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종로 쪽방, 출구 없는 삶의 종착역

0.7평, 숙박료 6000원의 안식처

  • 글: 정호재 demian@donga.com

    입력2003-01-05 15: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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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종로구 돈의동 103번지. 종로를 뻔질나게 드나드는 사람에게도 낯설기 그지없는 공간이다. 한 평도 안 되는 수백 개의 ‘쪽방’들이 뜨내기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 남아 있는 박제된 근대화의 유물, 그곳에 우리가 보듬어야 할 이웃들이 살고 있다.
    일흔을 바라보는 박노인을 만난 곳은 서울 종로 쪽방상담소 ‘사랑의 쉼터’였다. 자존심이 강한 노인이었다. 개인사를 좀체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소주가 몇 잔 들어가고서야 속내를 털어놨다.

    외환위기 여파로 연희동 집을 나와 지하도에서 노숙을 시작한 게 몇 해 전이다. 2001년 초 탑골공원에 들렀다가 근처에 싸구려 쪽방이 있다는 말을 듣고 종로구 돈의동 103번지, 이른바 ‘종로 쪽방촌’에 들어왔다. 칠십 나이에 노숙을 전전한 터라 몸이 많이 상한 데다, 당뇨와 류머티스까지 있어 걸음을 떼기도 힘겹다. 그래도 말쑥한 정장 차림이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사람을 찾아가 만나야 하고, 그러려면 허술한 행색을 보여선 안 된다는 것.

    “우리 세대는 말이요, 앞만 보고 달려왔어. 우리 동네에서 내 별명이 뭐였는지 알아? ‘왔소갔소’였어. 만날 회사와 집만 왔다갔다 했거든.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 결혼식에도 일 때문에 제 시간에 못 갔지….”

    그를 부축해 낙원상가 골목의 돼지족발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족발집 아줌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날 혼자시더니, 오늘은 손님을 다 데리고 오셨네.”



    “젊은 사람 갈 데가 못돼요”

    종로 거리를 웬만큼 누벼본 사람도 쪽방촌은커녕 돈의동이란 동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로구에는 80여 개의 동(洞)이 있는 데다, 대개는 소규모 상가로 들어차 있다. 말로만 듣던 쪽방촌이 탑골공원에서 종로3가 방향인 ‘노인벨트’에 있을 거라고는 짐작했다. 종로라면 서울 한복판이고, 그리 넓은 지역도 아니기에 어렵지 않게 찾아내리라 생각했다.

    탑골공원은 노인세상이다. 서울시가 제공하는 거대한 노인정이다. 그 곳말고는 온통 젊은이들의 공간이니 길 하나만 건너면 무려 5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셈이다. 여기에서 종로3가 쪽으로 5분 남짓 걸어가면 종묘공원(봉익동)이 나온다. 이곳은 두 번째 노인정이다. 종로 쪽방촌은 아마도 이 두 노인정 사이 어딘가에 있을 터.

    탑골공원 돌담길을 따라 낙원상가 쪽으로 걷다보면 약간 퍼진 밥에서 나는 듯한 ‘노인 냄새’가 느껴진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곳은 ‘노인들의 거리’라기보다는 ‘할아버지들의 거리’라고 하는 게 맞다. 할머니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곳곳에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술판이 벌어져 있다. 막걸리와 1000원짜리 안주가 있고, 장기판과 좌판에서 종종 승강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다시 종로3가를 향해 걸었다. 골목 사이사이로 모텔이 눈에 들어온다. 좀더 걸으니 개축 공사가 한창인 피카디리극장과 단성사가 나타난다. 여기에서 조금 더가면 종묘공원이다. 그런데 쪽방촌이 눈에 띄지 않는다. 분명 노인벨트를 지나쳐 왔으니 쪽방촌도 지나왔을 텐데. 무려 1000여 명이 살고 있다는 쪽방촌은 어디에 꼭꼭 숨었을까. 돈의동 103번지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첫날 밤은 그렇게 허탕을 치고 다음날 다시 종로거리를 헤맸다. 그러고도 쪽방촌을 찾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독자 수색’을 포기하고 낙원상가 근처 포장마차 주인에게 길을 물었다.

