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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가고 그림이 뜬다

디카족, 뽀샵족의 세상 바꾸기

  • 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언어는 가고 그림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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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이 말을 한다.’ 이 정도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각 이미지로 얘기를 나눈다’는 건 어떤가. 심지어 공적인 대화의 수단으로도 이미지를 활용한다면?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다. 젊은이들이 문자언어 대신 시각 이미지를 떡 주무르듯 가공해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삼는 2003년 대한민국, 디지털카메라 100만대 시대의 새로운 ‘언어진화’를 따라가보자.
언어는 가고 그림이 뜬다

그림 1. 임대료가 밀린 ‘불쌍한 은행’
그림 2. 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을 터는 모습
그림 3. 문제는 돈. 아껴쓰라는 어머니의 충고가 담긴 오천원짜리 지폐
그림 4. 손으로 그린 만원짜리 지폐
그림 5. 세종대왕 대신 탤런트 신구씨의 얼굴을 합성한 만원짜리 지폐

‘이 사진 보시오. 불쌍한 은행이오.’

1월 말의 어느날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는 강신우(35)씨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들어가본 대학 동아리 후배들의 인터넷 게시판에서 뜬금 없는 게시물 한 줄을 발견했다. 얼굴은 가물가물하지만 황당하면서도 재미있는 게시물로 즐거움을 주던 98학번 후배의 글이었다. 무슨 얘기일까. 호기심이 동한 강씨가 클릭을 하자 의 사진이 떠올랐다.

지나치다 찍은 것이 분명한 사진 한 장. 그러나 효과는 백마디 말보다 강력했다. 눈물이 나도록 웃어제낀 강씨는 사진을 다운 받아 회사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 바쁜 오후를 보낸 강씨가 퇴근 무렵 다시 들어가 본 사이트에는 아니나다를까, 다른 후배들의 댓글 서너 개가 올라와 있었다. 말이 댓글이지 ‘글’이라고는 제목 한 줄뿐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 갖고 무얼 그러시오? 실제로 은행이 털리는 장면을 보여드리겠소.’

은행을 터는 장면이라…. 클릭해 들어가본 첫 번째 댓글에는 정말 ‘은행’을 터는 사진(그림 2)이 올라와 있었다. 그 밑에 줄줄이 달린 댓글 역시 하나같이 포복절도할 사진들이었다.

‘그 놈의 돈이 원수요. 그러길래 일찍이 우리 어머니께서 돈을 아껴쓰라 하신 것 아니겠소.’ (그림 3)

‘조금 더 노력하시오. 아직 력이 부족한 듯하오.’ (그림 4)

‘그 세종대왕 역시 완전히 득를 하지 못하였구려. 여기 진짜가 있소.’ (그림 5)

묘하기 이를 데 없는 ‘하오’체의 글투, ‘도력(道力)’ ‘득도(得道)’를 뜻한다는 ‘력’ ‘득’라는 단어가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몇 달 전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올릴 때면 후배들이 어김없이 사용하는 스타일이어서 영 낯선 것도 아니었다. 한번도 들어가본 일은 없지만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재미있는 사진들을 올리는 ‘디시인사이드(www.dcinside.com)’라는 사이트에서 사용하는 문체와 은어라는 것쯤은 신문을 통해서도 읽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저게 무슨 짓인가 싶기도 했지만, 어쩌면 저렇게 기막힌 사진들을 만들고 찾아내 퍼 나르는지 무척이나 신기해하던 참이었다.

“다른 사이트에서 퍼온 게 많겠지만 어쨌든 누군가가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거잖아요. 우리 또래 같으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대도 ‘내가 말야, 어제 어느 은행 앞을 지나가는데…’ 하며 이야기로 풀었겠죠. 그걸 그냥 사진 한방으로 해결하는 걸 보면 대단하다 싶죠. 답도 사진으로 올리는 걸 보면 사진만 갖고도 ‘대화’가 가능한 세상이 됐나봐요.”

그림이 되겠다 싶은 건 뭐든지

“솔직히 말하자면 제 사진이라고 하기는 좀 민망해요. ‘표절작’이거든요.”

‘불쌍한 은행’ 사진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강씨의 후배 민경진(24)씨의 말이다. 누군가가 이 장면을 찍어 ‘디시인사이드’ 사이트에 올려놓은 것을 보고 신나게 웃었는데, 며칠 후 길에서 실제장면을 보게 되어 자신도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원래 사진을 올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게 민씨의 생각이다.

“항상 디지털카메라를 갖고 다니면서 ‘뭐 재미난 것 없나’ 생각하죠. 길에서든 집에서든 도서관에서든 그림이 되겠다 싶은 건 뭐든지 찍거든요. 만족스러운 사진이 나오면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요. 디시인사이드나 나우누리 사진유머방 같은 데서 조회수가 수천 번을 넘으면 기분이 좋죠. 댓글이 있으면 더 기쁘고요. 내가 보기에 작품이다 싶으면 분명히 반응이 있거든요. 정말 멋진 장면을 봤는데 그날따라 카메라가 없으면 정말 서운하죠. 분해서 한참 동안 그 일만 생각난다니까요.”

며칠 후 졸업을 앞두고 있지만 아직 취업이 안 돼 학교 도서관을 드나들고 있는 민씨가 디지털카메라를 지니고 다니기 시작한 건 2001년 봄부터. 지금은 군대에 가 있는 오빠가 1999년 ‘거금’을 주고 마련한 카메라를 쓰고 있지만, 곧 오빠가 전역하면 도로 뺏길 것 같아 새로 사려 마음먹고 있다. 그러나 눈여겨보고 있는 제품의 가격이 ‘취업준비생’에게는 만만찮아서 공동구매나 할인이벤트를 통해 싸게 사보겠다고 인터넷을 뒤지는 중이다.

“폰카(핸드폰에 장착된 카메라)가 늘어나면서부터 사진을 올리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어요. 요즘 나오는 건 내장형 33만 화소(화소는 한 화면 안에 들어가는 입자 수. 숫자가 높을수록 화질이 좋음)에 플래시까지 있다니까 굉장하죠. 그래도 아직은 디지털카메라가 나아요.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게 번거롭긴 하지만 화질은 경쟁이 안 되거든요.”

시각 이미지가 일상을 파고들고 있다. 이미지를 만들어 대화를 하고 즐거움을 나누는 일이 일상화되고 있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불특정 다수와 커뮤니케이션하는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느는가 하면, 관련 전문교육을 받은 적 없는 이들이 자유자재로 이미지를 합성하고 편집해 마치 일기를 쓰듯 이야기를 담는다. 바야흐로 ‘이미지 언어의 전성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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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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