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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상락의 이 사람의 삶|(주)거산 회장 김길호

정수기 장사꾼의 끝없는 물 사랑

정수기 장사꾼의 끝없는 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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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기분이 좋아서, 비행기가 경유지인 인도에 도착해 있는 동안 코냑 한 병을 사서 모두 들이켰다. 술에 취한 그는 공항 대기실 구석에 쓰러지고 말았는데, 승객 한 명이 탑승하지 않고 증발해버리는 바람에 승무원들이 수색작전을 벌이는 등 한바탕 난리법석을 떨기도 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직원들과 또 한 번 회식을 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정수기를 수출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상황인데, 그가 첫나들이에서 주문을 뭉텅이로 받아온 것이다. 그러나 잘 풀리는 듯하다가도 뜻하지 않게 엉키거나 매듭을 만나는 것이 세상 일이다. 걸프전이 터진 것이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거산에서 선적해 보낸 정수기들을 압류해버렸다. 노다지가 물 건너 가버린 것이다. 공장 직원들에게 집도 지어 주고 월급도 올려 주겠노라고 회식자리에서 기세 좋게 장담했던 그의 꼴이 우습게 돼버렸다. ‘공항에서 술을 진탕 마셔서 알라신의 노여움을 산 것이었다’며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수출전략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했다. 동남아부터 공략하기로 했다.

인도네시아 반둥에 있는 고급호텔의 컨벤션센터. 한국에서 온 물 박사가 미네랄 워터 시스템을 강의한다는 소문을 듣고 전국의 판매상 3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우렁찬 팡파르와 함께 김길호가 등장했다. 물의 분자구조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해서, 죽은 물과 살아있는 물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등 일장 연설을 마치고 나서 자신의 미네랄 워터 시스템의 여과기능을 소개했다.

그는 청중의 열띤 호응에 흥분하여 자신도 모르게 ‘오줌도 걸러 마실 수 있다’고 해버렸다. 그러자 한 청중이 ‘진짜냐?’고 물었다. 거기서 발을 뺐다간 허풍쟁이 취급을 받을 처지였다.



“좋습니다. 빈 페트병 두 개를 줄 테니까 지금 오줌 마려운 사람 있으면 가지고 가서 채워 오시오.”

인도네시아 남자 두 명이 화장실 쪽으로 가더니 페트병에 자신의 오줌을 담아왔다. 청중들은 숨을 죽인 채 신기하다는 듯 김길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누런 오줌이 맑은 물이 되어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일제히 박수가 터졌다. 다음 순간 오줌 정수한 물을 치켜든 김길호가 그 물을 거침없이 들이켰다. 환호성이 터지고 휘파람이 울려나왔다.

“자, 오줌 주인들 이리 나와서 직접 마셔보고 다른 사람들한테 맛이 어떤지 증언하시오.”

두 사람이 물컵을 받아들고 주저주저하더니 한 모금씩 들이켠 다음 소리쳤다. “진짜 물이다!”

‘육각수 이론을 제품화한 것’

장내는 환호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튿날 아침 도하 일간지에는 대문짝만한 활자로 ‘코리아에서 온 물 박사’ ‘난생 처음 본 매직 쇼’ 등의 제목으로 김길호를 소개했다. 제품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니 주문이 쇄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이런 홍보 행차는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싱가포르는 물론 남아프리카의 모리셔스까지 이어져 나갔다. 한 달에 2만여 대의 정수기가 팔려 나갔다. 김길호는 경기도 광주에 땅 2000 평을 사들여 공장을 짓고 본격적으로 ‘미네랄 워터 시스템’의 대량생산 체제를 갖췄다.

“그 다음에는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오늘날의 과학 문명을 꽃피운 선진시민들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 물은 단물인데 반해 유럽지역 물은 센물입니다. 그냥 센물이 아니라 심각하게 센물이기 때문에 그냥 마실 수 없어서 맥주를 많이 마시는 겁니다. 센물은 무기물이 너무 많이 녹아 있는 물이거든요. 물론 프랑스처럼 물이 아주 좋은 나라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역시 지금까지는 ‘정수’ 하면 그저 ‘거른다’는 차원에서만 생각해왔거든요. 그런데 동양에서 온 사람이 물을 생명체라고 얘기하면서 기(氣)를 들먹이니까 참 신기하게 생각해요. 거기다 전무식 박사가 규명한 육각수라는 그 사람들도 처음 들어보는 희한한 용어거든요. 그걸 과학적으로 설명했지요. 분자도 환경이나 상황 혹은 상태에 따라 끌어안고 있기도 하고 서로 배척해서 떨어져 있기도 한다, 그런데 분자가 육각형을 이뤘을 때가 생명에 가장 좋은 상태다…”

반신반의하던 유럽인들도 보통 물에 꽂아둔 장미가 하루가 지나면 시드는 데 반해, 육각수에 꽂은 장미가 2∼3일 동안 싱싱한 상태로 있는 걸 보고는 ‘미러클 쇼다!’라며 감탄을 했다. 더욱이 동양에 대해 막연한 신비감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김길호가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인 ‘생명체인 물’ 논리에 ‘서양의 과학과 동양의 정신이 하모니를 이룬 시스템’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더구나 작년에 세계적 물 박사인 전무식 교수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럽 학자들을 상대로 육각수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한 뒤부터는 김길호의 미네랄 워터 시스템이 ‘전박사의 육각수 이론을 제품화한 것’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김길호의 거산 정수기는 작년에 유럽통합 인증마크인 CE를 획득했고, 역시 작년부터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스위스, 모로코, 이탈리아, 폴란드 등 10여 개국에 본격적인 수출을 개시했다.

