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질사건 후 전면적인 반군 섬멸전
인질 사건이 일어나자 미-러 정상회담까지 취소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02년 11월11일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럽연합(EU)-러시아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다시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러시아의 체첸정책은 더 가혹해졌다. 체첸에서 병력을 단계적으로 철수하려는 계획은 취소됐다. 대신 체첸 주둔 러시아군은 전면적인 반군 섬멸전에 들어갔다. 전선이 따로 없는 게릴라전으로 전개되고 있는 체첸전이 격화되면 또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될 것인가?
“체첸반군은 국제 테러조직”

러시아 언론사는 반군의 주장을 전하거나 심지어 반군의 모습을 화면이나 사진으로 보여주기만 해도 폐쇄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관련 언론인이 구속되는 것은 물론이다. 모스크바 지역방송인 모스코비야가 폐쇄되고 폭로전문 주간지 베르시야가 압수수색을 당하자 러시아 언론은 숨을 죽이고 있다.
전화(戰禍)를 피해 모스크바 등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체첸인들은 이제 잠재적인 테러범 취급을 받고 있다. 이들은 경찰의 일상적인 검문과 체포 폭행 등에 시달리고 있다. 경찰뿐 아니라 ‘스킨헤드’라고 불리는 신(新)나치주의를 신봉하는 극우파청년들이 거리나 지하철 등에서 닥치는 대로 체첸인을 사냥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경찰은 이들의 초법적인 테러를 못본 척한다.
푸틴 정부는 이번 인질사건을 그동안 러시아에 불리했던 국제여론을 반전시키는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국제사회에서 체첸사태가 거론되면 늘 수세에 서야 했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등은 체첸에서 민간인에 대한 러시아군의 난폭하고 잔인한 행동을 들어 인권침해 문제를 제기했다. 더 나아가 에스토니아 등 유럽 일부 국가들은 자국 내에 체첸 망명정부의 대표부 활동을 허용해 ‘러시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이라는 반군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질사건 이후 러시아 정부는 적극적인 외교 공세에 나서고 있다. 체첸전을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대(對)테러 전쟁과 연결시킨 것이다. 체첸 망명정부와 반군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나 알 카에다와 마찬가지로 테러조직이라는 것이 러시아의 논리다. 여기에는 러시아가 그동안 ‘테러와의 전쟁’에 협조해왔으니 서방도 앞으로 체첸사태에 눈감아 달라는 은근한 압력이 포함돼 있다.
러시아는 체첸반군을 국제테러조직에 포함시켜 달라고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아슬란 마스하도프 대통령과 반군사령관 샤밀 바샤예프 등 대부분의 체첸 지도자가 러시아 정부의 요청으로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에 의해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러시아는 덴마크 정부가 수도 코펜하겐에서 세계 체첸인 대회의 개최를 허용하자 마침 이곳에서 열릴 예정이던 EU-러시아 정상회의를 거부해 결국 회의 장소를 벨기에 브뤼셀로 옮겼다. 체첸 망명정부의 대표부가 있는 국가에 대해서도 이의 폐쇄를 요청했다. 해외에서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체첸인들의 유일한 창구인 체첸 대표부는 독일 등 몇몇 유럽국가와 터키 등 이슬람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