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호

망주봉에서 전설의 고려왕릉을 찾다

王氣 서린 권력의 섬 선유도

  • 안영배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 기획위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입력2014-06-20 13: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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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의 지도자를 기다린다는 전설을 지닌 선유도 망주봉은 권력의 에너지가 넘쳐나는 길지(吉地)다. 이곳에서 조선 고지도에 명기된 고려왕릉을 ‘풍수고고학’으로 찾아보았다.
    망주봉에서 전설의 고려왕릉을 찾다

    망주봉 정면과 고려시대 추정 건물 터(아래).

    전북 군산시의 야미도리 선착장에서 출발한 유람선은 5월의 바닷바람을 가르며 목적지인 고군산군도의 선유도(仙遊島)로 달려간다. 군산항에서 서쪽으로 45km 지점, 63개의 섬(유인도 16개, 무인도 47개)이 군락을 이룬 고군산군도의 중심지가 선유도다. 고려시대 왕이 임시로 머물던 행궁(行宮)과 관아, 수군(水軍) 진영이 있었던 곳이자 중국과의 해상교통로에서 핵심 중계지 구실을 했던 섬이다. 조선시대에 이곳의 수군 진영이 현재의 군산으로 이전하면서 이름을 내어주고, 원래의 군산도는 접두어 옛 고(古) 자가 붙어 고군산이 됐다고 한다.

    유람선은 선착장을 벗어나는가 싶더니 곧장 엔진 소리를 드높이며 속력을 낸다. 저 멀리 왼쪽으로 새만금방조제가 고군산군도의 신시도와 선처럼 연결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군산시와 고군산군도, 부안군 변산을 연결하는 길이 33.9km의 세계 최장 방조제다. 머잖아 새만금방조제의 육지 쪽 바다(401㎢)는 모두 뭍으로 변하게 된다. 서울시 면적의 3분의 2 크기에 달하는 육지가 새로 생겨나는 것이다.

    유람선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평균 수심 34m의 바다가 육지로 된다는 사실을 옛사람들은 이미 알고나 있었던 걸까. “수저(水低) 30장(丈)이요, 지고(地高) 30장(丈)이라”는 예언이 전라도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왔다. 군산과 변산의 앞바다가 30장(약 90m) 깊이로 물이 빠지고 해저의 땅이 30장 위로 솟구친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1754~1825)의 예언이다. 전라북도 사람들은 새만금방조제가 놓인 변산 앞바다가 육지로 변하게 됨으로써 이서구의 예언이 들어맞았다고 놀라워들 한다. 이서구는 유가(儒家) 계열의 도학자(道學者)로 천문과 지리에 능통했다고 역사적으로 평가받던 인물이니 그의 예언을 마냥 허황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서구만이 아니다. 변산의 앞바다는 예부터 ‘칠산 바다’로 불렸고, 칠산의 섬은 뭍으로 변하게 되고 여기서 범씨(范氏)의 천년왕국이 세워진다는 예언 역시 도참서인 ‘정감록’ 등을 통해 조선 백성 사이에 광범위하게 유포됐다. 근래에도 주역에 해박했던 탄허 스님(1913~1983)이 서해안이 융기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천년왕국’ 전설 지닌 섬



    필자는 지금 이 모든 예언의 중심지에 선 선유도를 찾아간다. 과연 이 조그만 섬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만한 강력한 권력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일까.

    더불어 조선 숙종 8년(1682)에 제작된 지도 ‘동여비고(東輿備攷)’에서 ‘군산도 왕릉’이라고 표기된 고려 왕릉을 ‘풍수고고학’으로 찾아보자는 속셈도 있다. 삼국시대 이후 우리나라 역대 왕조는 왕릉이나 궁궐을 조성할 때 반드시 풍수 개념을 도입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망실된 분묘라고 해도 그 시대에 통용된 풍수 논리 관점에서 찾아보면 그 입지를 밝혀낼 수 있다. 필자는 이번 탐사에서 지한 풍수고고학연구소장과 함께 왕릉을 발굴해보기로 했다.