    “이 근처에 종로 쪽방이 있다는데, 어딘지 아세요?”

    포장마차 주인은 뜨악한 시선으로 아래 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왜, 댁이 거기서 자게?”

    그는 종로2가와 3가 사이의 모텔촌을 가로질러 들어가 ‘동광시장길’을 찾으라고 일러줬다. 피카디리극장 옆 초동교회 뒤편에 3층으로 불법 개조한 건물은 모두 쪽방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한마디 거들었다.

    “거기는 젊은 사람 갈 데가 아닌데….”

    큰길가엔 번듯한 유흥업소가 즐비하고 골목초입엔 모텔촌이 제법 크게 형성돼 있다. 그러나 조금 더 들어가면 영화 속 슬럼가처럼 음산한 기운이 감돈다. 곧 ‘동광시장길’이라는 푯말을 찾아냈다. 종로 쪽방촌 입구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허름한 건물 앞에 몸이 불편한 노인 몇이 의자를 놓고 앉아 있다. 어두컴컴한 골목에 사람들이 군데군데 앉아 있는 광경이 흡사 사창가 같다.

    금시라도 무너질 듯한 건물 외벽엔 나무 사다리들이 엉켜 있다. 작은 건물 곳곳에 어거지로 문을 냈다. 그만큼 방이 많다는 얘기다. 지은 지 50년은 돼 보이는 우중충한 목조 건물 옆으로 비교적 최근에 지은 다가구 쪽방 건물도 눈에 들어온다. “서울 한복판에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구나” 하고 혀를 내두르며 걷다보니 어느새 쪽방거리는 사라지고 종로 상가가 펼쳐진다.

    ‘쪽방’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1980년대 한 잡지사 기자가 ‘반쪽 방’이라는 뜻으로 붙인 말이 굳어졌다는 설명이 가장 그럴듯하다. ‘반쪽’이라는 말 그대로 쪽방은 방의 형태만 겨우 갖췄다. 한 평 안팎의 공간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시 빈민의 주거다. 쪽방에서 만난 한 주민은 이렇게 자조했다.

    “집이라고 할 수도 없죠. 4평 공간에 방을 12개나 만들었어요. 물론 무허가죠. 그러니 불도 잘 나고…. 이걸 집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냥 하늘만 가리고 있는 거죠.”

    그런 쪽방에도 ‘등급’은 있다. 작게는 0.5평, 크게는 1.5평까지 넓이에도 차이가 있고, 벽돌 건물이 있는가 하면 목조 건물도 있다. 하룻밤 숙박료는 6000원에서 1만원까지(월정가 20만원 안팎). 자그마한 창문이라도 하나 있고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다면 무궁화 4개, 바닥에 밤새 뜨거운 기운이 계속 유지된다면 무궁화 5개 ‘특급호텔’급이다.

    그러나 대개는 천장이 낮아 제대로 설 수도 없고, 창문도 없고, 늘 냉기가 도는 1평 미만의 작은 ‘감옥’이다. 여름엔 찜통, 겨울엔 냉방이다. 이곳의 1∼131호 건물 중 90여 개 건물이 쪽방으로 이용되고 있다. 모두 651개의 방이 있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으니 한 건물에 평균 7개의 방이 들어 있다는 얘기다.

    새벽 2시. 술 취한 정장 차림의 두 남자가 방을 달라며 흥정을 벌이고 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쪽방은 귀가시간을 놓친 직장인들에게 값싼 여인숙으로 사랑받았다. 두 사람이 방을 얻어 올라갔다. 골목 맨구석에 앉아 있던 아낙네가 이쪽으로 손짓을 보낸다. 가까이 갔더니 “방 얻으슈?” 한다. 크게 인심이라도 쓰는 양이다. 방을 달라고 했다.

