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국가 인프라까지 구상한 이건희 “SOC 없이 기업도 없다, 난지도~영종도 쓰레기 터널 만들자”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㊽] 이승한 전 홈플러스 창업회장 증언 ㊤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4-04-3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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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술 없던 乙 삼성전자, 홀로서기 전략 ‘마케팅 백서’

    • 깊이 파고들던 이건희 회장은 3-sight 있던 분

    • ‘구매는 금융’ ‘구매는 기술’이라는 말의 의미

    • 반도체業은 本業까지 말아먹을 수 있는 ‘버닝 하트’

    • 나라 전체 부강케 해야 삼성도 부강해진다는 인프라論



    이승한 전 홈플러스 창업회장. [조영철 기자]

    이승한 전 홈플러스 창업회장. [조영철 기자]

    이승한 전 홈플러스 창업회장은 1970년 삼성그룹에 입사, 제일모직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비서실 기획마케팅 팀장을 거쳐 삼성물산 런던지점장, 신경영추진팀장(부사장), 삼성물산 유통부문 대표이사를 지냈다. 이후 홈플러스 CEO만 17년을 했다.

    홈플러스는 1999년 삼성물산과 영국 대형 유통업체 테스코가 1대 1로 합작해 만든 ‘삼성테스코’가 모태다. 2011년 3월 삼성과 테스코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서 법인명이 삼성테스코㈜에서 홈플러스㈜로 바뀐다. 이 전 회장은 1999년 삼성테스코 CEO로 부임한 후 신생 업체를 연매출 12조 원에 달하는 대형 마트 2위 업체로 키워 ‘유통업체의 전설’로 통하는 사람이다.

    그는 2014년 퇴임 후 경영 이론가이자 벤처 스타트업을 키우는 컨설팅 일과 사회공헌 활동을 하며 살고 있다. 숙명여대 이사장을 지냈으며 숙명여대 MBA 석좌교수로 경영학도 가르치고 있다. 미국 보스턴대에서 연구 활동을 할 때 정리한 ‘인성 리더십’은 이 학교 경영대학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고 한다. 봄 기운이 완연하던 3월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에서 그가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 ‘북쌔즈(Book Says)’에서 만났다.

    6개월 동안 열정 불태운 ‘복사의 달인’

    기사를 검색해 보면 그의 이력은 대부분 유통업에 맞춰 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건희 회장의 이른바 ‘복합화’를 구현하는 최전선에서 일했음을 알게 됐다.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비화가 많았다. 삼성의 많은 전직 CEO처럼 그 역시 이 회장을 삶의 멘토이자 스승이라고 했다. 우선 그는 삼성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을까.



    입사는 언제 했나요.

    “1970년 1월 9일 제일모직으로 입사했어요. 대구 영남대를 졸업했는데 이병철 회장님이 직접 면접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제일모직 공장이 대구에 있었는데 당시 브랜드 ‘골덴텍스’는 대구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에게 익숙한 브랜드였죠. 공장에서 원단을 생산해서 기차 편으로 서울역에 가져오면 서로 받으려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배급’의 시대였지요.”

    물건을 파는 입장이었을 텐데 ‘배급’이라니요.

    “그 시절에는 공장이 없다 보니 만들면 팔리는 완전한 공급자 시장이었어요. 돈 받고 팔면서도 배급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양을 정해 나눠주는 구조였지요.”
    그런데 그는 이 일을 맡기까지 신입 사원 초기에 허드렛일로 마음을 다스리는 수련 생활이 있었다고 한다. 가만히 듣다 보니 월급쟁이 초심자가 가져야 할 삶의 지혜가 묻어 있었다.

    “당시 제일모직은 제일제당과 함께 삼성의 인재 사관학교라고 할 만큼 인재 양성에 열심이었습니다. 주변에서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고 부러워들 했지요. 저는 든든한 배경 없는 경북 칠곡 시골 촌놈 출신이었지만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만큼은 하늘을 찔렀죠.

    석 달 수습 기간을 마치고 원단을 파는 ‘모직물과(課)’로 발령이 났어요. 영업 현장을 다니며 열심히 뛰어다닐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는데 웬걸! 제일 먼저 맡겨진 일은 영업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복사 업무였어요.

    ‘블루 카피 기계’라고 지금 사람들은 생소하겠지만 당시에는 최신식 복사기였습니다. 복사지 한 장과 원본을 같이 넣으면 복사된 종이에 푸른색 물기가 축축하게 젖어 나와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은데 한 번에 한 장씩밖에 복사가 안 됐어요. 한 장 복사하는 데 1분씩 걸렸습니다.

