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 글: 이춘길(가명)전 북한 함경북도 국가안전보위부 탈북자 납치 공작원

    입력2002-12-31 12: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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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에 대칭하는 북한의 기관은 국가안전보위부다. 국가정보원을 줄여서 ‘국정원’으로 부르듯, 북한에서는 국가안전보위부를 ‘보위부’로 통칭한다. 현재 국가안전보위부의 부장은 공석인데, 일설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겸하고 있다고 한다. 부장이 없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는 김창석 제1부부장이 부장 대리를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정원, 중국 무대로 대북 공작

    남북 대결사는 1972년과 1988년, 2000년을 고비로 크게 바뀌었다. 6·25전쟁이 끝난 후부터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온 1972년까지는 남과 북이 휴전선 너머로 특수부대를 보내 서로 상대 군부대를 공격하고 주요 시설을 파괴한 테러의 시기였다. 남쪽에서는 HID 혹은 북파공작대가 그 일을 했고, 북쪽에서는 124군부대나 정찰국이 그 일을 했다. 양쪽의 군대가 집결해 있는 휴전선에서 감행된 테러와 기습은 자칫 정전체제를 열전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남과 북은 상당한 인적(人的)·물적(物的) 손실을 입었다.

    7·4남북공동성명 제2항에는 ‘쌍방은 남북 사이의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신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조항은 휴전선 부근에서의 테러 대결을 중지하자는 뜻이었다.

    이후 남쪽은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경제를 일으키는 데 주력했다. 반면 북쪽은 남조선 혁명을 위한 지하당 건설에 노력했다. 북쪽은 ‘창’을 들고 공격하고, 남쪽은 ‘방패’를 들고 막는 형세가 만들어진 것이다. 외견상으로는 북쪽이 주도권을 잡은 것 같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남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해졌다. 남쪽은 경제가 살아나 방위산업을 키웠고 북쪽은 테러지원국가로 고립돼버리고만 것이다.



    남쪽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마련된 북방외교를 통해 단숨에 남북관계를 역전시켰다. 과거 북쪽이 일본에 있는 조총련을 이용해 대남공작을 편 것처럼, 남쪽은 중국을 무대로 대담한 대북공작에 들어간 것이다. ‘방패’를 든 북쪽은 이전의 남쪽처럼 내실을 기하지 못했다. 식량난과 경제난이 심각했기 때문에 내실을 기할래야 기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 북쪽은 지독한 주민 단속정책으로 대항했다. 북한 주민의 일상 생활을 통제하고 탈북주민을 잡아들이는 공포정치를 구사한 것이다. 전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원 이춘길(32·가명)씨의 수기는 이 시기 북쪽이 편 공포정치의 실상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안으로는 식량난과 경제난으로 인한 민심 이반을 막아야 하고, 밖으로는 남쪽의 공세에 부딪친 김정일 정권이 생존을 위해 북한 인민을 상대로 어떠한 일을 저질렀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남쪽이 절대적인 우세를 보인 가운데 진행돼 온, 3국을 무대로 한 공작전을 중지시킨 의미가 있다. 공작전을 중지시킨 것이 과연 남북통일에 도움이 될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문제다. 혹자는 남북 긴장이 완화됐으니 통일의 기회가 넓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제정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통일이 저절로 되겠느냐”고 반문한다. 이들은 공작을 중지한 것은 김정일 정권을 연명시키고 북한 인민을 더욱 가혹한 조건에 놓아두는 비인도적인 조치라고 주장한다.

    이춘길씨 수기는 어느 것이 남북통일에 보다 나은 방안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자료가 될 것이다. 이씨의 수기는 중국을 자주 출입하는 한 한국인의 도움으로 작성되었다. 이 한국인은 이씨를 만나 장기간 이야기를 듣고 수기를 작성해 주었다. 그는 이 수기를 이씨의 육성이 담긴 테이프와 사진, 그리고 이씨가 작성한 사과문 등을 들고 ‘신동아’를 찾아왔다.

    1998년과 1999년 사이 남과 북의 공작기관이 벌인 숨가쁜 공작전과 북한 보위부의 지독한 탈북자 추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수기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때와 장소, 이름은 감추지 않고 그대로 싣는다.

    전 함경북도 국가안전보위부 탈북자 납치공작원 이춘길의 수기

    “나는 공화국의 저승사자였다”

    이춘길씨가 자신의 공작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쓴 사죄문.

    이 글을 쓰기에 앞서 헐벗고 굶주리는 2300만 민족을 구원하려는 일을 하다가 저에게 잡혀,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총살형을 당한 박진만(가명)·김덕성·황만길·박분옥·강창남·강성남·김진구·류영범 등 많은 님들의 영전에 용서를 바라며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또한 인간답게 살려고 자유를 찾아 떠났다가 저에게 잡혀 북한으로 송환돼 지금도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정치범관리소에서 고생하시는 분들께 다시 한번 용서를 빌면서 아울러 님들이 이루지 못한 뜻과 하지 못한 말을 온 세계에 알리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합니다.

    나는 1970년 4월18일 함경북도 무산군 온천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우리 집안은 이른바 ‘백두산 줄기’이다. 북한에서 출세하려면 능력보다 앞서는 것이 토대(출신성분)인데, 가장 끗발 센 집단이 ‘백두산 줄기’와 ‘룡남산 줄기’이다. 백두산 줄기는 김일성과 항일투쟁을 같이했던 사람들의 가족과 후손을 말하고, 룡남산 줄기는 김정일과 김일성종합대학을 함께 다닌 동창생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때 국내에 조직한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의 회원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소련으로 가 7년 동안 벌목공으로 일하고 돌아오셨다. 남한 사람에게는 벌목공이 대단찮은 직업으로 들리겠지만, 당시 북한에서는 소련 벌목공으로 나가는 것이 대단한 영광이고 혜택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단순 벌목공이 아닌 임업대표부 기사장으로 일하면서 1984년 당시로는 대단히 큰돈인 5만원을 벌어오셨다. 덕분에 나는 잡곡밥을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고등중학교 졸업을 앞둔 1986년 5월, 나는 호위총국에 선발되어 입대했다. 이듬해(1987년) ‘호위사령부’로 승격한 호위총국은, 김일성·김정일을 호위하고 두 사람의 지방 별장인 ‘특각’을 지키는 일을 한다. 남한의 대통령 경호실과 비슷하지만, 그 규모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선택된 사람’만 뽑혀 가는 호위사령부에 배치됐으니 어깨가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경호실은 대통령 근접경호만 담당하고, 대통령 주변경호와 청와대 외곽경호는 군(헌병·육군 수방사)과 경찰이 담당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호위사령부가 건물경호와 주변경호·근접경호까지 전담한다. 호위사령부는 조선인민군과 별개 조직으로, 내부에 당조직·보위부·검찰소 등을 둔 완결적 구조를 갖고 있다. 현재 호위사령관은 이을설(李乙雪·81) 원수다.-편집자)

    출신성분이 좋은 나는 호위사령부에서도 제일 편하고 알짜배기인 호위사령부 산하 보위부에 배치되었다. 한국군에도 군대 내부로 침투한 간첩을 잡고, 주요 지휘관들이 쿠데타를 모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무사령부를 운영한다고 들었다. 호위사의 보위부는 호위사 안에서 기무사와 같은 일을 하는 곳이다.

    나는 호위사령부 보위부 직속 747호 교양관리소에서 근무했다. 교양관리소는 전사(병사)에서 대좌(대령)까지의 호위사령부 군인들 중 과오를 범한 사람이 있으면 데려다가 계급장을 떼고 1년 동안 교육을 하는 곳이다. 내가 만나본 한국 사람들은 이곳을 한국군의 군기(軍紀)교육대와 비슷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곳은 교양을 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살아 나갈 테면 나가봐라’는 식으로 사람들을 혹독하게 취급하는 곳이다. 한국군의 군기교육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곳이다.

    호위사 보위부에서 군 생활 마쳐

    나는 1990년 7월19일 중사 계급으로 제대하였다. 호위사 출신은 워낙 성분이 좋기 때문에 3년제 공산대학만 나오면 최고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에 들어갈 수가 있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군당(郡黨: 군 단위마다 있는 조선로동당 조직)에 들어가 간부를 할 수도 있다. 나는 공부하는 것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무엇을 할까 궁리하며 3개월을 보내다, 결국 보잘것없는 ‘20호 금속건설사업소’란 회사에 들어가 운전수를 하게 되었다.

    소련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아버지는 자동차 운전을 할 줄 아셨는데, 덕분에나도 일찍 운전을 배웠다. 이러저리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내 성격에 운전수라는 직업은 제격이었다. 성분이 좋다는 이유로 나는 직장에서 사로청(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위원장이란 감투까지 썼다. 집안에서는 내가 외아들이라 빨리 결혼해야 한다고 하여, 스물두 살의 나이에 양가 부모의 합의로 정해놓은 여자와 결혼을 했다.

    운전수를 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었던 나는, 부업(?)삼아 장사를 시작하였다. 중국에서 의복류와 생필품 등을 밀수입해 북한에 팔았는데, 초기에는 제법 많은 돈을 손에 쥐었다. 그러던 1994년 말, 장사가 잘된다 싶어 10만원어치의 물건을 들여왔는데 몽땅 압수당해 버렸다. 간신히 절반을 건져 장사치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번에는 그가 물건값을 주지 않고 달아나버렸다.

    손실에 눈이 먼 나는 직장을 팽개치고 그 돈을 찾겠다고 돌아다녔다. 3개월 동안이나 무단 결근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무직(無職)에 주거부정(住居不定)인 사람은 이상한 눈으로 본다고 들었다. 하물며 ‘실업자가 없다’는 사회주의국가 북한에서 무단 결근을 했으니 얼마나 큰 과오겠는가. 더구나 직장 사로청 위원장이란 자가 3개월이나 무단결근 했으니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나가라’는 당비서의 말에 나는 미련 없이 사직서를 던졌다. 몇 개월을 빈둥거리다가 결국 사회안전부(한국의 경찰에 해당, 현재는 ‘인민보안성’으로 개칭)에 ‘무직자’로 잡혀갔다.