    입구는 흡사 재래식 공중변소로 들어가는 것처럼 좁고 어두웠다. 그래도 여주인은 날렵하게 사다리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간다.

    “머리 조심하고 따라와요.”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2층에서 다시 3층으로 향했다. 한 층에 방이 3개씩 있는데, 흡사 초가삼간 세 개를 포개올린 것 같다. 주인은 3층 끝방 문을 열더니 형광등 어딘가를 만져 불을 켰다. 스위치가 따로 없다. 방이 아니라 벽장 같다. 신발을 들고 방에 들어가니 형광등에 머리가 부딪혔다. 주인에게 7000원을 건넸다. 옆방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린다. 멀리 종각 삼성빌딩의 화려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20여 년 전에 만든 초창기 소형 컬러TV, 뽀얀 먼지투성이 선풍기, 얇은 이불 두 장과 베개 하나, 재떨이로 썼는지 막걸리를 부어 마셨는지 모를 스테인리스 밥그릇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릇 위로 초파리 수십 마리가 날아다닌다. 베개는 새카맣게 때가 낀 데다 축축한 습기가 배어나 도무지 머리를 대고 잠을 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벌레들이 몸 위로 기어오르는 것만 같다.

    다리를 바로 뻗을 수 없어 대각선으로 몸을 뉘였다. 이불을 덮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기에 옷을 입은 채 누웠다. 베개 위에 화장지를 한꺼풀 깔았다. 바닥은 무척 찼다. 보일러가 돌아가는 듯했지만 방바닥엔 열선이 하나밖에 깔리지 않았다. 얼기설기 발라놓은 창호지 틈새로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화장실을 찾았으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다리 앞에 놓아둔 양동이가 화장실이었다. 새벽녘에 누군가가 ‘쪼르르’ 볼일 보는 소리가 방안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사창가에서 빈민들의 삶터로

    겨울 쪽방은 얼음장이다. 온몸을 이불로 둘둘 막아도 한겨울밤 언 몸을 녹이기엔 역부족이다. 그래도 푼돈이나마 만지는 노숙자들은 “길바닥에서 자는 것보단 낫다”며 쪽방으로 모여든다. 연탄보일러가 기름보일러로 바뀌면서 가스중독 걱정은 없어졌지만, 대신 4000∼5000원 하던 방값이 7000원 안팎으로 수직 상승했다. 하룻밤에 1만원씩 하는 방도 생겼다.

    기름값 때문에 싸움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주인들이 늦은 밤에만 보일러를 돌리는 탓에 방이 쉬 따스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쪽방 사람들은 “300원짜리 연탄 한 장이면 열두 시간 따뜻했는데…” 하면서 연탄보일러 시절을 그리워한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부대끼다 보니 화재 위험도 높다. 소방도로가 미비해 불이 나면 피해가 크다. 동네 한가운데엔 1970년대에나 봤음직한, 빨간 페인트를 칠한 종이 매달려 있다. 불이 나면 비상상황을 알리기 위한 용도다.

    서울에는 5000여 개의 쪽방이 있다. 종로구 돈의동과 창신동, 영등포, 청량리, 서울역 앞 남대문로 5가 등지에 밀집해 있다. 한국전쟁 이후 도시 빈민들이 몰려들었고 대규모 사창가가 있던 지역이라는 게 공통점이다. 사창가가 없어진 후 최극빈층의 일세방으로 쓰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쪽방촌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였다. 외환위기 여파로 서울의 지하도들은 밤이면 노숙자들의 아지트로 변했다.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던 노숙자들이 그 절망의 나락에서 한 걸음 벗어나 숨을 돌린 곳이 바로 쪽방이다. 갈 곳 없는 노인과 노숙자들이 한두 푼씩 모은 돈을 들고 쪽방촌을 찾아 추위를 피했다. 하루 5000원이면 온기 있는 방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주변엔 무료 급식소도 있었다. 더구나 서울 한복판이다 보니 이런저런 잡일거리가 널려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정부가 쪽방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9년 이후다. 쪽방촌에서 노숙자가 굶어죽은 사건이 보도된 이후 당국은 각 구(區)별로 쪽방상담센터를 세워 체계적인 관리에 들어갔다. 종교계도 나섰다.

