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주한미군, 우리가 나가라고 해도 안나갈 것”

  • 글: 황호택 hthwang@donga.com

    입력2003-02-24 19: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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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선 직전 한나라당 후원금은 118억, 민주당은 5억
    • 후보 단일화 후 재벌들 돈 내겠다고 줄서
    • 북핵 해결을 위한 압박외교는 필요
    • 개혁당과는 정책연대가 바람직
    • DJ의 사적인 비밀은 무덤까지 갖고 갈 것
    “주한미군, 우리가 나가라고 해도 안나갈 것”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의 특사로 미국·일본을 다녀온 민주당 정대철(鄭大哲·59) 의원을 서울 신당동 남산타운아파트 자택에서 만났다. 정의원은 마침 방미 시기가 우주선 컬럼비아호 사망자 추도식과 겹쳐지는 바람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면담하지 못하고 딕 체니 부통령, 콜린 파월 국무장관 등을 만났다.

    노무현 당선자가 주변 4강 등에 파견한 특사는 중국 이해찬, 러시아 조순형, 다보스회의 정동영, 미국과 일본에 정대철·추미애 의원이다. 모두 노당선자의 승리를 위해 몸을 던져 뛰었던 1등 공신들로 논공행상식 특사단 구성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그러나 정의원은 박사과정에서 북한 문제를 전공했고 영어 능력도 있으니 다른 특사들보다는 전문성을 갖춘 편이다. 정의원은 미국 미주리 주립대학에서 ‘북한 통일 전략의 계량적 분석(A Quantitative Analysis of North Korea’s Unification Strategies)’이라는 논문으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35세에 서울 종로·중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에 진출한 정의원은 1980년 5·18 이후 한 번의 ‘정치 방학’과 두 번 낙선의 고배를 마시는 우여곡절을 거쳐 5선 의원의 관록을 쌓았다. 이번 대선에서는 노무현 당선자의 지지도가 한 자릿수로 추락하기 직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어려운 여건에서 대선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남산타워가 바라보이는 남산타운아파트 단지는 모두 5000가구로 주민수가 1만5000명에 이르는 대규모이다. 초행이라 택시를 잘못 내리는 바람에 10여 분 동안 거대한 아파트의 숲을 통과해 정의원의 집을 찾아갔다.



    국회의원 선거를 비롯해 중구에서 치러지는 각종 선거는 남산타운아파트 주민들의 표심에 좌우된다고 한다. 대개 15평·25평형에 사는 서민들은 민주당을 찍고, 35평·42평형에서는 한나라당 지지자가 많다고 한다. 정의원이 사는 아파트는 42평으로 ‘한나라당 평형’이다.

    정의원은 응접실 바닥에 편한 자세로 앉아 대통령선거 비화, 대미·대일 특사와 북핵 문제, 민주당의 진로 등에 관해 의견을 털어놓았다. 대미 특사 활동과 북핵이 민족의 생존과 관련한 중요 문제이기는 하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대선 스토리로 인터뷰를 시작하는 것이 더 흥미로울 것 같다.

    노 후보 집에서의 새벽 기도

    ―단일화 이후에는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후보가 앞서가다가 투표 전날 밤 선거운동 종료 1시간 반을 남겨놓고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가 지지를 철회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뀌었지요. 신문에 안 난 이야기를 중심으로 숨막히던 순간을 재구성 해보시죠.

    “대외활동은 주로 김원기(金元基) 고문이 했고 나는 당사 안에서 선거대책 본부를 지휘했습니다. 투표일 하루 전인 18일 저녁 7시경부터 정몽준 대표가 기분이 매우 나빠져 지지를 철회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낭설이려니 했는데 자꾸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후 9시경 차를 타고 노후보가 마지막 유세를 하던 동대문운동장으로 갔어요. 노후보에게 지지 철회 가능성 얘기를 했더니 믿지 않아요.

    그런데도 지지 철회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는 연락이 계속 오는 겁니다. 정몽준 후보는 그 때 종로 4가 우래옥에 있었습니다. 노후보한테 얘기도 하지 않고 우래옥으로 갔더니 식사가 끝나 정대표 일행을 태운 버스가 떠났습니다. 버스를 쫓아가다가 내 차가 신호등에 걸리고 말았어요.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에 있는 국민통합21 당사로 올라가는데 벌써 김행 대변인이 지지 철회 발표를 했다는 거예요. 국민통합21 당무회의장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습니다. ‘지금 밥이 다 익어가는 판에 당신들이 이러면 되느냐’고 눈물로 하소연했더니 정몽준 대표는 귀가했다는 거예요. 곧 이어 한화갑 대표, 이상수 사무총장이 들어와 국민통합21 당무위원들과 논쟁이 벌어졌어요.

    노후보가 정동영·추미애 의원을 거론하며 ‘정대표의 약을 올렸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내가 ‘노후보가 잘못했다 하더라도 지지 철회까지 가면 되느냐’고 따지자, 이철·최운지 전 의원이 나서 노력을 해보겠다고 했어요.

    민주당사로 돌아오니까 신계륜 비서실장 방에 국회의원 40여 명이 선대위 간부들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어요. 내가 노후보에게 ‘지지 철회를 번복시키러 정몽준 대표 집에 갑시다. 최후의 수단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노후보가 ‘안 가겠다’고 버텨 손목을 붙잡아 끌다시피 했습니다.

