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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전투비행사 서왈보 소전(小傳)

  • 글: 이영신 / 일러스트·홍석찬

한국 최초의 전투비행사 서왈보 소전(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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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왈보가 사망한 1926년 이전까지 조선인 비행사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때문에 일제 식민지하에 조선인이 비행사가 됐다는 것은 굉장한 뉴스거리였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서왈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왈보는 그냥 비행사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한 독립지사 비행사였음에도 그 이름을 알고 있는 독립지사는 단 한 사람,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독립군 연성대장이었던 철기 이범석(鐵驥 李範奭) 장군뿐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장군 또한 서왈보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6, 7년 뒤 필자는 ‘대한항공 10년사’ 편찬작업에 관여한 적이 있다. 1978년의 일이다. 이때 필자는 다시 ‘지하에 묻혀 있는 비행사들’을 발굴해 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때 만난 분이 바로 권기옥(權基玉) 여사다. 권 여사가 이범석 장군이 졸업한 중국 윈난(雲南)성의 강무학교(講武學校) 항공과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참으로 다행이었던 것은 권 여사가 서왈보와 2개월 가량 국민군 항공대에서 함께 생활해 서왈보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권 여사는 특히 서왈보가 비행기 추락사했을 때 갈기갈기 찢긴 시신을 수습해서 장사를 치러준 사람 중 하나라고 했다. 며칠에 걸쳐 권 여사로부터 서왈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 소전(小傳)은 전적으로 권 여사의 증언을 뼈대로 하고 관련 자료를 참고해서 구성했음을 밝혀둔다.

권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서왈보가 비행기 추락사한 뒤 서왈보의 아내는 중국 국민당 총사령관 펑위샹(馮玉祥)의 아내 리더취안(李德全)의 보살핌을 받다가 평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북한의 어딘가에 서왈보의 핏줄이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훗날 통일이 되어 그 누군가가 ‘한국 최초의 전투 비행사 서왈보’의 일대기를 보다 정확하게 밝혀낸다면 이보다 더 고맙고 다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서왈보의 어린 시절

서왈보는 1886년 평안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서씨 가문은 평안도 성천(成川)의 서씨 집성촌에서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살아왔으나 할아버지 대에 평양으로 옮겼다고 한다.

1876년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 시대의 흐름에 눈뜬 양반 사이에 자녀를 일본에 유학시키는 일이 점차 늘어났다. 서왈보의 아버지도 일본으로 유학(연대 미상)을 다녀왔다. 서왈보의 아버지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한동안 평양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다가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자 함경도 원산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일본이 설립한 원산 체신분장국(遞信分掌局)에 통역 일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때가 1888년으로, 서왈보가 세 살 되던 해다.

서왈보가 7세가 되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원산의 일본인 소학교에 입학시켰다. 1892년 봄이었다. 어떤 생각에서 아들을 일본인 소학교에 보냈는지는 확인키 어렵지만, 어린 서왈보의 가슴에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기에는 충분했다.

3학년 무렵의 일이다. 일본 아이들은 서왈보와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다. 요즘 말로 치면 ‘왕따’를 시켰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슨 꼬투리라도 잡으면 “조선놈의 새끼!” 하면서 쥐어박기 일쑤였다. 복수를 다짐한 서왈보는 어린 마음에도 먼저 신체를 단련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기계체조에 매달렸다. 그 시대에 일본인 소학교 운동장에는 이미 철봉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서왈보는 틈만 나면 철봉에 매달렸다. 그러나 일본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는 절대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았다. 반드시 학교수업이 끝나고 아무도 없을 때 철봉에 매달렸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기계체조로 단련한 그의 신체는 훗날 비행사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4학년에 진급한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아이들이 도시락을 먹다 말고 소동을 벌였다. 누군가의 도시락에서 역겨운 마늘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마늘 냄새의 진원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서왈보의 도시락이었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어머니가 마늘장아찌를 도시락 반찬으로 잔뜩 넣어주었던 것이다.

일본 아이들 가운데 대장노릇을 하는 아이가 욕설을 퍼부었다. 서왈보는 심한 모욕감에 몸을 떨었다. 어린 마음에도 도시락을 챙겨주신 어머니에 대한 모욕으로 느껴졌다. 순간 서왈보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벌떡 일어서 그 아이를 향해 성난 황소처럼 돌진했다. 그러고는 그 아이의 얼굴을 받아버렸다. 박치기는 평안도 사람의 특기다. 불의에 박치기를 당한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코가 깨졌는지 코피가 줄줄 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왈보는 개의치 않고 일본 아이를 올라타고 앉아 연방 주먹을 휘둘러댔다. 기계체조로 단련된 팔뚝이었으니 상대방 아이의 얼굴이 성했을 리 있겠는가. 조선 아이가 일본 아이를 두들겨 팬 이 사건으로 서왈보의 아버지는 끝내 아들을 자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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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영신 / 일러스트·홍석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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