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에는 이순신과 같은 명장(名將)이 많았다. 그런데도 이순신이 최고의 군신(軍神)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의 필력(筆力)과 독서력, 그리고 배운 것을 활용하는 응용력 때문이다. 무신 이순신 뒤에는 문신 이순신이 숨어 있다.
필자가 이순신을 공부하면서 중심에 둔 자료는 4개다. 그가 남긴 ‘난중일기’와 그의 보고서 모음집 ‘임진장초(壬辰狀草)’, 그의 조카 이분(李芬·1566∼1619)이 쓴 최초의 이순신 전기 ‘이충무공행록(李忠武公行錄)’, 이순신을 군신(軍神)으로 만들어준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징비록(懲毖錄)’이다. 이 자료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이순신은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
그의 시작과 끝은 ‘글’
난중일기에는 시대의 엄혹한 사명 앞에 선 ‘인간 이순신’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의 한과 눈물, 통곡, 인간관계와 함께…. 임진장초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혹한 비극 앞에서 군사와 백성을 먹여 살리고, 잔인하고 무서운 적을 눈도 깜짝 않고 최전선에서 마주해 싸우며 승리하는 ‘불패의 명장 이순신’이 생생히 살아 있다.
이충무공행록은 이순신의 삶을 시간 순으로 보여준다. 특히 그 유명한 문장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라는 ‘자기확신의 화신 이순신’이 새겨져 있다. 징비록에는 진중(陣中) 경영자 이순신과 불패의 병법가 이순신의 면모가 수놓아져 있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이순신은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그의 지혜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이순신은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에 그에 대한 답을 유추할 만한 흔적을 남겨놓지 않았다. 이순신을 곁에서 지켜보며 기록한 이충무공행록과 징비록에도 그 부분에 대한 묘사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그의 말과 글의 편린을 추적해보면, 그 스스로는 말하지 않았으나 ‘아! 그랬구나!’ 하고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조선시대에 이순신만한 명장은 또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순신만큼이나 열악한 조건에서 자신의 삶을 불태운 명장이 허다하다. ‘육지의 이순신’으로 불리는 정기룡(鄭起龍·1562∼1622), 진주대첩의 김시민(金時敏·1554∼1592), 행주대첩의 권율(權慄·1537∼1599), 연안성 전투의 이정암(1541∼1600), 선조가 명나라 장수에게 자랑한 한명련(韓明璉·?∼1624), 명나라 장군 모국기(茅國器)가 인정한 장수 이운룡(李雲龍,·1562∼1610), 자타가 공인한 명장 곽재우(郭再祐·1552∼1617) 등 한 손으로는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조선은 500년 역사를 지녔다. 난세는 물론이고 평시에도 변방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다. 그 현장엔 유명하건 그렇지 않건 무수한 장수들과 민초가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은 잊혔다. 이순신과 그들의 차이는 바로 ‘글’에 있다. 그들은 이순신처럼 일기와 보고서를 제대로 남기지 않았다. 이분이나 류성룡처럼 공인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다른 사람이 남긴 평가 기록도 많지 않다.
‘칼을 든 이순신’ 이전에 ‘붓을 든 이순신’이었기에 그는 오늘날까지, 아니 이 땅이 존재하는 날까지 영원히 남을 위대한 인물이 됐다고 본다. 글은 그의 시작과 끝이다. 그의 글에는 온전한 삶, 고통스러운 삶, 영광의 삶이 다 들어 있다.
임진왜란 중 이순신의 진영을 오가며 그를 보좌한 조카 이분은 이충무공행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처음에는 두 형을 따라 유학(儒學)을 배웠고, 유학으로 성공할 만한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매번 붓을 던졌고 군인이 되려고 했다. 병인년(1566년, 22세) 겨울에야 비로소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 겨우 한두 잠을 잔 뒤 사람들을 불러들여 날이 샐 때까지 의논했다. 정신력이 보통사람보다 배나 더 강해 때때로 손님과 한밤중까지 술을 마셨지만, 닭이 울면 반드시 일어나 촛불을 밝히고 앉아 사색하거나, 책과 서류를 보거나, 사람들을 불러모아 전술을 강론했다.”
이순신은 22세 가을까지 유학을 공부하다가 그해 겨울에야 무과로 바꿨다. 그리고 10년 뒤인 32세에 합격했다. 20대 초반까지 그는 그 시대 다른 사대부 집안의 청소년처럼 칼을 든 군인의 삶이 아니라 붓을 든 선비 · 관료의 삶을 지향했다.
