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호

헌법 개정으로 견제 장치 만들어야

[Special report | 사실상 內戰…개헌, 실행만 남았다] ‘제왕적’ 입법·사법부가 나라 망쳐…개헌 논의 촉발

  • 장용근 홍익대 법학과 교수

    입력2025-03-25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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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대 야당의 입법 폭거, 대통령 3인 탄핵소추

    • 예산 삭감, 탄핵소추권 남용에 삼권분립 깨져

    • 법관이 일하는 선관위와 헌재, 공정성·도덕성 치명타

    • 국민발안제 도입, 국민투표 대상 확대 필요

    • 헌재 결정, 대법원 판결에 국민소환 가능해져야

    헌법재판소.
뉴시스

    헌법재판소. 뉴시스

    한국은 광복과 동시에 민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궤도에 진입한 후 숱한 독재와 정치적 혼란을 겪은 끝에 1987년 개헌에 성공했다. 이른바 ‘87년 체제’로 민주주의를 이룩하지만 갑작스러운 민주화로 충분한 고민과 논의를 거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1987년 개정된 헌법은 당시 민주화를 주도한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야 3당 대표)’처럼 강력한 지도자를 전제로 하는 대통령직선제 실시, 대통령이 가지고 있던 국회해산권 폐지, 헌법재판소(헌재) 신설 등 일부 내용을 수정해 기존 5년 단임 대통령제를 유지하게 했다. 이후 38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87년 체제는 국민의 정치적 성숙도를 고려하지 않은 채 한국 사회가 억지로 입고 있는 ‘맞지 않는 옷’으로 전락했다.

    권력분립이란 분리된 권력이 정당한 권한 행사에 대해서는 상호 존중하고, 권한을 남용하는 경우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균형이 무너지면 제왕적 권력남용이 발생한다. 이에 따라 다른 권력으로부터 통제받지 않는 제왕적 대통령, 제왕적 의회, 제왕적 사법부가 나타나는 현상을 막기가 어렵다.


    한국의 ‘87년 체제’는 제왕적 대통령제?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 혼란에 대해 다수의 지식인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라고 보는 듯하다. 현행 헌법은 제도적으로 대통령에게 통제받지 않는 제왕적 권한을 부여한 것일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제왕적’이라는 용어는 실질적으로 통제받지 않는 독재적 왕정과 비슷하다는 의미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핵심은 대통령이 입법부나 사법부의 실질적 통제를 받지 않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대통령이 국회의 입법권이나 사법부의 사법권보다 절대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임명하거나 부정선거 혹은 국회해산을 통해 입법부를 일종의 거수기 의회로 만드는 것이 가능한 사회다. 대통령이 법관 임명권을 행사하고 물리적·정치적 위협을 통해 사법권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여건이어야 제왕적 대통령제라 할 수 있다. 이에 해당하는 전형적 체제가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할 때 개정된 유신헌법이다.

    이와 달리 1987년 개정된 헌법 체제는 제왕적 통치를 가능하게 하던 규정을 삭제해 대통령의 권한을 상당히 약화시켰다. 1987년 개헌 이후 직선제로 뽑힌 대통령은 지금까지 총 8명이다. 대통령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토대로 국정을 운영한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는 ‘제왕적 대통령’을 표방했다고 볼 수 있으나 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부는 ‘대통령 중심제’를 추구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할 때부터 대통령이 입법부와 검찰을 포함한 사법부를 통제하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노 대통령이 집권 당시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못 해 먹겠다”고 한 말은 대통령의 권한이 더는 제왕적이지 않음을 암시한다. 이때부터 정권을 잡은 역대 대통령 5명 중 3명이 탄핵소추됐고, 그 가운데 1명이 탄핵을 당해 옥고를 치른 것이 그 증거다.

    노무현 정부 이후에는 3김 시대처럼 인위적 의원 영입으로 여소야대를 여대야소로 재편하지 못했다. 심지어 집권 여당 내에도 반(反)대통령 세력이 있었다. 노무현 정부 때는 김근태 의원 중심으로 ‘반노(반노무현)’계가 형성됐고, 이명박 정부 때는 박근혜 당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친박(친박근혜)계가 친이(친이명박)계와 갈등을 빚었다. 윤석열 정권을 창출한 집권 여당에도 친윤(친윤석열)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반대통령 계파가 존재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대통령이 의회를 통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대통령이 임기 중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해 손발이 묶이고, 탄핵심판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죄인 취급 당하는 것을 보면 대통령보다 의회 권한이 제왕적이라 할 만하다. 또한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임기 중 검찰에 의해 구속 기소되고,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과정에서 3분의 반론권 요청조차 무시당한 전례를 보면 지금의 대통령제가 사법부를 통제할 만큼 제왕적인 상황도 아니다.

