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제 조선 역사에서 ‘무’는 전란이 있던 시기 외에는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그조차도 세종 때의 북방 개척과 대마도 정벌, 선조 때의 임진왜란·정유재란 시기에나 주목을 받았다. 고려 말 이후 병자호란(1636~1637)에 이르기까지 왜구와 여진족(淸)은 지속적으로 도발했고 끝내 새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무는 언제나 변방이었다. 한양은 ‘우물 안의 평화’에 젖어 있었다.
이순신과 드레이크
임진왜란 발발 100년 전인 1492년, 이탈리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그 후 유럽 여러 나라가 무력을 앞세워 지구 곳곳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최신 무기로 무장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은 대서양과 인도양, 태평양을 경쟁적으로 누볐다.
임진왜란 4년 전인 1588년, 식민지 침략사에 한 획을 긋는 스페인과 영국의 결전이 벌어졌다. 무적함대(Armada)를 앞세워 세계의 바다를 호령하던 스페인과 신흥 해양 강국 영국 간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였다. 프랜시스 드레이크(1545~1596)가 지휘한 영국 함대는 우수한 전함과 함포로 무적함대를 격파했다.
영국 함대는 장거리 항해 능력에서 무적함대를 능가했다. 함포도 무적함대가 탑재한 것보다 성능과 대수에서 앞섰다. 무적함대의 장거리포(culverin)는 21문, 중거리포(demiculverin) 151문에 불과했지만, 영국 함대는 장거리포 153문과 중거리포 344문을 보유했다.
이 승리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드레이크는 200여 년 후인 1805년, 트라팔가에서 세계 정복을 꿈꾸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함대를 몰락시킨 호레이쇼 넬슨(1758~1805)과 함께 영국 최고의 바다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드레이크는 이순신이 태어난 해인 1545년 출생했고,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2년 전인 1596년 병사했다. 그들의 전략·전술은 비슷했다. 이순신이 해적처럼 상대의 배에 올라타 육박전으로 공격하는 일본군의 전략·전술을 간파하고 함포 사격으로 이를 무력화한 것처럼, 드레이크도 다수의 우수한 함포로 무적함대를 격파했다.
드레이크가 중천에 떠 있던 스페인 제국의 야망을 꺾고 신흥 제국 영국을 세우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면, 이순신은 탐욕에 물든 과대망상증 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제국 일본의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이순신과 드레이크는 존재 조건이 달랐다. 그들이 만든 역사는 달랐다. 하지만 그들은 19세기 독일 철학자 니체가 말한 ‘시대의 초인(超人·Superman)’이었다.
自閉의 조선
상업 이익에 눈을 뜬 유럽이 목숨 걸고 탐험하며 세계사를 바꾸던 격동의 시절, 역사를 후진시키고 있던 성리학의 나라, 선비의 나라가 조선이었다. 조선은 우물 안에 뜬 태양 같던 명나라를 ‘하늘의 태양은 하나’라는 신념으로 해바라기처럼 바라봤다. 그런 나라에서 이순신은 특이한 존재다. 문인 집안 출신이면서도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무인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공평무사한 행정가를 넘어, 탁월한 경영자가 됐다. 이순신처럼 무인, 행정관료, 경영자 세가지 면모를 두루 갖춘 인물은 조선과 중국은 물론, 동양보다 수백 년 먼저 근대화를 이룬 서양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시대에는 뛰어난 인물이 많았지만, 대부분이 선비 혹은 문인 관료다. 명장(名將)이나 상인(商人), 장인(匠人) 등은 많지 않다. 명장들은 몇 차례의 전쟁을 통해 혜성처럼 등장했지만 그뿐이었다. 그저 왕과 양반 문인을 지키는 경호원 같은 존재였을 따름이다. 양반 신분인 장수들이 그럴 정도인데 상인과 장인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조선은 성리학의 종주국인 명나라 사람들조차 구시대의 전설로 여기던 노비제도를 유지했다. 고조선 때부터 존재한 노비제도는 1801년 순조 때 공노비 5만 명을 해방하고, 그로부터 93년 뒤인 1894년 사노비를 폐지함으로써 마침내 사라졌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질서는 그만큼 오랜 악습이었다. 그런 사회에서 상인과 장인은 역사의 무대에 올라서기 어렵다.
중앙과 지방의 행정권을 장악한 문인 선비들은 국가의 재정난과 민생 문제에 직면했지만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고 외면했다. 선비들은 그들이 내세운 청빈한 삶과 달리 부유한 삶을 추구했다. 선비들의 목표인 과거 급제는 대부분 일신의 영달과 생계 해결, 부의 유지와 확대를 위한 수단이었다. 공자와 맹자가 말하는 이상적인 정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형이상학인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백성들이 먹고사는 경제적인 문제는 부차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에는 ‘경제사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많지 않다. 양반의 먹을거리, 사회와 양반 신분을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는 정도의 부유함만 지키면 됐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경제사상가의 원조는 중기의 토정 이지함(1517~1578)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포천 현감 때 선조에게 올린 ‘이포천시상소(이抱川時上疏)’는 세계 최초의 근대 경제학 저술이라는 애덤 스미스(1723~1790)의 ‘국부론’보다 200여 년 앞선 탁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