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호

“586운동권 정치·이념적 파산… 곧 환갑, 짐 덜 주고 떠나라”

학생운동 주역→횟집 사장 함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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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입력2022-02-2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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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년 美문화원 점거농성 주도 586 운동권 상징

    • 변절? 현실에서 살다 보면 바뀌는 게 당연

    • 언제까지 친일파 타령하며 살 텐가

    • 무능한 데다 이익 탐닉에 내로남불·위선

    • 당신 하는 거 보니 못 찍겠다고 尹에게 말했다



     횟집 ‘네모선장’을 운영하는 함운경 씨가 1월 25일 ‘신동아’와 만났다. [조영철 기자]

    횟집 ‘네모선장’을 운영하는 함운경 씨가 1월 25일 ‘신동아’와 만났다. [조영철 기자]

    “1980년대, 함운경 모르면 간첩이었다.”

    지난해 12월 22일 윤석열(62)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함운경(58) 씨가 운영하는 전북 군산시 횟집 ‘네모선장’을 방문해 한 말이다. 함씨는 서울대 물리학과 82학번으로 이른바 ‘586 운동권’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다. 1985년 결성된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산하 조직 삼민투(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같은 해 5월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2년 9개월 복역하고 1988년 석방됐다. 계속 운동권에 남은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두 번 더 옥살이했다.

    수감 생활을 마친 후에도 파란만장한 삶은 이어졌다. 재야에서 사회운동에 매진하다 정치판으로 뛰어들었지만 빛을 보진 못했다.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관악갑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고향 군산으로 돌아와 재도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02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2006년 전국동시지방선거,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쭉 군산에서 출마했지만 연이어 고배를 마셨다.

    생업 전선에서도 고군분투했다. 복역 후엔 학원강사로 일했고 군산으로 내려온 뒤 2011년부터는 조경업에 몸담았다. 사업이 실패해 큰 빚을 졌고 2016년 신용불량자 판정을 받았다. 재기를 위해 그가 택한 일은 수산물 유통·가공업. 멸치 선물세트를 시작으로 온라인 판매에 주력하다 지난해 9월 횟집을 열었다.
    함씨가 다시금 세간의 관심을 끈 건 지난해 6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장사해 보니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사기”라고 발언하면서부터다. 당시 윤석열 후보는 지인들에게 함씨의 인터뷰 기사를 “한번 읽어보라”고 권할 만큼 공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2월 1박 2일의 호남 방문 일정 중 짬을 내 함씨의 횟집을 찾은 이유다.



    그를 만난 날(1월 25일)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서울에서 군산까지 가는 길이 예상보다 막혀 약속 시각인 오후 2시에 빠듯하게 도착했다. 횟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비릿한 내음이 코를 찔렀다. 함씨는 15분쯤 지나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타났다. 2019년 10월 간판을 달다 추락해 다리가 부러졌다. 아직도 걷기가 불편한 상태라고 했다. 함씨는 “설 연휴 택배노조 파업이 겹쳐 정신이 없다. 늦어서 죄송하다”고 했다. 그는 매우 분주해 보였다. 전화기가 수시로 울렸다. 연신 전화기를 붙잡고 물건을 판매하려 애쓰는 모습은 영락없는 자영업자의 그것이었다.

    “꿈꾸던 나라 아니니 계속 ‘할 말’ 하는 거 아니겠나”

    1985년 5월 24일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에서 함운경 씨가 피로에 지친 표정으로 필담을 통해 창밖의 취재기자들에게 외부 동정을 묻고 있다. [동아DB]

    1985년 5월 24일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에서 함운경 씨가 피로에 지친 표정으로 필담을 통해 창밖의 취재기자들에게 외부 동정을 묻고 있다. [동아DB]

    상황이 정리되고 마주 앉으니 “내가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뭐 볼 게 있다고 왔느냐”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첫 만남의 어색함을 풀 겸 “요즘은 무슨 생선이 제철이냐”고 물으니 “겨울엔 생선이 지방을 많이 비축해 웬만한 건 다 맛있다. 회 포장해 가시라”며 웃었다. “인자”라는 전라도 사투리를 자주 썼다. 느릿하고 둥근 말투가 586세대를 논할 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586 운동권 세력의 시대착오적 사고방식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그들의 시대는 끝났다”며 날을 세웠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후보가 “1980년대에 함운경 모르면 간첩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운동권에서 위상이 어땠나.