    다만 현행 대통령제에서 제왕적 요소로 볼 수 있는 것은 ‘인사권’이다. 대통령이 인사권을 남용할 여지가 있고, 인사권을 행사해 둔 검·경과 감사원 등 사정기관이 가진 수사·감찰권을 남용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어서다. 이 때문에 야당에서는 검찰 등을 이용해 야당 대표나 국회의원을 압박하거나 보복한다는 식으로 대통령을 공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국회의원은 불체포 특권을 갖고 있어서 중대한 범죄가 의심되더라도 현행범이 아닌 이상 국회의 동의 없이는 체포·구속되지 않는다. 또 법원의 영장실질심사를 통해 한 번 더 구제되기에 대통령 마음대로 국회의원을 체포할 수도, 구속할 수도 없다. 기소는 가능하지만 법원이 무죄로 판단할 기회가 주어지기에 대통령의 사정 권한도 통제 가능한 영역에 있다.

    현행 대통령제하에서 대통령은 행정부 내 수많은 자리에 대해서도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역대 대통령 대부분이 대선 캠프에서 활동한 인사들을 전문성과 상관없이 행정부 또는 정부 산하기관의 요직에 인사하는 것을 관례처럼 따랐다. 전문성이 결여된 부적절한 인사가 가능한 것을 두고 현행 대통령제의 제왕적 인사권을 탓할 수는 있지만 이는 법률 개정을 통해 국회가 통제할 수 있는 사안이다.

    대통령보다 막강한 제왕적 의회의 ‘줄탄핵’

    오히려 지금은 ‘제왕적 의회’가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의회는 1인이 아닌 다수의 합의제 기관이기에 제왕적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다수라고 항상 정의로운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의 사형도 다수인 아테네 시민이 결정했고, 히틀러 시대의 유대인 학살도 부당한 다수의 결정에 따라 이뤄졌다. 미국에서는 클린턴 정부 시절 “제왕적 의회”라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입법부와 행정부와 사법부는 서로 견제와 균형을 통해 삼권분립을 지켜야 하지만 의회가 극단적 여소야대인 경우에는 대통령이 의회를 견제할 카드가 소극적 거부권밖에 없다. 국회해산권처럼 직무를 정지시킬 강력한 견제 장치가 없는 경우 입법부의 무분별한 권력 행사를 실효적으로 통제하기 힘들다. 사법부도 의회가 예산심의결권과 임명동의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거대 정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1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회법 일부 개정안 재의, 비상계엄 내란 행위 특검 재의 등 8건의 법안이 상정되고 있다. 뉴시스

    1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회법 일부 개정안 재의, 비상계엄 내란 행위 특검 재의 등 8건의 법안이 상정되고 있다. 뉴시스

    통제할 수 없는 입법부는 말 그대로 제왕적 힘을 갖는다. 현 정부 들어 민주당이 29회에 걸쳐 탄핵소추를 거듭할 수 있었던 것도 다수당에 주어진 제왕적 권력 덕분이다. 한국의 국회의원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보좌관을 둘 수 있으며 세계 유일의 국정감사권을 갖고 있다. 법률 제정과 관련해서도 특별한 제한이 없다. 대통령은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어도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나기 전 탄핵심판만으로 파면될 수 있다. 이에 반해 국회의원은 형사 비리를 저지른 경우 구속돼 감옥에 있더라도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의원직을 유지한다. 게다가 대법원에서 확장판결이 나기 전까지 의원 수당과 보좌관의 지원을 받는 등 신분상 지위를 보장받는다.