    유람선은 1시간 남짓 걸려 선유도 선유3구 선착장에 우리 일행을 내려놨다. 2개의 암벽 봉우리가 불끈 솟은 망주봉(152m) 코밑이다. 누군가 선유도를 중심으로 한 고군산군도 일대를 연화부수(蓮花浮水), 즉 물 위에 떠 있는 연꽃 형상으로 묘사했던가. 실제 선유도 망주봉은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 신시도 등 주위 여러 섬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에워싼 모습이다. 산의 모양새와 지세(地勢) 중심으로 살피는 형세파 풍수의 시각에서 보자면 마치 연꽃처럼 펼쳐진 형국이며, 망주봉은 연꽃의 꽃술쯤에 해당할 것이다. 망주봉 일대가 지기(地氣)의 핵심처이자 명당이라는 뜻이다.

    위대한 지도자 기다리는 망주봉

    선유도의 뛰어난 지세는 외국인 눈에도 신선하게 비쳤던 듯하다. 고려 인종 때인 1123년, 송의 사신으로 고려를 찾은 서긍은 ‘고려도경’이라는 저서에서 선유도를 상세히 묘사했다.

    “아침 밀물을 타고 운항하여 진각(辰刻·오전 7~9시)에 군산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접반(사신을 맞이하는 고려 측 인사, 당시 김부식 일행이 왕의 명령을 받아 송의 사신단을 맞이했음-필자 주)이 채색 배를 보내 정사와 부사에게 군산정(群山亭)으로 올라와 만나주기를 청했다. 그 정자는 바닷가에 있고 뒤에는 두 봉우리가 받쳐주고 있는데, 그 두 봉우리는 우뚝 서 있고 높은 절벽을 이루어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다. 문 밖에는 관가 소유의 건물 10여 채가 있고, 서쪽의 가까운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또 서쪽에 숭산행궁(崧山行宮)이 있고 좌우 전후에는 민가 10여 호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900년 전 서긍이 묘사한 두 봉우리는 현재 망주봉의 모습 그대로다. 서긍이 배에서 내렸던 곳은 필자가 서 있는 선유3구 선착장 부근이었을 것이다. 함께 유람선을 타고 온 선유도 관광객들은 두 개의 암봉(巖峰)이 절벽처럼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진안 마이산의 쌍봉(雙峰)을 빼어다놓은 듯이 닮았다고들 말했다. 또 이곳에서 만난 마을 주민 윤연수 씨는 “서울 수방사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망주봉의 두 봉우리가 서울의 인왕산과 북악산을 너무나 닮아 놀라웠고 덕분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선유도의 망주봉이 조선 건국의 창업 염원이 담긴 마이산이나 조선 한양의 주산인 북악산 일대에 비유돼 표현된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 사람은 알게 모르게 산 기운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망주봉에는 천년 도읍을 건설할 왕을 기다린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김중규 계장은 군산의 역사와 전설을 채록한 ‘군산역사이야기’에서 “선유도 망주봉은 천년 도읍을 이루기 위해 왕이 되실 분이 북쪽에서 선유도로 온다는 말에 젊은 부부가 나란히 서서 북쪽 방향을 바라보며 기다리다 지쳐 굳어져서 만들어졌다”는 전설을 수록했다. 즉, 망주봉은 위대한 지도자를 기다리던 당시 민중의 소망이 깃든 곳이라는 뜻이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선유도 일대가 뭍으로 변한 뒤 망주봉을 중심으로 천년왕국의 궁궐이 들어선다는 ‘정감록’의 예언이 이곳 사람들에겐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새 궁궐의 서문(西門)은 관리도 쇠코바우가 되고, 북문(北門)은 방축도 구녕바위가, 동문(東門)은 선유도 북쪽 나매기(남악리)의 금도치굴이, 남문(南門)은 신시도의 구녕바위가 된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풍수적으로 살펴봐도 망주봉을 중심으로 이 일대는 원형으로 거대한 에너지장(場)이 펼쳐져 있다. 망주봉 아래에서 불거져 나오는 지기(地氣)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기(天氣)와 교합하고, 거기에 바다 쪽에서 온 수정(水精)의 기운이 가세해 엄청난 토션 필드(Torsion Field·에너지가 원형으로 회전하는 형상)를 형성하는 국세다. 특히 천기의 경우 오행으로 금(金)의 기운이 굳세 강한 권력의지를 북돋우는 기상이다. 그 기운이 너무 강해 일반인이 거주하기엔 부담스러울 정도인데, 풍수적 기운으로 치자면 능히 한 나라를 통치할 만하다.

