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929년 12월20일자에 실린 박소식의 40대 때 모습. 20여 년 전의 꽃다운 자태는 세월의 무게에 사라져 버렸다.
숱한 의문을 풀기 위해 이제부터 “천치 백치에 가까운 피고 이수탁이가 황금의 왕자 ‘못난이’가 되어 이를 중심으로 자작(子爵)과 대관(大官), 변호사와 의사, 경찰서장과 협잡배, 미인과 기생, 악한과 음모자… 이 모든 100여 명의 ‘잡배’가 서로 익숙지 못한 배역이 되어 경향을 무대로 하고 총출연이 된 희극, 비극, 황금의 연쇄적 실극(實劇)을 구경하기로 하자.”(‘동아일보’ 1929년 12월17일자)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자식 손에 비명횡사한 이건호라는 인물이다. 겉으로 보이는 백만장자 이건호의 일생은 화려했다. 그리 후덕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수명이 예순을 넘어 일흔을 바라보았고 당대의 백만장자로 이름이 높았다.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넷을 두었으니 자식복도 아쉽지 않았다. 더구나 그의 생전은 병이 없고 건강하여 그의 품에는 천하의 미인이 떠나지 않았다.
수전노에 호색한, 이건호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66세를 일기로 한 그의 일생은 초년에는 돈이 없고 자식이 없어서 걱정과 탄식이었고, 만년에는 늦게 본 자식이 ‘못난이’로 돈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었다. 그의 전반생은 돈을 모으기 위해 인색과 고달픔의 연속이었고, 그의 후반생은 처첩의 갈등과 늦게 본 자식의 허랑방탕으로 탄식과 수심이 그치지 않았다.
이건호는 빈한한 아전의 아들로 태어나 고리대금으로 누거만(累巨萬)의 재산을 모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돈 한푼에 치를 떠는, 그야말로 자기가 먹고 입는 것까지 아까워하는 말할 수 없는 수전노였다. 그같이 한푼 두푼 돈을 긁어모을 때는 살뜰한 친척도 없었고 의리와 공리도 몰랐다.
나이 마흔에 백만장자라 하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거금을 모았으나 슬하에 아들이 없어 고민이었다. 한때는 한학자(漢學者)의 문하에 들어가 청풍명월의 시를 읊고 거문고 가야금에 정신을 팔고 술을 마시며 여생의 쓸쓸한 시름을 잊으려고도 해보았으나, 귀밑으로 찾아오는 흰털이 저물어가는 만년의 심회를 더욱 처량산란케 했다. 이로부터 그의 가슴은 자식 욕심으로, 호색축첩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이건호는 일찍부터 음율을 배우기 위해 드나들던 논산의 유명한 광대 박근창의 집에서 17~18세의 꽃다운 소녀를 발견한다. 그녀는 광대 박근창의 조카딸 박소식으로, 비록 씨는 광대요 바탕 또한 무당이라는 미천한 가문에 태어난 몸이나, 호리호리한 몸매와 아리따운 자태는 누구라도 천인(賤人)으로 볼 수 없는 고상한 ‘귀족 타입’이었다. 당시 한 연재기사는 박소식의 미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20의 춘광을 멀리 바라보며 장차 피려는 티없이 맑고 흰 그 얼굴은 샛별같이 반짝이는 영롱한 눈동자가 초생 반달과 같이 성근 눈썹 아래에서 빛나는 것이 높고 영리한 예지를 갖춘 시원한 이마에 조화되고, 도톰한 코 아래로부터 붉은 입술에 미소를 지을 양이면 홍도화(紅桃花) 빛으로 물들인 두 뺨에 우물을 그리는 그것이 한데 어울려 요모조모 천하의 요염을 한데 모아 가진 절세의 미색 그것이다. 이는 본부(本夫) 이건호를 독살하였다는 혐의로 현재 철창에 있는 피고 박소식이었던 것이다. (‘익산 백만장자 독살사건 2’, ‘동아일보’ 1929년 12월18일자)
고와서 서러운 여인, 박소식
17세 소녀와 39세 장년의 이 어울리지 않는 혼인은 황금의 힘을 빌려 아무런 시비와 반항 없이 성사됐다. 박소식은 영문도 모르고 부모의 명령대로 아버지 또래의 사내에게 시집을 갔으나,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귀밑털이 희끔희끔한 이건호를 남편으로 대할 때는 어린 마음에 무섭고 싫은 생각뿐이었다. 더구나 검푸른 얼굴에 취흥이 도도하여 이상한 웃음을 띠고 가만히 자기를 가까이할 때는 앞서는 공포와 불안으로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그 불안과 공포는 마치 험상궂은 악한을 대하는 것과 같았다.
(남편의) 거친 숨소리에 (박소식은) 몸을 소스라치며
“아 무서운 사람”
이렇게 부르짖고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고 파르르 떠는 것이다. 그러나 소리를 내어 외치는 것은 아니었으니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고 속으로 부르짖는 말할 수 없는 비애의 서러운 비명이었을 뿐이다. 황금에 팔린 몸이 황금에 다시 고개를 숙인다. 움츠렸던 몸은 더 앙탈 못하고 억센 손에 그가 하는 대로 내맡기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좁은 가슴은 터지는 것 같았다. 미어지는 것 같았다. 분하였다. 원통하였다. 원망스러웠다. 이 밤이 언제나 다할꼬? 하면 날은 새었다가 다시 어두워지는 것이다. 어두워지는 밤이 원수와 같고, 깊어가는 밤이 큰 욕이었건만 그 지긋지긋한 밤은 또다시 오는 것이다. 이것이 신혼 초 나이 어린 박소식에게 날마다 찾아오는 원수의 밤이었던 것이다. (‘익산 백만장자 독살사건 3’, ‘동아일보’ 1929년 12월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