    둘이 차를 타고 평창동 정대표 집으로 가는데 이화여대 부근에서 노후보가 ‘정선배도 이런 걸 하려고 했죠’라며 한숨을 쉬는 거예요. 노후보가 ‘차 돌려’ 하면서 기사에게 돌아가자고 하길래, 나도 ‘다시 돌려’라고 버럭 소리를 질러 평창동까지 갔어요. 정대표 집에 도착하니까 문을 안 열어주었습니다. 처절한 느낌이 들더군요.

    30분을 기다렸는데도 약주를 많이 마셔 잔다며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부인이라도 만나자고 했더니 어물어물해요. 30분 가량 추위에 떨다가 노후보를 보내고 이재정 유세본부장과 내가 1시간반 정도 더 기다렸습니다.

    이른 새벽 김상현·김원기·김경재·이재정 의원 등 8,9명이 명륜동 노후보 집 문을 두드리니까 그 때까지 자고 있더군요. 권여사가 내복 바람으로 있길래 내가 농담으로 ‘막내 만들고 계셨수’ 했더니 웃어요.

    이재정 의원이 성공회 신부입니다. 이의원이 일어나서 큰 소리로 10분 동안 기도를 했어요. 감격적이었습니다. 간절하게 기도를 하니까 노당선자가 ‘아멘 아멘’ 하더니만 주섬주섬 옷을 입고 따라 나왔어요.

    노후보는 당사에서 ‘아직 공조가 살아 있다’고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하기 싫어하는 것을 우리가 억지로 시켰습니다. 그리고 노후보를 김해 진영에 있는 부모님 산소로 내려보냈습니다. 털털 털고 고향에 가는 모습이 국민한테 괜찮게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선 며칠 후 정몽준 대표를 만났죠? 뭐라고 하던가요.

    “정대표가 먼저 술 한잔 하자고 전화를 했어요. 만나는 게 꺼림찍해 노무현 당선자한테 보고를 했더니 마음대로 하라고 그래요. 정몽준 의원과는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2년 동안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던 적이 있지요. 정대표는 ‘평창동 집까지 찾아왔는데 안 만나 죄송하게 됐다’면서 ‘소주 먹고 떨어져서 그랬다’고 말하더군요. 내가 ‘문 안 열어줘서 당시에는 갑갑했지만 국민적 동정을 사는 바람에 선거에는 결과적으로 도움이 됐다’고 말했더니 정대표도 웃더군요.”

    ―한 시간 반만 참았으면 공동 정권이 탄생했을 판인데 후회하지 않던가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더라구요. 후회하는 모습을 보인 거죠. 유학 가겠다는 계획을 말하기에 제가 위로했습니다.”

    “꼬리곰탕끼리 해보자”

    정대철 의원은 노후보보다 나이가 두살 많다. 그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과 후보경선을 벌인 경력이 있다. 그러나 그 후로 국회의원 낙선과 구속 수감이라는 암초에 부닥뜨려 대통령 후보의 꿈을 일단 접었다.

    ―선대위원장을 선뜻 맡기가 쉽지 않았을텐데요.

    “9월 초 김원기 고문과 노무현 후보가 함께 나를 찾아오겠다고 하더군요. 집 근처 타워호텔에서 만났습니다. 내가 ‘당신이 잘 나갈 때 같으면 선대위원장 안 한다’고 했지요. 그 때 노후보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14.5% 였어요.”

    노후보 지지율이 더 추락해 한 자릿수까지 내려가면 대통령선거 경쟁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와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로 압축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올 무렵이었다.

    “민주당은 해공 신익희, 유석 조병옥, 운석 장면 그리고 정일형 박사, 김영삼·김대중씨가 만들어놓은 정당입니다. 이 정당을 흔들어서 붕괴시키면 되겠습니까. 115명 국회의원 중에서 절반 이상이 당을 뜨겠다는 판이었습니다. 정치혁명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국민경선을 통해 선출한 후보를 일시적으로 인기가 떨어졌다고 해서 바꾸자는 것은 언어도단이었습니다. 나는 조순형씨에게 ‘꼬리곰탕’끼리 공동 선대위원장을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조순형씨는 유석 조병옥 박사 아들이고 정의원은 8선의원에 제2공화국에서 외무부장관을 지낸 정일형 박사의 아들이다. 부모 꼬리라는 의미로 2세 의원들 사이에서는 ‘꼬리곰탕’이라는 은어를 쓴다.

    “꼬리곰탕끼리 모여 민주 정당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느낌을 국민한테 줘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김근태 의원은 재야운동 대부이고 정동영 의원은 호남의 떠오르는 별이니 국민들한테 인기가 있고 젊은 계층을 대변할 수 있습니다.

    김원기 의원은 ‘노당선자와 통추를 함께 한 내가 선대위원장을 맡으면 당신한테 집중이 되지 않는다’며 ‘바깥에서 일하겠다’고 했습니다. 김근태 최고위원은 단일화 전까지 권유를 했는데 안 맡았습니다. 정대철·조순형·정동영 3인 공동위원장으로 가면서 내가 집행위원장으로 수석 공동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이상수 사무총장과 선거자금 모금을 하면서 노후보에게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노후보는 ‘알아서 적법하게 하시다가 잘못되면 두 분이 감옥소 가세요’라는 말만 했습니다. 민주당의 선거자금 한도가 340억원이었는데 300억원도 못썼어요.”

