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마세요. 막말로 양반, 상놈이 한 눈에 보입니다. 가장 양반다운 분들은 시골 분들이죠. 평생 농토와 함께 늙은 분들이 존경스러울 정도로 순수해요. 벌레 잡는다고 논두렁 태우다 불낸 어르신들이 법정에 더러 와요. 농사짓는 분들은 관(官)에 대한 경애심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제 불찰로 바쁘신 판사님을 번거롭게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이소’라고 통사정을 합니다. 또 살다 보면 서로 치고받고 싸울 수 있죠. 어제도 쌍방 폭행사건 선고재판이 있었는데, 시골분이 ‘판사님, 잘못했어유. 그런데 제가 벌금 낼 돈이 없는데 좀 깎아주시면 안 되는지… 매달 조금씩 내도록 해 주면 고맙고유’라고 합디다. 벌금이 150만원이었어요. 요즘은 분할상환도 할 수 있어요. 잘못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사정 얘기하면 판사도 고마워하고, 또 그분들에게 죄송한 마음도 들지 않겠어요?”
11월2일 오전, 대전지방법원 제2형사부 정갑생(鄭甲生·43) 부장판사를 만났다. 158cm의 자그마한 키에 가냘픈 몸매지만 씩씩해 보이는 여판사였다. 정 판사는 “굵직굵직한 사건을 재판한 적이 없어 유명하지도 않고 시시콜콜한 사건만 맡아 별 재미도 없을 텐데 어떻게 저를 찾아왔느냐”고 물었다. 기자는 “재판하랴, 기록 읽으랴, 판결문 쓰랴, 정신없을 텐데 아이 셋을 키우신다니 그 비결 좀 들으러 왔다”고 했다. 순간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주차 시비로 1억 손해배상 소송
‘여풍(女風)’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법원이다. 우리나라 법관은 대법원장을 포함해 총 2288명. 이 중 431명이 여성이다. 최근엔 신임 법관 임용자의 상당수가 여성이다. 지난 2월만 해도 신임 법관 97명 가운에 절반에 가까운 47명이 여성이었다. 현재 판사나 검사 임용을 앞둔 사법연수원생 190명 가운데 102명이 여성이다.
전체 연수원생 중 여성 연수원생의 비율은 4분의 1. 하지만 판검사로 진출하는 여성 수료생이 전체의 절반이 넘다 보니 “장차 판사도 여자, 검사도 여자, 변호사도 여자인 시대에 법정의 유일한 남성은 피고인일 것”이라는 법조계 여풍 세태를 풍자한 유머가 실감이 난다.
정 판사는 10여 년간 변호사로 활동하다 지난 2000년 뒤늦게 판사로 임용됐다. 그는 “지난 7년간 벌겋게 물든 기록보다 서민의 고통을 담은 반성문을 읽으면서 재판을 해왔다”면서 “민생고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곳이 법정”이라고 했다. 먹고살기가 힘들어지니 법정 인심도 각박해지는 것 같단다.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어 법정까지 왔더라고요. 요즘 혼자 사는 남녀가 많잖아요. 피해의식인지, 말 한마디에 발끈하고 자존심 상해서 어쩔 줄 몰라 해요. 서로 상대방이 (차를) 빼야 한다고 우긴 거예요. 몸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쌍방 폭행으로 법정까지 왔어요. 여자 피고인은 ‘사람들 있는 장소에서 창피를 당했으니 1억원을 받아도 성이 안 풀린다’고 했고, 남자는 ‘차에서 애들이 보고 있었는데 체면이 말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쌍방 얘기를 들어보면 다 이해되잖아요. 몸싸움으로 여자는 무릎이 까지고 남자는 얼굴에 손톱자국이 났는데 각각 50만원씩 벌금을 선고했어요. 그런데 여자 피고인이 분하다면서 1억원을 청구하는 손해배상소송을 냈어요. 꼭 1억원을 받겠다는 건 아니고 모멸감을 참을 수 없다는 거죠. 민사재판 조정 땐 심리학자가 배석해 다행히 두 사람의 마음을 살살 녹여줬다고 들었어요. 여자에게 ‘이해한다. 1억원을 받아도 화가 풀리겠느냐. 하지만 대법원까지 가봤자 상처만 크다’고 하니 엉엉 울더랍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200만원을 주는 선에서 조정했다고 들었어요.”