    고려 오룡묘와 숭산행궁

    필자 일행은 망주봉을 바라보면서 서긍이 발길을 옮겨가며 묘사한 대로 움직여보았다. 바닷가의 군산정 및 10여 채의 관아(현재 망실됨)가 있었던 곳으로 유추되는 지점을 지나 서쪽의 가까운 산기슭에 오르니 진짜로 오룡묘(五龍廟·군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9호)가 존재한다. 서긍의 ‘고려도경’은 오룡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군산도의 객관(客館) 서쪽 한 봉우리에 있다. 옛날에는 몇 걸음 뒤로 작은 집이 있었다. 지금은 홀로 두 기둥이 있는 한 채의 집이 있다. 정면으로 벽이 서 있고 거기에 오신상(五神像)이 그려져 있는데, 뱃사람들은 그것을 퍽 엄숙하게 제사한다. 또 서남쪽 큰 수풀 가운데 작은 사당이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숭산신(崧山神)의 별묘(別廟)라 하였다.”

    서긍이 방문할 당시엔 오룡묘가 한 채만 남아 있다고 했는데, 현재의 오룡묘는 두 채의 당집이 앞뒤로 서 있는 형태다. 오룡묘를 소개하는 입간판엔 “이곳에는 두 채의 작은 당집이 지붕을 맞대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섬 주민들은 앞의 당집을 오룡묘 혹은 아랫당이라고 부르고 뒤쪽의 당집을 윗당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섯 용(신)의 존재를 이곳 사람들은 최씨부인, 명두아씨, 수문장, 성주, 오구유왕으로 불렀다고 한다. 앞의 토속신은 해안가 무속신앙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름이지만 ‘오구유왕’만은 전혀 낯선 존재다.

    서긍은 또한 서남쪽 작은 수풀에 숭산신을 모신 사당인 ‘별묘’가 있다고 했다. 하필이면 고려 수도 개경의 주산인 숭산(송악산)의 이름을 그대로 따오고 숭산의 산신(山神)을 이곳으로 모신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고려 왕실에서 이 망주봉 일대를 숭산에 비유할 정도로 매우 신성하게 여겼고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는 숭산행궁의 존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얼마 전 군산대박물관은 행궁 유적으로 추정되는 터에서 다량의 최고급 청자류 및 기와류 등을 수습하기도 했다. 서긍의 묘사대로 이곳이 왕이 임시로 머물던 행궁이었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임금의 행차엔 반대파들의 암살 위험을 무릅써야 하며 나들이에 엄청난 규모의 거금 또한 들게 마련이다. 하물며 육지가 아닌 해로로 배를 타는 것은 침몰 사고와 같은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도 감수해야 한다. 이 모든 위험요소를 감안하면서까지 고려의 왕들은 이곳을 방문했던 것이다.

    그런데 숭산행궁은 일반적으로 왕들이 피서나 휴양차 들렀던 곳이라 보기엔 그 규모가 협소해 보였다. 오히려 이곳에 묻힌 선대 왕족에게 제사를 올리던 제실(祭室)의 성격이 더 짙어 보였다. 필자 일행은 이곳에서 다량의 청자편과 다기류를 찾아내기도 했다. 제사를 수행하는 데 사용했던 그릇들로 추정된다.

    숭산행궁이 왕이 머물며 제사를 올리던 제실이라고 할 경우 이곳에 숭산신을 모시는 사당의 존재 이유 또한 분명해진다. 선유도 망주봉은 한 나라의 국운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의 에너지장이 펼쳐져 있고, 그것이 고려의 힘이 돼줄 것이라 믿었던 왕실은 이곳에 숭산의 산신까지 ‘모셔와’ 지키게 할 정도로 중요시한 것이다.