    정치교체 vs 정권교체

    이회창 대세론이 계속되면서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이 한나라당 쪽에 몰렸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선거자금 면에서도 한나라당이 훨씬 풍족한 편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선거 전에 쓴 돈까지 합치면 여야가 뒤바뀐 형국이었습니다. 한나라당 쪽의 조직과 자금이 윤택하게 돌아가는 것을 우리도 금방 느낄 수 있었지요. 우리는 조직 선거보다는 미디어와 인터넷 선거에 맞추었습니다. 그 결과 돼지저금통 모금에서 무려 74억원이 들어왔습니다.

    대기업으로부터는 돈을 받지 말자고 이상수 사무총장과 의견을 나누었는데 재벌들이 불안하게 생각하더라고요. 한나라당에 열을 줬으면 우리한테도 하나나 둘은 줘야 안심이 되는 거지요. 일종의 보험이겠지요.

    “주한미군, 우리가 나가라고 해도 안나갈 것”

    노무현 후보의 손을 맞잡아 치켜든 정대철(오른쪽) 정동영 의원정대철 의원은 대표적인 체인스모커다.

    재벌을 불안하게 하면 완전히 저쪽으로 넘어갈 것같았어요. 법인당 후원 한도액이 2억원이니까 산하계열사와 법인이 30개인 재벌로부터는 합법적으로 60억원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나라당에 비해 5분의 1, 10분의 1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한나라당이 10월말 후원회를 열어 118억원을 걷었습니다. 신문에 공개된 금액입니다. 민주당 후원회에서는 5억원이 걷혔습니다. 약정액을 합하면 조금 더 되지만 약정액은 떼어먹는 수가 많거든요. 그러나 이상수 사무총장과 내가 기십억원 들어왔다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기십억원은 20억∼90억원이지요. 사기가 떨어질까봐 더 들어왔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실제로 5억원밖에 안들어왔어요.”

    국민통합21의 후원금 50억원에도 못미치는 액수다. 민주당이 후원회를 연 지 일주일 후 단일화가 이루어지면서 노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러자 30대 재벌들이 돈을 더 내겠다고 줄을 섰다. 이 맛에 정권을 잡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

    ―정의원은 이른바 KS에 명문가 출신이고 노무현 당선자는 상고 출신으로 가난한 농민의 아들입니다. 정몽준 대표와 노무현 후보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노당선자와 정의원 사이에 케미스트리(chemistry·화학)랄지, DNA가 맞는다고 생각합니까.

    “맞는 데가 좀 있습니다. 비민주적인 것을 민주적으로, 불법적인 것을 합법적으로 고쳐가는 것을 개혁이라고 한다면 나도 개혁을 상당히 중시하는 입장입니다.

    또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습니다. 노후보가 어려운 환경에서 자수성가한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1997년 노후보가 통추 멤버들과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음식점을 할 때 가끔 이철·박석무·김정길·김원기·원혜영·유인태 같은 분들과 어울려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쪽 개혁 세력이 김상현·정대철을 대표로 국민경선제추진위원회(국경추)를 만들었고 그 쪽은 통추라고 했습니다. 국경추와 통추가 맥을 같이하고 친하게 지냈지요.”

    ―DJ 집권 5년 가운데 이회창씨가 58개월 이겼고 노무현씨는 고작 2개월 이겼다는 시중의 조크가 있어요. 노후보가 승리한 원인은 뭐라고 봅니까.

    “쉽게 얘기하면 하늘이 도운 겁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회창씨의 실수입니다. 세 번째는 노무현 당선자가 잘한 거죠. 이회창씨의 슬로건은 정권교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교체를 내걸었습니다. 1인 보스, 1인 지도자로부터 국민이 참여하는 민주적 국민정치로 바꾸자는 것인데 그게 먹혔다고 봅니다.

    또 지역 편중을 타파해 전국 정당화하고 돈을 덜 쓰는 선거, 미디어 선거, 인터넷 선거를 한 것도 승인의 하나라고 볼 수 있어요”

    인위적 언론개혁은 없다

    정대철 의원은 경기고 58회, 서울대 법대 62학번이다. 이회창 후보의 KS 9년 후배이다. 정의원은 까마득한 직계 선배에게 국회에서 신상발언을 통해 “정치를 먼저 한 선배로서 충고하겠는데 정치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일갈한 적이 있다. 정치란 그런가 보다.

    ―이회창 총재가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이회창씨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다음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칠순 가까운 나이에 유학을 떠나는 걸 보며 아직 꿈을 접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하고 영국 유학 갔다와서 국민회의를 만들었으니까. 그렇지만 정치 환경이 크게 바뀌고 있어서….”

    ―대선 후 언론사들을 찾아다니며 허니문 기간을 갖자고 했다면서요.

    “김원기 고문과 둘이서 대개 그런 요지의 말을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당선자가 메이저 신문과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지요. 사주, 중역, 편집국과 논설실 간부들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잘하겠으니 너무 적대시하지 말라는 부탁을 드렸습니다.”

    ―노무현 정부의 언론정책이 어떻게 전개되리라고 봅니까.

    “기본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인위적으로 언론개혁을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언론 스스로 고칠 점이 있다고 생각하면 자율적으로 개선해야지, 바깥에서 간섭하는 것은 안 됩니다. 언론 개혁 캠페인을 하는 것도 언론자유의 침해로 보일 가능성이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차기 민주당 대표 0순위라는 보도가 나오던데요.

    “김원기 고문과 나는 사적으로 형님 동생 합니다. 둘이서 이해관계에 충돌이 생기면 나는 100% 형님에게 양보합니다. 형님이 당 대표를 맡으면 내가 돕겠다고 했습니다. 아직 그것이 정돈되질 않았습니다.”