    “알려진 것처럼 소위 ‘우두머리’는 아니었다. 당시 핵심 지도부 역할을 한 사람은 따로 있다. 김한정(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적이다. 대형 로펌 대표 변호사로 활동하는 친구도 있다. 그들은 운동권 선배들로부터 학생운동을 지도할 역량을 갖췄다고 인정받은 인물이다. 나 같은 사람은 데모하며 현장에서 뛰는 거고(웃음). 삼민투 위원장도 우연한 계기로 맡았다.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도 원래 서울대 공대 팀에서 준비했는데, 논의 중에 공대 부총학생회장이 못 하겠다고 해서 내가 맡았다. 얼굴마담 했다고 보면 된다(웃음).”

    언제부터 학생운동에 관심이 있었던 건가.

    “고등학교 때부터다. 내가 나온 군산제일고엔 의식 있는 선생님이 많았다. 학창 시절 오송회 사건(1982년 군산제일고 전·현직 교사 9명이 이적단체 조직과 간첩행위 등으로 구속된 사건)으로 잡혀 들어간 선생님들과 친해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학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왜 학생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나.

    “당시 나에겐 두 가지 마음이 병존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자는 마음과 현실에 대한 분노. 후자가 두드러지니 소위 ‘스카우트’된 거다.”

    현실에 대한 분노?

    “부모님 두 분 다 공직에 계셨는데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 가세가 기울었다. 중산층에서 졸지에 빈민이 됐다. 두 분이 정말 열심히 살았지만 운이 좋지 않았다. 충격이 컸다. 그때 알았다. 열심히 노력해도 세상은 사람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걸.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에 분노가 생겼다.”

    화풀이하기 위해 학생운동을 한 건가.

    “단순한 ‘화’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분노. 이 세상이 좀 더 나아질 수 있는데, 노력하는 사람이 더 보상받을 수 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분노. 당시엔 지금보다 불평등과 가난이 훨씬 심했다. 구로공단에 가면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가 가득했고, 서울대 앞 봉천동은 전부 빈민촌이었다.”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건가.

    “당시 ‘더 나은 세상’이란 마르크스가 예언한 곳이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 저변에 있던 사상은 ‘사회주의’다. 사회에 대한 공부, 사회를 보는 시각 모두 사회주의 이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런 나라를 만들고 싶어 정치에 투신했나.

    “원래는 그랬지만 1989년 소련이 몰락하며 많은 게 변했다. 이론으로 꿈꾸던 이상사회가 현실에선 불가능함이 증명된 사건이다. 당시 ‘운동’하던 사람들에겐 참여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등 시민단체를 통한 시민운동이나 정치권 진입 외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나는 정치를 택했다. 내가 좀 앞서 뛰어든 편이고. 나중엔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더라.”

    다섯 번 낙선했다. 결국 정치인이 되지는 못했는데.

    “대학생이 된 후부터 ‘정치활동’은 계속했다고 생각한다. 꼭 정치를 해야 정치인인 건 아니다.”

    지금 세상은 학생 시절에 꿈꿨던 나라에 가깝나.

    “아니니까 계속 ‘할 말’을 하며 사는 거 아니겠나(웃음).”

    “주술(呪術) 같은 얘기를 아직도 하니 사회가…”

    학원 강사, 조경업을 거쳐 횟집을 열었다. 왜 수산업을 택했나.

