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돈을 죽이려고 ‘아오’라는 개를 풀어놓은 것을 묘사한 한나라 때의 벽돌 그림.
조최의 아들 조돈(趙盾)도 진나라 공실의 실력자로 성장해 영공(靈公)의 즉위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그러나 영공은 통치자로서의 자질이 떨어졌다. 기원전 607년을 전후로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백성에게 세금을 무겁게 물리기 시작했다. 그는 궁궐 담장을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했다. 게다가 궁궐 성 위에 올라가 성 아래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탄환을 쏘아대는 놀이를 즐겼다. 영공은 사람들이 놀라서 탄환을 피하려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했다.
한번은 궁중 요리사가 곰발바닥을 덜 익혀서 내자 화가 난 영공은 요리사를 죽이고 그의 아내에게 시체를 들고 궁궐 뜰 앞을 지나 내다버리게 했다. 조돈과 사회(士會) 등 중신들이 전부터 몇 차례 충고했으나 영공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조돈의 충고를 잔소리로 받아들여 자객 서마를 시켜 조돈을 죽이려 했다. 서마는 충성스러운 조돈의 모습을 보고는 “충신을 죽이는 것과 국군(國君)의 명을 어기는 것, 모두 같은 죄로구나”라고 탄식하며 나무에 머리를 부딪혀 자결했다.
“동호의 붓이 있구나”
그 뒤로도 영공은 조돈을 죽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사자보다 사납다는 개 ‘아오’를 궁중에 매복시켰다가 조돈을 물어 죽이게 하려는 시도도 했다. 조돈은 자신이 은혜를 베푼 기미명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영공은 군사들을 시켜 조돈을 잡아들이게 했다. 조돈은 망명길에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지난날 아버지 조최에 이어 2대에 걸친 망명이었다.그런데 조돈이 진나라 국경을 벗어날 즈음 조돈의 동생인 조천(趙穿)이 복숭아밭에서 영공을 습격해 죽이고 조돈을 다시 불러들였다. 조돈이 평소 존경을 받고 민심을 얻은 반면 영공은 젊은 나이에 사치스러워 백성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시해하기 수월했다. 조돈은 자리에 복귀했다.
진나라의 기록을 담당한 태사(太史) 동호(董狐)는 서슴없이 “조돈이 그 국군을 시해했다”라고 기록하고는 조정에서 이를 대놓고 조돈에게 보여줬다. 조돈이 “시해한 사람은 조천이고 나는 죄가 없다”라고 항변하자 태사는 “그대는 정경의 신분으로 도망쳤으나 국경을 벗어나지 않았고, 돌아와서도 나라를 어지럽힌 자를 죽이지 않았으니 그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오!”라고 반박했다.

‘동호직필’을 표현한 ‘동주열국지’ 삽화.(왼쪽) 공자가 정리한 ‘춘추’의 주석서인 공영달(孔穎達)의 ‘춘추정의’ 판본.(오른쪽)
훗날 공자(孔子)는 이 일을 두고 “동호는 훌륭한 사관으로 죄를 숨기지 않는다는 기록의 원칙을 지켰고, 조선자(조돈)는 훌륭한 대부로서 원칙을 지키다가 오명을 썼다. 안타깝구나, 국경을 벗어났더라면 오명을 면했을 터인데…”라고 말했다. 공자는 권력자의 행적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그 행적의 주체를 정확하게 지목해 죄를 숨기지 않은 사관 동호의 자세를 칭찬했다. 송나라 때의 애국충신 문천상(文天祥)은 제나라의 태사와 함께 “제나라에는 태사의 죽간이 있고, 진나라에는 동호의 붓이 있구나”라는 시를 남겨 사관의 직필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춘추시대 후기로 넘어가는 당시는 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권신들이 임금을 죽이는 일이 빈번했고, 동호처럼 엄격한 예법에 따라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서사(書史)의 원칙은 일찌감치 붕괴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동호의 용기는 더욱 빛을 발했다. 여기서 이른바 정직한 사관의 붓이란 뜻을 가진 ‘동호필(董狐筆)’이란 단어와 ‘동호의 곧은 붓’ 또는 ‘동호가 정직하게 기록하다’는 뜻의 ‘동호직필(董狐直筆)’이라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