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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비록<상>

전쟁은 술로 시작됐다

  • 이정훈 hoon@donga.com

전쟁은 술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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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부터 꼭 50년 전에 일어난 6·25 전쟁으로 대한민국에서는 230만 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292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한을 합쳐 50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는데도, 이 전쟁은 기이하게도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처럼 잊혀진 전쟁이 돼 가고 있다. 6·25 전쟁은 전쟁이란 형태를 통해 남북한에서 수많은 리더가 등장해 리더십을 발휘한 치열한 경연장이었다. 이들은 피와 땀과 한숨과 함성을 토해내며 생존 투쟁을 위한 거대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 리더십이 결국 지금의 남북 문제를 만든 근본 원인이다. 또 이 리더십을 재해석함으로써 우리는 정전체제 해체와 평화체제 구축을 향해 일보를 내디딜 수 있다. 6·25 전쟁은 또 생각밖으로 치열한 기동전이었다. 소설 ‘삼국지’보다 더 빠른 속도전이었다. 50년 전 남북한군과 미군 중국군은 어떻게 싸웠는가.》
[ 제1편 전쟁발발 ]

6·25 전쟁이 일어나던 날 가장 잘 싸운 지휘관으로 꼽히는 임부택(林富澤·당시 31세)은 1950년 6월25일 춘천에 본부를 둔 육군 제6사단 7연대장을 맡고 있었다. 일본군 사병 출신인 그는 한국군의 모태가 된 조선경찰예비대(1946년 1월15일 창설)의 창설 멤버다. 이때 그는 대한민국 사병 군번 제1번인 110001번과 함께 중사 계급을 받고, 한국 육군의 모태가 된 제1연대 제1대대 A중대 선임하사관이 되었다.

그러다 4개월 후인 1946년 5월1일 미 군정청이 조선경찰예비대훈련소(이후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육사의 전신)를 만들자 입교해 약 한 달간 훈련을 받고 소위가 되었다. 소위가 된 날부터 만 5년이 지난 1950년 6월25일에는 중령 계급장을 달고 중부 전선 최전방을 방어하는 7연대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6사단장은 29세의 홍안 청년 김종오(金鐘五) 대령. 김대령은 일본 중앙대를 다니다 학병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광복 후인 1945년 12월5일 미군정청이 군사영어학교를 만들자 입교해 참위(지금의 소위)가 되었다. 김대령 휘하에는 7연대 외에도 2·19연대가 있었다. 함병선(咸炳善·당시 30세) 대령이 이끄는 2연대는 홍천에 본부를 두고 7연대 우측 전방을 방어하고, 민병권(閔炳權·당시 32세) 중령이 지휘하는 19연대는 예비대로 6사단 사령부와 함께 후방인 원주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태풍 ‘엘시’



1950년에는 ‘30년 만에 최악’이라는 봄가뭄이 닥쳤다. 농민들은 이제나 저제나 비 소식을 기다리는데 장마철이 시작되는 6월이 와도 큰비가 오지 않았다. 그러던 참에 일본 오키나와 남쪽에서 규모가 작은 태풍 ‘엘시’가 발생해 서북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타는 목마름’으로 비를 기다리던 농민들이 겨우겨우 모심기를 끝낸 그해 6월23일 오후 2시쯤, 태풍 ‘엘시’의 영향으로 춘천 일대에 모처럼 가랑비가 내렸다.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 샘밭골은 당시는 38선 바로 남쪽이었다. 38선에서 불과 300m 남쪽에 있는 북한강에는 ‘모진교’라는 길이 약 250m의 다리가 걸려 있었다. 이 다리 북쪽인 화천군에는 함흥에 주둔하다 수일간 야간 행군 끝에 6월17일 이곳으로 이동해온 인민군 2사단(사단장 李靑松 소장·인민군 소장은 국군 준장과 같다)이 포진해 있었다. 인민군 2사단이 춘천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당시 이 다리 지역을 방어한 것은 박용덕 상사가 이끄는 7연대 수색대였다.