    “조경 사업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첫 번째 선거에서 낙선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였다. 장인어른이 나무 농사를 지었는데, 나에게 조경 사업을 해보라고 해 시작했다. 그런데 건설업은 ‘로비’를 잘해야 되더라. 기술보다 자금을 융통하는 게 더 중요했다. 돈을 갖고 있는 사람과 엮여야 하고 비위도 잘 맞춰야 한다. 군산 공무원 중에 내 후배가 많다. 관공서에 가서 그들이 만나주길 기다리곤 했는데, 스스로가 한심해지더라. ‘내가 뭐 하고 있나’ 싶고. 이와 달리 수산물 유통·가공업은 소비자의 욕구에 맞춰 물건만 팔면 된다. 2016년 멸치 선물세트 유통을 시작으로 생선을 취급하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

    함씨는 페이스북에 글을 자주 쓴다. 정치 현안에 대한 ‘쓴소리’나 일상에 관한 글도 간간이 보이지만 대부분은 사업과 관련된 일이다. 상품을 홍보하기도 하고 사업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지난해 11월엔 “새로 뽑은 직원이 4일 만에 그만뒀다”며 “쉬운 일이 없다”고 썼다.

    사업 현황은 어떤지 궁금하다. 매출이 어느 정도 되나.

    “한 달에 4000만~5000만 원이다. 최저임금으로 5명에게 급여를 줄 수 있는 수준이다.”

    월 4000만~5000만 원인데, 그렇게밖에 안 되나.

    “마진율이 낮다. 현재 직원은 4명이다. 잘 안 되는 달은 직원들 월급 250만 원 주고 나는 150만 원 가져간다. 1~2월이 제일 힘들다. 택배로 물건을 팔아야 하는데 설 연휴가 껴 있어 보름은 영업 못 한다. 이럴 땐 월급 주기도 힘들다. 당연히 난 한 푼도 못 가져간다.”

    온라인 판매와 횟집 영업을 병행하고 있는데.

    “2018~2019년엔 온라인 판매와 생선가게를 병행했었다. 그런데 잘 안 됐다. 전통시장에 손님이 잘 오지 않는 데다가 수산물 구입을 위해 굳이 따로 생선가게를 찾지 않더라. 그래서 한동안 온라인으로만 판매했다. 쿠팡, 네이버, 카카오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매출이 대부분이다. 지금도 횟집은 매출이 많지 않다.”

    플랫폼 수수료는 어느 정도 되나.

    “쿠팡의 경우 10.2% 뗀다. 그런데 여기선 광고를 하지 않으면 물건이 안 팔린다. 광고비까지 고려하면 매출의 30%는 가져간다고 봐야 한다.”

    매출의 3할이면 너무 큰 것 아닌가.

    “당연한 거다. 플랫폼이 없었다면 물건을 팔 생각조차 못 했을 거다. 플랫폼 사업자를 비난하는 건 옳지 않다. 더 많이 팔아 이득을 낼 수 있게끔 하는 게 옳은 마인드다.”

    사업하며 힘든 점은 없나.

    “뭐든지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장 어렵고.”

    지난해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을 비판했다. 사업이 더 어려워졌나.

    “더 힘들어진 건 맞지만 그보다는 정책 설계자의 사고방식이 못마땅하다. 국민소득을 늘리기 위해 가장 좋은 건 경제가 성장하는 거다. 그런데 최저임금 인상은 열심히 일하는 사업주에게 뺏어서 나눠주겠다는 것 아닌가. 자신이 직원 고용해서 월급 줘보면 그런 생각 못 할 거다. 급여는 사회적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져 형성된다. 인위적으로 건드리면 비숙련 일꾼들은 시장에서 쫓겨난다. 인건비 비중이 큰 업장은 직원을 해고한다. 보호하려 했던 계층이 오히려 타격을 입는 거다. 지난 대선 때 현 정권이 내세운 공무원 증원 공약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젊은이들보고 공무원 되라고 독려하는 나라가 앞으로 더 발전하겠나. 아니나 다를까 지금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을 대표하는 세력이 586 운동권 아닌가. 소싯적 함께했던 사이 중 현재 고위직에 있는 사람도 많을 텐데.