검찰의 기소율 하락에도 한 해에 고소·고발되는 사람이 80여만명에 이른다. 이들 중 기소돼 법정에 서는 사람은 26.9%. 고소·고발된 3명 중 처벌할 만한 혐의가 있는 사람은 1명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서류더미에 파묻혀 사는 판사들. 정갑생 부장판사는 종종 식탁에서 편결문을 쓴다.
“경제단위가 작을수록 (사건이) 더 많아요. 큰 액수는 오히려 양보나 포기하기가 쉽거든요. 작은 액수는 감정싸움입니다. 더 절박한 돈이기도 하고. 법정까지 온 건 합의를 못했기 때문인데, 피고인의 처신 문제죠. 돈보다 더 무서운 게 법이라지만, 법을 이기는 건 감동이고 정성입니다. 교통사고를 내고 합의를 못해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피고인에게 ‘몇 번이나 찾아가봤느냐’고 물으면 ‘돈이 없어 합의를 못했다’고 해요. 그러면 제가 ‘합의는 꼭 돈으로 하는 게 아니다. 여기 오기까지 피해자가 감정이 무척 상했을 거다. 피해자를 감동시켜보라’고 권합니다. 머리를 조아리면서 ‘미안하다’고 정중하게 말해야 하는데, 뭐든 돈으로 해결하려니 문제죠.
‘말 한마디에 천냥 빚 갚는다’고 하잖아요. 돈밖에 모르니 인심이 각박해지고 ‘배 째라’는 식이 되죠. 1500만원을 못 갚아 사기죄로 법정에 온 사람이 500만원 벌금형을 선고받으면 그 벌금을 내든지 노역을 해야 합니다. 500만원 벌금형을 선고받도록 방치할 게 아니라 그 돈으로 일부라도 빚을 갚으면서 ‘미안하다’고 사정하고 법정까지 오지 않는 게 낫지 않나요. 또 요즘엔 생계형 절도가 부쩍 많아졌어요. 절도 품목도 기상천외합니다. 문짝, 된장, 관공서나 공장의 철대문, 교량 준공표시 동판, 자판기 동전, 폐지, 전깃줄, 교통표지판까지. 정말 마음이 아파요.”
법정에서 드러나는 지역색
정 판사에 따르면 법정에서도 지역색이 드러난다고 한다. 출신 지역에 따라 피고인들의 법정 태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경상도 출신은 비교적 합의가 잘 된다고 해요. 목소리가 커서 조정이 잘 안 될 것 같은데도 막상 합의에 들어가면 잘 된다고 합니다. 많은 판사가 ‘충청도 사람들은 말이 없으면서도 고집이 세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조정이나 화해가 잘 안 되는 편입니다. 열사의 고장다워요. 전라도 사람들은 관에 대한 경외심이 있다고 들었어요. 반면에 서울이나 수도권 사람들은 권리의식이 강해요. ‘내가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이 대단하다죠. 법정에서 소란 피우는 일이 빈번하고요. 또 공정한 재판인지를 엄청나게 따지고 판결에 대한 항의가 많은 편이라고 합니다.”
▼ 국민이 사법부를 불신하는 이유 중에는 들쑥날쑥한 양형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같은 범죄라도 재판부에 따라 형량이 다르더군요.
“편차가 있죠. 6개월은 물론이고 1년 이상 차이가 날 수도 있어요.”
법원은 양형정보 시스템, 판결문관리 시스템 등을 만들어 유사한 사안의 양형을 쉽게 참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 대법원 산하에 양형위원회를 두어 양형 편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범죄의 경중에 따라 43단계로 나누고, 피고인의 재범 여부에 따라 6단계로 나눠 총 258개의 형량표를 작성해 운용한다. 한국엔 아직 양형기준에 대한 특별한 지침이 없다.
▼ 형량이 판사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건가요.
“판사의 시각이 다를 수 있거든요. 판사는 법률, 헌법, 양심에 따라 판결하지만, 각자의 경험이라는 게 작용하죠.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고 느낀 것이 법적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 겁니다. 피해자는 물론이고 그 주변사람들에게까지 오랫동안 그 고통이 미치기 때문에 사기가 가장 나쁜 범죄라고 보는 분이 있는 반면, 절도를 가장 나쁜 범죄라고 여기는 분도 있어요. 절도는 곧장 강도로 돌변할 소지가 있는 범죄라는 거죠. 훔치다 들키면 칼을 들잖아요. 또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점을 감형요인으로 생각하는 분도 있고, 반대로 불리한 요인으로 생각하는 분도 있어요.”
