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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군단의 ‘담임선생님’ 이백천의 음악인생 上

서울대, 미8군, 색소폰과 차차차

  • 글: 이백천 대중음악평론가

서울대, 미8군, 색소폰과 차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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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호랑이 유경상 선생의 영어시간이었다. 흑판에 필기체의 대문자 ‘I’를 써놓고 읽으라고 했다. 처음에는 ‘J’ 같아서 “제이”라고 했다. “나니?(무엇이라고?)” 무섭게 질책이 날아왔다. “아이데스!(‘아이’ 입니다!)”라고 수정했다. “나와!”라는 호통에 앞으로 나간 나는 종아리를 내밀어야 했다. 회초리로 힘껏 종아리를 치며 “아이까? 제이까?(아이냐? 제이냐?) 아이까? 제이까?”를 반복했다. 종아리에는 뻘건 줄이 죽죽 생기고, 그 날 이후 나의 별명은 ‘제이상’이 되고 말았다.

난고(南鄕) 선생의 국어(일본어) 시간이었다. 키가 작아서 맨 앞줄 책상에 앉은 나는 교과서 밑에 소설책을 깔고 몰래 읽고 있었다. 그것을 본 선생이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소설입니다”라고 똑바로 얼굴을 들고 대답을 하니 잠시 후 하시는 말씀이 이랬다. “기미와 오소로시이 다마고다!(너는 무서운 아이구나!)”

맨발 등교, 제이상, 오소로시이 다마고…. 사춘기의 꿈이라던가 설레임은 전혀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렇다고 꼭 암울하다거나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해방 되던 해 가을, 아버지는 생명보험사의 의사직을 접고 서울대 의대 생리학 교실의 무급조교가 되셨다. 그때 아버지는 40세. 가족은 어머니와 3남4녀. 막내동생은 두 살이었다. 상도동 숭실대 정문 맞은편에 아버지가 사두었던 야산 4000평이 있었다. 어머니가 농부로 나섰고 주말이면 아버지, 형 그리고 내가 도왔다. 콩, 마늘, 옥수수, 감자, 고구마, 참외, 수박, 토마토에 벼농사까지 조금 지었다.

집에서 밭까지는 약 2km. 나의 담당은 주로 운송이었다. 재와 인분을 버무린 비료를 리어카로 운반하는 일, 하교후 수확물을 거둬 어머니와 같이 돌아오는 것도 내 일이었다. 쌀, 보리를 제외한 모든 부식을 자급자족했다. 물주고 거름주기, 봄에는 고랑 파고 씨뿌리고 여름에는 잡초 뽑고 가을에는 새를 쫓았다.



형은 의대를 다니고 있어서 환자 볼 손이 거칠어진다고 일을 피하는 편이었고 누이는 하루 종일 밭에서 사시는 어머니 대신 가사를 맡았고, 두 살 밑의 여동생은 누이의 보조, 네 살 아래 남동생은 아직 국민학교 학생이라 노동력이 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밭에서 아버지가 나에게 물으셨다. 옷도 주고 책도 주고, 먹여주고 재워도 주는 관립철도학교에 가는 것이 어떠냐는, 다시 말해 기관사가 될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장남은 의사, 차남은 기관사….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때(1946년)쯤 학교공부와 밭일 외에 새 일과가 생겼다. 친구 김영대의 권유로 학교 밴드부원이 된 것이다. 연습실은 본관 4층에 있었고 수업이 끝난 후에 모여 연습을 했다. 나의 악기는 가장 사람의 소리와 가깝다는 알토 색소폰이었다. 밤에 집에서 명곡집을 펴놓고 악기를 연주하면 동네 개들이 따라 짖었다. 아주 좋은 연주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해군군악학교 시절

우리 악대는 시가행진에도 참여하고 경연대회에도 나가고 정동라디오 방송에 출연도 했다. 동네 여학생 중 누구의 얼굴이 곱고 누구의 다리와 걸음걸이가 반듯한지 관심을 갖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일과가 더해졌다. 아버지가 내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3년 동안 매일 밤 7남매 중 나에게만 한 시간씩 영어를 지도하셨다. 진도는 하루에 교과서 두 페이지씩이었다. 2학년 때에 3학년 과정을 끝냈고 3학년 때에는 4, 5학년용 교과서를 끝냈다. ‘영어3위일체’라는 책의 해석, 문법, 작문까지도 끝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무급조교 기간이 끝나고 강사, 조교수로 올라선 다음에도 7남매의 학비를 대는 것이 힘에 부치셨는지 집에서 밤에만 여는 의원을 운영했다. 밤에 환자도 받고 왕진도 다니셨다. 살림은 조금 나아졌지만 어머니는 계속 밭일을 하셨고 나도 변함없이 운송담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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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백천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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