    고려의 왕실 풍수

    고려 왕실이 풍수설에 전적으로 의지했다는 것은 서긍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고려는 본디 글을 알아 도리에 밝으나 음양설(陰陽說)에 구애되어 꺼리기 때문에, 그들이 나라를 세움에는 반드시 그 형세를 관찰하여 장구한 계책을 세울 수 있는 곳이라야 자리 잡는다”고 씌어 있다. 또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을 믿어 특정한 땅의 지기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왕성하기도 하고 쇠락하기도 하기 때문에 왕성한 지기를 따라 움직여야 권력이 유지된다고 봤던 것이다. 실제로 고려 숙종과 문종은 이를 수용해 남경(지금의 서울)과 개경 백마산에 새로운 궁궐을 짓기도 했다. 선유도 망주봉 역시 지기쇠왕설에 근거해 새로운 에너지를 얻으려는 곳 중 하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섬 문화를 연구하는 변남주 목포대 교수는 선유도 일대를 답사한 결과 “고려 정부가 유사시를 대비해 선유도 해상왕국을 두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선유도 일대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읽어낸 이상 조선 고지도에 표기된 ‘고려왕릉’을 본격적으로 찾아보기로 했다. 왕릉에 대해서는 군산대박물관 측이 1990년대 중반부터 문화재 지표조사를 꾸준히 해오고 있었으나 지금까지 그 흔적을 찾지 못한 상태다.

    곽장근 군산대 사학과 교수는 군산도 중앙부에 자리한 섬이 선유도이며, 현재까지 지표조사를 통해 군산도 가운데 문화유적 밀집도가 가장 높은 선유도에 왕릉이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왕릉을 찾기 위해선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왕릉 풍수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 필자의 전공이 고려와 조선 전기의 이론 풍수인데, 고려왕릉은 형세파 풍수이론으로 평지가 아닌 양지바른 산기슭에 주로 조성했다. 이러한 풍수이론으로 접근해 망주봉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그 결과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망주봉의 두 봉우리 가운데로 마치 말안장처럼 생긴 둔덕 아래가 지목됐다. 풍수지리학으로 길지에 해당하며 망주봉 일대 에너지장의 중심부이기도 했다.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져 다음 날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선유도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아침, 원거리에서 다시 확인해볼 겸 선유3구 선착장에서 전날 지목한 위치를 가늠해봤다.

    수묵화 ‘독화로사도’에 담긴 비밀

    망주봉에서 전설의 고려왕릉을 찾다

    선유도 망주봉의 권력 기운이 서린 고려시대의 수묵화 ‘독화로사도’.

    그런데 이곳에서 바라다보이는 망주봉 일대가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엔 유람선이 오후 늦게 출항할 정도로 선유도 일대에 안개가 자욱해 선명치 않았는데, 날씨가 화창하게 갠 이날엔 망주봉 풍경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앗! ‘독화로사도(獨畵鷺圖)’다. 필자는 순간적으로 이곳이 고려시대의 유일한 수묵화로 최근 공개된 ‘독화로사도’의 배경임을 알아차렸다. 국내 미술품 감정계의 권위자 이동천 박사가 지난해 언론에 소개한 바로 그 그림이 이곳 선유도 망주봉 일대를 묘사했던 것이다. 고려시대 불화(佛畵)를 제외하고, 이 세상에 비단이나 종이에 그린 고려 그림이 여태껏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독화로사도의 발굴 공개는 당시 언론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필자는 휴대전화로 이동천 박사를 찾아 독화로사도 사진을 e메일로 전송해달라고 요청했다. 불과 몇 분 만에 ‘독화로사도’가 휴대전화 화면에 떴다. 이를 확대해 필자가 선 지점에서 비교해보았다. 똑같았다. 망주봉의 불끈 솟은 두 봉우리 하며, 저 멀리 보이는 두 개의 섬이며, 망실된 군산정의 위치도 그림 속에서는 분명히 묘사돼 있었다. 게다가 서긍이 묘사한 고려 민가의 가옥도 그림에서는 사진을 찍어놓은 듯이 새겨져 있는 것 아닌가!