    ―전당대회는 언제 열립니까.

    “확정이 안 됐습니다. 국내 정치를 잘해 내년 총선에 승리해 개혁정책을 밀고 나가야 됩니다. 인위적인 정계 개편은 결코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내년 총선에 이겨야 합니다.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킨 사람의 하나로서 내년 총선까지는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일하겠습니다.”

    ―민주당이 어떤 방향으로 개혁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지요.

    “2001년 10월25일 재보선에서 민주당이 3대 0으로 완패했죠. 이 때부터 당 개혁안을 만들고 당헌을 개정했습니다. 지금의 개혁안에 일부 마땅치 않은 점이 있어 더 토론을 해봐야 합니다. 1인 보스 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지역 편중 정당에서 전국 정당으로, 돈 덜 쓰는 선거, 원내 중심 정당, 정책 중심의 정당으로 나아가려는 다섯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정치풍토가 하루아침에 크게 변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정치인들의 행태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습니다. 개혁의 방향을 정해놓고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목표가 너무 높아서도 안됩니다.

    개혁은 소위 1P와 3S를 갖추어야 합니다. 유명한 학자의 이야기입니다. 1P는 Principle(원칙)입니다. 원칙 있는 개혁이어야 합니다. 3S는 Substance(내용) Scope(범주) Support(지지)입니다.

    개혁은 내용이 있어야 됩니다. 예를 들면 실명제 그 자체는 괜찮아 보이지만 내실이 없었습니다. 가명이 차명이 됐고 차명이 또 다른 차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에 범주가 정해져야 합니다. 목표가 너무 높아 예수님이나 부처님만이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개혁을 하면 실효성이 없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국민적 지지가 중요합니다.”

    ―민주당은 DJ당, 지역적으로는 호남당이라는 이미지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민주당에서 영남 출신 대통령이 나왔습니다. 민주당이 전국 정당화하고 지역주의 선거 행태가 내년 총선부터 개선되리라고 전망할 수 있겠습니까.

    “광주에서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해 호남을 근거로 한 민주당이 경상도 김해 사람을 후보로 만들어내 당선시켰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민주당이 점진적으로 지역정당의 틀을 벗어날 것이며, 국민들도 이제는 마음의 문을 열리라고 믿습니다.

    정치권에서는 탈지역정치를 법률적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합니다. 중대(中大)선거구가 먹힐지 모르겠습니다만 해야 합니다.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김대중 후보가 대결했을 때 박후보가 호남 지역 6개 군에서 이겼습니다. 김대중 후보가 부산에서 39%를 득표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3김 정치가 종식되면 점진적으로 지역 편중성이 타파될 것입니다.”

    ―개혁당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하고 있습니까.

    “우리 당 안에서 개혁을 하다가 안 되면 뒤집어엎고 신당을 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개혁당의 위상과 함께 깊이 논의해야 합니다. 개혁당은 인터넷을 매개체로 20,30대를 주류로 하는 정당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우리 당하고 합당하는 것이 바람직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정책 연대로서 계속 가는 것이 나을 수도 있고 양당의 필요에 의해 합해질 수도 있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정책 연대가 정답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북한 보유 핵무기는 2~3개

    이쯤에서 정치 이야기를 거두고 특사로 미국에 다녀온 이야기로 들어갔다. 김대중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과제를 안고 출범했다면 노무현 정부는 북핵위기 해결의 임무를 부여받고 임기를 시작한다.

    ―평양은 벼랑끝 전술을 펴면서도 이라크 다음에 자기들 차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미국이 불가침협정을 체결하고 중유를 다시 제공하면 핵을 포기할 의사가 있다고 여러 경로를 통해 흘리잖아요. 북한의 그런 의사표시에 대해 미국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핵포기를 분명하게 선언하라는 것이 미국의 기본 입장입니다. 우리 특사단은 3원칙을 주장하면서 유연성있게 직접 대화를 하라고 권했습니다. 3원칙은 첫째 북한 핵은 용납될 수 없다, 둘째 평화적으로 대화를 통해서 해결한다, 셋째 한·미·일 긴밀한 공조 위에 한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미국 편도 아니고 한국 편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북한 편도 아닙니다. 미국 국방부에서는 북한이 단기간 내에 핵을 6∼8개 정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 수를 미국은 1~2개, 우리 당국은 2~3개로 봅니다. 미국이 추정하는 북한의 플루토늄 보유량은 7∼12㎏, 우리 추정치는 7∼22㎏입니다.

    우라늄탄을 만드는 데는 빨라도 2년 걸립니다. 농축 우라늄 원심분리기 한 대 가격이 10만달러나 나가는데, 그게 수천 개 있어야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중유도 못 사오는 판인데 쉽지 않을 겁니다. 플루토늄 탄은 사용후 핵연료에서 추출해내면 단기간에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존이 달린 문제입니다. 노동2호가 미국까지는 날아가지 못하지만 미국은 북한이 이 미사일을 테러국에 팔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나쁜 행동에는 보상을 않겠다고 협상을 거부하다가 지금은 협상은 안 하겠지만 대화는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칼럼니스트는 협상은 섹스고 대화는 전희냐고 빈정거렸어요.

    “나도 사실상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화는 협상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저 대화만 하고 지나간다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협상이 있어야 됩니다.”

    ―말을 바꾸기가 쑥스러우니까 그러는 거겠지요.