    북한은 1995년을 기점으로 사회기강이 급속하게 무너졌다. 그때부터 ‘조선에서는 총소리가 좀 울려야 한다’는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범죄자에 대한 공개 총살이 강화되었다. 1995년 이전에는 저격수 3인이 죄인을 향해 각각 세 발을 쏴 공개 처형했다. 그러나 1995년 9월에서 12월 사이에는 다섯 발씩 쏘도록 했다. 세 명의 저격수가 다섯 발씩 모두 15발의 총알을 죄인의 머리·가슴·다리를 향해 쏘는데, 그렇게 되면 머리는 형체도 없이 날아가버리고, 사방으로 피와 내장이 튀는 끔찍한 광경이 연출된다.

    공개 처형을 할 때는 반드시 그 지역 요주의 인물을 불러 맨 앞자리에서 보게 함으로써 무언의 위협을 가했다. 내가 무산군 사회안전부에 무직자로 체포된 것은 1995년 11월13일이다. 나는 ‘몇 달 노동교화를 받다 말겠지’하며 별 걱정 없이 조사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밤 옆방에서 안전원들이 “11월23일에 (나를) 쏜다(공개 처형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귀를 의심했지만 분명히 그들은 무단 결근자를 엄벌하는 ‘시범 케이스’로 나를 쏘겠다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라는 말은 아마 그럴 때 쓰는 말이리라. 그때까지도 우리 집에서는 내가 잡혀간 것을 모르고 있었다. 비명횡사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갇혀 있다는 것부터 식구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아버지가 손을 쓸 게 아닌가.

    15일 아침 조사실 문을 열자마자 죽기살기로 덤벼들어 안전원을 때려눕히고 도망쳤다. 그리고 곧장 처형 집으로 달려가, 눈에 보이는 30㎝ 길이의 쇠줄을 다짜고짜 삼켜버렸다. 북한에서는 6개월 이상 장기입원을 하면 사회보장을 받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재판을 하지 못한다. ‘긴 쇠줄을 삼켰으니 수술이 아니면 빼내지 못할 것이고, 수술 상처가 아무는 데 6개월은 걸릴 것이다. 그러면 재판이 열리지 못해 죽음을 면할 수 있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런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몇 시간이 지나도 배가 아프지 않았다. ‘지금쯤 안전부에서는 나를 찾으려고 난리가 났을 텐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병원에 실려갈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양잿물을 한 바가지 들고 안전부로 뛰어갔다. 아침에 도망간 놈이 점심 때 뭔가를 바가지에 담아 제 발로 찾아오니 황당했을 것이다.

    안전원이 “그것이 무언가” 하고 묻기에, “양잿물이다”하면서 앞에서 쭉 들이켰다. 죽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총살을 면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양잿물의 독한 기운 때문인지 목이 콱 조여들며, 기침과 함께 양잿물이 입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그러자 안전부 요원들이 달려와 족쇄(수갑)를 채워 구류장에 집어넣어 버렸다. 창피한 노릇이었지만 이 소동은 금세 입소문으로 퍼져 아버지가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안면이 있는 군당 조직비서를 찾아가 ‘아들을 살려달라’고 통사정한 끝에 조직비서의 힘으로 나는 죽음을 면했다. 배가 아프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삼킨 쇠줄은 십이지장을 뚫고 나갔다. 그러나 안전부에서는 나를 병원에 보내주지 않았다. 30cm짜리 쇠줄을 뱃속에 담은 채 나는 꼬박 일주일을 구류장에 있다가, 11월21일 풀려났다. 안전원은 내게 이틀 후에 있을 공개 처형을 꼭 참관하라고 했다.

    11월23일 아침, 아픈 배를 움켜쥐고 무산군 위생방역소 옆 야산에 마련된 공개처형장으로 갔다. 먼저 인민재판이 시작됐는데 절도범 두 명과 무직자 한 명을 재판했다. 그들은 오늘 운명이 끝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관례대로라면 그들에게는 많아야 3년형 정도가 선고돼야 한다. 그런데 안전부의 재판 진행자(판사가 재판을 진행하는 것도 아니다)는 죄인의 이름과 죄목을 나열하더니 갑자기 “△△△을 인민의 이름으로 총살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죄인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넋이 나가버렸다. 그들이 정신을 차려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안전부원들이 달려들어 나무에 묶은 후, 눈을 가리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군관의 사격 구령에 따라 15발의 총성이 울리는 순간 맨 앞자리에 앉은 나는 사람의 사지가 갈가리 찢기는 것을 보았다. 내 옆에는 절도죄로 잡혀온 죄수가 앉아 있었는데, 그는 총맞은 죄수의 대골(大骨)이 떨어지고 골에서 허연 물이 쏟아지는 광경에 놀라 그만 식도가 막혀 병원으로 실려가버렸다. 아마 그도 죽었을 것이다.

    공개 처형을 본 다음날 나는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쇠줄이 내장기관을 뚫고 지나간 데다 양잿물에 장기가 상해 장기의 많은 부분을 잘라내야 했다. 그 후유증으로 나는 지금도 깊은 잠을 못자고 식사량도 그리 많지가 않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서 국가안전보위부와 인연을 맺고 납치공작원으로 활동하게 됐는지를 이야기하겠다.

    나는 12월1일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동안 몸을 추스른 후 무산군 행정위원회에서 인사과장을 하는 처삼촌의 소개로 산림경영소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상당히 편한 직장이라 몸을 회복하는 데 더없이 좋았다. 1년 넘게 착실히 집과 직장만을 오가다가 다시 기질(?)이 발동했다. 1997년 4월부터 다시 중국을 드나들며 북한 골동품과 고사리·약재 등을 중국으로 밀수출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혹’이 찾아왔다. 밀무역을 하던 중 처의 6촌 오빠쯤 되는 백웅걸이라는 조선족을 알게 되었다. 어느날 그가 느닷없이 “평양에 갔다오면 중국 돈으로 40만위안(元)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무슨 일로 평양에 갔다 오느냐”고 물으니, 백웅걸은 “국가보위부에서 감시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빼내 오라”고 했다. 직감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라고 느꼈지만, ‘중국 돈 40만위안’에 홀려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다. 데려올 대상은 여자 한 명과 아이 두 명이라고 했다.

    안전원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 사회안전원 정복(正服)을 빌려 입고 안전원 신분증까지 휴대한 채 백웅걸이 건네준 편지를 들고 평양으로 갔다. 6월28일 평양에 도착해 알려준 주소지를 찾아가니 제법 잘사는 집이었다. 북한에서는 이불장·옷장·가시장(찬장)·신발장·책장을 ‘5장’이라고 하고, 텔레비전 수상기·녹음기·재봉기·세탁기·냉동기·선풍기를 ‘6기’라고 하는데, 평민들은 5장6기를 갖추는 것을 가장 큰 소망으로 삼고 있다. 내가 찾아간 집은 5장6기를 모두 일제(日製)로 갖춘 부잣집이었다. 그 집에 살고 있는 여자의 미모 또한 빼어났다.

    알고 보니 그 여자는 영화배우 김은미였고, 그 집은 조선로동당 39호실 기자인 박진만의 집이었다. 로동당 39호실은 조선로동당의 자금을 관리하는 곳으로, 노동당 내에서는 뒷돈 챙기기 가장 좋은 곳으로 꼽힌다. 이 집 주인인 박진만은 중국 담당 기자였다고 한다. 끗발 좋은 기자에 영화배우 부부가 사는 집이니 축재(蓄財)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박진만은 부정축재한 사실이 드러나 철도 담당 기자로 밀려났는데, 이에 앙심을 품고 중국 담당 기자일 때 알고 지내던 남한 정보기관원들을 찾아가 비밀리에 서울로 날아갔다고 한다.

    아무튼 그때 박진만은 이미 한국으로 튄 상태였다. 바로 그가 아내와 두 아들 마저 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백웅걸을 통해 나를 보낸 것이었다. 내가 가지고 간 편지엔 박진만이 아내에게 한국행을 재촉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걸리면 큰일이 나겠지만 실수만 없다면 거액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생각에 김은미와 두 아이를 데리고 조-중(朝中) 국경을 향해 북상했다. 마침내 7월4일 함경북도 무산 인근 국경에서 세 명을 중국으로 넘기는 데 성공했다.

    보위부 체포돼 자살 기도

    이때까지만 해도 쥐도 새도 모르게 일이 끝날 듯했다. 내가 김은미와 두 아이를 국경 너머로 넘긴 후에도 보위부에서는 이 사실을 몰랐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남녀관계’로 인해 사건이 터졌다. 김은미는 남편이 사라진 후 열살 연하인 변영남을 정부(情夫)로 두었다. 변영남은 사회안전부에서 운영하는 압록강회사 수출입지도원이었다. 김은미는 나를 따라 집을 떠나기 전에 변영남에게 “우리 집 물건은 네가 다 가져라”고 말했다고 한다.

    며칠 후 변영남은 트럭을 가져가 김은미 집에 있는 가재도구를 꺼내 싣고 가려다 보위부에 끌려갔다. 안전원 복장을 한 내가 김은미와 두 아이를 데려간 것을 알고 있는 변영남은 “무산군 안전부에서 사람이 내려와 김은미와 아이들을 데려갔다”고 진술했다. 곧바로 무산군 안전부(또는 그러한 복장을 한 사람)에 대한 조사가 진행됐다.

    이렇게 물이 새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나는 큰돈을 벌게 된 기쁨에 들떠 있었다. 나는 ‘백웅걸에게서 언제 돈이 오는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위부의 수사망이 좁혀져 결국 함경북도 국가안전보위부 반탐처(反探處)에 체포되었다. 1997년 7월 초의 일이었다.

    1995년 11월 무직자로 지내다 사회안전부에 체포됐던 이춘길씨는 공개처형 직전 30cm 쇠줄과 양잿물을 삼켜 자해를 시도했다. 이씨가 쇠줄을 꺼낸 수술자국이 남아 있는 배를 보이고 있다.

    반탐처장이 직접 나타나 나를 데려갔다. ‘이젠 정말로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전부에서 데려가는 것과 보위부에서 데려가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보위부에서 데려갔다면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보위부 내에서도 대내외 간첩의 색출과 검거를 주 임무로 하는 반탐처에서, 그것도 처장이 직접 나섰으니 살기를 기대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끌려간 곳은 무산군에 있는 보위부의 아지트였다. 2년 전 무산군 사회안전부에 체포돼 총살될 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그때 이미 죽은 몸이다. 고통을 당하면서 죽느니 스스로 죽자’는 생각에 취조실에 들어가자마자 몸을 날려 유리창을 깨고, 깨진 유리 조각으로 배를 찔렀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유리조각을 돌려가며 뱃속 깊이 찔러넣었다. 그러나 질긴 것이 사람 목숨이었다. 나는 죽지 못한 채 보위부원들에게 제압당하고, 복부에 붕대를 친친 감은 채 조사를 받게 되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자살시도가 반탐처장 윤창주 대좌의 눈에 들었다. 윤창주는 “저 자식 배짱 하나는 좋다”며 부하들을 시켜 내 뒷조사를 하게 했다. 윤창주는 나를 체포하기 이전부터 간 크게 안전원 복장을 하고 평양까지 간 녀석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다고 한다. 무산군 안전부를 조사한 그는 내가 쇠줄을 삼키고 양잿물을 들이켠 것도 알게 되었다.