글로 성공할 수 있을 만큼의 재능도 있었다. 이순신의 멘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은 단아하며 근엄하게 생겨서 마치 수양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속에는 담기(膽氣)가 있었다”며 책 읽는 선비 풍모를 그렸다.
‘膽氣를 품은 선비’
그런 이순신이기에 7년 전쟁 중에도 붓을 놓지 않고 매일 일기와 수많은 보고서를 쓸 수 있었다.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에 직간접적으로 언급된 독서력을 갖췄다. 그는 이충무공행록의 기록처럼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었다. 독서는 어느 날 갑자기 되는 일이 아니다. 습관이다.
이순신은 어떻게, 무엇을 공부했기에 그런 자질과 습관을 키울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선비들의 독서 과정과 독서법에 있다. 그 시대 문과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선비들은 오늘날과 같이 세밀한 학습 과정은 아니더라도 나름의 훈련 과정을 거쳤다.
조선 왕세자의 일과가 대표적이다. 왕세자는 4세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아침 6시부터 공부를 해야 했다. 학습 순서를 보면, 한문의 기초를 터득하는 ‘천자문’, 인간으로서의 예의범절을 공부하는 ‘동몽선습’ ‘격몽요결’ ‘소학’ 등을 배운 뒤, 유교 경전인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시경’ ‘서경’ ‘역경(주역)’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 후 나라의 흥망성쇠를 풀어쓴 역사서인 ‘사기’ ‘춘추좌전’ ‘자치통감’ ‘십구사략’ ‘역대병요’를 공부했다. 자신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이는 ‘삼국사기’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동국병감’을 따로 공부했다.
眼光이 紙背를 徹하게
공부 방법은 ‘읽고 외우기’였다. 이순신의 시호 ‘충무(忠武)’를 내려받도록 시장(諡狀 · 시호를 요청하는 근거 문서)을 쓴 이식(李植·1584∼1647)은 자손들에게 다음과 같은 공부 방법을 가르쳤다.
“시경과 서경은 본문 위주로 100번, 논어 100번, 맹자 100번, 중용과 대학은 횟수를 제한하지 말고 아침저녁으로 돌려가면서 읽어라. ‘자치통감강목’과 ‘송감(宋鑑)’은 선생과 함께 배운 뒤 숙독하고 좋은 문자가 있으면 한두 권쯤 베껴 써서 수십 번 읽도록 하라. 만약 미치지 못하거든 ‘자치통감절요’와 ‘십구사략’ 중 하나를 먼저 배우라. 그다음에 ‘주역’ ‘춘추좌전’ ‘예기’ ‘주례’ ‘소학’ ‘주자가례’ 등의 순서로 공부하라.”
같은 책을 100번씩 읽는다는 것은 눈빛이 종이의 뒷면까지 뚫는다는 ‘안광지배철(眼光紙背徹)’을 떠오르게 한다. 이 방식은 천장과 벽에 글씨를 써 붙이고 글자의 의미를 사색하면서 자연의 이치를 탐구한 서경덕(徐敬德·1489∼1546)과는 다른 방식이다. 서경덕의 방법은 그 시대에는 예외적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대부분 읽고 외우는 것을 먼저, 사색을 그다음으로 했다. 조선 성리학을 꽃피운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의 책읽기 방법이 가장 전형적인 공부법이었다.
“책은 정신을 차려 셀 수 없이 반복해 읽어야 한다. 한두 번 읽고 그 뜻을 대략 깨닫고 덮는다면 몸에 충분히 밸 수 없다. 알고 난 뒤에도 몸에 배도록 더 깊이 공부해야만 비로소 마음에 오래 지닐 수 있게 된다. 그런 뒤에야 학문의 참된 의미를 경험하여 마음에서 기쁜 맛을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독서법은 그렇게 무지막지했다. 청소년 이순신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읽은 책들이 그의 자산이 된 것은 분명하다.
그가 직접 읽었다고 기록한 책은 류성룡이 보내준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난중일기, 1592년 3월 5일), ‘동국사(東國史)’(난중일기 1596년 5월 25일), 독후감을 남긴 ‘송사(宋史)’(난중일기 1597년 10월 8일 일기 이후의 메모)밖에 없다. 그러나 난중일기, 임진장초, 이충무공행록에는 그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多讀), 사색(多商量)했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 넘쳐난다.