    “그렇습니다. 자기들끼리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수군수군해요. 그러나 협상을 안 하겠다는 말 속에는 북한은 신뢰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인식이 깔려있습니다. 신뢰를 쌓기 전에는 협상의 의미가 없다는 거지요.

    제네바 합의서가 휴짓조각이 됐다고 보는 미국으로서는 가시적인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는 집단과 협상해봐야 무슨 소용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거지요.”

    ―북한이 수천 발의 미사일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남쪽에도 막대한 피해가 예상됩니다. 그래서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말은 당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학자들은 북한 같은 불량국가를 다루는 데는 무력사용을 불사하겠다는 협박이 때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미국이 협박을 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전쟁을 원한다기보다는 압박작전인데 한국은 자꾸 ‘평화 평화’ 하면서 물타기를 한다는 불만이 미국에 있다는 겁니다.

    “압박외교(Coercive Diplomacy)가 필요함을 인정합니다. 우리가 평화적으로 대화를 통해 해결한다고 하는 것이 압박외교를 완전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무섭게 위협을 해야 말을 들을 상대라면 협박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협박만 계속하다 보면 전쟁으로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부시는 기도를 자주 하는 독실한 종교인입니다. ‘악의 축’도 성경식 표현이지요. 북한을 악마로 보는 미국의 시각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외교에서 ‘악의 축’이라는 표현이 과연 슬기로운 걸까요. 마음 속의 평가를 유보하고 이쪽으로 끌어오는 외교라는 측면에서 ‘악의 축’은 적당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렇게 표현을 해놓으니까 북미관계가 더욱 경직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한국을 동등하게 대우해 달라고 요구

    ―미국 언론에 노무현 당선자를 ‘반미주의자였다’라고 소개하는 기사가 한때 많이 나왔습니다. 미군 철수를 주장했던 인물이라는 프로필도 자주 등장했습니다. 백악관이나 국무부 혹은 의원들 중에 노당선자의 과거 경력에 대해서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기사를 읽기는 했지만 직접 듣지는 못했습니다.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콜린 파월 국무장관, 제임스 켈리 차관보, 리처드 루가 상원 외교위원장, 조지프 바이든 민주당 간사, 존 워너 상원 국방위원장 등 여야 의원을 두루 만났습니다. 그들에게 ‘노동운동가와 인권변호사를 할 때의 노무현과 국회의원을 할 때의 노무현은 달랐고 대통령 후보였을 때와 당선자일 때, 대통령이 됐을 때는 바뀔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노무현 후보가 반미한 적은 없고 미국과 한국이 너무 불평등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대등외교론을 편 적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미국에 대해 민족적인 입장에서 여러 가지 주장을 했지만 대통령 후보가 된 이후의 노무현은 반미주의자가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동북아 평화유지 및 힘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통일이 된 후에도 미군이 주둔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공화당 정부 출범 이후 김대중 정부의 대미 관계가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이 김대통령보다 노무현 당선자를 더 우려할 수도 있습니다. 대미 관계가 좀더 순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촛불 시위 이후 미국에서 한국민이 원하지 않는다면 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는 말이 가끔 나오고 있습니다. 블러핑(허풍)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미국에 다녀온 민주당 함승희 의원은 미군철수와 관련해 정부와 여당이 안이하게 판단하고 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일부 젊은이들이 반미감정을 갖고 있듯 미국 의원들 사이에서 반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특사단은 못 만났지만 한화갑 대표와 함승희·장영달 의원은 그런 의원을 만났답니다. 나이든 의원들 중에 몇몇 분이 ‘우리가 피 흘려 자유를 지켜준 나라에서 반미로 나오는 것은 배은 망덕이다’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런 의원은 공화당에도 있고 민주당에도 있습니다.

    “주한미군, 우리가 나가라고 해도 안나갈 것”

    대선과 미국 방문 등을 주제로 대화하는 동안 그는 20개비의 담배를 피웠다. 왼쪽은 황호택 논설위원

    미군이 전세계 80개국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주둔국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다시 말할 여지가 없지요. 주둔국이 원하지 않으면 철수하겠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라서 곧바로 철수한다는 의지 표명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괜히 과장할 필요도 없고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미군의 한반도 주둔에 한국과 미국의 이익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반도를 동북아의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미국의 전략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막말로 우리가 나가라고 해도 나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정치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그렇게 봅니다.

    젊은이들의 반미감정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1950년대에 당신들이 우리를 어린아이로 봤다면 50년이 지난 지금은 사춘기를 지나 성년이 됐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들 바라보는 것처럼 30이 되고 40이 돼도 아직 어린이 취급을 하니 기분이 나쁘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되고 국내총생산(GDP) 세계 12위, 무역규모 13위가 됐다. 우리를 이제 어른으로 대해다오. 이러한 요구가 붉은 악마에서부터 촛불 시위까지 계속된 것이다. 민족적인 자존심이라고 거창하게 부르지 않더라도 당신들과 동등하게 대화할 수 있을 만큼 컸다는 것을 인정해다오.’”

    윤영관 교수, 악의적 질문에 말렸다

    ―촛불시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하던가요.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촛불시위의 원인에 대해서는 재판 제도의 상이성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미국은 교통사고에 고의성이 없으면 민사 사건으로 처리하는데 우리는 과실범으로 형사 처벌합니다. 여학생을 두 명이나 죽였는데 무죄라는 것은 미국 우월주의라고 인식하는 데서 국민적 불만이 생긴 겁니다.