“가장 나쁜 죄는 공무집행방해”
▼ 정 판사께서 가장 나쁘게 보는 범죄는 뭡니까.
“공무집행방해예요.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죠. 술 먹고 지구대에 가서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형사가 작성하던 조서를 빼앗아 찢지를 않나…. 요즘 공권력을 우습게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얼마 전 음주측정거부로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되자 무죄를 주장하며 항소한 사건을 다룬 적이 있어요. 피고인은 환경관련 단체에서 일한다는 50대 남자였는데, 원한을 가진 동네사람이 피고인이 술 먹는 걸 지켜보다가 운전대를 잡는 즉시 신고를 했더라고요. 경찰관이 음주측정을 하겠다니까 ‘안 마셨다’고 우기면서 거부했어요. 측정을 회피하고 제대로 불지 않았으면서 기계가 잘못됐다느니 하면서 갖은 트집을 잡았더라고요. 그런 태도는 법정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국가 공권력을 뭘로 아는지….”
정 판사는 “같은 범죄라고 해서 같은 형량이 나와야 하는 건 아니다”라면서 “재판부마다 형량이 다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 법관 형량이 더 세다”
“양형인자라고 합니다. 형을 정하는 데 고려할 요소죠. (피고인에게) 동종 전과가 있는지, 다른 범죄 전력이 있는지, 누범인지, 집행유예기간 중에 있는지, 아니면 집행유예기간이 지났더라도 그 범죄가 집행유예기간 중에 저질러진 것인지를 따지죠. 또 범행 동기나 목적, 수법, 연령, 직업, 가족환경, 재산 규모 등을 살펴보죠. 만약 수사과정이나 재판과정에 주위 사람들을 동원해 범행을 은폐하기 위한 시도를 했는지도 알아보고. 어떨 땐 양형인자를 컴퓨터에 넣어 돌려 답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형량을 정할 땐 늘 가슴이 묵직해요. 이전에 선고한 사건과 비교해 과연 이 정도의 형을 선고해야 할 죄인지를 고민하죠. 그러다 보니 형량이 낮아질 수밖에 없죠. 형량이 하향평준화하는 이유입니다.”
▼ 경상도 지역의 형량이 가장 세다고 들었어요.
“예전에는 대구·경북이 가장 셌죠. 대구 법원은 일제 강점기에 문을 열었어요. ‘다른 지역에서라면 집행유예지만 대구에선 실형’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서울·경기는 약한 편이에요. 대체로 지방으로 갈수록 셉니다. 경제력의 차이겠지요. 가령 사기 피해액이 1억원이라고 할 때 그 범죄가 미치는 영향이 서울과 지방에서 다른 거죠. 그래서 양형기준을 일률적으로 정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범죄자의 경력이 다르고 처한 환경이 다르고 겪어온 일이 다른 데다 법관의 경험, 가치관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비슷한 양형요소를 가진 사건의 경우 법관이 정하는 형량은 대체로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여성 법관이 남성 법관에 비해 형량이 세다고 하던데요.
“그런 경향이 있다고 들었어요. 경험의 차이랄까요. 여자 판사들 중에는 답답할 만큼 바른 생활을 하는 분이 많아요. 그런데 남자 법관들 중에는 대학 시절 파출소에 가서 행패 부려봤다는 분이 꽤 있어요. 술 먹는 사람이 술꾼 마음을 이해하듯이, 이런 분들은 술 먹고 사고 친 사건에 대해 관대하게 생각할 수도 있죠. ‘젊은 혈기에 실수한 것인데 몇 달씩 형을 살게 해야 하느냐’면서. 피고인들도 재판장이 여자면 ‘잘못 걸렸다’고 한답니다.”
▼ 정 판사님도 형이 센 편인가요.
“전 별로 세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또 모르죠. 판사의 형량에 대한 평가는 구치소나 교도소에서 하거든요. ‘어떤 법관은 어떤 죄에 관대하다더라’는 소문이 쫙 퍼지는 가봐요. 반성문을 받아 보면 알 수 있어요. 내가 여성 법관이라 그런지 생활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심정적인 면에 호소하는 거죠. ‘이혼한 후 혼자 노부모 봉양하고 애 키우며 먹고살기 힘들다’는 식입니다. 제게 고3 아들이 있는 걸 알았는지 ‘아들이 고3인데, 빨리 집에 갈 수 있도록 선처해달라’고 호소하기도 해요.”