    현행 대통령제는 의원내각제를 따르는 국가나 프랑스의 대통령제처럼 국회를 견제할 국회해산권을 두고 있지 않다. 게다가 국회의원은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까지 부여받는다. 사실상 국회의원이 대통령보다 더 강력한 신분상 보호를 받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무소불위의 제왕적 의회’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불체포특권의 경우는 법원의 엄격한 영장실질심사로 예전처럼 불법체포의 위험이 상실됐기에 폐지도 고려할 수 있다. 국회의원은 국회 상임위원회를 운영하며 막말과 고성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면책특권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모욕이자 명예훼손적 언행일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모욕죄나 명예훼손죄를 물어 손해배상까지 청구할 수 있다. 국회의원이란 이유로 남을 모욕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범죄까지 면책하는 것은 지나친 관용이자 국민 정서에 반하는 시대착오적 특혜다. 우리도 독일처럼 국회의원의 면책 범위에서 “헌법상 명예훼손이나 모욕을 제외한다”는 문구를 추가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제왕적 의회에 대한 불신으로 국회를 상시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서 ‘국민소환제도’를 도입하자는 의견이 최근 여론조사에서 70%를 넘었다. 4년마다 치르는 선거만이 아니라 항상 국민에 의해 국회가 통제받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국민소환제는 시대적 요구인 만큼 이에 대한 거부는 민심에 반하는 것이며, 헌법 제1조에 담긴 민주공화국의 원리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미 탄핵 제도의 가장 큰 차이점은 ‘탄핵피소추인의 직무 정지’ 여부다. 한국에선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면 대통령의 직무가 즉시 정지돼 행정부 기능이 마비된다. 반면, 미국에서는 상원의 최종 심판이 있을 때까지 ‘무죄추정의 원칙’ 따라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지 않는다. 미국은 대통령이 반역(내란, 외환), 뇌물 수수 등 중범죄와 비행 등에 해당해야 탄핵할 수 있다. 한국은 탄핵 사유를 “직무 중 헌법과 법률 위반”으로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설정해 국회가 탄핵소추권을 남용할 여지가 너무 크다.

    윤석열 정부 들어 민주당이 탄핵소추한 29건 중 아직 단 1건도 헌재에서 인용 결정이 난 예가 없다는 사실은 의회의 탄핵소추권 남용이 심각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미국, 독일, 프랑스 등은 탄핵소추 의결 전 6개월에서 1년 동안 조사하는 과정을 거치는 데 반해 한국은 증거 조사와 구체적 사유 없이 ‘줄탄핵’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더구나 탄핵심판에서 피소추인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은 변호 비용을 사비로 부담하는 데 반해, 국회의원은 국회 예산으로 지불한다. 일반 재판의 경우 소송권을 남용한 패소자가 상대방의 소송 비용과 변호사 비용을 지급해야 하한다. 그런데 탄핵심판은 합리적 이유 없이 소추했거나 헌재가 기각결정을 내린 경우에도 탄핵소추권 남용에 대한 책임을 아무도 지지 않는다. 권한을 남용해도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미리 막을 방지책도 없는 실정이다. 의회의 권한 남용을 입법적으로 해소하고 보완할 필요가 있다.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왼쪽에서 다섯 번째)을 비롯한 재판관들이 2월 2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마지막 변론 기일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왼쪽에서 다섯 번째)을 비롯한 재판관들이 2월 2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마지막 변론 기일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선관위와 헌재, 제왕적 사법 기능 부작용 심각

    대통령이 속한 행정부는 예산편성권·증액동의권·예산집행권을 갖고, 국회는 예산의결권만 갖기에 대통령이 제왕적 재정 권한을 가진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다. 모든 나라는 행정부가 예산편성권과 예산집행권을 가지며 여소야대 국면에서 야당의 부당한 지역구 예산 끼워 넣기 등을 방지하기 위해 증액동의권을 두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야당이 예산의결권을 이용해 국민의 삶과 국정 운영에 필수인 예산을 부당하게 삭감하고 이를 빌미로 부당한 증액 동의를 받아내는 관행이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다만 이번에는 대통령이 타협을 거부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해 야당의 심각한 예산 삭감 실태가 여실히 드러났다. 자신들의 특수활동비(특활비)는 그대로 두고 감사원과 검찰, 경찰의 특활비를 전액 삭감하는 등 부당한 예산삭감권을 행사한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부당한 예산 삭감이자 제왕적 의회의 민낯을 보여준 행태다. 현행 헌법 체제에서는 국회의 부당한 예산 삭감 행위에 대해 통제할 방안이 없고 행정부의 실질적 기능 마비에 대처할 대안도 없다. 이렇게 예산 의결이 안 되는 경우에 적용하는 준예산을 발동할 수도 없기에 대비책이 전무한 상태다. 야당이 일방적으로 삭감한 예산이 국민에게 매우 필요한 경우에는 대통령이 국민투표에 부치거나 국민이 국민발안을 통해 국민투표를 진행하는 등의 대안이 필요한 상황이다.




    김승원(맨 앞) 더불어민주당 특수활동비 TF 단장이 2023년 11월 27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실을 찾아 ‘윤석열 정부 특활비 공개 및 예산 삭감’과 관련한 입장문을 전달하고 일다. 뉴시스

    김승원(맨 앞) 더불어민주당 특수활동비 TF 단장이 2023년 11월 27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실을 찾아 ‘윤석열 정부 특활비 공개 및 예산 삭감’과 관련한 입장문을 전달하고 일다. 뉴시스

    12·3 비상계엄 선포로 야기된 한국의 혼란은 대통령제 자체보다는 대통령 부인의 각종 비리에 대한 특검법 통과와 그로 인한 여야의 극한 대립, 이재명 대표의 성남시장 시절 각종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와 여야 간의 극한 대립이 근본적 원인으로 보인다. 현직 대통령은 헌재의 탄핵심판, 야당 대표는 법원의 판결로 운명이 결정될 상황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중요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사법부는 공정한가.

