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막은 내리지 않았다. 한류는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날는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역사의 뒷전에 있던 문화가 이제는 정치와 경제를 끌고 가는 앞바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류(韓流)’는 우리가 만든 말이 아니다. 영어로는 ‘코리안 웨이브(Korean wave)’라고 하지만, 다른 외래어처럼 영어권에서 들여온 것도 아니다. 알다시피 ‘韓’은 ‘한국’, ‘流’는 ‘흐른다’는 뜻으로, 한자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생겨난 말이다. 더 정확하게는 1999년 11월2일 베이징 청년보(靑年報)에 처음 소개된 것으로, 한국의 대중문화와 연예인에 열광하는 중국의 젊은이들을 일컫는 신조어였다.
그러기 때문에 단순한 한자말이지만 그 뜻과 ‘이미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하다. 같은 ‘韓’자라도 우리에겐 자신의 이름처럼 친숙하게 느껴지지만 중국인의 반응은 다르다. 월드컵 축구경기 때 세계인의 귀에 쟁쟁했던 “대~한민국”의 그 ‘한’과는 분명 다른 의미로 들을 수도 있다. 발화자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같은 호칭이라도 그 문맥적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인에게 익숙한 호칭은 ‘한국인’이 아니라 ‘고려인’이요, ‘조선인’이었다. 특히 ‘조선’은 고조선 때부터 불러온 말이고, 이성계 개국 당시에는 ‘조선’과 ‘화녕(和寧)’의 두 국명 가운데 하나를 중국에서 골라 결정해준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중국인에게 조선은 가깝고 한국은 멀다. ‘한국’이란 호칭에는 ‘대한제국’처럼 중화(中華)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나라, 그리고 6·25전쟁 때에는 직접 총부리를 겨눈 적대국의 이미지까지 잠재해 있다.
한류(韓流)에 숨은 한류(寒流)
더구나 동아시아의 나라 이름은 중화사상(中華思想)의 화이질서(華夷秩序)를 나타내는 문화 코드의 하나였다. 역대의 중국은 하(夏), 은(殷), 주(周)를 비롯해서 진(秦), 한(漢), 수(隋), 당(唐), 송(宋), 원(元), 명(明) 그리고 마지막 청(淸)에 이르기까지 나라 이름이 전부가 외자다. 하지만 주변국들의 이름은 거의 예외 없이 두 자 이상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 신라, 백제, 조선, 안남, 일본이 그렇다.
‘호칭’에서 드러나는 중화문화의 이 같은 특징은 19세기 서양의 여러 나라와 접촉하는 과정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잉글랜드를 영국(英國)이라고 부른 것은 영웅(英雄)들의 나라라는 뜻이고, 프랑스를 법국(法國)이라 한 것은 법을 만든 나라라는 뜻이다. 도이칠란드는 덕이 있는 나라라 하여 덕국(德國)이고 아메리카는 아름답다 해서 미국(美國)이다. 모두 우호적이고 너그러운 마음에서 나온 외자 이름들이다.
그러나 헝가리 같은 나라는 흉노족과 관련이 있다 하여 ‘흉아리(匈牙利)’라고 썼고 글자도 석 자나 된다. 물론 그 나라의 이름을 한자음에 맞춰서 만든 말이기는 하지만, 그 나라의 이미지와 특성에 어울리는 글자를 골라 붙인 것이다.
이렇게 나라 이름과 관련된 중국의 한자 표기는 그 자체가 숨은 뜻을 지닌 문화코드로 사용되었듯 ‘한류’라는 조어 역시 잠재적인 다른 뜻을 갖고 있다. 중국인들에게 ‘韓’은 자기네와는 체제가 다른 생소함 또는 낯설음을 내포하고 있다. 과거부터 지니고 있던, 고려인이나 중국 내에서 살고 있는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족 혹은 북한을 지칭하는 조선과는 분명히 다른 이질적 말이다. 동시에 한류의 ‘韓’자에는 그와 음이 같은 차가운 ‘한(寒)’의 이미지도 숨어 있다.
그래서 사실 중국사람들은 ‘한류(韓流)’를 ‘한류(寒流)’와 같은 이중적 의미로 사용해왔다. 말할 것도 없이 한류는 ‘차가운 해류의 흐름’으로, 난류와 반대되는 느낌을 주는 말이다. 중국사회로 매섭게 파고 흘러들어온다는 의미다. 즉 한국 대중문화의 유행현상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며 그 경계심과 거부감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한국의 ‘한’이 차가운 ‘한’이 되는 것은 ‘사(四)’가 ‘사(死)’로, ‘팔(八)’이 ‘발(發)’이 되는 중국인들의 오래된 문자 사용 풍습이다. 축일에 폭죽을 터뜨리는 것도 그 같은 문자 신앙에서 나온 풍습이다. ‘폭발(爆發)’이 ‘발전하다’의 ‘發’과 같고, ‘죽(竹)’이 축하의 ‘축(祝)’자와 음이 통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