    한참 후에 나에 대한 조사서류가 들어왔는데 그때 나는 나도 몰랐던 우리 집안의 내력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사촌동생, 그러니까 나한테는 당숙 되는 분이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해안경비를 담당하는 국가안전보위부 11연대의 정치위원이었다. 또 다른 당숙은 교도사단(한국군의 향토예비군 사단과 유사-편집자)의 조직부장을 맡고 있었다. 그 밖에도 많은 친척들이 당·정·군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것이 윤창주의 마음을 흔든 모양이었다.

    내가 김은미 가족을 감쪽같이 빼돌리는 수완을 발휘했고, 성깔과 담력이 있는 데다가 백두산 줄기임을 알게 된 윤창주는 그해 7월 입원해 있는 나를 찾아와 “우리와 함께 일해보지 않을래?”하고 제의했다. 윤창주가 나를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한 데는 내가 백웅걸로부터 돈을 받지 못한 사실도 크게 작용했다. 그에게 있어 나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러나 나를 죽이면 박진만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은 더욱 멀어진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나같이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폼 잡을 수 있도록 바람만 잡아주면, 죽을 둥 살 둥 열심히 한다는 것을 노련한 그는 꿰뚫어보았을 것이다(나는 지금 윤창주에게 말려든 내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한다). 죽음에 고비에서 보위부 공작원으로 일해달라는 제의를 받은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것은 내 성질에도 맞는 일이었다.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가 왜 그렇게 박진만이라는 인물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었던가. 나는 보위부 공작원으로 숱한 사람들을 중국에서 납치하여 북한으로 돌려보냈지만, 식량난을 피해 월경한 단순 탈북자들은 체포한 적이 없다. 모두가 보위부에서 ‘꼭 잡아와야 한다’고 수배령을 내린 정치적 탈북자나 중국인들만 잡아왔다. 박진만이 단순히 부정축재를 하고 도망갔다면 보위부가 모든 조직망을 다 동원해 잡으려고 기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여느 탈북자와 크게 달랐다.

    당시 보위부는 ‘민통련’이라는 단체와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었다. 민통련은 ‘민족통일연합’의 약자로 추측된다. 보위부는 민통련을, 남한의 국가정보원이 북한을 내부적으로 붕괴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지하조직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 조직을 총괄하는 사람은 국정원 대북2처의 차장보인 한성원이라고 했다. 박진만은 한성원의 지시에 따라 중국(지린)에서 민통련을 비롯한 반북(反北) 지하조직을 움직이며 각종 사회혼란 행위를 일으키는 ‘현장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실제로 민통련이 국정원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는지, 국정원에 대북2처가 있는지, 그곳에 차장보라는 직책이 있는지, 그 부서의 책임자가 한성원인지 나는 모른다. 나도 중국에서 공작할 때 이춘길이라는 가명을 썼으니, 한성원도 본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서울에서 직항편이 들어오는 중국의 선양(審陽)을 거쳐 옌지(延吉)에 나타나, 포섭한 조선족과 탈북자들에게 대북공작을 지시하고 사라지는 사람을 우리는 한성원이라 불렀다. 한성원-박진만 라인이 두만강에 인접한 북한에 조직원을 침투시켜 여러 가지 폭파미수사건과 삐라살포사건을 일으킨 것만은 확실하다.

    내게 하달된 임무는 일차적으로 ‘조국을 배신하고 국정원의 개가 된’ 문제의 박진만을 잡아들이고, 궁극적으로는 한성원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두 달 간 반탐처장 윤창주에게서 공작 방법에 대해 밀봉 교육을 받고 조직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쓴 후 1997년 9월15일 나는 처와 두 아이(당시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넜다.

    가족들을 대동한 것은 상대를 속이기 위해서였다. 박진만과 백웅걸은 내가 보위부 공작원이 된 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나 혼자 중국으로 탈출한다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가족은 내 마음을 옭아매는 ‘인질’이 될 터이니, ‘의심 많은’ 그들은 나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박진만의 가족을 탈출시킨 것이 문제가 돼 나도 가족을 이끌고 탈북했다면, 나에게 빚진 것이 있는 그들은 나를 신뢰할 것이다. 역공작(逆工作)은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헤이룽장성 무단장시에 들어가 정착했다. 경상도 출신 조선족이 많이 사는 마을이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억센 함경도 사투리를 버리고 경상도 사투리를 빠르게 익혔다. 지금은 중국에서 이따금 만나는 남한 사람들도 내가 “대구에서 왔다”고 하면 깜빡 속아넘어갈 만큼 대구지방의 사투리를 완벽히 구사한다. 그리고 중국어도 재빨리 익혔다. 이렇게 중국화·조선족화·한국화를 하며 1997년을 넘기고 1998년을 맞았다.

    그렇게 지내는 사이 사방으로 백웅걸을 찾다가 마침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약속한 40만위안을 주지 않은 빚이 있었다. 백웅걸은 내가 조선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박진만이 보낸 돈을 꿀꺽 한 상태였다. 그것이 백웅걸의 약점이 되었다. 백웅걸은 차일피일 ‘돈이 안 왔다’고 미루기만 했는데, 그것을 핑계로 나는 박진만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것이 박진만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나는 백웅걸이 진심으로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도록 끈질기게 기다리며 설득했다.

    그러는 틈틈이 현지화를 위한 나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평소에 공작원은 거의 한량처럼 지낸다. 정보를 구하려면 술집이나 노래방을 하는 동네 ‘어깨’들과 통해야 하므로, 이들과 어울려 같이 놀아주는 것이 평시의 공작이다. 여기에 드는 돈은 보위부에서 한 번에 5000여 달러씩 보내주는 돈으로 충당했다. 이따금 보위부에서는 “공작금을 어디에 사용했느냐”고 묻지만, 어차피 영수증을 챙겨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 “아껴서 썼다”고만 하면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풍족한 중국 생활에 아주 만족해했다.

    기다린 보람이 있어 1998년 5월, 박진만이 나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백웅걸이 박진만에게 ‘당신 가족을 빼낸 것 때문에 그 사람도 탈북자가 됐다’며 내 이야기를 한 것이리라. 5월23일 나와 박진만은 옌지시 원화산에 있는 ‘토속집’이라는 식당에서 만나, 닭곰탕과 비둘기구이·토끼구이 등을 먹으며 환담을 했다. 이때 박진만은 민통련 이야기를 꺼내며 보위부의 눈을 피해 자기 가족을 빼내온 능력을 보여준 나를 민통련에 가입시키고 싶어했다.

    그날 밤 나는 윤창주 처장에게 박진만을 만난 사실을 보고하고 “당장에라도 박진만을 업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박진만이 나를 민통련에 가입시키려 한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윤창주는 매우 흡족해 하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라. 그들에게 더 가까이 접근하라”고 지시했다. 윤창주는 한성원이 걸려들 때까지 기다려 일망타진할 생각을 한 것이다. 역공작은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나를 포섭하려고 마음 먹은 박진만은 5월26일 옌지 대우호텔로 나를 불렀다. 그곳에 가니 뜻밖에도 자신을 한성원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나와 있었다. 문제의 국정원 대북2처 차장보라는 사람이었다. 셋이 같이 식사를 했는데, 주로 이야기한 것은 박진만이었고 한성원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보위부는 이렇게 한번씩 옌지에 나타나는 한성원이 중국 동북3성은 물론이고 북한에까지 점(點)조직 형태로 침투해 있는 민통련 조직원을 개인별로 불러내 지령과 공작금을 주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국정원이 조정한 反北 단체 ‘민통련’

    며칠 후 나는 박진만의 소개로 서울에서 왔다는 사람 두 명과 어울려 노래방에서 신나게 놀았다. 박진만은 나에게 그들이 국정원 직원들이라고 귀뜸해 줬다. 갑작스레 박진만을 만나고 게다가 한성원까지 일사천리로 만나게 되었으니 일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윤창주에게 매일 상황을 보고하자 보위부에서는 ‘체포 D-데이’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때 민통련에는 나말고도 강성남이라는 조선인민군 보위사령부(보위사)의 프락치가 들어가 있었다.

    여기서 잠깐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와 조선인민군 보위사령부(보위사)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기로 한다. 보위부는 북한의 국가 정보기관이고, 보위사는 조선인민군의 정보기관이다. 남한의 국정원과 기무사(국군기무사령부)와 같은 관계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군이 곧 당이라고 할 정도여서 보위사의 위상이 상당히 높다. 따라서 보위부와 보위사는 경쟁 관계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보위부는 원래 ‘인민국 보위국’이었으나 ‘6군단사건’을 해결하면서 보위사령부로 승격하였다. (6군단 사건은 1995년 함경북도 청진시에 위치한 인민군 제6군단의 군관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국가안전보위부가 먼저 첩보를 입수했으나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해 묻어버렸다. 그런데 인민군 보위국이 이를 추적해 쿠데타를 모의한 세력을 적발했다. 이 사건으로 6군단은 해체되고 9군단이 청진 지역을 맡게 되었다. 보위국은 보위사로 승격하고 보위국장 원응희(元應熙)는 중장에서 상장을 거쳐 대장으로 고속 승진하였다. 그러나 보위사는 1999년 다시 보위국으로 격하되었다.-편집자)

    ‘라이벌’ 보위사의 프락치가 민통련 안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보위부는 더욱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보위사가 덮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잡아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코앞에 놓인 먹이를 빼앗기는 격이 된다’는 것이 보위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즈음 대형 사건이 터졌다. 양강도 보천군에 있는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 폭파 미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보천보’는 김일성이 항일 빨치산을 이끌고 첫 번째 국내 진격작전을 펼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은 1937년 6월4일 두만강을 건너 보천보로 침투해,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과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등 격문을 살포한 후 도주했다고 한다.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민족 언론은 보천보 전투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북한에서는 보천보전투를 김일성 항일투쟁의 상징으로 여기고 기념탑을 세웠다. 보천보는 북한의 ‘정신적인 국립묘지’인 것이다.