    문정인·윤영관 교수, 추미애·유재건 의원 등이 아주 솔직담백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여태까지 외교관들이 미국 가서 좋은 소리만 했을지 모르지만…. 노무현 당선자가 옛날에 조금 반미적인 색채가 있었더라도 지금은 변하고 있고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어요. 그러나 토론을 많이 하다보니 윤영관 교수가 저쪽의 악의적인 질문에 말렸습니다.”

    한 참석자가 윤교수에게 북한 핵과 체제붕괴 사이에서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는 질문을 하자 “북한이 붕괴하기보다 핵무기를 보유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있다”고 답변한 것이 미국 신문에 보도되면서 국내에서 물의가 일었다.

    “로버트 갈루치 전 국방부 차관보, 웬디 셔먼 전 대북정책 조정관, 리처드 솔로몬 전 국무부 차관보 등 한국통들이 30명 가량 참석했습니다. 영어로 하다가 급하면 통역으로 하고…. 아무래도 한국말이 빠르니까. 말하느라 밥을 못먹을 정도였습니다.

    내가 나중에 사석에서 윤교수에게 그런 질문은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는 질문 아니냐고 말했어요. 그 질문에는 ‘우리는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는 않지만 북한의 붕괴가 통일로 이어진다면 말릴 이유는 없다. 핵도 안 된다’는 게 정답 아니겠습니까.”

    ―일본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만나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북한 핵문제에 관해 일본이 유럽연합(EU)·러시아·중국 등 각종 채널을 통해 북한을 설득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미국이 북한과 유연성 있게 포괄적으로 대화할 수 있도록 권유해달라는 말도 했습니다.

    한일관계는 김대중 정권 이후 더 우호적으로 개선됐는데 새로운 세기를 맞이해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나아가도록 노력하자고 했습니다. 무비자 협정을 체결하자고 했더니 불법 체류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며 난색을 표명하더군요.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한국과 중국인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고이즈미- 김대중 간에 협의한 대로 2차대전 전범을 제외한 제3의 추모시설을 서둘러 지어달라고 했습니다.”

    ―DJ의 소위 햇볕정책이 도마 위에 올라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개명(改名)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오고….

    “포용정책으로 바꾸려 합니다. 햇볕정책에는 상대방을 개혁시켜 우리와 비슷한 체제로 동화시키겠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내포돼 있습니다. 이젠 국민적 동의를 얻고 야당도 함께 나갈 수 있는 포용정책이 돼야 합니다. 나 같았으면 정상회담할 때 이회창씨를 데려가거나 아니면 한나라당의 부총재라도 데리고 갔을 것입니다.”

    ―북쪽에서는 햇볕정책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햇볕의 반대는 어둠 또는 동토(凍土)이거든요. 그러나 Engagement Policy의 번역어인 포용정책은 일반인들에게 좀 어려운 개념이에요. 평양에서 북쪽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화해협력 정책이라는 말은 싫어하지 않더군요. 굳이 개명을 한다면 북쪽에서도 거부감이 없는 화해협력정책이 어떨까요.

    “좋은 제안입니다. 같은 뜻이면 상대방의 마음을 살 수 있는 표현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탈북자라던가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분들 중에는 화해협력을 할 게 아니고 북한을 봉쇄해 붕괴시켜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한이 지금 붕괴된다면 남쪽에 엄청난 부담이 될텐데요.

    “북한을 붕괴시키자는 건 흡수통일을 하겠다는 뜻이지요. 북한이 스스로 붕괴한다면 막을 이유는 없겠지만 우리가 능동적으로 붕괴를 시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는 과거 북진통일·적화통일하고 궤를 같이하는 발상으로 결국 분쟁이나 전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상선의 대북 비밀송금을 두고 시끄러운데요. 당선자 측에서도 여러 가지 해법이 나오고 DJ가 모든 걸 털어놓고 사과를 해야 하느니, 검찰수사 또는 특검을 해야 하느니, 논란이 있습니다.

    “국민적 의혹은 밝혀야 됩니다. 지금은 한식에 밝혀지느냐 청명에 밝혀지느냐가 문제입니다. 노무현 정권을 위해서나 김대중 정권을 위해서는 한식에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김대중 대통령과 박지원·임동원씨 세 분 정도는 그 내막을 소상히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실상을 국민 앞에 고해성사하고 나서 예민한 대북관계를 고려해 정치적으로 결말이 나야 이롭다고 봅니다.”

    ―DJ 정부의 대북 지원에 대해서 야당과 언론에서는 대북 퍼주기라는 비판이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금강산 입산료를 포함해 5년 동안에 10억달러 정도 나갔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과거 정권에 비해 많이 나간 것은 아닙니다. 대북 유화정책을 통해 한반도 긴장이 완화되고 전쟁 가능성을 없앤 것은 높이 평가해야 됩니다. 독일의 경우에도 동독 물건을 비싸게 사고 서독 물건을 동독에 값싸게 파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마찬가지죠.”

    행정수도 공약 반드시 지켜야

    북한 문제와 대미 특사단 이야기를 이쯤 해두고 새 정부와 정의원의 정치적 미래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노무현 당선자의 공약 중에서 대표적으로 충청도의 표심을 산 게 행정수도 이전인데요. 당선자 임기 내에 가능하리라고 보는지요.

    “임기 안에 행정수도의 기초는 닦을 수 있다고 봅니다. 공약이기 때문에 해야 하고 또 필요합니다.”