    스무 쪽 서류를 열 명에게 돌린다고 하면 200장이니까 200분, 세 시간 넘게 복사기를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성질 급한 사람은 머리에서 김이 날 겁니다(웃음).

    하루 종일 복사기와 씨름하다 보니 ‘아니, 내가 이런 일이나 하려고 어렵게 이 직장에 들어왔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왔죠.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절간에 가서 도를 닦으려 해도 마당에 비질만 3년을 한다는데, 무술 수련을 받는 신입 생도라는 생각으로 언젠가 제대로 된 일이 주어질 때까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다 보니 페이지가 엉키는 경우도 없었고 종이도 예술적으로 느껴질 만큼(웃음) 깨끗하게 말렸습니다. 다들 ‘어디서 복사 비법이라도 배웠느냐’면서 ‘카피 담당 상무’ ‘카피 달인’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줬습니다. 어떤 일이든 맡은 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그때 그 정신이 직장 생활 내내 저를 이끈 내적 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일다운 일을 맡은 것은 그때로부터 6개월여가 지난 뒤였다고 한다.

    “‘시장에 나가서 양복지 패턴에 대한 고객 반응을 조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드디어 제대로 된 일을 하게 된 거죠. 날아갈 듯이 기뻤습니다. 여기서 한 6개월 열심히 했더니 기획팀으로 가래요. 업무 태도를 높게 평가한 상사가 그룹에서 처음 시도하는 기성복 사업 기획팀으로 부른 거죠. 사업 기획안 작성, 공장 건설, 제품 기획과 판매까지 두루두루 참여했습니다. 그야말로 핵심 업무 한가운데로 들어가게 된 거죠.”

    그렇게 제일모직에서 일하다 비서실 감사팀으로 옮겨가지요.

    “이병철 창업 회장 시절입니다. 감사 업무로 시작해서 나중엔 비서실 기획팀장, 마케팅팀장을 맡아 일했습니다. 아까 공급자 중심이어서 마케팅이 필요 없던 시절이었다고 했는데 삼성전자가 마케팅 개념을 사업에 처음 도입한 계기가 생겼어요.

    비서실 감사팀에서 일하고 있는데 어느 날 호암 회장님께서 삼성산요 감사를 지시하셨어요. 당시 감사는 직원들의 부정부패가 없는지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미래 경영전략을 만들기 위해 현재 상황이 어떤지 본다는 측면에서 ‘경영 감사’ 성격이 강했어요.

    아시다시피 삼성전자의 출발은 1969년 4월 일본산요전기와의 합작사인 ‘삼성산요’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술이 없는 을(乙)의 입장이다 보니 합작 계약을 맺을 때 불이익이 많았어요. 산요가 경영 참여는 물론 수출권, 수입 원자재 공급권, 상품권, 내수 상품 등록권 등등을 모두 갖고 우리는 국내 판매권만 갖는 거였죠. 호암 회장님이 이런 식으로 계속 하다가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셨어요. 실제로 감사 결과 도움이 안 되겠다는 판단이 나왔습니다.”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이건희 회장

    왜일까요.

    “열심히 해서 생산성을 늘려 원가를 다운시켜 봐야 산요가 과실을 다 가져가 버리는 구조였으니까요. 한마디로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였죠. 그렇다고 저희한테 핵심 기술을 넘겨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바야흐로 삼성전자가 홀로서기 할 때가 됐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감사 결과를 받아든 호암 회장님의 결정으로 산요와 결별하면서 저희가 가장 먼저 한 게 ‘마케팅 백서’를 만드는 거였습니다. 저도 백서 제작에 참여했는데 그룹 내에서 본격적인 마케팅 개념이 도입된 시점이죠. 공급자 시장에 소비자 개념을 넣어서 삼성전자가 종합 전자회사로 기반을 갖추기 시작한 때입니다.”

    앞서 직장 생활 초기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월급쟁이로 성공하려면 그때나 지금이나 ‘수련 생도’ 정신으로 무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본질은 같다고 봅니다.”

    그는 2003년 영국 테스코 국제회의에 참가했을 때 발표한 것이라면서 동물 우화를 빗댄 리더십 이야기를 들려줬다. 은퇴 후 경영학을 가르치는 경영학 교수의 모습이 느껴졌다.

    “동물들이 모여서 왕을 뽑는 총회를 열었어요. 물고기들은 헤엄 잘 치는 동물이 돼야 한다고 육지 동물은 잘 달리는 동물, 새들은 잘 날아다니는 동물이 왕이 돼야 한다고 했죠. 하루 종일 회의해도 결론이 나지 않으니 컴퓨터에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헤엄도 잘 치고, 하늘도 잘 날고, 잘 뛰어다니는 동물이 뭐냐, 답이 뭔지 아세요.?”