▼ 우리나라는 항소율이 높은 편이지요.
“대법원에 올라가는 사건의 90%가 기각됩니다. 비용은 비용대로 많이 들고 재판에 지면 망하게 됩니다. 민사재판에선 화해와 조정을 많이 권하지만 마음이 각박해져서 그런지 끝까지 가보자는 식이에요.”
예전에는 항소부에 올라온 사건의 경우 1심 판결을 파기하고 형량을 깎아주는 사례가 허다했다. 하지만 요즘은 1심 법원이 내린 양형을 존중해주고 재판부 간 양형 편차를 줄이는 추세다.
“하고 싶은 말 다 하게 해요”
지난 3월, 부장판사와 배석판사 2명으로 구성된 전국 18개 지방법원 항소부가 판사 1명의 단독재판부가 한 1심 판결을 파기한 비율은 전년 대비 1.8% 낮아진 41.8%를 기록했다. 그에 따라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는 비율도 4% 정도 낮아졌다고 한다.
판사의 무대는 법정이다. 요즘 형사재판에선 공판중심주의가, 민사재판에서는 구술변론주의가 실현되고 있어 법정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예전에는 피의자 신문에서 수사 방향이 결정되고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가 공판에서 중요한 증거자료로 사용됐다면, 공판중심주의 법정에선 검사가 제출한 공소장만으로 심리재판이 진행된다. 아무리 수사가 투명하게 이뤄졌더라도 공개적이고 투명한 법정에서 사실판단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민사재판은 속도가 빨라졌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소장이 접수되는 순서대로 기일을 잡아 증거서류를 내도록 했는데, 요즘은 소장이 접수되면 서면공방부터 시작한다. 10차례 이상 법원에 출석하던 예전과 달리, 두세 차례 출석해 판결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몇 년 걸리던 민사소송이 2~3개월 만에 판결문을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빨라진 것이다.
“공판중심주의 이전의 법정에선 판사가 심리재판에서 읽어서는 안 되는, 증거능력이 없는 수사기록까지 읽고 들어갔어요. 선입관을 갖고 재판을 시작하는 거죠. 이젠 공소장만 들고 들어갑니다. 만약 피고인이 (공소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심리를 여러 번 해요. 법정에서 하고 싶은 말 다 하도록 해요. 법정 속기사가 피고인의 말을 다 받아 적습니다. 심지어는 A4 용지 3장까지 적도록 말하는 피고인도 있어요. 판결할 때는 양형사유에 대해서도 말해줍니다. 판결문에는 범죄사실, 증거의 요지, 적용되는 법령이 제시되는데, 왜 실형을 줄 수밖에 없는지, 왜 법정구속을 하는지 등 양형 이유를 담아 읽어주는 거죠. 민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준비서면으로 재판했는데 요즘은 양측을 다 나오게 해서 말로 해보라고 시켜요.”
정 판사에 따르면 변호사들은 아직 공판중심주의나 구술변론주의 재판에 익숙하지 않다.
“소송 당사자들은 말을 잘해요. 오히려 변호사들이 훈련이 안 돼 있어서 잘 못합니다. ‘준비서면에 다 적어놓았으니 보시면 됩니다’라고 해요. (준비서면은) 대부분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장이 작성하죠. 변호사가 사건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채 법정에 들어오는 거죠. 변호사도 스피치 훈련이 필요해요.”
‘괘씸죄’ 적용되면 형량 늘어나
미국 연방대법원에선 한 사건당 한 시간씩 변론을 진행한다. 원고대리인의 변론시간이 15분, 피고대리인이 15분 하는 식이다. 대법관이 원고대리인과 피고대리인에게 사건의 쟁점사항을 질문하는 시간이 따로 배정돼 있는데, 마치 구술시험 치르는 것 같다. 미국은 연방대법원에서 변론할 자격이 있는 변호사가 250명밖에 안 된다. 최고 자질을 갖춘 법률가만 입장하라는 얘기다.
▼ 그러잖아도 말 많은 법정이 더 시끄러워지겠네요.
