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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상락의 이 사람의 삶|(주)거산 회장 김길호

정수기 장사꾼의 끝없는 물 사랑

정수기 장사꾼의 끝없는 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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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샐러리맨들의 월급이 10여만원쯤 하던 시절, 그는 정수기를 팔아 50만∼60만원을 주급으로 받았다. 82년부터 83년에 걸쳐 1년 동안 정수기 외판을 해서 적잖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정수기 외판만 하고 있을 양이었다면 애당초 물속으로 뛰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물을 물질로 보고 물리적인 처치만 하게 돼 있는 기존 정수기에 문제가 있다는 판단을 했다. 죽은 물을 환생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연정화다. 땅속으로 스며든 물이 수백 미터의 지층을 통과하면서 지층에 있는 광물질이 녹아들어 미네랄이 풍부한 물이 된다. 따라서 강제적인 힘에 의해서 순식간에 필터를 통과시키는 방식으로는 살아 있는 물을 얻을 수 없다. 역삼투압 정수기의 경우 정수효과는 뛰어나지만 인체에 유익한 미네랄까지 걸러내 증류수처럼 돼버린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가 얻어낸 답이 ‘자연 여과방식’이다.

김길호는 정수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필터 개발에 나섰다. 1단계로 녹찌꺼기나 석회질, 세균 등을 제거하는 전처리 필터를 개발하고, 2단계로 염소 같은 화학물질이나 중금속 등을 걸러내는 주필터를 개발했다. 이 주필터가 바로 92년도에 특허 출원한 ‘매직필터’다. 이 두 단계의 필터를 자연상태에서처럼 천천히 통과하게 만든 것이 그의 정수기다. 그는 이 과정을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수기에 물을 담아놓으면 지구의 중력에 의해 천천히 필터를 통과하면서 물이 스스로 자신의 병든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 했다. 그렇다면 이 두 단계의 필터 통과만으로 자연에서 환생한 물에 가까운 ‘살아 있는 물’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닙니다. 자연여과 방식으로 걸렀다고 하지만 오염물질을 걸러내는 과정에 미네랄 등 우리 몸에 좋은 성분까지 상당부분 걸러져버린 거지요. 무엇보다 이 물에는 기(氣)가 없습니다. 지구 자체가 자석 덩어리이기 때문에,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면서 자력을 받아서 활력을 얻는 거예요. 걸러진 물에 활력, 즉 기를 불어넣지 않으면 살아 있는 물이라고 볼 수 없지요.”

걸러낸 물에 활력을 줄 매체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 매체로 그가 택한 것이 맥반석이다.

“서남해안의 노화도 앞바다 해저 800미터 깊이에 일본인들이 세계적인 보물이라고 감탄하는 맥반석 광맥이 있습니다. 이 광산 주인이 나와 친한 분인데 그 곳에서 나는 질 좋은 맥반석이 바로 걸러진 물에 활력을 주는 대단히 중요한 매체입니다. 맥반석은 물을 알칼리성으로 바꿔주고, 미네랄과 산소를 증가시키며, 원적외선 전자파를 물속에 방사해서 물분자를 움직이게 하는데, 그렇게 될 때 전무식 박사가 우리 몸에 가장 좋은 구조라고 얘기한 바 있는 육각수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중금속은 흡착까지 해주는 그야말로 신비의 돌이에요.”



맥반석 조각을 정수기 바닥에 깔아 필터에서 오염물질을 걸러낸 물이 이 돌 조각을 통과하는 것, 이것이 제3단계 처리에 해당하는 셈이다.

원리는 찾았으니 이제는 물건을 만들 차례였다. 서울 소공동의 아주 허름한 건물 2층에 조그만 사무실 하나를 얻어 세를 들었다. 그는 혼자서, 순전히 수공(手工)으로 뚝딱뚝딱 정수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을지로나 용산, 청계천을 돌며 재료를 구해다가 혼자서, 그것도 순전히 수공(手工)으로 금형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 그가 공부한 기계공학이 큰 도움이 되더라 했다. 그렇게 해서 최초로 만들어본 정수기가 20대. 그러나 다 만들었다고 뿌듯해한 것도 잠시. 정수기에 뚜껑이 없었다. 다시 금형을 떠서 뚜껑을 만들자니 너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남대문 시장을 돌며 좋은 방법이 없을까를 궁리하던 그가 그릇가게 앞에서 무릎을 쳤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테를 두른 냄비의 유리 뚜껑이 정수기 뚜껑으로 안성맞춤이었다.