    양강도 보천군 보천보에는 1937년 6월4일 김일성이 빨치산을 이끌고 들어와 공격한 일본 경찰주재소(사진)가 남아 있다. 1998년 반북 결사체인 민통련은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보천보기념탑을 폭파하려고 했다.
    보천보전투 61돌을 앞둔 1998년 5월말 보천군은 한 여인으로 인해 발칵 뒤집혔다. 그는 보천보기념탑에 폭약을 설치한 사람의 아내로, 남편을 신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 자수해 온 것이었다. 당시 사건을 조사했던 보위부원들의 말을 들으면, 이 여인의 남편은 6월4일 기념행사를 앞두고 기념탑 주변을 빙 둘러 폭약을 설치했다. 따라서 6월4일 행사가 열릴 때 ‘불만 댕기면’ 아수라장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보위부는 민통련이 뒤에서 보천보기념탑 폭파를 지시한 것으로 판단했다. 때마침 한성원이 옌지에 나타났고, 민통련 조직원들이 속속 옌지 시내에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으니, 또 다른 대형 ‘거사(擧事)’가 준비되고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5월26일 이후 나는 한성원을 만날 수 없었다. 북한의 기류를 감지했는지 박진만 또한 몸을 감춰 그와의 접촉도 여의치 않았다.

    1998년 9월9일은 북한 정권 수립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런데 9·9절을 며칠 앞두고 함경북도 청진에서는, 시내에 있는 대형 김일성 동상을 폭파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민통련과는 전혀 상관없이 북한 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획책한 것이었는데, 아무튼 이 사건으로 보위부와 보위사는 발칵 뒤집혔다. ‘하루속히 한성원 일당을 잡아들이라’는 지시가 평양에서 내려온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할 틈이 없었다. 한성원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 보위사보다 먼저 잡아들여야 했다. 이 일에서는 보위부가 유리했다. 왜냐하면 한성원의 얼굴을 알고 있는 공작원은 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함경북도 보위부의 호출을 받고 9월3일 회령으로 들어갔다. 회령에는 함경북도 국가보위부장인 한성주 중장(왕별 두 개)이 나와 있었다. 이날 내가 받은 지령은 이러했다.

    “한성원이 옌지에 오면 박진만이나 조선족 문화준이 주로 안내한다. 그러니 박진만이나 문화준을 포섭해 언제 한성원이 선양공항에 도착하는지 파악하라. 그리고 한성원이 선양공항에 도착하면 그 즉시 납치해 북한으로 데려오라.”

    한성주 중장이 언급한 문화준은 나와는 안면이 없는 조선족으로 한성원과 박진만을 연결해 준 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위사는 주로 문화준의 행적을 따라가며 한성원을 추적해 오고 있었다. 도(道) 보위부장은 세 명을 다 잡으라고 지시했지만, 보위사와의 경쟁을 생각하면 이는 상당히 위험한 짓이다. 박진만과 문화준은 한성원을 잡기 위해 보위부와 보위사가 지금까지 잡지 않고 내버려둔 ‘미끼’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보위사가 먼저 미끼를 채간다면, 보위부는 완전히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될 것이 뻔했다.

    윤창주 반탐처장은 나를 불러 “일단 박진만이와 문화준이부터 잡고 그 다음에 한성원이를 잡자”고 말했다. 그것이 보위사에 선수를 빼앗기지 않고 절반이라도 건지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9월4일, 나는 먼저 박진만을 체포하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갔다. 여기서 잠깐 북한 보위부가 중국에 있는 공작원들과 어떻게 연락을 주고받는지를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쓰얼링, 일은 잘 돼가나”

    보위부는 중국 내에 협조자를 만들기 위해 여러 모로 노력하는데, 그 중 한 방법이 보위부의 지시를 받는 여자를 조선족 남자에게 시집보내는 것이다. 조선족과 결혼하면 중국 국적을 취득하므로 보위부 여자는 중국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나와 보위부를 이어준 연락책 김영숙도 그런 여자였다. 연락을 주고받을 때는 삐삐(무선호출기)를 사용한다. 역추적을 당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활동할 때 내가 취득한 신분은 ‘수정무역주식회사 부사장’이었다. 그리고 보위부 공작원 대호(代號)는 420이었다. 420을 중국말로는 ‘쓰얼링’이라고 읽는데, 보위부 요원들은 전화를 걸어 “어이 쓰얼링, 일은 잘 돼가나”하고 묻곤 했다. 박진만을 체포하던 날 나는 김영숙에게 “쓰얼링이다. 곧 일을 시작하니 지원을 바란다”며 인력 지원을 요청했다. 김영숙의 통보를 받은 보위부는 그 동안 관리해 온 조선족 10여 명을 보내 나의 지시를 받도록 했다.

    9월4일 저녁 8시. 나는 박진만이 옌지시 연남각 식당에 있다는 것을 알고 식당 부근에서 기다리다 박진만이 식당에서 나오는 순간 다가가 순식간에 제압했다. 나를 믿고 있던 박진만은 내가 나타나자 아는 체하려다 붙잡힌 것이다. 곧 10명의 협조자가 박진만을 에워싸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 테이프를 붙였다. 팔 하나는 어깨 너머로, 다른 한 팔은 허리 뒤로 돌려 양손이 등 뒤에서 사선모양으로 만나게 한 후, 양 손목에 족쇄를 채웠다(북한에서는 수갑을 족쇄라 부른다).

    한국 경찰은 피의자의 팔을 앞으로 늘어뜨려 수갑을 채우는데, 그러면 피의자는 수갑을 찬 채로 뛰어 달아날 수 있고 저항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양 손을 등뒤로 돌려 족쇄를 채우면 저항은커녕 제대로 뛰어가지 못한다. 잡아끄는 대로 끌려오고 뜀박질도 못해 내버려둬도 도망가지 못한다.

    박진만을 체포해 미리 대기한 차에 태우는 데에는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조중 국경지역인 싼허(三合)를 향해 차를 몰았다. 가는 도중 만나게 되는 중국 공안 초소에는 미리 손을 써두었기 때문에 ‘물건을 갖고 간다’고만 하면 무사통과였다.

    밤 10시에 우리 차는 국경을 넘어 회령으로 향했다. 그런데 회령으로 가는 길목의 풍산초소에 이미 연락을 받은 도 보위부장이 벤츠를 끌고 마중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도 보위부장은 나를 벤츠에 태워 회령의 한 아지트로 데려갔다. 간단히 축하 파티를 한 후 나만 따로 청진시 청암구역에 있는 또 다른 아지트로 보냈다.

    보위부가 나를 재빨리 다른 아지트로 보낸 것은 중국과 북한에 퍼져 있는 민통련 조직원들에게 내가 박진만을 체포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후로도 중국에 오는 한성원을 체포해야 한다. 청진의 아지트에서 나는 곧 중국 생활에 대한 총화(점검)를 받았다. 지난 1년 동안 겪은 일을 쓰고 또 쓰면서 지겹도록 재무장을 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또 쓰다 보니 나는 내가 한 일을 6하원칙에 따라 정확히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총화를 받는 도중 박진만을 체포한 공로로 반탐처장 윤창주는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다. 북한에서 영웅칭호란 그 어떤 것에도 비길 수 없는 최고의 영예다. 나에게는 국기훈장 1급이 내려왔다. 이것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한성원을 잡으면 영웅칭호를 주겠다고 했다.

    청진에 있을 때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당시 보위부 청진 아지트는 9군단 27여단 본부와 같은 건물을 쓰고 있었는데, 27여단에 나와 있는 보위사 요원들이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박진만을 먼저 잡아버린 나를 보위사에서 곱게 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보위사령부 함경북도 담당 책임지도원인 임선호가 보위부의 윤창주 반탐처장을 찾아가 나를 좀 빌려달라고 했나보다. 마무리 공작을 할 것이 있는데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윤창주가 이런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다. 박진만 체포로 내 주가가 꽤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보위사와 보위부는 경쟁도 하지만 때로는 협력하기도 한다. 이런 관계 속에서 두 조직은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 경쟁을 벌이고 있다.

    敵地 물자 살포

    청진에 있을 때 종종 청바지를 입고 반탐처 지도원과 함께 시내로 놀러 나갔다. 북한에서 청바지를 입고 시내를 활보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청진에서야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한 외화상점에 들어갔는데, 희한한 지폐가 눈에 띄었다. 액면가 ‘500원’짜리 지폐였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는 500원짜리가 없었다. 100원권도 보기 힘들었는데, 500원짜리가 있으니 하도 신기해서 “이게 언제 나왔는가. 조선돈 맞소”라고 상점 판매원에게 물었다.

    북한은 라진-선봉 경제특구에서만 유통할 목적으로 500원권과 1000원권을 만들었는데, 그 돈이 청진으로 흘러든 모양이었다. 김일성 동상 폭파 미수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인지라 판매원은 나를 재깍 간첩으로 안전부에 신고해버렸다. 느닷없이 안전원들에게 끌려간 나는 “도 반탐 50번(반탐처장 직통전화)을 대라”고 호통을 쳐 윤창주와 통화한 후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윤창주로부터 “철이 덜 들어 자유주의를 하고 다니는가” 하는 야단을 들었다.

    9월16일 나는 청진 아지트에서 온성군 종성구에 있는 집결소로 보내졌다. 그곳은 보위부가 관리하는 정치범 관리소가 있던 자리인데, 관리소를 옮긴 후 공작원들을 총화하는 자리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다음 공작에 대한 비준(결재)이 나올 때까지 한 달 동안 지겨운 총화를 반복했다. 이러한 총화는 공작원의 사고 범위를 옭아매는 효과가 있다. 북한 공작원들이 적지(敵地 : 남한을 말함)에 나가서도 엉뚱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

    10월24일 평양으로부터 다음 공작에 대한 비준이 떨어졌다. 11월초 나는 ‘박진만과 함께 북한으로 붙잡혀 갔으나, 동맥을 끊고 자살을 기도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병원 쇠창살을 뜯고 도망친 것’으로 알리바이를 만들어 다시 중국으로 나왔다. 내가 중국으로 나오면 보위부는 약속한 알리바이대로 소문을 퍼뜨린다. 알리바이를 만들고 재침투 교육을 받는 도중 나는 박진만이 체포된 이후의 중국 쪽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박진만이 체포된 후 보위부는 문화준을 체포하지 않았다. 아깝지만 한성원을 잡으려면 미끼로 문화준을 남겨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문화준은 국정원이 보내주는 적지(敵地) 물자 유통과 관련 있는 인물이었다. 적지 물자는 ‘Made in Korea’가 새겨진 라이터·양말·수건·치약 같은 생필품이다. 국정원은 9·9절 무렵 남한의 경제력을 알리기 위해 이러한 물자를 북한에 대량으로 살포했는데, 연결책이 문화준으로 추정되었다.