    기자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어보자 그는 “오리”라고 했다.

    “모든 걸 어설프게 다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깊이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주는 우화죠. 사자, 고래, 독수리가 되려면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일단 최고가 돼야 합니다.

    그런데 이건희 회장님은 입체적 사고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죠. 지금처럼 앞을 알 수 없는 빠른 속도의 시대, 경계가 없는 경쟁의 시대에는 독수리처럼 날고 사자처럼 뛰면서 고래처럼 헤엄치는 3차원적이고 입체적인 사고가 필요하죠. 한 분야에 깊이 몰두하면서도 넓게 보려고 했던 회장님의 입체적 상상력은 지금 시대에 정말 꼭 맞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상상력은 본질을 파고 들어가려는 깊은 몰입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그는 사회생활 초창기 이건희 회장이 얼마나 집중형이고 몰입형 인간이었는지를 체험한 적이 있다고 했다.

    “제일모직 대구 공장에서 일을 보고 서울로 가는 기차 안이었어요. 우연히 건너편 옆자리에 앉아 계신 회장님을 본 거예요. 저처럼 대구에서 타신 것 같았어요. 공장에 가끔 들르신다는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저는 비서실에 있었기 때문에 사진으로 뵐 기회가 있어서 얼굴을 알아봤지만 회장님은 당연히 저를 모르셨죠. 근데 첫인상이 너무 강렬했어요.”

    어땠는데요.

    “기차 안에서라면 누구라도 약간 긴장을 풀고 창밖을 본다든지 잠을 청한다든지 하잖아요. 기차도 정말 느리게 가던 그 시절에 회장님은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계신 거예요. 1974년인지, 1975년쯤 되던 때이니까 한 30대 초반쯤이었을까. 중앙일보 이사로 계실 때였어요.

    저는 보통 기차를 타면 서울까지 한숨 자면서 올라가는데 그날은 회장님께 인사드릴 틈을 찾느라 본의 아니게 계속 훔쳐보게 된 거죠. 더 놀랐던 건 수행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셨어요. 저는 마음속으로 ‘대한민국 최고 부자의 재벌 2세라고 하면 비서라도 있을 텐데’ 하면서 신기하게 생각했어요. 그룹을 맡기 전이긴 했지만 수행원도 없이 혼자 다닌다는 게 정말 의외였거든요.

    그날 회장님의 이미지는 제 뇌 속에 깊이 각인됐습니다. 뭔가 양 어깨에 큰 숙제를 짊어진 듯한 고뇌에 찬 청년 모습이었거든요. 그리고 생각에 몰두하시면 무지하게 깊이 파고 들어가는 분이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그는 훗날 이건희 회장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그때 받았던 첫 느낌 그대로일 때가 많았다고 했다.

    “회장님은 완전히 올빼밋과예요(웃음). 밤에 잠을 안 주무시고 사색을 깊이 하시는 형이죠. 가까이서 모실 때 밤 11시나 12시에 댁으로 부르셔서 새벽 서너 시까지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았습니다. 아침형 사장들은 무지하게 고생했는데 저는 같은 올빼밋과여서 다행이었지요.(웃음) 저는 회장님이 ‘3-sight가 있는 분’이라고 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보는 눈이죠. 과거에 대한 조명력은 ‘hind sight’, 현재에 대한 현시력은 ‘eye sight’, 미래에 대한 선견력은 ‘fore sight’라고 하잖아요.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이승한 전 홈플러스 창업회장. [조영철 기자]

    이승한 전 홈플러스 창업회장. [조영철 기자]

    구매라는 업의 본질

    옆에서 직접 일하게 된 계기는 언제였나요.

    “런던지점장으로 가 있던 시절에 ‘해외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자주 오셨어요.

    제가 비서실 근무 후 삼성물산으로 발령을 받고, 회계과장·감사실장·사장실장을 했는데 해외 근무를 한번 꼭 해보고 싶었어요. 제 전공인 회계 업무로는 도쿄, 뉴욕, 런던 정도밖에 자리가 없는 거예요. 거기다 부장급이다 보니 지점장급 아니면 안 되고.

    한번은 두바이에 현지법인이 만들어져서 갈 기회가 있었는데 갑자기 소병해 비서실장이 ‘이 사람은 비서실 감사팀 출신인데, 물산에 감사실장 자리가 비었지 않으냐? 그리로 보내라’ 해서 물거품이 된 적도 있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의지를 계속 밝혔더니 ‘건설 쪽으로 옮겨서라도 나가보겠느냐’ 하길래 좋다고 했죠. 물산 해외사업관리부장을 1년 정도 하다가 마침내 런던지점장으로 발령이 납니다.