    “백성은 열두어 집씩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고… 백성의 집은 지형과 높낮이가 벌집이나 개미굴 모양이었다. 띠를 잘라 지붕을 엮어 겨우 비바람을 가리는데, 그 크기는 서까래 두 개를 넘지 못했다.”

    바로 이런 모양새의 민가들이 ‘독화로사도’에 그대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동천 박사는 “독화로사도는 화가가 바다에서 섬 쪽을 바라보는 구도로 그린 것이며, 이러한 형태의 그림은 우리나라 조선에서도 중국의 역대 어느 왕조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독특한 그림”이라면서 “해양국가인 고려의 체취가 묻어 있는 그림”이라고 평가했다.

    아무튼 ‘독화로사도’는 고려 관아와 군산정, 그리고 숭산행궁의 위치를 찾는 데도 매우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가 될 수 있다. 사실 서긍이 묘사한 군산정 위치에 대해선 한국과 일본의 학자마다 의견이 엇갈려 있던 상태인데, 군산정의 위치가 그림에 묘사됨으로써 숭산행궁의 추정 위치 또한 보다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고려왕릉 추정 장소 찾아내다

    그림 감상을 뒤로하고 동행한 지한 풍수고고학연구소장과 현장을 찾아갔다. 이 일대를 몇 차례 확인한 결과 망주봉 산기슭에서 왕릉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했다. 무덤 자리는 봉분이 이미 무너져내려 평지처럼 변해 있고, 주위는 잡초만 우거져 아무런 표지가 없기 때문에 일반인은 이곳이 무덤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누군가가 이미 이곳을 파헤쳤던 흔적이 곳곳에 드러났다. 선유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진흙 황토와 석회(백회) 덩어리가 주변에 산재했고, 나중에 파헤친 무덤을 흙으로 듬성듬성 덮어놓은 듯 보였다. 지상에서 20~30cm 깊이까지는 이 섬의 토양 색깔과 비슷한 지층을 형성하고 있는데, 더 밑으로는 황토와 석회 성분이 드러났다. 지한 소장은 “이 흙은 생토(生土)가 아닌 사토(死土)이며 시신을 매장한 뒤 덮은 흙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지상에서 1m 남짓 계속 이러한 석회 덩어리와 황토가 뒤섞여 있는가 싶더니 돌처럼 굳어버린 석회층이 나타났다. 너무 굳어진 석회층은 삽 따위의 도구로는 파헤칠 수 없을 것 같았다.

    망주봉에서 전설의 고려왕릉을 찾다

    숭산행궁 추정 터(위)와 오룡묘.

    아마도 이곳을 파헤친 누군가가 딱딱한 석회층이 나타나자 도굴을 멈춘 듯하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석회층이 나타나면 최소 30cm~1m 남짓한 두께의 석회 덩어리가 시신을 안치한 석관(石棺)을 보호하고 있기가 십상이다. 석회층은 도굴 방지와 함께 나무뿌리, 벌레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려 이후 무덤 조성에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수법이다.

    석회층이 배치된 곳을 중심으로 패철을 놓아보니 이상한 좌향(坐向)을 취한 점도 눈에 띄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다리는 남쪽으로 향하는 임좌병향(壬坐丙向)의 좌향을 취한 것으로 추정됐다. 이 경우 바다 쪽인 북쪽을 등지고 높은 산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는 이상한 모양새가 된다. 일반 풍수론으로 볼 때 주변 산세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 좌향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 고려왕실인 왕씨(王氏) 성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고려는 중국 송나라 때 유행한 오음성리설(五音姓利說)을 무덤 좌향법에 응용했다. 이에 의하면 고려 왕은 성이 왕씨(王氏)로서 오음(궁, 상, 각, 치, 음) 중 상음(商音)에 해당하며 상음에 해당하는 성씨는 임좌병향(壬坐丙向)의 좌향에다, 무덤에서 바라보는 안산(案山)은 사오(巳午) 방위에 있어야 하며, 물이 빠져나오는 수구(水口)는 진사(辰巳) 방위에 있어야 그 묘가 크게 이롭다고 본다. 이를 상음대리향(商音大利向)이라 한다. 현재 북한 땅에 있는 고려 왕릉들이 거의 모두 임좌병향, 즉 북쪽에 머리를 두고 남쪽을 바라보는 형태로 배치돼 있는 것도 이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반면 송나라의 왕들은 성이 조씨(趙氏)로 각음(角音)에 해당하는데, 각음의 경우 머리를 남쪽으로 두고 북쪽을 바라보는 형태가 가장 길하다고 해서 왕릉도 그와 같이 배치돼 있다. 송나라 효종의 경우 오음성리설로 길한 묏자리를 찾지 못해 수년간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자 주희 같은 성리학자가 이기파 풍수이론인 오음성리설을 허황된 술수라고 맹비난할 정도였다.