    국정원은 문화준 같은 협조자에게 적지 물자를 무료로 넘겨준다. 그러면 협조자는 북한을 드나드는 보따리 장사에게 10% 내외의 헐값에 물자를 판매하고, 보따리 장사꾼은 이를 들고 북한에 들어가 판매하는 것이다. 협력자는 물론이고 보따리장수까지 앉은자리에서 떼돈을 벌 수 있으므로 이들은 국정원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이다(민통련 협조자로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1998년 9·9절을 앞두고 컨테이너에 실린 국정원의 적지 물자가 문화준 외에 다른 루트로도 다량으로 들어온 듯했다. 보위부와 보위사는 중국에서 이뤄지는 거래를 막을 방법이 없어 누가 중간책을 하는지 지켜보고만 있었다.

    문화준은 영리했다. 그는 자신이 미행당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대비책을 마련했다. 이 시기 보위부는 문화준을 잡아 ‘반타작’이라도 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먼저 손을 쓴 것은 문화준이었다.

    중국에서는 2000위안만 주면 암시장에서 소총과 권총을 얼마든지 구입할 수가 있다. 어느날 문화준은 총으로 무장한 부하들을 이끌고 보위부 공작원 다섯 명이 지내는 옌지 시내의 보위부 아지트를 습격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문화준이 총을 들이대고 “어째서 나를 감시하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러자 겁을 먹은 보위부 공작원들은 “보위부에서 박진만이와 이춘길이를 잡아갔는데, 그 중 이춘길이가 다시 중국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혹시 당신에게로 간 게 아닌가 하여 감시하고 있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렇게 마지막 순간에도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것이 공작원이다.

    문화준은 “이춘길은 내게로 안 왔다. 그러니 나를 미행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돌아갔다. 이것이 문화준의 실수였다. ‘순진한’ 문화준은 9월말 보위사령부의 술책에 걸려들었다. 중국에서는 차(車) 값이 매우 비싸서 한국이나 일본에서 중고차를 밀수입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 문화준은 자동차 밀수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보위사 협조자는 문화준에게 “중국 개산툰 부근에 좋은 차를 갖다 놓았다”고 말했다. 문화준이 제발로 개산툰까지 오자, 이번에는 “온성군 종성구에 차를 갖다 놓았다”고 말해 북한 땅에 발을 들여놓게 한 후 체포해 버린 것이다.

    문화준은 청진시 송평구역에 있는 보위사 아지트에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과거 내가 보위부에 끌려갔다 보위부 공작원이 된 것처럼 보위사의 협조자로 변신했다. 두 달간의 취조와 밀봉교육을 받고 문화준은 남한 편에서 북한 편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후 중국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문화준은 다시 3중 스파이가 되었다. 중국에 나온 문화준은 북한 사람을 납치하려다 중국 국가안전부(국정원 같은 중국의 국가정보기관)에 체포되었다 풀려 나왔다. 그때 중국의 국가안전부에도 협조하겠다고 서약했을 것이니, 그는 남한·북한·중국에 세 다리를 걸친 스파이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윤대일을 죽여라”

    1998년 11월 초에 보위부는 나를 중국으로 다시 집어넣으면서, 중국에 있는 내 가족을 북한으로 들여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돌아온 우리 가족을 연고자가 없는 회령에 살게 했다. 보위부는 내가 중국 바람이 잔뜩 들어 믿을 수 없다고 보고, 인질로 잡기 위해 가족을 불러들인 것이리라.

    11월24일, 나는 가족을 이끌고 북한에 들어왔는데, 그때 아이들은 중국 생활에 익숙하고 중국말도 제법 했다. 아이들을 모든 것이 ‘긴박한’ 북한에 두는 것이 맘에 걸렸다. 그러한 내 심정을 아는지 보위부는 우리 가족을 한 달 동안 회령에서 가장 좋은 국제호텔에서 머물게 한 후 가장 좋은 집을 구해 입주시켰다. 이렇듯 공작원과 그 가족에 대한 대우는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가족들을 회령에 남겨놓고 중국으로 가려는데 윤창주가 불러서 “보위사가 붙잡아온 문화준은 그쪽의 협조자가 될 것을 약속했다. 그도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내질 것이니 옌지에서 문화준을 만나면 모른 척해라. 너의 임무는 대북공작을 지휘하는 국정원 간부 한성원을 체포하는 것이다”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공작금으로 미화 1000달러와 중국돈 3000위안을 주었다. 이제 보위부와 보위사는 한성원을 잡기위한 ‘쌍(雙)공작’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국경을 넘기 직전 갑작스런 지시가 추가됐다. “함경북도 무산군 국가안전보위부 반탐과 외사지도원으로 활동하던 윤대일이 조국을 배신하고 중국으로 도주했다. 그를 찾아내 죽이고 머리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체포가 아니라 ‘살인지시’였다. 14년간 보위부에서 일해온 윤대일은 아내와 이혼한 후 보위부를 떠났다(보위부원은 이혼하면 해직된다). 그후 무역 쪽 일을 하다가, 중고자동차 판 돈을 갖고 중국으로 튀었다고 한다. 이런 그가 남조선으로 튄다면 보위부가 어떤 피해를 입을지 자명한 일이었다. 윤대일은 보위부가 자기를 잡기 위해 어떠한 활동을 벌일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보위부는 박진만처럼 잡지 말고 차라리 죽여버리라고 지시한 것이다.

    하지만 대명천지에 어떻게 사람 목을 베어서 그것을 상자에 담아 북한으로 가져온단 말인가. 국경지대의 중국 군인들은 자동차의 트렁크까지 열어 검색을 한다. 이런 점을 들어 이의를 제기하니 윤창주는 중앙에 보고한 후 수정된 내용을 비준 받아왔다. 수정된 지시는 “윤대일을 죽여서 몸과 머리를 완전히 분리시켜놓은 다음 사진을 찍어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일회용 사진기를 지급했다. 사진기까지 주는 것으로 봐서 김정일로부터 직접 받아낸 지시라고 여겨졌다.

    윤대일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가 일제 중고차를 중국으로 밀수출할 때 중국 쪽에서 협조한 사람이 조선족 채장열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채장열을 찾아가 윤대일의 행방을 물으니 그는 “돈을 주면 협조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1000달러를 몽땅 그에게 주었는데,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정보를 주지 않았다. 채장열도 윤대일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1999년으로 해가 바뀐 다음에도 시간만 보내다가 채장열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 손을 좀 보려고 할 때인 1월10일 윤창주에게서 “윤대일 추적을 중단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윤창주는 “야, 윤대일이 벌써 남조선으로 튀어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대일씨는 한국으로 귀순 후 기자회견을 한 적이 없다. 1999년 2월26일 국정원은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원을 지낸 윤대일씨가 1998년 말 아들과 함께 한국으로 귀순해 왔다’는 보도자료만 배포했다. 윤씨는 보위부원 시절 겪은 일을 2002년 7월 ‘악의 축 집행부, 국가안전보위부의 내막’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윤대일씨의 책과 이춘길씨의 증언을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은 보위부의 공작 실태를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편집자)

    1999년 1월15일 보위부의 호출을 받은 나는 다시 회령에 들어갔다. 이때 받은 지령은 투먼(圖們)에 자주 출몰하는 국정원 요원 서영범을 잡으라는 것이었다. 서영범에 대한 체포 지시는 1998년 11월에 이미 내려졌는데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다. 서영범이 진짜로 국정원의 요원인지 아니면 에이전트에 불과한지는 모른다. 그러나 보위부가 체포 지시를 내린 것을 보면, 그가 북한정권 타도를 목표로 한 지하조직을 이끌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보위부는 이 지하조직에 탈북자로 꾸민 황철수라는 공작원을 침투시켜 서영범의 정체를 포착해 놓고 있었다. 보위부는 먼저 황철수에게 서영범 체포 지시를 내렸는데, 황철수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잡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서영범의 곁에는 김진구(가명 김은국)라는 탈북자가 있었다. 그는 회령시 체신부에서 운전수로 일하다 탈북한 사람인데 그 역시 보위부가 고의로 탈북시킨 프락치였다. 그런데 김진구 또한 서영범을 체포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 결국 보위부의 시야에서 서영범이 사라져버렸다. ‘왜 서영범에게 접근한 보위부 공작원은 맥을 쓰지 못하는 것일까.’ 이것이 보위부의 의문이었다.

    중국으로 넘어간 나는 전화 추적을 통해 김진구를 찾아내 체포하고, 김진구를 미끼로 황철수도 잡아 함께 북한으로 넘겼다. 조사 결과 두 사람은 서영범으로부터 공작금을 받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두 명이 정기적으로 받아온 공작금의 액수가 8000달러에 이르렀다. 게다가 황철수는 “22호 정치범수용소(함북 회령)의 사진을 찍어오면 거액을 주겠다”는 서영범의 약속까지 받아놓고 있었다. 이러니 그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서영범의 체포를 미뤘던 것이다.

    이들은 쥐꼬리만큼 받는 북한 보위부의 공작금보다는 국정원이 쥐어주는 달러 맛이 더 좋았기에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공작금을 노리고 줄타기하는 공작원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는 북한 공작원과 협조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들을 회유하는 데는 술과 돈, 그리고 여자가 제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청강주식회사 조직 검거

    이 사건 외에도 자잘한 일 처리를 하고 있는데 1999년 1월26일 호출이 왔다. 중국 룽징(龍井)시로 나가서 다른 공작조와 합류하라는 것이었다. ‘적색(赤色)조직’을 추적해 온 공작조가 있었는데 이제 핵심 분자들을 거두어들이려 하니 가서 도와주라는 것이었다. 그간의 성과를 통해 내 체포방법이 가장 깔끔하다고 정평이 나 나를 참여시킨 것이었다. 잡을 대상은 류영범이라는 53세의 탈북자였다. 그는 한국인 백가라는 사람 밑에서 지하조직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먼저 중국인 협조자를 통해 그를 국경 근처 룽징시 싼허진으로 불러냈다. 협조자들이 줄곧 그를 미행했다. 이 무렵 나는 중국에서 활동할 때는 항상 중국 경찰복(警服)을 입고 파출소장에 해당하는 계급장을 달고 다녔다. 평소에는 경복 위에 외투를 입고 있다가 체포에 들어갈 때는 외투를 벗었다.