    당시 삼성전자는 글로벌 무대로 가기 위한 해외 전진기지를 만들려고 고심하던 시기였는데, 유럽·아시아·미국을 놓고 고민하다 유럽에 두기로 하면서 프랑크푸르트와 런던을 두고 저울질을 했죠. 현장 조사를 해보니 독일보다는 영국이 나았어요. 금융 중심지고 인건비도 그 당시 유럽의 다른 곳들과 비교해 비싸지 않았고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했던 건, 나중에 또 설명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영국 정부가 삼성을 좋아했어요. 삼성전자가 자기 나라에 공장을 지으면 보조금 혜택도 많이 주겠다면서 적극적으로 나섰죠. 결국 런던에 해외사업 전진기지를 두게 됩니다. 그런 모든 일을 해외사업추진단이 결정했습니다. 회장님이 총괄하셨지요. 제가 런던에 있었던 것이 1978년 말부터 1983년 초까지 5년 정도인데 그때 회장님을 런던에서 여러 번 뵙고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중 두 가지는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뭔가요.

    “우선 삼성은 국내 챔피언이 아니라 글로벌 챔피언이 돼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올림픽에서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었는데 그건 많이 알려졌지요.

    두 번째가 중요한데 바로 ‘구매’라는 업의 본질에 관한 거였습니다. 나중에 1993년 신경영 선언하실 때 구매, 용역의 예술화를 말씀하시잖아요. 제가 들은 건 그보다 훨씬 전이죠.

    회장님은 저희들에게 ‘구매는 기술이다’ ‘구매는 금융이다’라고 하셨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이고 어떤 책에서도 보지 못한 말씀이라 회장님 스스로 터득해 만든 개념 같았어요.”

    구매가 금융이란 말이 뭘까요.

    “당시 중동 붐을 타고 건설 붐이 일어서 저희가 비싼 장비를 사는 일이 많았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사면 엄청나게 이자를 내지요. 그런데 회장님이 ‘구매는 금융’이라고 말씀하셔서 알아보니까 구매 금융이라는 게 실제로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코파셋, 독일은 에르메스, 영국에는 ECGD(Export Credits Guarantee Department·수출신용보증국)라고 해서 이런 걸 이용하면 장비를 살 때 이자를 줄인다거나 원금을 천천히 갚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삼성물산도 국제금융팀을 만들어 그룹 최초로 신디케이티드론(syndicated loan)을 했습니다. 서너 개 은행이 함께 돈을 빌려주는 집단대출이죠. 삼성건설이 하는 프로젝트에 삼성물산이 지급보증을 서서 이자율을 낮게 적용받기도 했습니다. 지금이야 너무 상식적 방식이지만 그때는 저희가 처음이었어요. 선대 회장님께서도 금융에 관심이 많으셨지만, 그룹에 글로벌 금융 기법을 태동시킨 건 당시 이건희 부회장이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구매가 기술이란 말은 또 뭘까요.

    “회장님 왈 ‘구매가 비즈니스의 출발이다. 대부분 CEO들이 영업은 엄청나게 이런 것 저런 것 연구해서 하고 생산도 원가절감을 위해 피땀 흘려 노력하는데 구매에 대해서는 소홀하다. 연구자나 예술가들이 어떤 한 분야에 꽂혀서 연구하듯이 그런 에너지를 구매에 쏟으면 엄청나게 큰 결실을 낼 수 있다’고 하셨어요.

    예를 들어 중장비를 살 때 트럭은 독일 것이 제일이고, 포클레인은 일본 것이 제일이고 등등 가격이 다 다르잖아요. 이렇게 상품에 대한 조사를 치밀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업체 간에 가격경쟁도 시켜서 좀 더 싸게 사고, 살 때 앞에 언급한 구매 금융도 잘 운용하면 비용을 엄청나게 줄일 수 있는 거죠. 이 모든 게 결국 사람의 에너지와 혼이 들어가는 예술의 경지라는 말씀이었죠.

    장비는 사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아요. 유지관리 계약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가격만 싸다고 무조건 사면 안돼요. 나중에 배달도 늦고 애프터서비스도 안돼서 난감하거든요. 협상할 때는 까다롭고 약간 비싸다 싶어도 배달이 확실하고 애프터서비스가 확실하면 그 제품을 사야죠. 일본 회사들이 협상할 때는 까다로워도 실수가 없었습니다. 어떻든 구매는 금융이다, 기술이라는 회장님 말씀이 화두가 돼 영업이나 생산에 버금가는 혁신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반도체업은 버닝 하트다

    그는 당시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업의 개념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버닝 하트 게임에 비유했다는 말도 전했다.