    “직책은 상관없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지금 사회의 주류가 민주화 세력이라는 점이다. 고로 그들의 사고방식이 주류다. 사회 전반 핵심을 차지한 인물이나 의사결정 권한이 있는 자가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책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제가 물러간 지 80년이 다 돼가는데 아직도 친일파 타령을 하고 있다.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가 독재를 거치며 ‘적폐’가 됐으니 청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주술(呪術) 같은 이야기를 아직도 하고 있으니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리 만무하다.”

    민주화 세력이 기득권 세력이 됐다는 건가.

    “기득권 세력뿐이겠나(웃음). 사회의 주류로 자리매김해 권력을 가졌음에도 세상은 그대로다. 나이가 많은 게 문제가 아니다. 자신들이 분노해마지 않았던 사회의 부조리를 그대로 둔 채 이익에 탐닉하는 ‘내로남불’과 ‘위선’이 문제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 세력은 ‘과오가 있다’ 정도가 아니라 정치적·이념적으로 ‘파산선고’ 하는 게 맞다. 나도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우리가 민주화운동을 해서 자랑스럽니 마니 하는 이야기는 그만하는 게 맞다.”

    이상이 아닌 현실에 답 있다

    지난해 12월 22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함운경 씨가 운영하는 횟집을 찾았다. [동아DB]

    지난해 12월 22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함운경 씨가 운영하는 횟집을 찾았다. [동아DB]

    함씨는 지난해 11월 24일 페이스북 계정 소개 글을 고치며 “전두환과 맞서면서 커온 민주화 세력도 전두환이 죽으면서 역할을 다했다는 생각이 어제 문득 들었다. 전두환을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전두환보다 못한 실력밖에 안 된다면 치욕이 될 것 같다. 지금은 그럴 가능성이 높다.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겠다고 했는데 불편만 주고 자기 몫도 제대로 못 하고 산다”고 썼다.

    페이스북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민주화 세력도 생명이 다한 것 같다고 썼다.

    “전 전 대통령보다 더 못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본다. 너무 무능하다. ‘파산’이라는 표현을 쓰는 나도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이 지금처럼 국운을 망가뜨린다면 역사가 어떻게 평가할까. 1980년대에 운동을 통해 민주화에 기여했으나 시대에 뒤떨어져 나라를 퇴보시킨 주역으로 불리지 않겠나. 반대로 군부가 학살로 정권을 장악하고 독재로 수많은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한 건 맞지만 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는 평가를 받으면 우리 세대의 삶은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만다. 이 점이 안타깝고 화가 난다.”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주도했던 ‘동지’들은 1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만난다. 함씨의 말에 따르면 그를 포함해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김민석 민주당 의원, 고려대 대표이던 신정훈 민주당 의원 등 현 정권 인사들도 참석한다.

    김민석 의원, 신정훈 의원과는 이제 견해가 많이 다를 듯하다.

    “다른 대로 그냥 사는 거다.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 중엔 아직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친구도 있다. 서로 다른 걸 알지만 20대의 경험이 너무 강렬해 60살 다 돼가는 데도 아직 본다.”

    만나면 무슨 얘길 하나.

    “일상적 얘기도 하고 토론도 한다. 얼굴 붉히면서 싸우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또다시 본다(웃음).”

    그의 지인 모두가 ‘다름’을 인정하는 건 아니다. 현 정권과 586 운동권에 대해 날 선 비판을 쏟아내는 그를 비난하는 지인도 있다. 함씨가 지난해 12월 윤석열 후보와 만나자 그의 지인 중 하나는 함씨의 페이스북에 “윤석열과의 만찬 뉴스에 왜 함운경 이름 석 자가 나오나요? 참으로 실망입니다”라는 내용의 글을 쓰기도 했다. 함씨는 “지난해 기사가 나간 이후 나를 변절자라고 욕하는 사람이 많다. 횟집에 쳐들어와 장사를 못 하게 하겠다며 협박한 사람도 있다”고 밝혔다.

    함께하던 동료들에게 비난을 받으면 더 서운하지 않나.