“그렇죠. 어떨 땐 거짓말 경연장 같아요. 흥미진진하죠. 둘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건데, 제3자가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맞추어야 하는 게임인 셈이죠. 법정에선 본성이 다 보여요. 판사가 모를 줄 알고 허위진술을 사주하고 교묘하게 증거를 조작하는 사람이 참 많아요. 최소한의 양심마저 버리는 것 같아요.”
▼ 판사가 리드를 잘 해야겠군요.
“질문을 잘 해야 합니다. 사전에 충분히 공부하고 들어가야 해요.”
▼ 흔히 말하는 ‘괘씸죄’로 형량이 늘어나는 경우가 있습니까.
“그럼요. 주변 사람들 동원해 알리바이 조작하고 목격자 조작해보세요. 벌금으로 나갈 것도 실형을 받을 수 있어요. 최근 우리 재판부에서 이런 사건을 다뤘어요. 피고인이 경찰에서 자백했으면 연령이나 범죄경력 등을 고려해 단순 상해죄로 처벌받을 사건이었죠. 흉기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너무나 분명한 걸 부득부득 우기니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집단·흉기 등 상해)죄로 기소된 거예요. 수사기관에서도 피의자가 우기면 좋게 생각하지 않겠죠. 저희 재판부도 (선고 직전에) 이런저런 양형요소를 고려해 ‘법정에서 다시 물어봐서 돌로 때린 것을 시인하고 잘못했다고 하면 집행유예를 선고하자’고 합의했죠. 그런데 끝까지 시인하지 않고 억울하다고 우기더군요. 결국 징역 10월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죠. 법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보여서는 안 되죠. 법정에선 진실을 얘기할수록 유리합니다.”
▼ 수사기관에선 객관적 물증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는 데 대해 불만이 많던데요.
“법원의 증거가치 판단이 까다로워졌어요. 최근에도 증거가 없어 무죄로 판결한 사건이 있었어요. 솔직히 유죄라는 심증은 갔어요. 배석판사 중 한 분은 유죄의견을 내기도 했고요. 그런데 백에 하나 피고인이 범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무죄로 합의됐지요. 어쩔 수 없었어요.
절도 사건이었어요. 하루에 손님 하나 둘로 먹고사는 초라한 찻집에 손님이 왔어요. 주인은 이혼녀였고. 저녁 7시쯤 들어온 손님은 절도 전과가 많고 노래방 등쳐먹는 남자였죠. 노래방에 가서 도우미 불러 놀고 난 다음 도우미 불러준 것을 빌미로 노래방 주인을 협박하고 돈을 뜯는, 질이 안 좋은 사람이었어요. 자정까지 찻집 룸에서 술을 마셨는데, 술값이 10만원 나왔다고 하자 8만원밖에 없다면서 ‘근처 노래방에 가서 돈 빌려 오겠다’며 나가서는 못 빌리고 다시 들어왔대요. 이 남자가 출입구에 접한 1평 남짓한 온돌방 문턱에 걸터앉는 걸 본 주인이 문 밖에 나가 동네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남자가 후닥닥 나가더래요. 그런데 온돌방에 둔 지갑이 없어진 겁니다. 지갑에 10만원이 있었는데 닷새 후 화장실 청소하면서 지갑만 찾았어요. 이 남자가 신분을 알 수 있는 봉투를 놔두고 가는 바람에 신고가 됐죠. 정황상 이 남자가 범인임에 틀림없어요. 찻집에 온 사람이 없었고, 들어왔다 해도 출입문에 딸랑이가 달려 있으니 소리가 났을 테고, 또 찻집 안에서 화장실 왔다갔다할 수 있었던 사람이 이 남자밖에 없었다는 거죠. 오죽 답답했으면 저희 재판부가 찻집에 현장검증까지 갔겠습니까. 하지만 직접적 증거가 없어서 무죄로 선고했어요.”
경찰 최초 진술의 중요성
최근 검찰이 기소한 사건에 대한 법원의 무죄 선고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4~5년 전보다 2~3배 늘어 지난 한 해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사건은 4224건으로 전체 기소건의 0.21%였다.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사건은 452건으로 전체 항소심의 1.77%였다.
▼ 법원과 변호사 간의 커넥션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사법부 불신의 시초이기도 하고요.
“믿기 어렵겠지만 변호사는 판사 방에 올 수 없습니다. 전화야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기일 연기나 재판 절차에 관한 내용이지, 사건에 대해선 말도 못 꺼내요. 요즘이 어떤 세상입니까. 누가 판사한테 줄 대 이겼다면 가만있겠습니까. 질 건 지고, 이길 건 이깁니다. 이길 수 있는데 졌다면 증거가 부족했을 겁니다.”