    아무튼 필자 일행은 이 고분은 도굴이 되지 않은 처녀분이고, 강한 권력 에너지장의 핵심지에 자리한 명당 터라는 점과 이 무덤의 주인공은 왕씨 성을 지닌 고려 왕족일 것이라는 잠정 결론을 냈다.

    정확한 지점은 관계당국이 공식 발굴 조사에 들어갈 때까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필자는 이 무덤의 반경 10m 이내에 묘지석(墓誌石)도 함께 묻혀 있을 것으로 보아, 발굴에 들어갈 경우 부장자의 신분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선유도에 왕릉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비단 조선의 고지도에만 등장하지 않는다. 군산도 왕릉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망경현 산천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군산도는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둘레가 60리다. 벼랑에 배를 감출만한 곳이 있어서 모든 조운(漕運)하는 자는 여기에서 순풍을 기다린다. 섬 가운데 마치 임금의 왕릉 같은 큰 묘가 있었는데, 근세에 이웃 고을 수령이 그 묘를 파내어 금은기명(金銀器皿)을 많이 얻었는데 사람들에게 고발되어 도망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16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왕릉으로 추정되는 대형 무덤이 남아 있었고 도굴까지 당한 바였다. 게다가 1980년대까지 이 일대가 도굴을 당한 바 있다는 선유도 주민들의 제보를 참고해보면, 선유도 일대가 단지 왕족 한 사람만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신들의 섬, 선유도

    실제로 필자 일행은 풍수적으로 망주봉의 핵심처에서 왕릉으로 추정되는 처녀분을 찾았을 뿐 아니라, 그 인근의 다른 지점에서도 무덤으로 유추되는 곳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망주봉 일대에 고려 왕실과 관계 있는 사람들이 묻힌 고분군이 형성됐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점이다. 조선 고지도에서 명기한 ‘왕릉’이 한 기의 무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무덤군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뜻인 것이다. 이렇게 볼 경우 고려의 왕들이 이곳에 행궁을 설치함으로써 주기적으로 방문해 제사를 지냈을 것이라는 추론 역시 합당해진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필자 일행은 산에서 내려왔다. 저 멀리 쇠백로 한 마리가 공중에서 우리 쪽으로 날아오는가 싶더니 방향을 바꿔 사라졌다. ‘독화로사도’에 그려진 바로 그 쇠백로는 상상의 동물이 아니라 이 섬에 사는 존재였던 것이다.

    ‘독화로사도’에서 그림의 주인공은 하단에 묘사된 한 마리 쇠백로다. 화가는 쇠백로의 시각에서 그림 중앙의 망주봉을 중심 포인트로 잡고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그 포인트는 필자 일행이 찾아낸 ‘고려왕릉’ 추정 장소의 지점이기도 했다.

    그림에 취한다는 말이 사실일까. ‘독화로사도’를 살펴볼수록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필자는 순간 놀랍게도 그림으로 그려진 망주봉이 힘차게 뿜어내는 권력 기운을 느꼈다. 화가는 망주봉의 비밀을 아는 구매자의 요구에 따라 망주봉의 권력 기운을 그림 속에 담았을 것이다.

    땅에서 느껴지는 풍수적 기운이 그림으로도 느껴진다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다. 그림을 배치함으로써 필요한 기운을 보강한다는 논리로 시중에서 유행하는 ‘풍수 인테리어’가 현대인에겐 나름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유도 풍수 기행에서 뜻하지 않은 ‘선물’을 얻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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