그러나 다리 북쪽 지역에 있는 38선 이남 지역이 너무 좁아 7연대 수색대는 다리 남쪽만 방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다리 북쪽에는 인민군 초소가 생겨났으니, 사실상 모진교가 38선인 셈이었다. 당시에도 지뢰가 있었다. 국군은 인민군의 침공에 대비해 다리 한복판에 지뢰를 매설해 놓았다. 그리고 원격장치로 다리를 폭파할 수 있게끔 별도의 폭발물을 설치해 두었다.

가랑비를 맞는 모진교 아래 북한강에서 을씨년스럽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데, 다리 북쪽에서 홀연히 흰옷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당시는 인민군이 월남자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할 때였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인민군 초소로부터 전혀 총격을 받지 않고 다리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흰옷은 한 노인이었다. “어! 저 영감이-!” 하며 7연대 수색대원들이 당황해 하는데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지뢰가 터지고, 노인은 다리 한복판에서 꼬꾸라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노인은 장씨였고, 화천으로 출가한 딸 집에 살고 있었다. 장씨의 평생 소원이 38선 남쪽 춘천에 살고 있는 아들집에 가보는 것이었다.

이청송 인민군 2사단장은 개전을 앞두고 사단 정치장교인 이시혁(李時赫)에게 “요충지인 모진교의 방어 상황을 알아보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이산가족을 찾던 이시혁은 장노인을 찾아내, 설득 반 위협 반으로 “아들 집으로 가라”며 모진교로 내몬 것이다. 장씨의 죽음으로 인민군은 모진교에 폭파 시설이 있음을 간파했다.

그로부터 10여 시간 후인 6월23일 24시(6월24일 0시), 육군 본부는 6월11일부터 발령된 전군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 이 경계령은 5월1일 메이데이 시위와 2대 총선인 5·30선거, 그리고 6월7일 북한이 남북한 선거를 제의하고 6월10일에는 북쪽의 조만식(曺晩植))과 남쪽의 이주하(李舟河) 김삼룡(金三龍)을 교환하자고 제의함에 따라 취해진 조처였다.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자 육본 장교들은 토요일인 6월24일 저녁부터 육군참모학교 구내에 만든 장교구락부 낙성 기념 댄스 파티에 들어갔다.

댄스파티

1950년 1월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전미 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국은 미국의 대(對)공산권 방어에서 제외된다”고 밝힌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애치슨 선언은 6·25전쟁을 유발한 첫째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1947년 발족한 미 CIA 극동 책임자로 1981년까지 주로 서울에서 비노출 요원으로 활동하던 하리마오박 (당시 31세·한국명 朴承德)씨는 미국이 고의로 6·25전쟁을 유도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그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미 극동군 정보참모부 산하 한국인 첩보부대인 KLO부대와 미 극동공군의 첩보부대인 ASIS, 한국 육군의 일선 부대 그리고 미 CIA는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1195개 문건을 워싱턴에 보냈다. 그러나 워싱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6월23일 망설이는 채병덕 육군총참모장(蔡秉德·당시 29세)을 설득해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댄스파티를 열게 한 이는 미군 고문단장 대리인 헨리(가명) 대령이었다”

하지만 6사단 7연대만은 모진교 사건 때문에 비상경계령을 풀지 않았다. 7연대는 이미 6월19일 귀순해온 인민군 2사단 포병연대의 박철호 전사에게서 “원산에 주둔하던 포병연대가 대규모 야외훈련을 한다며 1주일간 야간행군을 계속해 철원-김화를 거쳐 6월18일 밤 화천 남쪽 신포리 백사장에 도착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바 있었다. 7연대로부터 이러한 보고를 받은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큰 관심을 표시했지만, 육본 정보국의 미군 고문관(대위)은 “인민군은 절대 도발하지 않는다”며 김대령의 보고를 묵살했다.

당시 한국 육군은 8개 사단 1개 독립연대로 편성돼 있었다. 최전방인 38선 방어를 위해 서쪽에서부터 17연대(옹진반도)-1사단(청단∼적성)-7사단(적성∼적목리)-6사단(적목리∼진흑동)-8사단(진흑동∼동해안)을 포진해 놓았다. 후방인 서울에는 수도경비사령부를 두고, 대전에 2사단, 대구에 3사단, 광주에 5사단을 둬 공비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 부대를 통합 지휘한 것은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었다.