    쪽방촌에선 가족 없는 빈민들이 혈혈 단신으로 날품을 팔아 생계를 꾸려간다. 쪽방 사람들은 집주인과 장기 거주자, 뜨내기 단기 거주자들로 나뉜다. 1∼131호 건물에 살고 있는 700여 명의 쪽방 주민 가운데 노인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2001년 조사에 따르면 60세 이상 노인은 20% 정도. 세입자의 주류는 가족과 헤어진 40대였다.

    주민 700여 명 가운데 1년 이상 장기 거주자가 절반이 넘는다. 장기 거주자들은 주민등록을 돈의동으로 옮겨놓기도 한다. 400여 명의 주민등록지가 돈의동이다. 그 중 기초생활 수급자가 150명쯤 된다. 장기 거주자의 절반은 아예 가정을 이뤄본 적이 없다.

    이곳 노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쪽은 외환위기 이전부터 살아온, 적어도 10년 이상 가족 없이 단칸방을 지켜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민등록도 이곳으로 옮겼고, 장애가 있거나 가족과 진작에 연락이 끊겨 정부로부터 생활보호를 받아왔다. 2000년부터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됐다. 다른 한쪽은 외환위기 이후 가정이 붕괴하면서 튕겨나온 이들이다. 최근에 수급자로 등록된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가족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밥벌이를 해결해야 하는 노인들이다.

    종로 쪽방, 출구 없는 삶의 종착역

    ① 30년째 쪽방에서 살아온 최씨 할머니 <br>② 종로 쪽방촌, 뒤로 초동교회가 보인다. <br>③ 소방도로가 없는 이곳에는 화재경보종이 걸려 있다. <br>④ 취사도 방에서 해결한다.

    1급 장애인인 최씨 할머니(70)는 1층 단칸방에서 고만고만한 세간을 갖춰놓고 산다. 결혼 후 아이를 못 낳는다고 쫓겨나서 서울에 왔는데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40년 전 일이다.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아 나섰지만, 두 눈이 성치 않으니 입에 풀칠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젠 쪽방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할머니는 그저 “나라에서 쥐어주는 돈으로 먹고 사는 것만도 고맙다”고 했다.

    최씨 할머니는 이곳 쪽방촌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받는 축에 든다. 구청과 보건복지부로부터 2500만원의 전세자금을 지원받았고, 매월 기초생활수급자 중증장애급 43만원을 받는다. 의료급여증도 있다. 그나마 이 정도의 복지 혜택을 누리는 이는 선택된 소수에 불과하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려면 확실한 장애가 있거나 홀몸이어야 한다. 더욱이 월수입이 35만원을 넘는 직업이 있으면 대상이 될 수 없다. 수급비는 평균 월 30만원 안팎.

    70세가 넘은 전씨 할아버지는 ‘교장선생님’으로 불린다. 나이에 비해 정정해 보인다고 해서 얻은 별명이지만, 이런저런 병치레에 시달린다. 젊었을 때는 항만청에도 다녔고 사진관을 운영한 적도 있다. 물론 가정도 일구고 살았다. 이 근처에 포장마차를 열었는데, 14년 전 부인이 암으로 세상을 뜨자 홀로 쪽방에 눌러앉아 노년을 보내고 있다. 수입은 수급비와 노인수당 등 월 36만원. 한동안 재미가 쏠쏠했던 취로사업도 요즘은 끊겨 종묘공원을 왔다갔다 하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다.

