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백교 사건을 보도한 당시의 \'동아일보\'와 재판정 광경(작은 사진).
유곤용의 조부는 약종상으로 자수성가해 한때 수십만원대의 재산을 모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온천이 개발되어 전국적인 휴양지로 번성한 신천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다. 그런 유씨 집안의 재산은 30여 년 전부터 뚜렷한 이유 없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조부가 축첩을 하거나 주색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미두(米豆·미곡의 시세를 이용하여 약속만으로 거래하는 일종의 투기)나 도박에 손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조부는 수시로 땅을 팔고, 빚을 얻었다. 유곤용이 해주로 나올 즈음 유씨 집안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몰락했다.
유곤용의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비방으로 약을 처방했는데, 특히 위장병, 임질, 뇌신경질환 치료약 조제에 탁월했다. ‘구명당’을 개업한 지 불과 1~2년 만에 유곤용의 명성은 일대에 자자했다. 10여 년의 관록이 붙은 후 그의 명성은 황해도를 넘어 경기도와 평안도에 뻗쳤다. ‘구명당’은 조선 최초의 한약재 연구소를 설립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거칠 것 없이 뻗어가던 유곤용에게도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1933년 임종하기 전, 조부는 유곤용에게 30년간 지켜온 집안의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
“할아비는 장차 너의 부귀와 공명을 위해 근 30년간 백백교를 믿어왔다. 대원님께 의지하여 재물 버리기를 초개와 같이 했다. 그러나 아쉬워 말거라. 할아비가 정성을 다해 교에 바친 재물은 이제 곧 몇 곱절, 몇십 곱절이 되어 네 아비와 네게 돌아올 거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집안이 몰락한 이유는 허망하게도 조부가 백백교라는 신흥종교를 믿은 탓이었다. 조부의 죽음으로 집안의 비극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부친 유인호는 조부보다 더 ‘독실한’ 백백교 신도였다.
조부가 죽은 후 부친 유인호는 얼마 남지 않은 가산을 정리해 가솔들을 이끌고 백백교 본부가 있는 서울로 이주했다. 재산 일체는 물론 18세밖에 안 된 딸 유정전마저 대원님께 바쳤다. 그 대가로 받은 것이라고는 고작 ‘장로’라는 허울뿐인 직함과 왕십리에 있는 허름한 방 한 칸이 전부였다. 유곤용은 헛된 망상에서 깨어나라고 4년을 두고 설득했지만, 유인호의 30년 믿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교주의 애첩이 된 누이동생 유정전 또한 백백교의 열성 신도가 됐다.
최후의 밤
1937년 2월10일, 음력 설을 맞아 유곤용은 중대한 결심을 하고 왕십리 유인호의 처소를 찾았다. 4년 만에 부친을 만난 유곤용은 무릎을 꿇고 그동안의 불효를 고개 숙여 사죄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대원님을 만나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는 뜻을 전했다. 유인호는 자식의 돌연한 개심이 한편으로는 기특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몹시 불안했다.
“대원님을 승안(承顔)하는 데에는 절차와 법도가 있다.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승안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먼저 선생님께 의향을 여쭈어 허락을 얻어야 한다. 만약 대원님께서 허락하시면 너는 그로부터 사흘 동안 집안에서 아무도 만나지 말고 근신하여 세상에 찌든 더러운 마음을 씻어야 한다.”
유곤용은 어떠한 곤란한 명령이라도 순종할 터이니 제발 대원님을 승안케 해달라며 거듭 부탁했다. 그제서야 유인호는 자식의 진심을 믿을 수 있었다. 유인호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2월16일 저녁 8시 왕십리 유인호의 자택에서 백백교 교주 전용해와 유곤용이 운명적으로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전용해의 애첩이 된 유정전은 오빠 유곤용에게 대원님을 승안할 때 다섯 가지 계율을 명심해서 지켜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