    류영범이 버스에서 내릴 때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다가가 중국말로 “이리와 보라”고 했다. 그런데 류영범은 나보다 중국말을 훨씬 더 잘했다. 그는 원래 중국에 살다가 북한으로 귀화한 사람이었다. 유창한 중국말로 “왜 나를 부르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나?” 하고 따지는데 순간 당황했으나, 바로 납치조원을 불러 류영범을 대기하고 있던 차에 강제로 태워 강을 건너 북한 땅으로 보냈다. 그의 수첩에는 그동안 한 일과, 조직원 명단이 죄다 적혀 있었다. 보안 감각이란 쥐뿔도 없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살아보겠다고 모든 것을 불었다. 그 중에 평양시 봉화무역총국에서 일했다는 박분옥(46)이라는 여자를 먼저 체포하기로 했다. 반북(反北) 조직에서 연락책 노릇을 해온 박분옥을 잡기 위해 옌지시 안투(安圖)현으로 이동했다. 박분옥의 집 앞에서 류영범의 수첩에서 찾아낸 전화번호를 눌렀다. 누군가가 받기에 중국말로 사람을 찾는 척했더니, 상대는 조선말로 “여기 아무도 없어요”하고 대답했다. ‘박분옥이 확실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 집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체포했다. 박분옥은 국경을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내가 중국 경찰 복장을 하고 있어 중국 공안국으로 넘기는 줄 알았다.

    박분옥을 잡고 나자 이번에는 석두옥이라는 중국인을 잡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 역시 류영범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라고 했다. 석두옥은 2월4일 밤 10시에 잡아, 북쪽으로 넘겨주었다. 그런데 석두옥에게서 ‘국정원 직원으로 추정되는 한국인과 접촉해 왔다. 옌지시 △△아파트의 5층에 산다’는 첩보가 나왔다. 그 즉시 그 아파트로 달려갔으나 현관에 별도의 보안 잠금장치가 달려 있어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북한으로 전화를 해 상황을 보고하니 석두옥의 옷에서 그 집 열쇠가 나왔다고 했다. 그 열쇠를 받아 아파트 문을 따고 들어갔는데, 문제의 한국 사람은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한국인은 석두옥과 연결이 되지 않자 바로 튄 것으로 추정됐다.

    청강주식회사라는 위장 명칭을 쓰고 있는 이 조직은 류영범·석두옥을 비롯해 12명이 줄줄이 잡힘으로써 완전 파괴되었다. 이들은 국정원의 공작금을 받고 북한 내부로 연계망을 구축해 온 탈북자와 중국인들이었다. 체포 수완에 한창 물이 오른 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처음에는 살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하다보니 체질에 맞는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중국 경복(警服)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내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보위부에서도 내 실력을 인정하는 만큼 나는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내 손에 붙잡혀 양손을 등뒤로 돌려 족쇄에 채워진 채 북한에 넘겨진 이들이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는 밝히지 않아도 짐작할 것이다. 당시 나는 탈북자를 잡아들이는 데 바빠서 그들이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 살펴볼 겨를조차 없었다. 그저 ‘야차(夜叉: 불교에서 말하는 모질고 사나운 귀신)’처럼 국정원에 협조하는 탈북자를 열심히 잡아 북한으로 넘겼다.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이 글을 통해서나마 그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

    이렇게 반쯤 미쳐 돌아다닌 1999년 2월5일 나는 김정일로부터 ‘일을 잘한다’는 친필지시를 받게 되었다. 북한에서 김정일의 친필지시를 받는 것은 목숨을 하나 더 얻는 것과 같다. 훗날 나는 북한에서 또 한 번의 죽을 고비에 직면하는데, 이 친필지시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다.

    나의 죄상을 또 하나 밝히고자 한다. 석두옥 건을 끝낸 얼마 후 문화준이 찾아와 “보위사가 추적해 온 림인숙 가족을 같이 잡자”고 제의했다. 나는 문화준에게 “보위부의 승인을 받아오라”고 했다. 이틀 후 윤창주로부터 “보위사 측과 협력해 그 일을 해결하라”는 전화가 왔다. 림인숙은 최영호라는 사람의 장모인데, 최영호는 3년 전에 탈북해 한국으로 갔다고 한다. 최영호는 다시 중국에 와 처삼촌 되는 림인숙의 동생과 함께 과거 그를 따르던 국경경비대원 두 명을 탈북시켰다. 국경경비대원은 보위사 소속이니 보위사에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림인숙이 제발로 나타나 ‘최영호의 처인 자기 딸(한선희)과 외손주를 데리고 중국에 가서 최영호를 데려오겠다’고 제의했다. 의심스러운 제의이긴 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국경경비대를 관할하는 9군단 보위부장과 함북도 보위부 반탐처장 윤창주는 이를 승인했다. 림인숙은 남편인 한인찬, 딸인 한선희, 외손주(8세)와 외손녀(12세)를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러고는 중국행을 승인해 준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3월14일 잠적해 버렸다.

    이렇게 되자 9군단 보위부장과 윤창주가 매우 곤란해졌다. 두 사람 이외에도 회령시 보위부장, 27여단 보위부장 등 승인에 관여한 사람들의 목이 날아갈 판이 되었다. 그래서 윤창주는 보위사와 같이 림인숙 일가를 잡으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중국에서 사라져버린 일가를 찾는 것은 사막에서 유리구슬을 찾는 것만큼이나 막막한 일이다. 먼저 최영호가 중국에 전화를 한 리스트를 뽑아서 일일이 찾아다녔는데 그것이 생각밖으로 오랜 시간을 잡아먹었다.

    북송 일본인 양초옥 일가의 원한

    그러는 사이 새로운 지령이 떨어졌다. 일본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에서는 ‘양초옥’으로 불린 일본인 할머니 가족을 잡아오라는 것이었다. 양초옥은 조총련계 재일동포와 결혼한 일본 여성인데, 1970년에 남편과 함께 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왔다. 이들은 별로 활용가치가 없는 인물이라 회령시 유선탄광에 배치되었다. 남편은 그곳에서 평생 석탄을 캐다 1990년대 중반 식량난 때 죽었다고 한다. 양초옥은 땅속에 묻힌 남편의 시체를 파내 두만강에 띄웠다. 시체라도 흘러서 현해탄을 건너 풍족한 일본으로 가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남편이 죽은 후 생계가 막막해진 그녀는 아들-며느리와 시집간 딸과 외손녀를 데리고 중국으로 탈출했다(사위만 버리고 나온 것이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일본이었다. 헤이룽장성 융안(永安)시 와룽향이라는 궁핍한 시골로 들어간 양초옥은 딸을 중국인 노총각에게 다시 시집보내고, 그 집에 얹혀 살았다. 그리고 일본영사관을 다니며 일본에 있는 친정과 연락을 취했다. 일본의 친정에서는 달마다 생활비를 보내줬다. 양초옥은 일본으로 가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는데, 이 과정에서 그녀의 행적이 보위부 협조자들에게 발견된 것이었다.

    일가족을 이끌고 나온 양초옥이 일본에 건너가 북한에서 겪은 일을 증언하면 이는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체포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양초옥의 거주지는 이미 파악되었으므로 가서 잡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2월25일 밤 10시쯤 양초옥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갔다. 불빛 한 점 새나오지 않는 집의 마당에 들어서니 개가 짖었다. 먼저 중국 남자의 어머니가 문을 열고 “누구요?” 하고 물었다. 중국말로 “나는 경찰이다”라고 말하고는 곧장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양초옥 가족만 족쇄를 채워 대기하고 있던 차에 태웠다. 그제서야 중국 남자가 “도대체 어디서 나온 사람들이냐”고 따져 물었다. 나는 “융안시 공안국에서 왔다. 여자를 되찾고 싶으면 내일 아침에 일인당 벌금 1500위안씩 갖고 시 공안국으로 오라”고 했다. 그리고 차를 북한쪽으로 몰았다. 양초옥 일가는 자신들이 북한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조선말을 모르는 중국 경찰인 줄 알고 “우린 북한에 가면 죽는다, 중국 경찰에 잡혀서 다행이다, 북한은 정말 사람 살 곳이 아니다”라는 등 자기들끼리 쉼 없이 말을 주고 받았다. 그때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북한쪽 구호판이 언뜻 비쳤다.

    ‘불요불굴의 공산주의 투사 김정숙 동지를 따라 배우자!’

    이 구호판을 본 양초옥이 기겁을 했다. 상황을 인식한 그는 울고불고 매달리며 “있는 돈을 다 주겠으니 살려달라”고 사정했다. 얼마나 있느냐고 물으니 “중국 돈으로 7만위안이 있다”고 했다. “그걸 어디에 숨겼냐”니까 “살던 집 굴뚝 밑에 숨겼다”고 했다. 그때 우리 체포조원 중 한 녀석이 그 말을 듣고 나중에 돈을 파러 갔다가 중국 공안에 잡혀가 호되게 당했다.

    다음날 양초옥 일가를 보호하던 중국 남자가 벌금을 들고 융안시 공안국을 찾아갔다. 그런데 시 공안국에서는 양초옥 일가를 잡아온 적이 없으니 뜨악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중국인 남자는 양초옥이 일본에서 받아온 돈으로 와룽향 파출소에 뇌물을 주고 이들의 불법체류를 묵인받아왔다. 와룽향 파출소가 뇌물을 받고 탈북자를 묵인해 왔다는 사실까지 밝혀지자 시 공안국은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를 채고 시끄러워졌다. 그러한 때에 굴뚝 밑에 숨긴 돈을 찾겠다고 그 집을 찾아갔으니 그는 정말 아둔한 놈이 아닐 수 없다.

    양초옥 일가는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고 16호 정치범 관리소로 끌려갔다. 양초옥 일가를 보호하던 중국 남자가 한달 뒤에 일본에서 온 소식을 안고 북한에 들어왔다가 그도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나로 인해 미래의 꿈이 무너져버린 그들에게 너무도 미안할 따름이다.