    “죽지 못해 사는 거지. 수급비에서 방값 20만원을 떼주면 끼니 걱정을 해야 돼. 그렇지만 여기가 내 고향이나 다를 바 없는데, 또 어디로 가겠어?”

    쪽방살이가 고달프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을 떠나기도 쉽지 않다. 방값이 한 달에 20만원이니 물경 2000만원짜리 전셋집에 살고 있는 셈인데, 그래도 종로3가만큼 여건이 좋은 곳도 없다. 주변에 일거리가 많고, 지하철 노선이 3개나 지나가는 데다, 노인들에게 공짜로 밥을 퍼주는 곳도 몇 군데 있기 때문이다.

    이씨 할머니(78)는 전형적인 외환위기 피해자. 사업을 하던 아들이 끌어다 쓴 사채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바람에 온 가족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폭력배들의 빚독촉에 시달리던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법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었다. 종로에 값싼 방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돈의동까지 찾아왔다. 딱 열흘만 있을 생각으로 들어왔지만, 어느새 3년이 지났다.

    “친자식들이 있기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자격이 없어요.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잔심부름도 해주고, 식당 설거지며 전단 돌리기 등 닥치는 대로 일해야 내 한 몸 겨우 추스려요.”

    기능공 출신이라는 송씨 할아버지(67)는 “건강해 보인다”고 인사를 건네자 퉁명스레 되받았다.

    “건강하면 뭘 해, 일을 안 시켜주는데. 좀 늙긴 했지만 취로사업쯤은 끄떡없이 할 수 있는데도 말이야.”

    그러나 번듯번듯한 장정들도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마당에 일흔을 바라보는 그에게 돌아올 일은 없다. 그러니 하릴없이 쪽방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그는 “이놈의 지긋지긋한 쪽방에서 매일 TV만 끼고 뒹군다”며 혀를 찼다.

    술판, 싸움판, 노름판

    뒤늦게 쪽방촌에 합류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하루 빨리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러나 방도를 찾지 못하고 한 해 두 해를 흘려보내다 정붙이고 사는 이도 있고, 방값을 못 내 쫓겨나는 사람도 있다. 하나같이 의지가지 없는 ‘막장인생’인데다 살기가 팍팍하니 술 마실 일도 많고, 그러다 보니 싸움판도 자주 벌어진다. 관할 종로3가 파출소에서 많으면 하루에도 10차례 이상 출동해 싸움을 뜯어말리기도 한다. 한 주민의 말.

    “불편한 것 생각하면 여기서 못 살지. 노인은 많아도 동네 어른이 없어요. 젊은 축도 아주 메말랐어. 인사는커녕 서로 말도 안하고 지내. 돈푼이나 쥐면 그저 술 퍼마시고 싸움질이나 해대니 상종하기도 싫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뜨자고 다짐해보지만, 나가서 살 도리가 없는데 어떡하겠어. 억지로라도 정붙이고 살아야지.”

    그러나 늘상 우울한 일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환갑을 바라보는 천씨는 5호선 종로3가역 근처에서 붕어빵과 어묵을 판다. 돈의동 쪽방촌에서 수십 년을 산 천씨는 매일 장을 보아 쪽방에서 TV를 보며 붕어빵을 반죽한다. 37년 전에 고향인 경남 충무를 떠나 이곳에 정착했다니 종로 토박이다. 주변 상인에 따르면 천씨는 10여 년 동안 혼자 포장마차를 꾸리면서 매주 응암동 ‘소년의 집’에 도너츠며 만두를 싸들고 간다.

    “내가 입은 은혜에 비하면 대단할 것도 없어요. 없이 살아도 남을 돕고 살 수 있다는 게 다 복이요. 돈이 많으면 고통이지. 뭐 그리 좋은 집이 필요해….”