    “회장님이 ‘버닝 하트’라는 용어를 썼어요. 마지막 두 사람이 남을 때까지 계속 베팅하는 게임이에요. 최후 승자가 판돈을 다 가져가는 구조죠. 지는 사람은 한 푼도 못 먹는 것은 물론 있는 돈까지 다 털립니다. 그때만 해도 삼성이 반도체업에 진출하겠다는 선언을 하기 전인데 이미 한국반도체를 사재로 인수해 반도체업에 발을 담그신 상황이었으니까 고민이 얼마나 많으셨겠어요. 워낙 투자금이 많이 들어가고 위험 산업이란 걸 정말 잘 알고 계셨던 거죠. 잘못하면 본업까지 말아먹을 수 있는 그런 뜻의 업의 개념으로 ‘버닝 하트’라고 하신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의 다른 표현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당시 중동과 거래하면서 애를 많이 먹은 적도 많았다며 삼성의 투명한 기업문화를 언급하기도 했다.

    “공사비를 차일피일 미루고 안 주는 거예요. 어느 정도 진척되면 기술자로부터 증명서를 발급받아 그걸 발주처에 내면 돈을 받는 구조였는데 이 사람들이 계약서는 싹 무시하고 ‘아임 더 로드(I′m the Lord)’, 즉 자기들이 법이라면서 돈을 안 주니 얼마나 황당해요.

    이 친구들을 런던으로 불러서 접대를 잘 해줬어요. 겉으로 술 안 마신다 하지만 술도 잘 마셔요(웃음). 그렇게 하고 나서야 겨우 대금을 결제해 주는데 그것도 현금이 아니라 기름을 주면서 시장가격이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높은 GSP(Government Standard Price)라고 정부 공시가격으로 주는 거예요.

    저희들은 한 푼이라도 제값을 받으려고 가격 차이가 덜 나는 원유를 받았는데 종류마다 일일이 가격 조사하는 것도 큰일이었죠. 당시 다른 대기업 런던 책임자들도 같은 일을 했는데 이 사람들은 이탈리아에 작은 정유 회사를 하나 사서 거기서 원유를 받더라고요. 가격차 때문에 회사가 손실을 입어도 본사에서는 손실이 안 나는 것처럼 분식 결산을 하기 위해서였죠. 그런 회사들은 결국 IMF 외환위기 때 파탄이 납니다. 우리는 그렇게 올바르지 않게 일을 보고했다가는 회장님한테 혼쭐이 날 거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어요. 그런 게 기업문화죠.”

    그는 런던지점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신경영추진팀’이라는 새로운 태스크포스팀의 팀장을 맡게 된다. 1993년 신경영 선언 이전으로 회사 내에 이건희 회장이 지시한 인프라와 관련한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별동대였다.

    여기서 잠깐 이건희 회장의 ‘인프라’ 철학에 대해 먼저 소개하려 한다. 이 회장은 취임 직후부터 ‘인프라’라는 말을 거의 입에 달고 살았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한국의 인프라는 지금은 세계적 수준이지만 40여 년 전만 해도 후진적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인프라가 없이는 기업이 성장할 수 없다”며 “국가 인프라의 구축이야말로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물적 토대”라고 했다. 물류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향유하고 새벽배송이란 것도 도로라는 인프라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회장의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에도 ‘인프라와 경쟁력’이라는 별도 제목의 글이 따로 있을 정도다. 우선 글을 읽어보자.

    ‘세계 주요 도시의 도로율을 보면, 서울이 20%에 불과한 데 비해 동경은 30%, 뉴욕이 38%, 워싱턴이 40%, 그리고 로스앤젤레스는 44%다. 더 큰 문제는 도로 폭이 12m 이상 되어 차량 통행이 원활한 도로는 8%에도 못 미친다는 점이다.

    다른 면에서 우리나라와 선진국을 비교해 보면 그 수준의 차이가 더욱 뚜렷해진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인 데다 북쪽이 막혀 있어서 사실상 섬과 같고, 수출입 화물의 99%가 해상에서 움직이는데도 항만시설은 선진국의 23분의 1에 불과하다. 전력 사정은 선진국의 9분의 1, 비행장은 15분의 1 수준이다.

    이 정도 인프라로는 세계시장에서 선진 기업들과 겨루기가 어렵다. 우선 물류 비용이 너무 높아 기업 부담이 크다. 다국적 기업들이 해외 투자를 할 경우 과거에는 그 나라의 노동력이나 시장규모를 따졌지만 지금은 유통에 필요한 기반이 얼마나 잘 갖추어져 있는가를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따진다. 싱가포르가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에서 국가 경쟁력이 가장 높다고 평가되는 이유가 바로 인프라 면에서 높은 점수를 따기 때문이다. 과거 인프라는 ’산업의 젖줄‘로 통했으나 이제는 ‘국가의 젖줄 이라고 할 정도로 그 중요성이 높아졌다.

