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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 살인, 성폭력의 그늘

‘짐승’에게 강간당하고, 사회에게‘왕따’당하고…

인격 살인, 성폭력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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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폭력 피해의 기억은 영혼에 새겨진 문신이다. 살을 태우고 뼛속 깊이 사무쳐 결코 지워지지 않는 악마 같은 느낌, 감추고 싶은 ‘주홍글씨’다.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큰 ‘처벌’을 받는 아이러니한 범죄가 바로 성폭력이다. 그 수법은 나날이 흉포화, 지능화, 엽기화하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법과 제도는 여전히 제자리를 맴돈다.
인격 살인, 성폭력의 그늘
지난2년 사이에 잇달아 터진 밀양·익산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단지(斷指)사건, 성직자 유아 성추행 사건은 지금껏 우리 사회를 경악과 충격에 빠뜨리고 여론을 들끓게 하고 있다.

‘가해자 44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운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은 수사 초기부터 여태까지 ‘뜨거운 감자’다. 최근 부산지법 가정지원은 검찰을 거쳐 소년부로 넘어온 가해자 20명 가운데 5명에 대해서만 소년원 송치 결정을 내렸다. 이미 검찰의 솜방망이 처벌로 항의 촛불 집회를 촉발한 데 이어 또 한 차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일명 ‘단지사건’은 징역 7년의 중죄가 선고된 가해자가 보석으로 석방되자 이에 분노한 피해자 어머니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재판부 앞으로 보낸 사건이다. 이 일로 기소된 어머니는 1, 2심에서 무죄선고를 받고 현재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부산에서 발생한 신부(神父)의 유아 성추행 사건은 검찰에 의해 무혐의 처분 결정이 나면서 또 한 번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성폭력 관련 단체 주도로 꾸려진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새 교황 베네딕트 16세에게 사건 해결을 위한 탄원서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폭력범죄로 끓어오른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현재 국회 법사위원회에 계류 중인 성폭력특별법 개정안은 무려 7건에 달한다.



검찰·경찰 통계에 잡히는 성폭력범죄는 한 해 평균 1만여 건, 하루 39명꼴이다. 그러나 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피해 사실을 숨긴 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성범죄의 특성을 감안할 때 실제 통계에 잡히는 수치는 많아야 전체 건수의 6% 안팎에 불과할 것으로 추정된다.

우울증, 수치심, 극심한 불안과 공포

인터넷 사이트 성폭행 관련 상담 게시판에는 끔찍한 공포의 순간을 떠올리며 분노하거나 속으로 고통을 삭이고 사는 피해자의 글이 적지 않다. 2년 전 하숙방에 침입한 강도에게 강간당한 여대생은 이렇게 호소했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심장이 미친 듯 쿵쾅거리고, 밤길을 걸을 때면 늘 누가 따라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대인공포증뿐만 아니라 누군가 나를 해칠지 모른다는 강박증 때문에 살기가 너무 힘들다. 평생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강간당한 사실을 누군가 알아내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면 어쩌나, 범인이 다시 나를 찾아오면 어쩌나 싶어 너무 무섭고 괴롭다.”

성폭력범죄 피해자가 겪는 심리적·정신적 고통은 다른 범죄 피해자에 비해 더 심각하다. 불안강박증, 무력감 또는 우울증, 수치심과 죄책감, 가해자에 대한 분노·적개·복수심, 자살충동, 남성혐오증, 대인기피증을 보이는가 하면 피해를 계기로 오히려 성 중독증에 빠져들기도 한다.

한편 유아와 아동은 성에 대한 호기심 증가 같은 발달상 부적절한 성적 행동을 보이거나 낯선 사람에 대한 지나친 공포, 짜증과 까다로움을 나타낸다. 또 자주 씻거나 부모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순천향대 부천병원 김태희 교수(산부인과)는 “유아는 성폭행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의 세심한 관심과 주의가 필요하다. 아이가 낯선 사람을 무서워하고 유치원에 안 가려고 하는 등 평소와 다르게 행동한다면 성폭행 피해가 있는지 의심하고 몸에 찰과상이 없는지, 성기 주위에 상처가 없는지, 팬티에 냉이 묻어나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라”고 충고했다.

피해자를 가해자 만든 ‘악몽’

성폭력범죄 가운데 친족 내 강간 또는 강제추행의 경우 피해자의 고통은 더 심각해진다. 집안에 문제가 생길 것을 두려워해 피해 사실을 숨기는 동안 지속적으로 피해를 당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당한 데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 상처를 더욱 깊게 한다.

마흔 살의 한 주부는 “여덟 살 때부터 6년 간 오빠와 오빠친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참다못해 어느 날 엄마에게 얘기를 꺼냈는데 ‘절대 그럴 리 없다’며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날 괴롭힌 오빠보다 엄마가 더 미워서 어쩔 줄 몰랐다. 이제 결혼해서 아이들도 있고, 이미 20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때 일이 떠오르면 지금도 분노가 끓어 미칠 것 같다”며 고통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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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은경 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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