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경·유소연 우승의 숨은 조역 최희창 캐디.
은퇴 후 진로를 고민하던 그는 주변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했다. 현역 시절 2군 홈런왕 출신답게 큰 키(190cm)와 우람한 체격(110kg)으로 드라이버샷을 300m나 날리는 장타자였다. 하지만 프로 테스트에서 번번이 낙방했고 전문 캐디의 길을 선택했다. 국내 최다승 보유자인 최상호 프로 밑으로 들어가 연습생으로 생활했으나 프로골퍼는 그의 길이 아니었다.
서희경과 유소연의 연장전
캐디 데뷔전은 LPGA 투어였다. 2006년 최혜정(29·볼빅)이 LPGA투어 Q스쿨을 수석으로 통과하면서다. 외국인 캐디와 언어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최혜정은 최희창에게 캐디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혜정이와 7개월을 함께했는데 나 역시 영어가 안 되고 미국 생활도 맞지 않았다”며 “귀국을 준비하는데 서희경이 덩치 큰 캐디를 찾는다는 연락이 와 2009년 하반기 대회부터 전담 캐디로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그해 4월 서희경은 롯데마트여자오픈에서 우승했지만 상금 랭킹 선두를 달리던 유소연의 위세에 밀려 낙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희창을 영입한 뒤 ‘찰떡궁합’을 뽐내며 하반기에 ‘대박’을 쳤다. 하이트컵 챔피언십과 KB국민은행 스타투어 그랜드 파이널, ADT캡스 챔피언십에서 3승을 합작하며 유소연을 밀어내고 상금왕과 대상, 다승왕, 최저타수상 등 4관왕에 올랐다. 이듬해 서희경은 초청 출전한 LPGA 투어 KIA클래식에서 우승해 미국 무대로 직행했다. 최희창은 “희경이의 캐디를 하면서 4승을 합작했는데 선수를 잘 만나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며 겸손해했다.
서희경이 미국으로 진출하면서 최희창은 유소연의 백을 멘다. 서희경이 그를 적극 추천했고 유소연도 일찍부터 점찍고 있었다. 최희창은 2011년 6월 롯데 칸타타여자오픈에서 유소연에게 우승컵을 안긴다. 당시 유소연에겐 오랜 가뭄을 끝내는 단비 같은 우승이었다. 유소연은 그해 L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US여자오픈 초청장을 받는다. 당연히 최희창과 함께 미국에 가기로 했다. 하지만 ‘시집가는 날 등창난다’고 최희창은 갑작스럽게 허리수술을 받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유소연은 US여자오픈에서 연장접전 끝에 서희경을 물리치고 우승했다. 자신과 인연을 맺은 두 선수가 세계 최고 권위의 대회에서 우승을 다투다니…. 최희창은 “연장 경기를 TV로 시청하면서 가슴 터질 것 같은 기쁨과 아픔이 교차했다”고 회상했다.
캐디에겐 기쁨보다 아픔이 더 많다. 우승하는 날보다 그렇지 못한 날이 많아서다. 야구의 경우 3할을 치면 좋은 타자로 인정받지만 골프는 우승 확률이 10%도 안 된다. 10번 나가서 한 번 우승하면 1년 농사를 잘 지은 경우다. 그래서 캐디의 구실이 중요하다. 대회장 안에서 선수를 합법적으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캐디밖에 없다. 최희창은 “공격적으로 나갈 상황이 있어도 선수에게 안전 위주의 공략을 설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며 “핀까지 150야드가 남은 상황에서 선수가 7번과 8번 아이언을 놓고 고민할 때 어느 클럽이 옳은 선택인지 확신을 주는 게 캐디의 임무”라고 강조한다.
캐디는 대회 코스를 선수보다 먼저 답사한다. 도보로 걸으며 코스의 실제 거리와 특성, 오전과 오후 시간대에 따른 풍향의 변화, 그리고 절대 볼을 보내지 말아야 할 곳과 예상 핀 위치 등을 꼼꼼히 체크한다. 이를 바탕으로 코스 공략도(圖)를 제작한 뒤 공식 연습일에 선수와 손발을 맞춘다. 캐디의 임무는 단순히 백을 메는 것과 코스를 파악하는 게 다가 아니다. 선수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잘 파악해야 하고 실수를 하거나 압박을 느낄 때 긴장하지 않도록 대화하면서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도 유능한 캐디의 몫이다.
전문 캐디 고용의 어려움
자신을 거쳐간 선수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최희창 캐디.
KLPGA 투어의 경우 전 경기가 생중계되는 만큼 전문 캐디에게 의류를 후원하는 기업도 생겨난다. 그래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대회기간 중 숙박비와 체류비, 교통비 등은 캐디의 부담이다. 수입은 빤한데 나가는 돈은 여기저기 많아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 선수가 전문 캐디를 고용하면 성적이 좋아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당장 들어가는 돈이 아까워 전문 캐디를 고용하지 않고 가족이나 후배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다. KLPGA 투어를 예로 들면 상금 랭킹 30위까지는 전문 캐디를 고용할 여력이 되지만 나머지 선수는 힘든 게 현실이다.
전문 캐디가 늘면서 문제점도 생겨난다. 시즌 도중 웃돈을 받고 선수를 바꾸는 일이다. 최희창은 “다른 부업이 없는 전문 캐디는 주급 가지고는 생활이 힘들다”고 전제한 뒤 “그래도 시즌 중에 선수가 해고하기 전에는 돈에 따라 선수를 바꾸면 안 된다. 또 해고당해도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문제점을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톱클래스 선수와 함께 일한 그에게 잘 치는 선수들의 비결을 물었더니 ‘똑똑하다’ ‘맨탈이 좋다’ ‘자기관리가 철저하다’란 대답을 내놨다. 그는 “연습 볼은 하루에 1시간 정도 치지만 퍼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며 “나머지 시간은 운동으로 근력과 근육을 키우고 마사지로 몸을 풀어준다. 성적이 좋은 선수들은 공통적으로 공만 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즐길 줄 안다. 하지만 자신의 스윙에 이상이 감지되면 최대한 집중해 몇 시간씩 연습한다”고 말한다. 톱랭커는 무엇인가 특별한 연습을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쉬는 것도 연습’이란 멘탈을 가졌다고 한다. 연습 시간만 길게 잡아놓고 노닥거리며 시간만 때우는 일부 선수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최희창과 동고동락했던 선수 중 서희경과 유소연, 이미림은 LPGA투어에서 뛴다. 이들은 빠듯한 투어 일정 속에서도 최희창과 자주 전화 통화를 하며 안부를 주고받는다. 재미난 에피소드도 있다. 지난해 이데일리 여자오픈 첫날 골프장으로 국제 소포가 배달됐다. 유소연이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선글라스를 사서 보낸 것이다. 선물상자에는 “오빠! 자외선 때문에 눈 상하지 말라고 보내는 거야. 꼭 착용하고 미림이 우승시켜야 해’라는 유소연의 자필 메모도 함께 들어 있었다. 유소연의 열띤 응원이 힘을 발휘했을까. 이미림이 우승했다. 이미림은 “우승이 결정될 때 누구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부모 형제도 아닌 “캐디 (최)희창이 오빠”라고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와 캐디 스티브 윌리엄스의 예에서 보듯 결별한 선수와 캐디가 좋은 인연을 이어가기란 쉽지 않다.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희창 캐디는 자신을 거쳐간 선수들과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그가 전문 캐디로 대접받는 이유다. 캐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의 ‘신뢰’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