    지난 70~80년대 고도성장기에 우리나라는 인프라 구축에 너무 소홀했다. 하지만 늦었다고 깨달았을 때가 제일 이른 시점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부터라도 인프라 확충에 힘을 기울여 국가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할 것이다.

    국가의 인프라뿐 아니라 기업의 인프라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 기업 대부분은 여러 품목을 동시에 만들 수 있는, 하드적인 측면의 인프라를 갖추고 있고, 구성원들 역시 필요한 학교 교육을 다 받은 양질의 인력이다. 여기에 기술과 노하우, 건전한 직업관 등 소프트적인 인프라를 강화하고 유통력, 판매력 등을 키워나간다면 세계 어느 기업에도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인프라’의 원뜻은 도로·항만·비행장 발전소 등 사회간접자본 설비다. 하지만 이 회장이 내건 ‘인프라’는 이런 사전적 뜻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의 가장 기본적, 기초적, 핵심적인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도로나 항만 같은 물적 인프라 외에도 개인이나 회사에도 인프라가 있다고 봤다. 예를 들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도 그 사회의 인프라다. 여기에 인프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인프라론은 판매·설계·생산 등 기업 경영의 모든 과정에서 쓰일 수 있는 개념이었다.

    이승한 전 회장은 이건희 회장의 인프라에 대한 강조는 결국 한 기업의 성공 여부를 떠나 나라 전체를 부강하게 해야 삼성도 부강해진다는 국부론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저는 회장님이 삼성에 대한 생각을 넘어서 국가에 대한 생각, 산업 전체에 대한 생각을 가장 많이 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늘 삼성만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으니까요. 이런 점에서 진정한 애국자셨습니다. 해외 출장 나가셔서도 매일 저녁, 밤마다 모여 국가 인프라, 산업 인프라,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1990년대는 아시다시피 국가 인프라가 국가의 경쟁력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이에요. 선진 각국에는 이런 인프라가 있는데 우린 없다, 우선 이것부터 알아야 한다고 하셨죠.

    그 연장선상에서 선진 각국 인프라 실태를 조사해서 책으로 만들어 돌리라고 하셔서 국토도시학회, 정부정책 하는 사람들, 도서관에도 돌렸어요. 국가 인프라에 관해서는 제가 아마 폴로업(follow-up)을 제일 많이 했을 겁니다. 그룹에 관련되는 거는 각 운영팀장 쪽에서 많이 커버했다고 보면 되고, 저는 물산하고, 건설, 그다음에 엔지니어링, 디자인 이쪽을 커버하면서 국가에 관련된 걸 많이 했지요. 아예 도시계획 박사학위를 땄습니다. 회장님하고 얘기하려고 하면 공부 안 하면 감당 못 합니다.”

    그러면서 국민소득을 스톡과 플로 두 가지 틀로 봐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흔히 자산이라고 할 때 플로(flow), 즉 흐르는 돈이 있고 스톡(stock) 쌓아놓은 부가 있잖아요. 국가도 마찬가지죠. 내셔널 인컴(National Income)도 플로와 스톡이 있는데 그 스톡이 바로 인프라죠.”

    스톡과 플로 구분할 줄 알아야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추진 훨씬 이전부터 어린이집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어린이집을 세워서 엄마들을 육아로부터 해방시키면 맞벌이 가정이 늘어 소득이 늘 것이고, 아이들도 전문교사에게 맡기면 교육효과가 높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기업이 어린이집 사업을 하는 것에 내외에서 반발이 많았다. 사진은 1990년 7월 서울시립 꿈나무어린이집 개원식 참석 모습. 오른쪽은 고건 당시 서울시장. [동아DB]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추진 훨씬 이전부터 어린이집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어린이집을 세워서 엄마들을 육아로부터 해방시키면 맞벌이 가정이 늘어 소득이 늘 것이고, 아이들도 전문교사에게 맡기면 교육효과가 높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기업이 어린이집 사업을 하는 것에 내외에서 반발이 많았다. 사진은 1990년 7월 서울시립 꿈나무어린이집 개원식 참석 모습. 오른쪽은 고건 당시 서울시장. [동아DB]

    그는 이 대목에서 플로와 스톡 개념을 현장에서 절실하게 느낀 경험이 있다고 했다.