▼ 법정에서 실체적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키워드는 무엇인가요.
“재판은 말 되는 소리와 말 안 되는 소리의 싸움이거든요. 말의 앞뒤를 따지다 보면 진실이 보여요. 거짓말을 하면 앞뒤가 안 맞잖아요.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하는 피고인도 판사가 갑작스럽게 질문하면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달라지지만, 표정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 판사들은 경찰에서 작성된 최초의 진술조서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건이란 게 수사가 진행되면서 전모가 드러나거든요. 경찰서에서 한 초기 진술에선 자신이 어떻게 말해야 유리한지 불리한지 몰라요. 오염되지 않은 신선한 진술이죠. 진술은 점점 진화해요. 수사를 받으면서 재구성하고, 주위 사람들 조언을 듣고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캐치하는 거죠.”
정 판사는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박철·옥소리 부부의 공방전을 지켜보니 진실과 먼 동문서답을 하고 있더라”고 지적했다.
“서로 본질에서 벗어난 엉뚱한 대답을 하잖아요. 옥소리씨는 ‘바람을 피웠다’ 또는 ‘안 피웠다’라고 대답하면 되는데, ‘10년간 살면서 잠자리를 10번 했다’고 딴소리를 했어요. 이에 대해 박철씨는 ‘부부생활을 소홀히 한 건 사실이다’ 또는 ‘사실무근이다’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의학적으로 별문제가 없다’라고 합니다. 서로 동문서답하는 거죠. 모두 초점을 흐리면서 대화의 핵심을 피하고 있어요. 법정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면 판사로부터 ‘정확하게 핵심을 얘기하라’고 지적받게 되죠.(웃음)”
정 판사의 남편은 계경문 한국외국어대 법대 교수다. 연수원 동기로 변호사 활동을 하다가 정 판사는 법관의 길을, 계 교수는 법대 교수의 길을 선택했다. 그녀는 세 아이의 엄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법관으로서 1인3역을 거뜬하게 소화할 수 있을까.
“저희 재판부는 일주일에 판결문을 30~40건 작성합니다. 한 달에 100건 이상 선고하지요. 한 건당 기록이 적게는 100페이지에서 많게는 수천 페이지입니다. 잠을 푹 잘 겨를이 없어요. 일주일에 평균 3~4일은 야근을 해야 합니다. 다행히 애들이 저를 따라 대전까지 내려와 있어요. KTX 덕분에 주중에도 남편이 내려오곤 합니다. 아이들 때문에 법원에서 5분밖에 안 되는 거리에 아파트를 얻었어요. (야근하는 날은) 6시에 퇴근해서 애들 밥 챙겨주고는 다시 법원에 와서 일해요. 주말에도 나와서 기록을 봐야 하고요. 돌아서면 기록 읽어야 하고, 돌아서면 판결문 써야 하는 게 판사들 생활입니다. 진득하게 책 한 권 못 읽는 사람이라면 사법연수원까지 오지도 못하겠지만, 와서도 적응할 수 없겠죠.”
“막달에 야근 빼주는 게 전부”
정 판사는 “여성 법관들이 초임 때 격무에 시달리다 보니 결혼을 기피하거나 늦추게 된다”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초임 시절에는 연애라고는 꿈도 못 꿔요. 배석판사로 일하면서 일주일에 두 번 재판합니다. 일반 공무원 생활과 비교하면 살인적 격무죠. 새벽 2시에 집에 가는 건 허다해요. 주말에도 나와서 다음 주 판결문을 써놓아야 해요. 우리나라 남자들, 대접 제대로 못 받으면 ‘모시고 산다’고 하잖아요. 초임 때 결혼하면 전업주부처럼 남편 넥타이 골라주고 속옷 챙겨줄 정신이 없어요. 남자 판사야 육아와 가사에서 자유롭지만, 여성 법관은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힘들어요. 여성 법관이 식탁에서 판결문 쓰는 건 일상생활입니다. 요즘은 집까지 법원 전송시스템이 연결돼 있어 식탁에서 판결문을 쓸 수 있거든요. 주로 새벽에 씁니다.”
▼ 임신한 판사는 형사 재판을 기피하겠네요.
