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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수도 평양은 북한땅에 없었다”

거란 역사서 ‘요사(遼史)’ 의 놀라운 증언

“고구려 수도 평양은 북한땅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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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령성 요양은 본래 고조선 땅이었다
  •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이후 요양이 수도
  • ●패수도 요양 근처, 발해 중경도 요양에 위치
“고구려 수도 평양은 북한땅에 없었다”

사회과부도 교과서의 고구려 지도. 우리 교과서는 장수태왕 이후 고구려가 지금의 북한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고 밝혔으나, ‘요사’는 광개토태왕 이후 패망할 때까지 요양을 평양으로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고대에는 지금의 요서를 요동으로 불렀으니 고구려 영토는 요하를 건너 서쪽까지 미쳤다.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우리를 압박한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지금의 중국 땅에서 일어났고 관련 유적과 자료가 중국에 있으니 우리는 발만 동동 구른다. 이런 답답함을 타개하기 위해 몇몇 학자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정사(正史)인 ‘요사(遼史)’를 완역했다. ‘요사’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와 함께 제3자의 관점에서 우리 고대사를 알려주는 사서로 꼽혀왔다. 이 때문에 여러 학자가 부분 번역했지만 완역되기는 처음이다.

번역 기획은 복기대 뇌교육대학원 교수(고고학)가 했다. 복 교수는 중국 유학 시절 ‘요사’와 ‘금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만주지역을 답사해 사료와 맞춰보며 ‘요사’ ‘금사’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귀국 후 그는 스승인 윤내현 단국대 교수와 ‘요사’ 전문가인 김위현 명지대 교수와 협의한 뒤 교육인적자원부를 설득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밀어붙일 때라 교육부도 우리 국사를 다시 연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요사’ ‘금사’ 인정 안 하는 중국

그리하여 ‘역사 기초자료 번역 및 연구 사업’을 입안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진흥사업단을 통해 번역을 지원했다. 단국대 이상훈 교수와 이성규 교수가 실무를 맡아 출판을 하고 번역은 김위현 교수가 제자 김한기 변은숙 씨 등과 함께 했다. 김 교수는 번역의 전체적인 틀을 만들어 세밀히 고증했다.

중국은 한 왕조가 끝나면 다음 왕조가 이전 왕조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렇게 25개 역사서가 만들어졌다(통칭 ‘25사’). 그런데 선비족이 세운 북위 등 5호16국 시대의 왕조와 요, 금, 몽골족의 원(元), 여진의 후예인 만족(滿族)이 건국한 청(淸)은 한족(漢族)의 나라가 아니었다. 한족이 겁낸 적국인데 중국을 지배하고 통치했기에 다음 왕조는 그들의 역사서를 제작했다. 그런데 ‘요사’와 ‘금사’를 제작한 것은 한족이 아닌 몽골족의 원나라였다. 두 사서만 비(非)한족이 만든 것이다(반면 ‘원사’는 한족 왕조인 명나라가 만들었다).



이 때문에 중국 역사학계는 두 사서가 부정확하다며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이 조선과 대한민국에도 전해져 같은 분위기가 형성됐다. 두 사서는 원나라 말기 몽골인인 탈탈(脫脫)의 주도로 급하게 제작됐기에 약간의 오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 역사학계는 이를 이유로 두 사서의 기록을 무시한다. 그러나 제3자인 우리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기술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요는 고려와 세 번 전쟁을 했고, 고려가 고구려를 이은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적국 고려의 선조인 고구려와 고조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으니 이들의 기록은 더욱 객관성을 갖는다. 학자들은 이에 착안해 동북공정에 맞설 객관적 사료 확보를 위해 1월 중순 ‘요사’ 번역본을 내놓았다. ‘금사’는 내년 말 완역본을 낼 예정이다.

‘요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요나라 지리를 정리한 ‘지리지’다. 그중에서도 요나라 동쪽 지방인 ‘동경도’ 부분이다. 요나라는 동경 서경 남경 상경 중경의 오경(五京) 제도를 갖고 있었다. 요나라는 동경도(東京道)의 중심인 동경을 지금의 요령성 요양(遼陽)에 뒀다. 그때도 요양은 요양으로 불렸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편은 요양이 ‘본래 조선의 땅이었다’는 글귀로 시작한다. 조선은 고조선을 가리킨다. 우리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이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해놓았는데 ‘요사’에선 도읍지가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놓은 것이다.

한4군은 만주에 있었다

고조선에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있었다. 지리지는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옥에서 풀어줘 그가 조선으로 가자 그 땅에 책봉했다’고 밝혀놓았으니 조선은 곧 기자조선이다. 8조법금은 기자가 만들었는데, 지리지도 ‘그(기자)가 8조법금을 만들었다’고 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요양에 도읍했음을 재확인했다.

지리지는 기자조선이 40여 대 왕을 이어오다 중국 연(燕)나라 때 매우 약해져 연나라에 속한 ‘진번’과 ‘조선’이 됐다고 밝히고 있다. 연나라는 중국 역사에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때의 연은 진시황의 진(秦)과 다투다 패배한 ‘전국 7웅’ 중의 하나인 연이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은 진시황이 죽자 곧 무너지고, 항우와 유방이 다투다 유방이 승리해 한(漢, 서기전 206~서기 220)나라가 등장했다.

황제가 된 유방(한고조)은 고향 친구이자 부하 무장으로 공을 세운 노관을 연왕(燕王)에 봉하고 제후로 삼았다. 유방은 건국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면서도 그들이 한나라 왕실을 넘보지 않을까 의심했다. 한나라군 총사령관으로 항우 군을 궤멸시킨 1등 공신 한신을 특히 의심해, 몇 가지 혐의를 씌워 그의 허리를 잘라 죽였다(요참형·腰斬刑). 그때 한신이 원한에 사무쳐 남긴 말이 바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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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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