    ―이 인터뷰가 실린 ‘신동아’ 3월호가 나올 무렵이면 DJ 정부가 간판을 내립니다. DJ 정부에 대한 평가를 간략하게 해주십시오.

    “IMF 경제위기를 단시일 내에 극복하고 남북 화해협력의 기조를 다진 업적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의약분업은 국민적 지지를 유도하지 못해 실패했습니다. 야당에 조금 더 슬기롭게 대응하지 못했던 오류가 있었습니다. 독한 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를 하다가 시어머니가 됐으면 며느리를 조금 더 잘 다뤘어야 하는데….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안에서는 평가가 낮지만 바깥에서는 평가가 꽤 높습니다.”

    ―1998년 경성그룹 사건으로 구속 수감이 되었죠. 그때 DJ한테 서운하다는 토로를 하지 않았나요.

    “바깥으로 서운하다는 표현을 한 일은 없습니다. 내가 힘이 약해지고 도덕적으로 결여되면 세상이 버리는 법입니다. 검찰에서 1차 조사를 받고 무혐의 통보를 받았는데 재조사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재판의 중요 증인을 검찰이 1년에 300회 불러냈습니다. 교도소에 있는 사람을 재우지 않고 진술을 강요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수사기관에서 증인을 거의 매일처럼 불러내 압박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한 적이 있습니다. 그거 하나만 봐도 알만한 사건이 아닙니까.

    대법원에서 3000만원 건은 무죄판결을 내리고 1000만원 건은 다시 재판하라고 해서 파기환송했습니다. 주요 증인이 4년을 살고 출소했습니다. 증인이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재판결과가 좋으리라고 전망을 합니다.”

    ―고법 판결이 정치 행로에 큰 영향을 미치겠군요.

    “유죄판결이 확정되면 국회의원도 끝이고 당분간 정치 못하는 거죠. 이 일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괜찮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정의원에게는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라는 제목의 저서가 있다. 5·16 이 터지면서 부친은 수감되고 가족들이 한남동 외무장관 공관에서 쫓겨났으나 고등학교 3학년생이던 그는 공관에 남아 쿠데타군과 3개월 동안 동거를 하는 기이한 체험을 했다. 그의 가족사에는 2공화국과 5·16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려고 했더니 아버지가 말렸습니다. 장면 총리를 두 번 죽인다는 거지요. 영감이 1981년에 돌아가실 때까지는 엄두를 못냈습니다. 미국의 외교 문서도 25년이 지난 후에는 공개하는데 나는 근 40년 만에 공개를 한 겁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지고 시간이 날 때 나와 관계가 있는 역사의 증인들을 죽 만났습니다. 자형이 장면 총리 비서실장이던 김흥한 변호사입니다. 참모총장을 했던 최경록 장군은 집안 형님뻘입니다. 이태희 검찰총장은 친구 아버지이지요. 그 사람들을 인터뷰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언젠가 써야겠다고 결심을 하다가 1990년대 들어서야 손을 댔습니다.”

    부친 정일형 박사는 김대중 대통령이 1972년 대통령선거에 나왔을 때 선거대책본부장을 했다. 모친 이태영 여사는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로 가정법률상담소를 세워 여권신장에 지대한 공로를 남겼다. 정일형·이태영 부부는 김대중-이희호 부부와 인연이 깊다.

    기왕 인터뷰를 시작한 김에 이태영 여사가 평생 간직했다는 DJ의 비밀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정의원은 “어떻게 알았냐”며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는 “내 입으로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말했다.

    정의원은 DJ 비판 그룹에도 가담하고 DJ와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서 DJ 심기를 적지 않게 건드렸다. DJ는 계보 내에서 자신에 대해 반기를 드는 사람은 인정사정 없이 내쳤다. 김상현 의원 등 그러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정의원은 아무리 DJ 비판의 기치를 들어도 DJ가 끝까지 끌어안았다.

    DJ는 한때 정의원을 후계자감으로 보고 공부를 시키려고 노력했다. 둘이서 토론을 하다가 정의원에게 책 몇 권을 추천하며 읽고 나서 다시 토론하자고 할 정도로 자상한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DJ의 각별한 애정과 관련해서는 선대의 덕을 본 것이 아닌가요.

    “그랬을 겁니다. 나는 나름대로 DJ한테 ‘예스맨’이 되지 않고 올바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DJ가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해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바른 소리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보고 그렇게 했습니다.

    나는 유신 말기에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발언을 해 마이크가 열여섯 번이나 끊기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때 김용태 공화당 총무는 ‘저것도 제 아비가 간 길로 가게 하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아버지처럼 의원직을 빼앗아야 한다는 거지요.

    그후 정발연 만들어 3당 통합 이후 꼬마 민주당을 하던 이기택·이철·김정길·노무현과 합치는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야 비호남 지역에서도 표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1997년에도 대통령후보 경선제를 주장해 관철시키고 경선에 출마했습니다. 나름대로 DJ 이후를 내다본 거지…. 경선에서 이기리라는 생각은 안했습니다. 김대통령으로서는 좀 야속하고 섭섭하기도 했을 겁니다.

    나는 김홍일 의원이 사퇴해야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해 김홍일 의원과 1년여 동안 말을 않고 지낸 적도 있습니다. 김의원이 내가 교도소 있는 동안에 찾아와 화해를 했습니다.(웃음)

    내가 김의원에게 ‘우리는 둘다 꼬리 곰탕인데 내가 개인적으로 당신한테 무슨 감정 있겠나. 한 표라도 더 얻어 확실하게 김대중 대통령 출현을 보려는 충정에서 그런 말을 했다. 자네가 그걸 이해 못한다면 나는 도리어 섭섭하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정의원은 장점이 많은 사람이다. 좋은 집안 출신으로 KS 학벌에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갖추었다.