“무엇보다 선진 과학문명 당사자들에게 저의 미네랄 워터 시스템을 가지고 물의 분자구조와 ‘생명체로서의 물’을 함께 인식시킨 것이 동남아에서와는 또 다른 자부심을 느끼게 했어요. 외화를 얼마 벌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정신이 서구 과학 문명국 전문가들의 찬사를 유발했다는 것은 가볍게 볼 수 없는 정신적 소득 아닙니까.”

물 팔아 달러 버는 현대판 봉이 김선달

그의 자부가 대단하다. 이쯤 되면 그를 단순한 정수기 장사꾼이 아니라고 봐줄 만하지 않은가. 순전히 장사꾼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그는 할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누가 물을 가지고 달러를 벌어옵니까. 수출, 수출하지만 100만큼 수출하면 90은 외국에서 원료나 부품 들여오는 경우가 태반 아닌가요? 저는 100% 국내 자재를 씁니다. 그리고 그 자재들은 공해를 유발할 위험이 없는 천연자재예요. 우리 공장은 팔당댐 근처 상수원 보호구역에 있거든요. 왜 거기다 공장을 짓게 허가해줬겠어요. 우리는 100만큼 수출하면 그 100이 모두 한국에 떨어집니다. 이 정도면 저도 애국자 아닌가요.”

김길호는 기존 정수기 외에, 세계 시장을 장악할 또 한 가지 아이템을 개발해 두고 있다. KISS(Keosan Instant Superior System)라는 이름인 이 정수기는 휴대용이다. 정수기는 값비싼 물건이며 일정한 장소에 두는 설치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셈인데 ‘언제 어디서든 내가 마시는 물은 내가 걸러먹는다’는 발상이 바탕이 되어 개발한 제품이다.

“외국 출장을 가보면 호텔 미니 냉장고에 생수가 있긴 하지만 너무 비쌉니다. 고급호텔에 묵는 서양 사람들도 물값이 비싸니까 호텔주변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는 사람이 많습니다. 작년 김포공항을 통해서 해외에 나간 사람들이 700만 명이 넘습니다. 곧 1000만 명에 육박할 거예요. 그 사람들이 외국에 가서 물값으로 10달러씩만 지출한다 해도 1억 달러가 나가는 것 아닙니까. 휴대용 정수기 하나만 가지면 세계 어느 나라에 가든 그 나라 수돗물을 걸러먹을 수 있어요.”

볼링핀 모양으로 디자인된 이 정수기는 기존 거산 정수기와 똑같은 원리와 구조로 돼 있으면서도 크기가 아주 작기 때문에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다. 필터 성능이 4000병을 걸러먹을 수 있도록 돼 있다니 자꾸 바꿀 걱정을 안 해도 된다. 물론 국내에서는 처음이고 유일하게 미국에서 휴대용 정수기가 나왔으나 그것보다 성능이 뛰어나다는 게 그의 장담이다.

“물에 투자하면 세계 제패가 가능하다”

그는 기 에너지 연구에 권위자인 서울대 이충웅 교수의 이론을 빌려, 한반도의 물이 좋은 이유는 땅 자체가 거센 기가 뭉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와 비슷한 수질을 가진 곳이 역시 반도국인 이탈리아인데, 땅이 비슷하니 수질도 비슷하고, 수질이 비슷하니 그 땅에서 나온 산물(産物)도 비슷하고, 또한 그 산물을 먹고 사는 사람들의 성질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가 세계를 제패했듯이 비슷한 물을 마시고 자란 우리도 언젠가 세계를 제패할 것이라고 했다. 글쎄, 지금이야 제국주의 시대가 아니니 로마식 세계제패를 얘기하는 것은 아닐 테고, 어쨌든 적어도 물 하나는 세계적으로 그 질을 자랑할 만하다는 것은 그 방면의 전문가들 사이에도 이론이 없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사이 석유보다 훨씬 비싼 값에 물을 사 마시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한국에 여행 오는 외국인들이 여행 오기 전에 교통사고를 조심할 것과 수돗물 마시지 말 것을 미리 숙지해야 한다니 문제 아닌가.

“작년 말 UN에서 아시아 국가 중에서 2003년에 물 부족을 겪을 것으로 예상되는 10개국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우리나라도 포함돼 있습니다. 우리는 물이 얼마나 중요한 자원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아무 데나 구멍을 뚫어서 지하수를 마구 퍼 올리다 방치하는 바람에 고갈은 둘째치고 오염이 심각합니다. 지하수는 한 번 오염되면 햇볕이 안 들기 때문에 자정작용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오염된 지하수가 원상을 회복하는 데에는 300년이 걸려요.”

김길호는 자신이 정수기 사업을 하고 있다고 얘기하지 않고 물에 투자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근래 벤처기업이다 뭐다에 투자하는 것의 일부만이라도 (국가든 개인이든) 물에 투자한다면 바로 그 질 좋은 물로 세계 제패가 가능하다고 얘기한다.

왕조·농경시대에 나라일의 근본으로 여겼던 치수(治水)가 홍수 피해를 막고 농업용수 이용을 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면, 이 시대의 치수는 죽어 가는 물을 살리는 일 아닐까? 김길호 사장 말처럼 기가 왕성하고 맛이 탁월한 우리의 물이 본래 상태를 회복하여 정수기 따위가 쓸모 없게 되는 날을 앞당길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병든 물을 고치는 그의 병원(정수기 공장)은 문을 닫아도 좋을 터인데.

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문제다.

신동아 200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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