“‘상관없다’는 분이 더 많아요. 임산부 판사에 대한 배려는 막달에 야근을 좀 빼주는 게 전부예요. 임산부 판사가 사람 죽이고 훔치고 사기 치는 사람을 만나는 형사재판을 하면 태교에 괜찮겠느냐고 걱정합니다만, 태교라는 게 나쁜 걸 보고도 좋게 마음을 먹으면 괜찮거든요.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봐요. 안타깝게도 유산을 하는 여성 법관이 많아요. 일이 너무 많은 거죠. 우리 신체에서 에너지를 가장 많이 쓰는 기관이 뇌잖아요. 멀쩡한 사람도 바짝 일하면 배고파요. 자궁으로 가야 할 피가 뇌로 다 몰려서 그런지, 유산율이 높은 편이에요. 임신이 안 되어 시험관아기 시술을 받는 분도 많고요.”
정 판사는 매년 늘어나는 여성 법관들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
“제발 여자인 척하지 말고 씩씩한 태도로 일하면 좋겠어요. 의사표명을 정확하게 하고. 선배한테 지적을 당하면 기분이야 좋지 않겠지만 ‘명심하겠습니다.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의사세계를 보세요. 얼마나 기강이 셉니까.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일인데다 재판처럼 2심, 3심이 없으니 더하겠죠. 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면 옳은 재판을 할 수 없어요. 요즘 판사 하려는 여성이 많은데, 공부 잘한다고 판사 잘하는 게 아니에요. 무엇보다도 건강해야 해요. 법원 업무라는 게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집중해서 읽어야 하고, 쉬지 않고 뇌를 움직여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읽어 핵심만 정리해 법률적 평가를 거쳐 결론을 내야 하는 정치(精緻)한 작업입니다.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면 에러가 날 수 있어요. 치밀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만 고집하거나 객관적이지 못하면 판사 될 자격이 없어요.”
“진실이란 천장에 손이 닿는 느낌”
그는 “법관에게는 수학적 사고가 절실히 요구된다”면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수학을 잘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법학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가 아니라 개념 법학이라고 해요. 시험은 케이스 중심이지만 법 이론을 공부해야 풀 수 있도록 되어 있죠. 실을 한 올 한 올 풀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사건을) 숨죽이고 자세히 보면 실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 알 수 있거든요. 모자이크 맞추는 작업이죠. 하나하나 증명해갈 때 수학적 사고가 없으면 힘들어요.”
정 판사는 연봉 2억원이던 변호사 생활을 접고, 박봉의 법관 생활을 선택했다.
“변호사 시절 ‘판사들, 참 정확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신(神) 다음의 부류가 판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존경심을 가졌어요. 대부분의 판결에 수긍이 가더군요. 변호사는 ‘나쁜 사람’도 변호해야 하잖아요. 법을 이용해 사람의 도리를 벗어나려는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변호하게 되죠. 판사는 다 알더라고요. 패소를 당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판사들, 귀신이다’ 싶었지요. 제가 판사가 되어 기록을 읽어보니 알 것 같아요. 진실이란 천장에 손이 닿는 느낌이랄까요. 판사가 된 걸 후회하지 않아요. 제가 지금 월 500만원대 봉급생활자거든요. 맞벌이라 괜찮아요. 애들도 엄마가 판사란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요.”
정 판사는 딸 부잣집 막내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12녀 중 12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58세였다. 딸을 무릎에 앉혀 가르친 세월이라야 고작 5년 남짓. 그녀의 뇌리 속에는 법보다 더 무서운 진리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양반이고, 저렇게 하면 상놈”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이다. 형사처벌보다 더 무섭던 아버지의 훈계가 삶의 지침이 됐다고 한다.
“동네 어른이 없어졌어요. 술 한잔 먹고 화해하고 끝낼 일이 법정까지 오는 건 동네에서 자정(自淨) 기능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도시화 익명화하면서 모든 걸 법으로 해결하려 해요. 타협이 안 되는 사회가 된 거죠. 어른이 없는 건 선비정신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양반을 타파하려 했던 건 양반의 위선을 비판해서지, 양반정신을 버리자는 뜻은 아니었을 겁니다. 또 위선을 부린다는 게 뭡니까. 그만큼 체면을 중시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즘은 체면이 없는 것 같아요. 하긴 우리 사회가 어른 얘기를 들을 분위기입니까. 괜히 어른 행세하다 ‘보수꼴통’으로 낙인찍히면 큰일 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