옛 선비들은 글자 하나, 말 한마디를 그냥 던지지 않았다. 대부분 옛 전거를 활용한다. 창작 대신 선현들의 말과 글 혹은 그들이 쓴 단어를 활용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그래서 일반적인 문신(文臣)이나 선비가 쓴 단어나 표현 방식은 대개 유사하다.
이순신은 무신(武臣)이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문인이 쓰지 않는 표현, 혹은 문인이 쉽게 접하는 책이 아닌 병법서 용어가 자주 눈에 띈다. 역사책은 문인이나 무인이나 다 같이 읽는다. 이순신은 전쟁의 관점에서 역사책을 읽었기에 그가 주목한 표현은 문인들이 읽고 인용하는 내용과 차이가 있다. 이순신은 유학의 기초 소양을 바탕으로 각종 병법서와 전쟁사를 읽고 공부했다. 현실의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현장과 이론을 비교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병법 세계를 만들어갔다.
岳飛의 삶 닮고자
이순신의 일기와 글에는 그가 읽고 메모하거나, 다른 책을 읽고 변형한 사례들이 나온다. 무과 시험 과목과 관련된 책들도 직간접적으로 활용했다. 가장 확실하게 인용한 책, 또 그렇기에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책은 1585년 선조의 명으로 조선에서 간행된 중국 송나라 명장 악비(岳飛)의 전기 ‘정충록(精忠錄)’인 듯하다. 난중일기에 있는 다음의 메모들이 정충록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출전하여 만 번 죽을 일을 당했어도, 한 번도 살고자 생각하지 않았다. 분노하고 분노하는 마음 끝이 없다.
△사직(社稷)의 위엄 있는 신령에 힘입어 작고 보잘없는 공로를 세웠는데도 총애와 영광이 넘치고 넘쳐 분수를 뛰어넘었다.
△몸은 장수의 신분이나 티끌만한 공로도 없는데, 입으로는 임금이 내린 교서를 외워 떠들고 있어, 얼굴에는 부하 장졸들 보기가 부끄러움만 가득할 뿐이다.
△더러운 오랑캐에 짓밟힌 지 2년이 다 되어간다. 회복할 때가 바로 오늘이다. 명나라 군사의 수레와 말울음 소리를 하루가 1년처럼 기다렸다. 그런데도 적을 무찔러 없애지 않고 강화를 위주로 하고 있다. 흉악한 무리들이 잠시 물러나 있으나, 우리나라는 수년 동안 침략당한 치욕을 아직도 씻지 못하고 있다. 하늘까지 닿은 분노와 부끄러움이 더욱 사무친다.
이순신은 악비의 글을 읽고 공부하며 악비의 삶을 닮고자 치열하게 고민했던 듯하다. 이순신이 독후감을 남긴 ‘송사(宋史)’도 악비가 활약하던 송(宋)과 금(金)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이순신은 일본의 침략을 당한 처지에서 유사한 일이 있었던 송나라의 사례를 철저히 연구하면서 송나라의 명장과 충신을 연구했다.
△나라 안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기운이 풀어지니 백성들의 희망이 저절로 끊겼습니다. 신(臣)이 비록 어리석고 겁쟁이지만, 마땅히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직접 나아가 여러 장수들보다 먼저 몸을 바쳐 나라의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유기(劉錡)는 문에 땔나무를 쌓아 놓고는 경비 군사에게 명령해 말하기를, “만약에 불리해지면 즉시 우리집을 불태워 적의 손에 모욕당하게 하지 말라.”
진수(陳壽·233∼297)가 쓴 역사서 ‘삼국지’ 혹은 나관중(羅貫中 · 1330?∼1400)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를 인용하거나 변형한 사례도 있다. ‘삼국지 혹은 삼국지연의’라고 한 까닭은 같은 문장이 두 책에 동일하게 나오기 때문인데, 이순신이 어떤 책을 읽었는지 확정할 수 없어 두 책을 모두 언급한다.
△초야에는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도록 보좌할 만한 주춧돌 같은 사람이 없고, 조정에는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책략을 지닌 기둥 같은 사람이 없구나.