혼자 수공(手工)으로 정수기 제조 시작

‘냄비 뚜껑 스무 개만 파시오.’

냄비 몸통은 말고 뚜껑만 스무 개를 팔라고 했으니 미친 사람 취급할 건 당연한 일. 사정 설명을 하고 냄비 만드는 공장을 소개받아서 냄비뚜껑 스무 개를 확보했다. 뚜껑을 씌우고, 외부 틀을 등나무 가구로 만들어 앉히니 근사한 정수기가 완성되었다. 이름 붙이기를 ‘크리스털 큐브’.

그 20대를 싣고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 주방용품 판매상을 하던 이상희라는 사람한테 한바탕 물 강의를 한 다음에 그 역사적인 시제품을 내보였는데, 그의 첫마디는 ‘보아하니 어항 같은데 금붕어는 왜 없느냐’였다. 겉을 등나무로 치장한 데다 바닥에 돌 조각까지 깔려 있어 어항처럼 보였던 것이다. 물을 부어 정수 시범을 보이자 이번에는 ‘그렇게 물이 조금씩 떨어지니 성질 급한 사람 기다리다 목말라 죽겠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일단 놓고 가보라는 주인의 달갑지 않은 반응에 되싣고 올 수는 없어서 두고 왔는데….

‘사건’은 다음날 터졌다. 부산의 이 사장이 ‘그 정수기의 부산 총판 독점권을 내게 줄 수 없겠느냐’고 제안해온 것이다. 정수기 한 대를 집에 갖다 두고 퍼런 맥반석 위로 물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노라니 ‘이게 바로 암반수요, 석간수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무릎을 쳤다는 것이다.

한달음에 부산으로 내려간 김길호에게 이 사장은 총판 계약금을 얼마나 받겠느냐고 물어왔다. 가지고 간 20대를 팔아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한 판에 총판 계약금 운운은 꿈도 꾸지 못한 터였다. 300만원을 염두에 두고 ‘석 장 정도 주실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오케이였다. ‘1500만원은 당장 현금으로 주고 나머지 1500만원은 내일 서울에 올라가서 공장을 보고 건네 주겠다’고 했다. 그의 ‘석 장’은 3000만원이었던 것이다.

“현금 1500만원을 받아 쥐긴 했지만 10원도 쓸 수가 없었어요. 다음 날 공장을 보고 나머지를 주겠다고 했는데, 공장도 뭣도 없이 낡고 좁은 사무실에서 정수기 만든다고 뚝딱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줬던 돈도 다시 내놓으라고 할 것 아닙니까.”

최초의 맥반석 정수기로 떼돈

다음날 부산의 이 사장이 소공동으로 찾아왔다. 삐거덕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와 어지러운 사무실로 들어선 그에게 김길호는 공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 곳이 공장이며 사무실이라고 실토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이 사장이 김길호의 통장번호를 물었다. “그러실 줄 알고 어제 받았던 돈 한 푼도 안 썼습니다.” 김길호는 미련없이 1500만원이 입금된 통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나머지 1500만원을 마저 주기 위해서 통장번호를 물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그는 이틀 사이에 현금 3000만원을 받고 꿈을 꾸는 줄만 알았다고 했다.

“나를 믿어준 그 사람이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어요. 그러나 그 양반은 이런 계산을 하고 있었어요. 공장도 뭣도 없이 좁은 사무실 구석에서 만든다면 물량에 한계가 있어서 다른 사람한테 줄 것도 없을 것이니 자신이 생산량 전부를 독점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거지요. 어쨌든 나하고 그 사람 둘 다 떼돈을 벌었습니다.”

직원을 늘려 하루에 60대를 만들었는데도 주문량을 맞추기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사무실을 역삼동으로 옮기고 말죽거리에 공장을 차렸다. 전국 판매망을 갖춘 뒤부터는 생산량을 월 5000대로 늘렸는데도 물량이 달렸다. 그런 중에도 그의 물 강의는 계속됐는데, 제품에 대한 가장 확실한 홍보수단은 사장인 그의 물 강의였다. 이 무렵 그와 정수기에 얽힌 전설 같은 일화가 있다.

한번은 대리점을 하겠다는 사람 셋이 그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의 물 강의를 한바탕 듣고 난 다음 그들 중 한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네 정수기에 그토록 자신이 있다면 청산가리 탄 물이라도 걸러 마실 수 있다는 얘기요?”

