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쪽에서 본 덕승문 전경.
언뜻 보면 주자를 내세운 전서 편찬의 대업이 학문의 전면화나 주자학의 보편화에 목표를 둔 듯하지만 황제의 속뜻은 선비들을 번잡한 형식적 학문에 묶어둠으로써 도서 교정으로 허송세월하게 하는 데 있었다. 요컨대 천하 학자들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주자를 받드는 것으로 세상의 찬양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연암은 곧 황제의 교활한 책략을 짐짓 간파했다. 진시황처럼 분서갱유 같은 포악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천하의 식자들을 ‘사고전서’ 편찬 교정부서인 취진국(聚珍局)에 몽땅 몰아넣고 그들의 문장력과 생각하는 권리를 갈가리 찢어발겼던 것이다.
연암은 마침내 비수 같은 말을 서슴없이 뿜어댔다.
嗚呼! 其愚天下之術, 可謂巧且深矣, 所謂購書之禍甚於焚書者正指此也.(슬프다! 천하를 우롱하는 꾀가 교묘하고도 심각하다. 책을 사들이는 화(禍)가 책을 불사르는 화보다 더하다는 것이 바로 이거로군.)
여기서 ‘책을 사들이는 화’는 책을 엮고 찍어서 사람들에게 읽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문화적이고 생산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그 일을 매도한 것은 그것으로 우민화하고 책략화하기 때문이다. ‘책을 사들이는 화’는 ‘주자를 떠받드는 일’과 통했다. 이 두 가지 일은 사실상 유학(儒學)이라는 형식주의에 매어두는 일이다. 결코 그 목적이 육상산의 사상과 그 도당을 멸종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 사실상 중국에는 주자의 성리학파와 상산의 심리학파가 공존했다.
이런 세태를 살피라는 뜻에서 연암은 이 글에 굳이 ‘심세(審勢)’라는 제목을 달았는지 모른다. ‘심세편’의 마무리에 연암은 이런 당부를 서슴지 않았다. 조선 선비 중에 중국을 유람하다가 주자를 반박하는 난적(亂賊)을 만나더라도 함부로 배척하지 말라고. 말씨를 다소곳이 낮추면 천하대세의 정체를 알 수 있으리라고.
필자는 이 대목에서 버릇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동안 걸핏하면 흰둥이 아니면 깜둥이로 금 긋듯 갈래질해왔다. 주자 아니면 반(反)주자,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속단했던 것이다.
연암은 중국 문화를 비평하는 잣대를 늦추지 않았다. 당당한 선비의 자세로 그 시각이 준엄했다. 더구나 유학, 나아가 학문을 보는 눈이 객관적이고 지성적이었다.
상식을 뛰어넘은 神
8월19일자 일기에서였다. 임구(林溝)를 지나 청하(淸河)에서의 밤이었다. 관운장(關雲長)의 사당에 걸린 강희황제 친필의 금자 현판을 두고 연암이 시비를 걸었다.
‘左聖右佛’
좌로는 성인이요, 우로는 부처라는 뜻이다. 그런데 성인은 누굴 뜻하는가. 관우(關羽·자가 운장)임이 자명했다. 그런데 관우가 왜 성인이란 말인가. 연암은 관묘의 주련마다 관우의 도덕과 학문을 찬미한 것들이 줄줄이 섰는데 그것들을 휘둘러보면서 치미는 분통을 참지 못했다. 관우가 어째서 관성(關聖)이고 관부자(關夫子)란 숭고한 칭호를 둘러쓰게 됐을까. 그것도 명나라 초기부터라니, 벌써 그 존대를 500년이 넘도록 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