    양초옥 일가 건을 끝내고 다시 최영호 건에 집중하다가, 최영호가 중국 안투에 사는 최화자라는 사람과 자주 연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람을 시켜 안투에서 최화자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을 찾아보니 열 몇 명에 이르렀다. 그들을 하나하나 추적하다 한 병원에 근무하는 최화자가 최영호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즉시 최화자를 옌지에 있는 보위부 아지트로 잡아와 협박하니 최영호 가족이 있는 곳을 불었다. 이렇게 해서 4월5일, 은신처에 숨어 있던 림인숙을 비롯한 5명을 체포해 북한에 들어갔다. 림인숙 일가를 넘기고 잠시 북한에 머물렀다. 나는 잡아온 사람들의 얼굴은 두 번 다시 보지 않는데, 그때는 왠지 림인숙 가족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보위부 구류장에 가봤더니 최영호 아들인 여덟 살배기 충성이가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고 있었다.

    겁도 먹었을 테고, 물자가 풍족한 중국에서 지내다 북한에 끌려왔으니 입에 맞는 음식도 있을 리 없었다. 우리 아이들도 중국에서 살다가 북한에 돌아온 후 영 음식이 맞지 않아 불편해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장마당에 나가 빵과 사탕을 사서 충성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런데 그것을 회령시 곡산공장에서 보위부장을 하는 지용수라는 사람이 목격했다.

    지용수는 나를 불러 “왜 아이에게 인정을 베푸는가” 하고 따졌다. 나는 “중국에서 있다 왔으니 얼마나 먹을 게 없겠느냐, 그 정도의 인정도 베풀지 못하느냐” 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지용수는 “동무는 계급주의가 바로 선 사람인가? 그렇게 동정을 베풀다 나중에 저 아이가 커서 총부리를 겨누면 어쩔 것인가” 하고 야단을 쳤다. 지용수의 말에 뒤통수를 내려치는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내가 이 일을 왜 하는가. 저 어린것이 뭘 안다고 계급주의를 들먹이며 모질게 대한단 말인가.’

    그 무렵 함북도와 양강도 일대에는 종종 김정일을 비판하는 삐라가 뿌려졌다. 이 삐라는 ‘진달래’라고 하는 반북 탈북자 조직이 뿌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위부에서는 진달래 조직을 찾아내 체포하라고 지시했으나 진달래 조직 자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한두 명의 탈북자를 체포해 넘겼으나, 일에 대한 열정은 점점 식어만 갔다.

    1999년 8월, 잠복지시가 내려졌다. 보위부는 그동안 내가 너무 노출이 되었다며 당분간 중국에 잠수해 다음 지시를 기다리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던 때라 잘됐다고 생각했다. 11월까지 방황하듯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한국에 가서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을 굳힌 나는 11월18일 중국 선양에 있는 한국 영사관을 찾아갔다. 당시에는 탈북자들의 대사관 진입이 없던 때라 경비가 없었다. 더구나 선양 영사관에서는 한국 비자를 발급하지 않아 찾아오는 사람이 적은 탓인지 더더욱 경비가 허술했다.

    민원담당 영사를 만나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간단히 설명하고, 망명을 요청했다. 영사관 측이 기다려보라고 해 매일같이 영사관을 들락거렸다. 그런데 열흘이 지나자 “한국에서 접수가 안 된다고 한다”며 중국돈 5000위안을 주고 내보냈다. “정 한국에 가고 싶으면 3국을 통해 알아서 가라”는 것이었다. 밀항을 할까 생각하고 다롄(大連)항에 가 보았는데, 경계가 삼엄해 포기했다. 이어 칭다오(靑島)에 있는 한국 영사관을 찾아갔으나 거기서도 거절당했다.

    12월 초에 다롄에 있는데 윤창주에게서 연락이 왔다. 빨리 옌지로 오라는 것이다. “다른 공작조가 옌지에서 한국인 한 명을 납치하려고 하는데 용기가 없어 못하고 있으니, 네가 가서 해결해 주라”고 했다. 나는 “몸이 안 좋아 도저히 갈 수가 없다”며 거절했다. 그리고 북한 공작조가 한국인을 납치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심양에 있는 한국 영사관 측에 알려주었다. 그러나 선양영사관 측은 “옌지에 있는 그 많은 한국인 중에서 누구를 납치하려는지 알아야 대피시킬 것 아닌가” 하면서 내 말을 대수롭잖게 넘겨버렸다.

    그후 옌지에서 이 공작에 참여했던 공작원을 만났는데, 그는 그날의 상황을 자랑스럽게 말해주었다. 납치한 날짜는 2000년 1월16일, 옌지시의 예림불고기라는 식당 앞이었고 납치한 사람은 장애자로 60대의 남자였다는 것이다. 이 공작에는 북한에서 온 공작원 세 명과 조선족 협조자 여섯 명이 참여했고, 납치 차량은 라는 번호판을 단 중국제 회색 산타나 승용차라는 것까지 이야기했다(옌지에서는 항상 이 승용차로 납치하니 ‘그 차’라고만 해도 나는 알아들을 수 있다. 번호판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것이다).

    김동식 목사 납치 소식 들어

    납치된 사람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목사인데, 탈북자들에게 종교의식을 심어준 후 성경을 갖고 북한으로 들어가게 한 혐의가 있다고 했다. 보위부는 성경을 반입시켜 북한을 흔들려는 세력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 납치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후 나는 한국인들과의 만남에서 옌지에서 납치된 사람이 김동식 목사란 것을 알았다. 김목사 납치에 참여했던 조선족 협조자인 리용철과 류용화는 지금 한국에 들어가 돈을 벌고 있다고 들었다.

    (김동식 목사는 이춘길씨가 말한 것과 같은 날짜, 같은 장소에서 납치되었다. 김목사는 미국 영주권을 가진 한국인으로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에 인공 뼈를 삽입해 걸음이 자유롭지 않다. 피랍 4개월 전인 1999년 9월에는 직장암 수술을 받아 더더욱 행동이 불편했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때 김목사는 북한 선수단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북한에 국수공장을 지어준 적도 있어 한때 친북주의자란 오해도 받았다. 그러면서도 1999년에는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의 김상철 변호사와 탈북난민 인권지위 확보를 위한 서명 운동에 참여했다. 김목사는 옌지를 무대로 선교활동을 하며 북한에 성경을 보내는 운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편집자)

    김동식 목사 납치에도 가담하지 않고 전화를 받을 때마다 맥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윤창주는 “왜 그렇게 힘이 없는가” 하고 위로하며, “네 처를 보낼 테니 같이 (북한으로) 들어오라”고 회유했다. 윤창주는 아이 둘이 북한에 남아 있다는 것을 믿고 처를 중국으로 내보내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2000년 2월 아내를 만난 나는 내 맘을 털어놓고 같이 한국으로 도망가자고 했다.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동안 내가 한 공로가 있으니 함부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계시고 하니…’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내와 나는 베트남을 통해 한국에 가려고 중국 남쪽에 있는 윈난(雲南)성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국경 탈출 방법을 몰라 상하이(上海)로 올라와 상하이에 있는 한국 영사관을 찾아갔다. 상하이 영사관은 도와줄 수 없다며 중국돈 600위안을 주고 내보냈다. 그러는 사이 평양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나는 ‘정상회담 때문에,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나를 받아주지 않은 것’이라고 나름대로 자위했다. 그러는 틈틈이 북한의 허위를 폭로하기 위해 내가 한 일을 깨알 같은 글씨로 썼다.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상하이 있는 일본 영사관을 통해 한국에 가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2000년 7월15일 나는 일본어를 하는 학생을 통해 일본 영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 학생의 일어 실력이 부족해 나의 망명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하도 답답해서 일본 영사관의 팩스번호를 알아내, 7월18일 중국어로 내 사연을 적어 팩스로 보냈다. 그날 저녁 8시쯤 민박집에서 아내와 식사를 하고 있는데 중국 국가정보기관인 국가안전부가 나를 찾았다.

    민박집은 19층 건물의 꼭대기에 있었다. 중국 안전부에 잡히면 북한으로 강제송환될 것이고 그러면 죽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건물 꼭대기로 뛰어올라가 자살하려고 했는데, 밑에서 처가 “송미(딸 이름) 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 외침에 때문에 뛰어내리지 못하고 붙잡혔다. 상하이 안전부 취조실에 끌려가서도 나는 자살을 시도했다. 취조실 한쪽에 큰 유리창이 있기에 창을 깨고 뛰어내릴 생각으로 몸을 날렸는데 ‘쾅’하고 튕겨 나왔다. 부딪친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방탄유리였던 것이다.

    안전부원들은 조선말 통역을 놓고 나를 조사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지만 내 가방에서 수기가 나옴으로써 1997년 이후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저절로 드러났다. 그 수기에 나는 ‘북한 공작원의 탈북자 납치 수기’라는 제목을 붙이고 보위부에 협조한 중국인(조선족)의 이름도 적어놓았다. 과거 반북 조직을 붙잡을 때마다 그들이 수첩에 적어놓은 전화번호를 보고 비웃었는데 나는 그보다 더한 바보가 되었다.

    보름 후 유치장에 집어넣기에 단식에 들어갔다. 음식을 거부하자 그들은 강제로 입에 음식을 넣었으나 게워냈다. 그러나 링거 주사는 피할 수 없었다.

    9월2일 상하이 안전부는 나와 처를 기차에 태워 선양의 안전부로 보냈다. 나의 법적인 신분은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머물고 있는 비법월경자이니, 나를 북한으로 강제송환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북한에 돌아가면 내가 잡아온 탈북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죽거나 정치범 관리소로 보내질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했다.

    9월6일, 단둥-신의주 사이의 다리를 건너 북한으로 넘겨졌다. 다리 건너편에는 평안북도 보위부 반탐처장이 나와 있었는데 그는 나를 보더니, “이인모처럼 절개를 지키고 돌아올 것이지, 다 불고 돌아오느냐”라며 혀를 찼다. 그리고 승용차에 태우더니 “고생했어” 하면서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었다.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9월8일, 평양에서 보위부 2국 반탐부국장 문종환 중장(왕별 두 개)이 와서 나를 평양으로 데려갔다. 당시 나는 몸무게가 46㎏까지 줄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펄펄 날더니 왜 이 모양이 됐어?”라고 하더니, “뭐 일하다가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국가안전보위부 2국 305호 관리소(보위부 산하 모든 아지트를 관리하는 본부)가 관리하는 712아지트로 갔다가 보위부 4호 병동으로 옮겨졌다.