반면 인민군은 민족보위상(국방부 장관에 해당)에 최용건 부원수를 앉히고, 지금의 한국 육군 야전군사령관에 해당하는 전선사령부를 만들어 김책(金策) 대장(4성장군)을 사령관에, 강건(姜健) 중장(2성장군)을 참모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을 임명했다.

인민군 1군단 휘하에는 6사단-1사단-4사단-3사단-105전차여단이, 2군단에는 2사단-12사단-5사단이 배속되었다(서쪽에서부터). 그리고 예비부대로 13사단은 1군단에, 15사단은 2군단에 배속하고, 10사단은 총예비대로 북한 방어를 위해 평양 지역에 배치해두었다. 인민군과 별도로 북한은 내무성(한국의 내무부에 해당)에 북한 주민의 월남을 막는 부대로 38경비대(한국의 전투경찰대와 흡사) 3개 여단을 편성했다. 이중 3경비여단은 국군 17연대가 포진한 옹진반도 바로 북쪽에 포진해 있었다(지도 참조).

선제 타격전략

국군에는 4사단이 없지만 인민군에는 4사단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군 사단은 연대를 시발로 생겨났다. 1연대가 1여단이 됐다가 1사단이 되는 식이다(그 후 각 연대는 계속 배속 사단이 변경돼, 1사단에 꼭 1연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국군이 연대로만 구성돼 있을 때인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 터졌다. 이에 따라 군내 좌익 분자를 색출하기 위해 대규모 숙군 작업이 펼쳐졌는데 유독 4연대(연대장은 6·25전쟁 당시 8사단장인 李成佳 대령)에 좌익이 많았다.

여순반란 사건은 4연대 예하 대대를 모태로 창설한 14연대(연대장 박승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1949년 5월 4여단(여단장 金白一 대령) 예하 8연대에서 표무원(表武源) 강태무(姜太武) 소령이 자기 대대원을 이끌고 월북했다. 그렇지 않아도 4자는 ‘죽을 사(死)’자를 연상시켜 개운치 않은데다 자꾸 좌익 관련 사건이 일어나자, 국군은 24~34~40 등 4자가 든 부대 명칭은 아예 쓰지 않게 되었다. 요컨대 국군은 죽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빨갱이’가 싫어서 4자를 쓰지 않은 것이다. 10과 18도 욕설을 연상시켜 사용하지 않는 숫자가 되었다.

이른바 ‘선제 타격 전략’으로 불리는 인민군의 전쟁 개시 작전계획은 3경비여단과 6사단 소속의 14연대를 동원해 옹진반도에 배치된 국군 17연대를 공격하고, 6사단과 1사단은 국군 1사단을, 4사단과 3사단은 국군 7사단을, 2사단과 12사단은 국군 6사단을, 5사단은 12사이드카연대를 배속받아 국군 8사단을 밀어붙인다는 것이었다.

공자(攻者)는 방자(防者)보다 3배 이상 강해야 이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인민군은 2 대 1로 우세한 상황에 국군을 밀어붙이기로 한 것이다. 1950년 2월부터 인민군 각 사단은 북한 중앙은행에서 돈을 인출해 전쟁 소모물자를 대량 확보해놓았다. 더구나 국군은 1대도 없는 전차를 무려 242대, 한국 공군은 연락기 10대뿐인 데 비해 인민군 공군은 211대의 각종 공군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제 타격만 하면 공자와 방자 비율에 관계없이 이긴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군은 지금처럼 미군에 작전권을 넘긴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작전권을 갖고 있었다. 인민군의 이러한 부대 배치에 대비해 지금의 합참본부와 같은 구실을 한 육군본부는 ‘육본작전계획 제38호’를 작성해 인민군의 선제타격전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육본작전계획 38호는 인민군이 주공을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에 집중할 것으로 보고 의정부 지구에 방어지대를 형성한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6월23일 밤 12시부로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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