    “기분이 매우 나쁘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듣기만 한다. 괜히 싸워서 일을 키우고 싶진 않으니까. 대표적인 비난이 ‘변절’했다는 건데,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절개라니(웃음). ‘나만 왜 이렇게 변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마도 군산에 홀로 떨어져 있어서 그런 듯하다. 서울에서 벗어난 곳에서 세상을 보니 다른 면이 보이는 거다. 생업에서 분투하며 깨닫는 것도 있다”

    그게 뭔가.

    “좌파는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설계해 그것을 이뤄내려고 한다. 꿈에 그리는 ‘이상사회’가 존재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살다 보면 뜻대로 안 되는 게 너무 많다. 마음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것을 수십 년, 수십 차례 겪다보면 사람이 보수화될 수밖에 없다. 보수는 경험에서 배워 조금씩 더 나은 길을 찾아감을 의미한다. 충돌·마찰과 타협하며 서서히 변하는 것이다. 현실을 뜯어고치려 하면 잘 안 된다. 사람의 본성에 맞게 제도를 점진적으로 바꿔줘야 한다. 그게 정치의 역할이다”

    당신은 좌파인가 우파인가.

    “현실을 어떻게 보는지에 달린 것 아닐까. 난 국민의힘은 역사에서 퇴출돼야 할 정당이고 민주당은 심판받아야 할 정당이라고 여겼다. 그저 진정한 자유주의 정당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윤 후보를 만나고 나니 졸지에 그의 선거운동원이 된 ‘변절자’로 여겨진다. 난 장사하고 있는데 그가 찾아왔을 뿐이다.”

    예고도 없이 온 건 아닐 텐데.

    “보좌진이 먼저 전화로 연락해 오긴 했다. 어떤 지인은 나보고 도망가라고 하더라. 본인이 온다고 하는데 뭘 막나. 와서 물건이나 많이 팔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웃음). 윤 후보에게도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 하는 거 보니 못 찍겠다고(웃음).”

    윤 후보를 만나보니 어떤 사람 같던가.

    “인간적으론 괜찮은 사람 같았다. 주변인들이 왜 ‘석열이 형’이라고 하는지 알겠더라. 포용력 있어 보였다.”

    586, 짐이 되진 말아야

    함씨는 뽑을 사람이 없어 고민 중이라고 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는 나라를 파멸로 이끌 국가적 재앙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대선후보로 정한 민주당도 한심하다. 아무리 정치는 차선, 그게 안 되면 차악을 고르는 거라지만 선택지가 없어 괴롭다.”

    그가 바라는 정치는 뭘까. 횟집 이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네모 선장’은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의 주인공 네모 선장(Captain Nemo)에서 따온 것이다. 네모 선장은 잠수함을 타고 다니며 바닷속 보물을 찾아 전 세계 피압박민을 돕는 인물이다.

    횟집 이름에 정치적 의미가 담긴 듯하다.

    “나는 세상의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군산의 재단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다. 정치를 해보겠다고 출마하면 군산시민들이 후원금을 걷어줬다. 횟집 한다고 하니 군산시민들이 주식회사를 만들어 도왔다. 내 삶은 빚쟁이 인생이다. 받은 은혜를 다 돌려주고 죽는 게 나의 꿈이다.”

    그 수단이 정치였던 건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지만 ‘반드시’는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 사회에 환원해도 되지 않나. 군산이든, 대한민국이든 내가 속한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남기고 싶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치가 어떻게 발전했으면 좋겠나.

    “국민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지금보다 미래가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을 주는 거다. 정치하는 사람의 가장 큰 목적은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번 대선을 통해 우리 사회가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특히 나와 같은 586 운동권 세대에 말하고 싶다. 우리가 곧 환갑이다. 앞으론 더 젊은 사람들이 큰 역할을 해나가야 할 텐데, 그들에게 짐은 덜 주고 떠나야 하지 않겠나. 꼭 고민해 봤으면 한다.”



    이현준 기자

    이현준 기자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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