    4호 병동에서 남한으로 갔다가 북한으로 송환된 조강건이란 사람을 만났다. 그는 2군단 4사단 보위부장의 운전수였는데, “부장이 식사하러 간 사이 차 수리를 하다가 둔기로 머리를 맞아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남조선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다시 북으로 돌아가겠다고 해 돌아왔다는데, 판문점을 넘을 때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는 김일성청년영예상을 받고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 특설반에 입학했다.



    갑자기 출세한 조강건은 친구들과 어울려 패싸움을 하다 붙잡혀 안전부 구류장에 끌려갔다. 조사를 받던 중 시간이 나자 그는 다른 죄수들에게 남한 이야기를 해줬다고 한다. 제 딴에는 신나서 직승기(헬리콥터)를 타본 이야기며, 서울의 높은 빌딩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 원인이 되어 바로 족쇄를 차고 보위부로 끌려왔다. 조강건이 횡설수설하는 것은 심심함을 달래는 데 아주 좋았다.

    병실 침대에 누운 채로 나는 보위부 2국 4처(해외반탐 담당) 처장인 심재명 대좌의 취조를 받았다.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그때까지 겪은 일을 반복해 물어보면서 쓰라고 하는데 아주 지겨웠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한국영사관을 찾아간 것과 수기를 쓴 것만은 사실대로 밝히지 않았다. 9월11일 시작된 조사는 11월26일까지 계속 되었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해 10월 평양에서는 전국보위일꾼대회가 열려, 내 문제가 토론되었다고 한다. 내가 통신을 끊었을 때 함경북도 보위부는 완전히 초비상 상태였다고 한다. 만일 내가 한국으로 튀었다면 목이 날아갈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으로 인한 유화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한국에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가 되돌아왔으니 윤창주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국기훈장 1급까지 탄 나를 처형한다면 나를 보증했던 몇몇 사람들도 함께 잘라내야 한다. 전국보위일꾼대회에서 오랜 논의 끝에 나를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한 결정은 11월24일 김정일이 ‘용서하라’는 친필지시를 내림으로써 공식화되었다. 12월1일 아침 6시에 심재명 대좌가 나를 데리고 기차를 탔다. 12월3일 새벽 1시 반에 청진역에 도착하자 윤창주가 나와 있었다. 1년 사이 그의 얼굴이 10년은 늙어버린 듯했다. 윤창주는 나를 보자마자 “동무 땜에 내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쎄게 한 줄 아나, 전부 목 놓을 준비를 하고 있었어”라고 했다. 이어 그는 “그런데 왜 일본영사관에 들어가려고 했나” 하고 따져 물었다. 나는 정치범관리소로 끌려갈 것으로 예상하고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윤창주는 나를 자기 차에 태우더니 회령 국제호텔로 갔다. 호텔방에는 양주와 푸짐한 안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웬일인가 싶어 눈이 휘둥그래지자, 윤창주는 “그렇게 손때 묻혀 키워 왔더니 어떻게 공작원 이름을 다 불 수 있는가” 하고 서운한 감정을 토로했다. 드디어 상황이 짐작되었다. 보위부는 내가 한국으로 가려고 한 것과 수기를 쓴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중국 국가안전부가 내 수기를 통해 보위부의 움직임을 꿰뚫게 된 것을, 내가 분 때문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아내와 함께 윤창주의 승용차로 회령 집에 갔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광수야” 하고 부르자, 아이가 “아버지” 하면서 뛰어나왔다. 1년이 넘도록 보지 못한 자식이었다. 윤창주는 “방침을 전달할 것이 있다”며 빨리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했다. 30분 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집으로 왔다. 윤창주는 최고사령관 김정일 동지의 친필지시라며 “지난날 많은 일을 했으니 관대하게 대해주라”는 내용의 글을 읽고 돌아갔다. 아들이 죽은 줄 알고 있었던 부모님은 김정일의 친필지시에 눈물을 줄줄 흘리셨다.

    인생은 정말 이상한 것이다. 다음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우리 동네를 관찰하는 보위부 끄나풀인 보위원이 보자고 했다. 그는 “한 가지만 도와 달라”고 했다. 사연인즉 오래 전에 반동결사를 적발하여 일곱 명이 처형당하게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처형당한 사람의 가족이 복수를 한다며 자기 딸을 죽였다는 것이다. 딸을 죽인 자가 헤이룽장 ○○마을에 사는데, 가서 복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다…’ 순간 내가 해온 일이 떠올라 “개인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는 “인간적으로 도와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는 “문제가 발생해도 내가 다 책임을 지겠다. 당신이 이동하면 무조건 상부에 보고해야 하는데, 10일간은 보고하지 않을 테니 그놈을 잡아달라”고 애걸했다.

    운명적인 부탁이었다. 가슴속에서는 까맣게 포기했던 한국행 꿈이 다시 타올랐다. 나는 못이기는 척하고 담당 보위원이 챙겨주는 돈까지 받아 12월15일에 다시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그 길로 베이징(北京)으로 가, 한국 대사관에 들어갔다. 당시는 탈북자들이 대사관에 뛰어들기 전이라 경비가 삼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만나준 영사는 역시 “도와줄 수 없다”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브로커를 통해 위조 여권을 사 비행기나 배를 타기로 하고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벌었다. 돈을 버는 사이 해가 훌쩍 넘어가 2002년이 되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브로커를 만나 한국 여권과 비행기표를 샀다. 중국을 떠나기로 한 날 아침,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는데,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택시를 세워놓고 한국 대사관에 들어갔을 때 만난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여권번호를 불러주니 그는 “이미 분실 신고가 된 여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낭패였다. 다시 돌아가 여권을 판 브로커 3명과 죽기 살기로 싸웠지만 돈을 돌려받을 수는 없었다.

    내가 사라진 후 보위부는 물론이고 보위사까지 나를 추적했다. 특히 나 때문에 물을 먹었던 보위사는 보위부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적극적이었다. 2002년 3월8일 다롄시 55로(路)에서 보위부 체포조 세 명에게 둘러싸였다. 3 대 1의 상황이었지만 그들의 수법을 잘 아는지라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그들이나 나나 중국에서의 법적 신분은 똑같이 비법월경자다. 중국 공안에 걸리면 북한으로 강제송환되는 신세인 것이다.

    손에 잡히는 대로 휘두르고 던지며 싸우는데 중국 공안 백차가 “웽”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순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체포조와 나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그후 과거의 협조자로부터 들으니 보위부와 보위사에는 나에 대해 살해지시가 내려졌다고 한다. 나는 내가 쫓던 윤대일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어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인 3월14일 TV에서 일단의 탈북자들이 주중 스페인 대사관에 들어가 망명을 요청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후 탈북자들이 한국 영사관을 비롯한 외국 공관에 뛰어들어가 망명을 요청했다. 세계 여론은 이들을 난민으로 인정하라고 외쳤다. 그러자 중국이 이들의 한국행을 허가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찾은 기분으로 베이징으로 갔다. 위조여권이긴 하지만 한국 여권을 갖고 있고 경상도 말투를 쓰니 중국 공안은 두말 않고 출입을 허가했다.

    “네가 그 이춘길이냐”

    2002년 7월10일 나는 베이징 주재 한국 영사관 진입에 성공했다. 귀찮게 찾아오던 내가 다른 탈북자들이 집단으로 뛰어든 시기에 찾아왔으니 영사관 직원은 놀란 표정이었다. 탈북자를 다루는 영사가 지정돼 있기에 그를 만나 “이춘길이다. 보위부의 납치공작원이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과거 영사관에 들어갔을 때도 늘 하던 말이었다. 영사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갔다 오더니 “네가 보위부의 그 이춘길인가?” 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전에는 보지 못한 반응이었다. 그가 “그런데 웬 일로 이곳에 왔는가” 하고 묻기에 “그간의 잘못을 반성하고 내가 했던 공작을 전세계에 폭로하려고 왔다”고 대답했다. 당시 영사관에는 나를 포함해 17명의 탈북자가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16명은 헬스장 안에 머물고 나만 별도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과거에 만난 영사들은 나를 그저그런 탈북자로 보았던 것이다.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의식해 탈북자를 데려가지 않던 게 관례인지라, 그들은 본국에 형식적으로 물어본 후 ‘당신 힘으로 한국에 가라’고 했던 것이다.

    탈북자들이 집단으로 영사관에 뛰어들어 세계 언론이 주목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국정원이 주축이 돼 탈북자들을 꼼꼼히 조사하면서 비로소 나에 대한 조사도 제대로 이뤄졌던 것이다. 생각보다 나에 관한 자료가 많았던 모양이다. 서울에서 국정원 직원 세 명이 날아와 디지털 카메라와 디지털 녹음기를 켜놓고 나를 조사했다. 국정원은 보위부 납치조를 추적해 왔던 듯, 나를 찍은 사진을 갖고 와 대조해 본 후 “맞군”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길고 긴 조사를 받는 사이 영사관에 들어와 있던 탈북자들이 하나둘씩 서울로 출발했다. 나는 그들이 모두 서울로 떠난 8월3일까지 24일간 조사받으며 기다렸는데, 마침내 돌아온 답은 ‘한국행 불가(不可)’였다. 이유를 물어보니 탈북자를 한국으로 보내기 전에 중국 정부와 협의를 거치는데, 중국 정부가 나의 한국행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중국과 북한 사이의 모종의 합의 때문에 나처럼 보위부 일을 한 사람은 보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중국 국가안전부에서 조사받은 전력이 있으니 중국 정부에서 안 보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국정원이 나를 거부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한국 정보기관의 공작을 심각히 방해했고 여러 탈북자를 북한으로 끌고 갔으니, ‘너도 한번 당해봐라’는 식으로 내팽개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했다. 죽고 싶었고 그런 만큼 살고 싶었다. 나 때문에 생을 거둔 사람도 이런 심정이었으리라. 불면의 날이 많아졌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기 위해’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중국 대도시의 밤하늘에는 삼성과 LG 등 한국 대기업의 네온사인이 반짝인다. 지난 월드컵 때 TV를 통해 서울 광화문 광장에 모여든 붉은 악마를 보고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고 싶다. 나도 저들과 함께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치고 싶다.

    이춘길의 손에 의해 절명한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한다. 그리고 그들과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김정일의 음흉함을 온 세계에 알리고자 한다. 한때 공화국의 저승사자였던 나, 이제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진지한 마음으로 태극기를 향해 경건한 경례를 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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