭행 사건, 위메프 수습사원 전원 해고 사건 등이 잇따르면서 언급량은 연일 5000건을 오르내리면서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갑질 논란을 언급한 글에 대한 리트윗이 증가하는 등 트위터 확산력도 커졌다. 그만큼 갑질 논란에 대한 사회적 반응이 활발했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아이디 [@Yello****]을 쓰는 사용자가 트위터에 올린 “프랑스인들에겐 갑질이라는 것이 잘 안 통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는 우리의 왕을 단두대에 세워 처단한 사람들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네가 뭔데 내 위에 서려 하느냐’가 바탕이기 때문”이라는 글이 2000회 이상 퍼져나갔다. 또 [@3rd_****]의 “갑질은 문화가 아니라 인권 유린입니다”라는 글은 1500회 정도, [@sept****]의 “갑을 관계가 없는 나라는 없지만 한국에서 유독 가혹한 것은 국가주의 때문이기도 하다.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되고 나라가 잘되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생각. 그런데 이 국가주의는 왜곡된 애국심보다도 노동 착취의 가리개인 경우가 더 많다”는 다소 길고 분석적인 글도 500회 가까이 리트윗 됐다.
조기숙의 ‘을 비판’도 논란
최근 한 달간 ‘갑질’과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6150건으로 압도적 1위였다. 2위는 대리기사 폭행 논란으로 기소된 새정치연합 김현 의원이 차지했고(1542건), 3위는 대한항공에 처남 취업을 청탁한 사실이 드러난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이 올랐다(1534건). 이어 4위는 박근혜 대통령(1025건), 5위는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687건) 등의 순이었다.
함께 언급된 단체 연관어 역시 ‘대한항공’이 1위(6957건)에 올랐다. 2위는 주차요원 폭행사건에 휘말린 ‘현대백화점’(6869건). 수습사원을 전원 해고한 위메프가 3위(1283건)를 차지했고, 롯데마트와 크라운제과 등이 뒤를 이었다.
일부 저명인사들도 갑질 논란에 휘말렸다. 노무현 정부 시절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 때문에 격한 논쟁의 중심에 섰다. 조 교수(@leastory)의 글은 백화점 모녀의 아르바이트 주차요원 폭행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우리 사회 갑질은 새로울 것도 없다만, 백화점 아르바이트생 4명이나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 하루 일당 못 받을 각오로 당당히 부당함에 맞설 패기도 없는 젊음. 가난할수록 비굴하지 말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면 좋겠다.”
이마트 고객이 경비원에게 욕설과 폭력을 가하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갑질’논란이 더욱 거세졌다.
논란이 일자 조 교수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약자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자는 겁니다. 노무현은 그 아르바이트생보다 더 가난했지만 자신의 자존심과 신념을 지켰습니다”라고 해명성 글을 올렸다. 여기에 “땅콩회항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젊지 않은 나이에 퇴사를 각오하고 누군가 폭로했기 때문입니다. 아르바이트생이 잘못이 없어도 갑인 고객에게 머리를 숙이고 사과를 할 수는 있겠지만 단체로 무릎 꿇을 만큼 우리 사회가 그렇게 엉터리인가요”라며 자신에게 쏟아진 비판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러자 “소비자 앞에 정규직뿐 아니라 임원까지 무릎 꿇는 사회에서 아르바이트생에게 저항하라고 하는 것이 합당한 요구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한마디로 비판의 화살을 잘못 들이댔다는 지적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가 무리하게 추진한 비정규직법안이 을들의 숨통을 더 조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도 많았다.
‘부사장’과 ‘사무장’이 2, 3위
갑질 논란의 중심에는 조 전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이후 한 달 동안 ‘조현아’와 ‘땅콩’을 함께 언급한 글은 무려 36만8103건이나 됐다. 하루 평균 1만 건 이상 꾸준히 언급된 셈이다. 언급량 추이를 보면 12월 9일 2만9604건으로 정점을 찍었다.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이 있던 12월 19일을 전후로 급격히 줄어든 언급량은 같은 달 31일 조 전 부사장의 구속과 동생 조 전무의 ‘복수 문자’ 파문으로 다시 늘었다. 앞서 분석했던 ‘갑질’ 언급량 추이와 거의 같다.
그러다 1월 10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이 사건을 다시 조명하면서 ‘조현아’와 ‘땅콩’ 언급량은 하루 2만 건 이상으로 급증했다. 이와 관련 2000회 이상 리트윗을 통해 빠르게 퍼져나가는 글들 중의 하나다.
[@jung****] “사무장은 자신 보호해주려다 힘든 순간 보내고 있는데, 땅콩항공 피해자라는 여승무원은 교수 제의 받고 ‘폭행폭언 없었다’고 진술. 진술 받으러 갈 때 웃는 게 카메라에 포착. 웃음 사진 본 사무장 표정….”
조현아 ‘땅콩회항’ 사건의 전체 연관어 1위는 12만2632건의 압도적 언급량을 보인 ‘대한항공’이다. 2위는 조현아의 직급인 ‘부사장’으로 8만5934건을 기록했다. 3위는 4만928건의 ‘사무장’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즉 갑을의 직책이 나란히 2, 3위에 오른 점이 이채롭다. 4위는 3만545건의 ‘승무원’. 5위는 2만7022건을 기록한 ‘검찰’이 차지해 검찰 수사에 대한 관심을 반영했다. 6위에는 조현아의 쪽지 사과와 관련해 논란이 증폭되면서 ‘사과’가 올랐고(1만9069건), ‘조현민’‘국토부’ ‘구속’ ‘재벌’ 등이 뒤를 이었다.
인격 파괴 행위
긍·부정 연관어 분포를 보면, 부정어 분포가 67.0%로 15.7%에 그친 긍정어 분포를 압도했다. 긍·부정 연관어 1위는 ‘폭행’(1만1369건), 2위는 ‘증거인멸’(8228건)이었다. 조 전 부사장의 사무장과 승무원 폭행 혐의, 그리고 대한항공 측의 지속적인 증거인멸 시도에 대한 비판적 글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3위는 ‘안전’이 차지해 조 전 부사장의 슈퍼 갑질이 승객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혐의’ ‘울다’ ‘분노’ 등이 높은 순위에 올랐다.
조 전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처럼 재벌 3세의 슈퍼 갑질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일상적 갑질에 비해 오히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국민 모두 공분해 특권적 횡포를 비판하면 카타르시스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저성장, 저고용 시대를 살아간다. 갑을 논란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더욱 강퍅해진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정규직이 800만 명을 넘어선 비정상적인 고용시장에서 정규직조차 갑질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도처에서 불거지는 사회적 갑질 논란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을의 수난이 결코 갑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갑질은 대체로 불법이며 을의 인격을 파괴하는 나쁜 행위다. 을미년이 사회적 약자, 사회적 을을 한 번 더 생각하는 따뜻한 공동체의 출발점이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