△배를 더 만들고 기계를 보수하며 사용법을 훈련시켜 적들이 편안히 잠들지 못하게 한다면, 나는 그로 인한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
△원컨대 한번 죽을 것을 약속하고, 곧바로 호랑이굴을 공격해 요망한 기운을 다 쓸어버려 나라의 수치를 만분의 일이라도 씻으려 합니다. 성공과 실패, 이익과 해로움을 신의 지혜로는 미리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순신의 담박한 문장
악비가 금나라에 연승을 거듭하자 이를 시기한 진회가 악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 후 중국인들은 악비의 사당 앞에 무릎 꿇은 간신 진회의 상을 세우고, 진회의 상에 침을 뱉거나 오물을 던졌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을 싸워도 백 번 승리한다. 나를 알지만 적을 모르면, 한 번은 이기나 한 번은 진다. 나도 모르고 적도 모른다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한다. 이것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이론이다.
명량해전의 기적을 만드는 데 일조한 ‘오자병법’도 난중일기에 나온다. 명량해전 전날 장졸들에게 한 연설문의 핵심을 이순신은 일기에 기록했다. 그가 오자병법을 탐독했다는 다른 증거도 있다. 관점에 따라 사소해 보일 수 있으나, 전거를 활용하는 옛사람들의 기록 방식에 따르면 그냥 지나칠 기록은 아니다. 그동안 초서체 판독 문제와 한문 해석의 어려움으로 인해 파악되지 못한 1596년 6월 26일 일기 뒷부분이 그것이다.
△병법에서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고, 또 “한 사나이가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1596년 6월 26일. (…) 이날 낮 12시쯤(午)에 망아지 2필의 발굽이 상했다.
6월 26일 일기의 ‘발굽이 상했다(낙사하, 落四下)’에 대해 난중일기 번역자들은 바른 해석을 하지 못했다. 낙사하는 ‘오자병법’의 ‘치병(治兵)’ 편에 나오는 말이다. 거기에서 오자는 군마(軍馬) 기르는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릇 말은 반드시 말이 마구간에서 편안하게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물과 사료를 때에 맞게 주어야 하고, (…) 털과 갈기를 때에 맞춰 깎아주고, 굳은살을 떼어내고 편자를 갈아주어 네 발굽이 손상되지 않도록 한다(夫馬 必安其處所 (…) 刻剔毛 謹落四下).”
이순신은 오자가 ‘謹落四下(굳은살을 떼어내고 편자를 갈아줘 네 발굽이 손상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고 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자신의 망아지 발굽이 상했다는 것을 표현했다.
외운 것은 현실에 적용
이수광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독서의 이치는 활을 쏘는 이치와 같다. 활 쏘는 사람은 과녁에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집중한다면, 정확히 맞히지는 못해도 화살이 그다지 멀리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책에 눈과 입을 머물게 하라”고 했다. 이순신의 독서법은 이수광이 말한 활쏘기 독서법과 같다. 활을 쏘듯 책에 집중하고 기억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수광의 독서법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그가 읽은 책 내용을 현장에서, 현실에서 끊임없이 비교하고 활용방법을 고민했다. 그의 1597년 6월 4일 일기에는 자신이 읽은 ‘오자병법’을 현실과 비교하는 모습이 그대로 나온다.
“개연(介硯)으로 걸어갔다. 기암절벽이 천 길(丈)이나 되고 강물은 굽이쳐 돌아가는 데다 깊었다. 또한 절벽과 절벽 사이에 선반처럼 매어놓은 사다리길은 위태로웠다. 이 험한 곳을 굳게 지킨다면 만 명의 군사도 지나기 어려운 곳이다. 이곳이 모여곡(毛汝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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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백의종군 중이었지만 오자병법의 눈으로 지형지물을 관찰했다. 그 결과가 모여곡과 같은 지형의 명량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이순신 독서법의 또 다른 특징은 실용적인 데 있다. 그가 읽은 책의 공통점은 자신의 일인 전쟁 승리와 진중 경영을 위한 아이디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병법과 역사책들이라는 사실이다.
이순신은 그들 책 속의 이론과 역사적 경험을 자신이 처한 현실과 비교하면서 끊임없이 통찰력을 키웠고 실용적으로 활용했다. 이순신이 우리 현대인에게 알려주는 독서법을 결론지어 말하자면 ‘자신의 일과 관련된 이론서와 사례 연구서를 깊이 읽고, 부단히 현실과 비교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