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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國志 兵法 ①

춘추전국의 인간관계와 전략전술

부패·내분, 민심 무시한 수도이전으로 몰락한 周왕조

춘추전국의 인간관계와 전략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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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중국의 대변혁기였던 춘추전국시대는 혼란과 불안의 시대, 그야말로 난세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상당수 지식인도 어지러운 세상사를 개탄하며 춘추전국시대를 떠올린다. 난세를 헤쳐나간 중국의 인학(人學) 고전 ‘열국지’를 오늘의 시각으로 다시 읽으며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이 시대, 가슴에 새길 교훈을 찾아본다. [편집자]
춘추전국의 인간관계와 전략전술
혼란과불안의 시대를 난세(亂世)라고 한다. 중국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가 대표적이다. 역사적으로는 중국 고대사의 대변혁기에 해당하는 약 500년간의 난세를 가리킨다(B.C. 770~221).

오늘날 한국에서도 일부 지식인들은 세상사의 어지러운 현실을 개탄하면서 자주 전국시대를 거론한다. 또 언론사들은 ‘춘추필법(春秋筆法)’을 표방하는데, 이는 나라의 정통성을 수호하면서 대의명분을 밝히고 시비와 선악을 가려나가겠다는 자세의 다짐인 것 같다. 나아가 일반 서민들은 적응해야 할 객관적 정세의 사태발전에 대한 판단이 매우 어렵다는 데서, 가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고 푸념한다. 이른바 ‘불확실성의 시대(Age of Uncertainty)’로 일컬어지는 난세의 답답한 분위기를 적확하게 묘사한 ‘민중의 예술적 표현’이라 할 만하다. ‘uncertainty’는 불안과 불신 그리고 인생의 허무 등 함축적 의미를 지닌 단어다.

난세의 특징은 혼란과 불안의 소용돌이, 즉 위기의 연속이다. 그러니 기성의 권위와 질서, 도덕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처음엔 명분과 체면을 고려하지만, 나중엔 이나마 돌볼 겨를이 없어진다. 살아남기 위한 각박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곧 ‘춘추’가 ‘전국’으로 이행하는 셈이다.

원래 춘추란 ‘봄’과 ‘가을’의 합성어로, 시간의 경과, 계절의 변화, 시대의 변천 등을 뜻했다.

춘추는 또한 특정한 역사책을 지칭한다. 즉 공자가 편집·수정했다는 노(魯)나라의 국사책이라고 오랫동안 인식돼왔고, 한국의 유학자들도 그렇게 믿어왔다. 이 책은 용어 선택 하나에도 철저하게 시비를 가렸다. ‘춘추필법’이란 성어(成語)가 여기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중국 역사학자(대만해협의 양안에 걸쳐) 가운데 이를 공자의 집필이라고 고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애독서였다고 한다.

시대 변천의 착잡한 전주곡

역사적으로 춘추시대는 주(周) 왕조의 평왕(平王)이 수도를 섬서성에서 하남성으로 옮긴 소위 ‘동천(東遷)’ 이후, 국세(國勢)가 급전직하로 추락해 멸망으로 치닫게 된 시기를 말한다.

이어진 전국시대는, 한족(漢族) 사회에서 구심점이 없어진 후 약육강식이 벌어지고 그것이 7대 강국간의 경쟁적 상극(相剋)으로 정리됐다가 끝내 진(秦)왕조의 시황제(始皇帝)에 의해 이른바 ‘천하통일’이 달성되기까지 피비린내 나는 전쟁시기를 가리킨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인권이 크게 유린당해 인명이 파리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시대는 한족의 정신문명이 훌륭하게 다져진 시기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공자와 맹자, 노자, 장자, 손자, 오자, 한비자 등이 모두 이 시대 사람이다. 그후 각 시대에 출현한 것은 이들 사상의 계승 또는 변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동시에 과학기술 분야의 발명·발견도 눈부셨다. 광석에서 쇠붙이를 골라내는 야금술과 철제공구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도 춘추시대 초기의 일이다.

그러한 발전의 비결은 부단한 전란의 와중에서도 다양한 경쟁 주체가 존재했으며, 그들간에 능력 본위로 인재를 모으려는 경쟁의식과 시장경제적 사고활동이 가동한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는 개인미신 독재체제가 ‘가문 조작’으로 세습전제를 일삼고, ‘계급투쟁’을 표방해 노동귀족이 횡행하는 한편에 수백만이 굶어죽었으나 단 한 사람의 국제적 학자도 나오지 못한 북한의 사례와는 판이하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에 역사적 행동단위였던 제후의 나라들은 흔히 ‘동주열국(東周列國)’이라 통칭된다. 이러한 명칭은 주 왕조가 비록 동쪽으로 천도한 후 멸망했으나, 유교적 정통성의 표식인 종주권의 구심점다운 지위를 보유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다지 설득력 있는 칭호로 여겨지지 않는다.

한편으론 역사소설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의 성립 경위를 보면, 원래 명(明)나라 사람 여소어(余邵魚)가 역사책에 민간설화를 섞어서 ‘열국지전(列國志傳)’을 썼고, 그것을 명말(明末)의 풍몽룡(馮夢龍)이 정정해 ‘신열국지’로 고쳤으며, 청(淸)나라 때의 채원방(蔡元放)이 손질해 ‘동주열국지’로 펴냈다고 한다.

필자는 그러한 문학작품의 묘사를 참고하지만, 난세의 처세술과 전략·전술의 논거로는 정사(正史)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중시했다. 아울러 현대의 관련 연구를 섭렵하고자 노력했으나 한계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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