    “삼성물산 런던지점장 시절인 1980년대 초 중동 국가들이 석유 부호국으로 부상하면서 건설 붐이 일었다고 했잖아요. 사람들이 런던을 거쳐서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 많이 다녔는데 당시 영국이 외환위기를 맞아 1인당 국민소득이 1만2000달러가 조금 안 됐어요. 리비아는 석유 덕분에 신흥 부국으로 주목받으면서 1만5000달러가량 됐고요. 런던에 출장 온 사람들에게 ‘영국 살고 싶으냐, 리비아 살고 싶으냐’ 물어보면 당연히 영국 살겠다고 하지, 리비아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왜일까요.

    “플로와 스톡 개념으로 바라보니 답이 나오더라고요. 리비아 국민소득은 플로가 많고 영국은 스톡이 많잖아요. 공원도 정말 잘 가꿔져 있고, 커뮤니티 시설도 잘돼 있고, 병원·미술관·학교·도서관 등 문화시설도 많고, 치안도 확실하죠, 복지제도도 잘돼 있고요. 여기에 법과 질서를 준수하고 친절하고 약자를 돕는 국민 의식도 다 무형자산으로 사회의 국부를 이루는 스톡이죠. ‘삶의 질’로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국민소득만 높으면 좋은 줄 아는데 그게 아닌 거죠. 플로와 스톡을 균형 있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진정한 국가경쟁력을 만들어낸다는 걸 그때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출과 이익은 플로 개념이죠. 건전한 자산, 재무구조는 스톡 개념이고요. 흑자 도산이라는 말 아시죠. 기업이 이익을 내고도 도산하는 경우인데 실제 현금이 들어오지 않은 외상 매출과 가공 이익이 지나치게 많으면 현금이 없어서 부도가 나는 겁니다. 바로 스톡의 문제죠.

    개인도 그래요. 매달 받는 월급이 플로라면 자신이 가진 가치, 직장에서 누리는 각종 혜택 등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가치를 구성하는 스톡이라고 할 수 있죠.”

    그는 이건희 회장이 펼친 대표적 국부 사업이 탁아소 사업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회장님의 탁아소 사업에 대해 ‘달동네에서 맞벌이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죠? 하지만 이 사업의 가장 중요한 상상력의 원천은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 는 국부론이라고 봐요.

    회장님이 탁아소 사업을 시작한 건 1989년부터이고, 제가 1994년에 신경영 추진팀장(부사장급) 들어가고 난 다음에도 끊임없이 엄청나게 말씀하셨거든요. 저보고 ‘서울에 구(區)마다, 동(洞)마다 탁아소 부지를 확보해라’ 하시면서 ‘이건 국가 인프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별도 팀을 만들어서 탁아소 지을 터를 물색하고 조사도 했습니다. 삼성 자산 늘리겠다고 한 게 아니에요.

    하지만 당시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삼성이 부동산 투기를 하려 한다’고 대거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사업을 중단했습니다. 정말 국가에 헌신하겠다는 발상이었는데 자꾸 부동산 쪽으로 봐가지고 안타까웠죠.

    제가 회장님 영향을 받아서 나중에 홈플러스 대표로 갔을 때 탁아소를 매장 안에 설치하려고 했는데, 우리나라 법규가 도대체 ‘탁아소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들어놨어요. 반드시 1층에 있어야 되고, 문이 두 군데에 나 있어야 되고, 놀이터가 밖에도 있어야 되고 등등 유통 점포로는 도저히 맞추기 힘든 조항이 많았습니다. 결국 잘 안됐어요. 그때 너무 화가 나서 ‘정부는 어떻게 하면 기업들이 탁아소를 만들지 못하게 할까’ 연구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탁아소 사업은 매스컴의 공격도 받았지만 사내에서도 좋아하지 않았어요. 땅을 사거나, 건물을 사거나, 아니면 기존 빌딩을 산다고 해도 헐고 다시 짓거나 리노베이션을 해야 하니 돈을 써야 하는 사업이잖아요. 사업 주체인 삼성생명이나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당장 현찰이 나가니까 별로 좋아하지 않았죠. 나중에는 소액주주들까지 나서서 왜 그런 데 돈 쓰냐고 했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MF 외환위기까지 와서 결국 접어야 했는데 참 아쉬운 사업이었어요.”

    최초로 민간 인프라 사업에 참여

    TF팀에서 만들었던 국가 인프라 보고서. [이승한]

    TF팀에서 만들었던 국가 인프라 보고서. [이승한]

    그의 증언에서 특이했던 것은 삼성건설이 주도한 국가 인프라 사업이었다. 국내에 사회간접자본시설이 태부족이던 시절 기업이 민자유치법까지 만들어 주요 기간산업 건설에 나섰다는 점에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증언이었다.