김길호는 두 말 없이 청산가리를 구해왔다. 독극물임을 표시하는 뻘건 해골이 그려진 청산가리 병을 열어 물에 탄 그는 그 물을 정수기에 부어 걸렀다.

“아니, 됐어요. 그냥 농으로 해본 소리요. 그만하면 믿겠으니 제발 치우시오.”

김길호가 그 물을 정말로 마실 태세를 보이자 이번에는 그들이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김길호는 청산가리 탄 물이 정수되어 나오자 지체 없이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들은 독극물을 마신 김길호가 언제 죽나 보려고 겁먹은 눈길로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청산가리의 화학성분과 정수기 필터의 기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에게 그건 모험이랄 것도 없었다.

“울산에 물 강의를 가서 6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우리 정수기의 여과장치를 설명하는데 청중 중에 짓궂은 사람이 구정물도 걸러 마실 수 있느냐고 물어요. 즉석에서 보여줄 수도 있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시커먼 대걸레를 가지고 나가더니 아주 지저분한 화장실 바닥을 닦은 다음에 양동이에 빨고 나서 그 시커먼 물을 가지고 왔어요. 보기 좋게 걸러 마셨지요. 물론 기분은 좀 찜찜했지만.”

유사품 판치자 해외 수출로 물꼬

크리스털 큐브는 5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연매출 40억원에다 정수기 시장의 80%를 석권할 정도로 고속성장을 구가했다. 그러나 (주)거산의 정수기가 날개돋친 듯 팔려 호황을 구가하고 있을 무렵, 정수기로 떼돈 번다는 소문이 퍼지자 정수기 생산업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바닥에 맥반석을 까는 것까지 거산 제품을 흉내낸 유사품이었다.

덤핑이 난무하고, 현저하게 질이 낮은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언론에는 시중의 불량 정수기가, 정수를 하기는커녕 세균 구덩이라는 등의 비판 기사가 실리고… 정수기 전체에 대한 불신이 만연했다. 아무리 ‘우리 정수기는 다르다’고 해도 먹혀들 상황이 아니었다. 상당수 업체가 부도를 냈고, 타업체의 덤핑 공세 때문에 김길호씨도 직원들의 월급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려움에 처하고 말았다.

그러는 중에 삼성전자가 OEM(주문생산) 계약을 제의해왔다. 까다롭기로 이름난 삼성에서 거산 정수기가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해서 협력업체로 선택한 것이다. 안정적인 공급처를 가졌으니 이제는 살았다며 직원들과 함께 걸판지게 회식부터 했다.

“그러나 아니었어요. 거대기업이던 삼성 쪽에서 보면, 정수기 사업 정도는 수백 개 아이템 중 하나에 불과했으니까요. 심지어 일선 대리점에 전화해보면 ‘우리 삼성 제품 중에 정수기도 있던가요?’라고 되물어요. 아하, 그저 구색 갖추기 수준이구나 생각했지요. 판매 실적도 시원찮고 해서 그만둬야겠다고 판단했어요.”

삼성전자와 했던 계약을 취소하고 나니 60여명에 이르는 공장 직원들에게 월급 줄 일이 막막했다.

“살 길은 수출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처음 크리스털 큐브를 내놨다가 국내에서 히트를 했다면 해외에서도 통할 것이다, 이런 판단을 한 거지요. 서둘러 회사 내에 무역부를 설치하고, 브랜드도 회사 이름하고 같은 ‘거산’으로 정한 다음에, 제가 몸으로 뛰기로 작정을 한 겁니다.”

맨처음 간 곳이 중동의 쿠웨이트. 항공료는 어떻게 마련해서 날아갔지만, 호텔비가 문제였다. 콧노래 부르며 떼돈을 벌어들이던 그가, 그 사이에 그 정도로 쪼그라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지갑을 잃어버려야 했다. 실제로 분실한 것이 아니라, 바이어한테 그런 핑계를 대고 호텔비를 신세졌던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도자인 아라파트와 절친한 한 사업가를 만났다. 그는 PLO(팔레스타인 해방군)의 장성이기도 한 거부(巨富)였다. 쿠웨이트에 있던 영국인 화학자 한 사람을 대동하고 찾아가서 007 가방에서 분석기를 꺼내 그곳 수질을 분석한 다음 한바탕 물 강의를 했다. 그가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웠다. ‘당신네 제품 최고다’. 즉석에서 312만 달러어치를 수주했다. 콘테이너로 72개 분량이었다. 그런 희열은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처음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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