    40∼50대 쪽방 주민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곳으로 들어왔다. 가정을 이뤘다가 실패해 들어온 사람도 있고, 대학까지 나오고도 밑바닥 직업을 전전하다 들어오기도 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생활을 했던 이들은 몇 개월씩 머물다 가는 뜨내기가 대부분이다. 장기 거주자들은 대개 몸 하나로 세상을 살아온 이들이다. 술과 노름은 늘 그들 삶의 일부였다.

    갓 마흔이 넘은 김씨는 ‘택배업체 사장’이다. 하지만 직원은 물론 오토바이 한 대도 없는 ‘나홀로 사장’이다. 김씨는 종로 주변 상인들의 신뢰를 얻어 지하철 왕복 요금을 밑천으로 물건을 나른다.

    그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다. 김씨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헛것이 보이는 알콜중독자였다. 술독에서 허덕이던 김씨는 정신질환자와 부랑자들의 재기를 돕는 은평마을로 들어갔다. 그는 백내장까지 겹쳐 7개월 동안 사경을 헤매다 어렵사리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쪽방에는 매일 술로 연명하다시피 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도 그럴 것이, 혈혈단신이거나 가정을 꾸려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비슷한 처지의 이웃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게 유일한 낙일 때가 많다. 김씨는 “쪽방촌만큼 술인심 좋은 데도 없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공사판에서 일하는 40대 최씨는 “새벽 4∼5시에 열리는 인력시장에 나가려면 도심에 잠자리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요즘은 인건비가 올라 운이 좋으면 일당을 10만원씩 받기도 하지만, 그런 날은 극히 드물다. 매일 일터로 나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며칠 일해서 돈을 쥐면 방값을 내고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다 돈이 떨어지면 터벅터벅 다시 일터로 나간다.

    쪽방을 포용해야 ‘진짜 종로’

    쪽방촌의 또 다른 주인공은 장애인들이다. 장애의 유형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 살아온 인생역정도 갖가지다. 나면서부터 장애였거나 비교적 최근에 사고로 장애인이 된 사람, 거동이 좀 불편한 사람에서 아예 수족을 쓰지 못하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 또한 함께할 가족이 없다는 사실이다. 몸까지 편치 못하니 하루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경우가 많다.

    쪽방촌의 어려운 사정이 알려지면서 이들을 도우려는 손길이 생겨났다. 쪽방촌이 형성된 종로구, 중구, 용산구, 영등포구에는 쪽방상담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이들은 무료 급식과 의료 서비스 등 기초생활 지원에서 행정 지원까지 펼치며 쪽방 주민들의 손과 발이 돼준다.

    돈의동 쪽방촌 부근의 종로쪽방상담센터(소장·지영식)에선 두 사람의 젊은 사회복지사들이 주민들의 친구를 자처하고 나섰다. 얼마 전에는 “바다를 보고 싶다”는 몇몇 할아버지들의 바람을 듣고 승합차를 빌려 제부도를 다녀오기도 했다. 외로움에 젖은 이들에겐 물질적 지원보다 정서적 복지가 더 아쉬운 부분이다. 지역 보건소와 가톨릭 무료 병원인 성가복지병원은 의료 지원을 펴고 있다. 종교 단체들도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나 아직은 도움이 충분하지 못하다.

    3년째 종로쪽방상담센터를 이끌고 있는 지영식 소장은 “쪽방촌이 단지 노숙자와 노인 등 불쌍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만 인식돼선 안 된다”고 했다.

    “여기도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가진 것은 없어도 제 힘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쪽방을 넉넉하게 끌어안을 때라야 종로는 비로소 제 모습을 찾을 겁니다.”

    낙원아파트 옆에 들어선 23층짜리 프레이저 스위츠(Praser Suites)는 외국인 장기 체류자를 겨냥한 최고급 호텔 겸 사무 공간이다. 한 달 이용료가 400만원에 이른다. 이 호화판 국제 주거지 바로 건너편엔 각지에서 갖가지 사연을 안고 밀려든 도시 빈민들이 오늘도 힘겨운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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