    “제가 삼성건설 개발사업본부장을 할 때 일인데 회장님이 어느 날 사회간접자본(SOC) TF팀을 만들라고 해서 제가 팀장이 됩니다. 그때 하신 말씀이 삼성그룹을 넘어 국가 인프라를 만드는 것도 해봐라 이러시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영종도 신공항고속도로, 부산 가덕도 신항만 공사를 삼성이 오거나이즈(Organize)하고 11개 회사를 컨소시엄으로 참여시키는 대형 프로젝트를 주도하게 됩니다. 시공을 구간별로 나눠서 했으니까 다른 건설업체들도 있고, 보험회사도 있고, 산업은행이니 금융회사도 들어가고 하니까 11개 회사가 모였습니다.

    처음에 정부에서 제시한 주문은 단순하게 ‘몇 차선 도로를 만들어달라’는 거였어요. 하지만 저희는 ‘50년 뒤에도 시속 120km 이상을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를 만들어야 한다’며 ‘투자비는 톨게이트 비용으로 회수하되 적정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는 정부에서 보조해 줘야 된다’는 조건을 달아서 시작했습니다. 결국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됐지요.

    영종도 국제자유무역도시 보고서. [이승한]

    영종도 국제자유무역도시 보고서. [이승한]

    구간은 대우 구간, 삼성 구간 이렇게 나눠서 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기획해서 컨소시엄 리더가 돼 한 프로젝트였어요. 영종도 신공항 고속도로의 경우 민자 유치 첫 사업이었어요. 관련 법규가 없어서 청와대와 국회를 다니며 ‘민자유치법’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이후 동서고속도로, 서울시 교통체계 개선 방안 프로젝트 등 수없이 많은 민자유치사업에 참여합니다.”

    그는 1993년 신경영 선언이 발표된 해 출범한 김영삼(YS) 정부가 삼성에 인프라 건설을 위한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구했다는 증언도 했다.

    “신공항 건설이나 고속전철 같은 중요 국책사업에 대해 기업가, 경영자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이 들어왔어요. 회장님이 청와대 오찬인가 다녀오셨는데 대통령이 회장님한테 별도로 물으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회장님이 저를 불러서 사업의 타당성 검토를 지시하셨고, 저는 태스크포스팀을 가동해 세밀한 자료를 만들어 청와대 가서 설명한 적도 있어요. 이건희 회장님은 단지 아이디어를 내는 치원이 아니라 직접 현장도 다니셨습니다. 일본 롯코 아일랜드와 고베항 시찰을 다니기도 했는데 나중에 부산 가덕도 신항만 건설 구상에 영감을 주기도 했죠.”

    이때 영종도에 자유무역도시를 구상하는 계획도 오갔다고 한다.

    “회장님이 신공항이 들어서는 영종도에 싱가포르·홍콩·스위스 세 나라를 참고해 경제특구나 자유무역도시를 한번 구상해 보라고 하셔셔 최대 1억 평에서 최소 2000만 평을 매립해서 만드는 시뮬레이션까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강화도까지 연결하는 구상도 해봤지요.

    이때 압권은 쓰레기 매립과 관련한 계획이었습니다. 당시 서울시에서는 난지도 매립장이 포화 상태가 될 것을 대비해 새로운 쓰레기 매립에 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하면서 입찰에 부쳤는데 저희가 난지도와 영종도를 캡슐 라인으로 연결해서 매립하는 개념을 프레젠테이션해서 당선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예산 문제로 실현되지는 못했는데 지금도 저는 당시 아이디어가 구현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면서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캡슐 라인으로 연결한다는 게 뭔가요.

    “쓰레기를 트럭으로 옮기면 먼지가 엄청나게 날리잖아요. 그래서 상상한 것이 난지도부터 영종도까지 한강변을 따라 동그란 캡슐 통을 쭉 연결해가지고 그 속에 쓰레기를 싣고 보내는 거예요. 공기압을 이용해 엄청 빠른 속도로 가게 하는 겁니다. 가다가 속도가 떨어지면 중간 스테이션에서 다시 공기로 팍! 쳐서 죽 가는 형식이죠. 이걸 마지막에 인천 앞바다에 떨어뜨려서 매립하는 거예요. 쓰레기 열차 같은 걸 생각해 보면 됩니다. 난지도 매립은 그냥 쓰레기를 투척하는 수준이지만 그런 식으로 계획적으로 매립하면 바다를 쓰레기로 메워서 평평한 땅을 만들 수 있죠. 단지 쓰레기 운반뿐 아니라 지방에서 보내는 각종 물자도 육상은 교통이 막히고 비용도 많이 드니까 캡슐 라인을 통해 이으면 단가도 싸지고 하지 않겠느냐 하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참 무궁무진하죠? 그런 얘기들을 회장님하고 한 거예요.”

    그의 눈은 그 시절로 돌아간 듯 반짝반짝 빛났다.

    *그의 이야기는 다음 회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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