    최근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에서 고위직 자녀들을 불법적 방법으로 경력직에 채용한 비리가 알려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더 놀라운 것은 부정부패가 심각한 선관위를 상대로 한 감사원의 직무감찰이 헌법을 침해한다고 ‘위헌’으로 판단한 헌재의 권한쟁의 결정이다. 감사원이 대통령 소속이기에 헌법상 독립기구인 선관위에 대한 직무감찰을 할 수 없다는 것이 헌재 결정의 요지다.

    헌법이 권력을 분립한 이유는 분명하다. 통제받지 않는 권력은 타락한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을 분리하고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헌재는 선관위가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이유로 무소불위의 절대적 권력으로 합리화하며 프랑스혁명 시대의 무소불위 귀족 같은 특권계층을 탄생시켰다. 더는 이러한 무소불위의 선관위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국민들이 외친다. 헌법상 독립기관은 외부의 부당한 압력이나 개입을 막아 공정한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둔 것이지, 부정부패를 덮기 위해 ‘독립’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헌법이 추구하는 정의를 수호하고자 만들어진 헌재가 불의를 옹호한 결정을 한 것이니 이보다 더 큰 모순이 있을까.

    문제는 카르텔이다. 헌법상 독립기관인 선관위의 최고책임자인 위원장을 법원 구성원인 법관들이 재임하며 선관위가 사법부의 종속기관이 돼 있다. 상설 기관인 선관위의 장을 법관이 재임하면서 선관위는 각종 경력직 불법 채용 등 비리가 만연한 범죄 집단이 돼버렸다. 최고재판소인 헌재 재판관들이 거의 법관 출신이 장악하고 있다. 지금 헌재 재판관 6인이 지역선관위원장을 재임한 적이 있으나 스스로 회피하거나 제척되지 않고 선관위 사건을 판단했다. 자신들이 변호사로 돌아갈 때 판사로 생사여탈권을 쥘 수 있는 동료나 선후배 법관들이 각급 선관위원장으로 재직하며 선관위를 보호하고 있으니 현명한 재판관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헌법 제1조의 국민주권주의에 근거해 국민이 법관과 헌법재판관들에게 부여한 강력하고 최종적인 판단권은 이러한 카르텔에 묶여 있다.

    이제는 국민이 직접 나서야

    헌법재판관들은 국민을 위해 기본권을 보장하고 정의를 실현하고 부당한 권력자를 통제하라는 국민의 준엄한 명령을 받들 의무가 있음에도 자신의 임명권자와 동료 법관을 우선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법관은 선거로 인한 통제도 받지 않고 독일처럼 법모독죄로 처벌받는 일도 없다. 이제 제왕적 사법부를 감시하고 견제할 특단의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프랑스혁명 당시 귀족계급의 부당한 특권을 옹호해 준 법관들은 단두대에서 그 운명을 다했다. 미국은 일반 공무원이라면 사소한 경고로 넘어갈 일도, 법관이 했을 때는 직을 해임할 뿐 아니라 영원히 변호사도 못 하게 한다.

    87년 체제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이나 제왕적 의회를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사법시스템도 제왕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행정부·입법부·사법부가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려면, 현행 대통령의 권한이나 의회의 권한을 상대방에게 이전하기보다는 직접민주주의의 실질적 확대를 통해 문제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국민발안제 도입, 국민투표 대상 확대, 국회의원의 권한 남용과 헌재 결정, 대법원 판결까지 포함한 국민소환 대상 확대 조치가 필요하다. 이는 권력구조 개헌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대통령 중임제나 의원내각제, 분권형 대통령제를 통해 나올 수 있는 제왕적 지도자를 미리 견제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다수파의 횡포에 대해 정치적·법적으로 엄중한 책임을 지게 하는 가장 실효성 있는 대안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래 위에 쌓은 성이 견고할 리 없다. 부패 혐의가 많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후보는 입법적이고 제도적 개혁을 공정하고 상식적 방식으로 이뤄내기 힘들 것이다. 제왕적 시스템의 카르텔에 묶여 본분을 망각하는 공직자가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개헌의 성공 여부는 국민에게 달렸다. 무엇보다 올바른 선거권 행사가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신동아 4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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