    ―정의원의 장점은 저서와 선거 홍보물에 많이 나왔으니까 새삼스럽게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스스로의 결점에 대해 들어볼 기회는 적겠지요.

    “너무 솔직하게 얘기를 다 해서 곤란하다, 좀 덤벙댄다는 얘기가 있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말고도 또 있다. 정의원 인터뷰를 앞두고 주변 취재를 해봤다.

    ―주위에서 말하는 첫 번째 단점은 술 좋아하는 한량이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자기 관리에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1996년 2차 낙선하고 나서 자기 관리를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첫째 건 아직도 못 고치고 있고(웃음)…”

    DJ에게 이헌재씨 소개

    정의원은 1977년 아버지가 명동 구국선언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의원직을 상실하자 미주리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급거 귀국해 종로·중구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나 그 이후의 정치역정은 순탄한 편이었다고 하기 어렵다. 1980년 5·18과 함께 정치활동 금지를 당했고 두 번 낙선 기간을 합쳐 12년 동안 원외 생활을 했다. 정계투신 26년에 14년(5선의원) 동안 금배지를 달았다.

    “원외 생활을 제일 오래한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이고 그 다음이 김상현·조윤형씨, 네 번째가 정대철이라고 그래요. 물론 노무현 당선자도 보궐선거까지 합해 겨우 2선이니까 원내보다 원외에 있었던 기간이 길었습니다.

    나는 여당 의원으로 감옥에도 가봤습니다. 파란만장은 아니더라도 우여곡절은 많았습니다. 의원 배지를 달고 있는 대부분의 기간 야당의 비주류였고 당직을 맡는 복도 없었죠. 내가 부총재와 최고위원을 올해로 12년째 하고 있습니다. 제일 오래 한 사람이 이기택씨이고 그 다음이 정대철입니다. 기업으로 치면 힘 없는 대표이사 부사장이라고 할 수 있죠. 대표이사 사장을 못했습니다.”

    이태영 여사는 외아들인 정의원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정의원이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7순의 모친이 일일이 대의원석을 돌아다니며 아들에게 한 표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이태영 여사의 말년 모습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여사는 외아들이 출소한 지 한 달 만인 1998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 때는 치매가 깊이 진행돼 자기 속으로 난 아들을 잘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정의원은 이여사가 여든세 살 때인 1996년 1월 외아들의 생일에 써준 글을 표구해 응접실에 걸어놓고 있다. ‘의롭게 살아 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라’는 요지다. 그런데 이미 치매가 상당히 진행됐던 듯 맞춤법이 군데군데 맞지 않는다.

    ―좋아하는 주종은 무엇이고 주량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저는 소주하고 양주를 좋아합니다.”

    ―소주 몇 병이나 듭니까.

    “소주는 한 병, 많이 먹으면 두 병입니다. 위스키는 반 병 이상 못 먹어요. 나이 드니까 조금만 먹어도 취하고….”

    ―술 친구를 거명해줄 수 있습니까.

    “가까운 친구들이죠. 정성철 변호사,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이헌재씨는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이회창 캠프의 핵심 멤버였습니다. 내가 선거 끝나고 DJ한테 소개를 했습니다. ‘경제 잘 알고 똑똑한 친구가 있는데, 하나 걸리는 게 이회창 선거운동을 한 것입니다’고 했더니 ‘데려와보라’고 해서 김대중 정부에서 일을 하게 됐죠.”

    “다시 골초가 됐소”

    민주당 국회의원을 지낸 조순승씨는 정의원의 동서로 미주리대학에서 정의원을 가르치던 교수였다. 정의원의 소개로 DJ를 알게 돼 전남 구례·승주에서 3선의원을 지냈다. 조홍규 전 의원도 정의원이 DJ에게 소개했다. 그러고 보면 DJ가 정의원의 부탁을 많이 들어준 편이다.

    “조홍규 전 의원(관광공사 사장)은 1967∼83년 선친의 보좌관으로 일했습니다. 영감 돌아가실 때까지 보좌했습니다. 언론계에는 최규철(동아일보 주간) 이영덕씨(조선일보 논설위원) 등이 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시국담을 나눌 때는 술을 하루라도 안 마시면 나라가 망하는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드니까 점점 주량이 줄어요. 담배를 6년 동안 끊었는데 이번 대통령선거를 치르며 다시 피웠어요. 9월경부터 한두 대 피우다 보니 다시 골초가 됐어요.”

    담배는 과부가 정조 버리는 것 같아서 6년 동안 끊었다가도 다시 손을 대면 하루 아침에 옛날로 돌아가버린다. 정의원은 인터뷰 3시간 동안 가느다란 ‘에세’를 스무 개비 가량 태웠다. 골초 인터뷰이를 만난 덕에 막힌 실내에서 간접흡연을 실컷 했다.

    “핑계같지만 답답해서 피웠습니다.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고 보니 이회창씨는 지지도가 34%인데 노무현씨는 14%에서 한 자릿수로 고꾸라기지 직전이었습니다. 매일처럼 국회의원들이 탈당을 하는 바람에 선거운동인지 당을 지키는 운동인지 모르겠더라구요. 선거대책위원장의 주업무가 나가는 의원들 말리는 일이었어요. 제대로 된 선거운동이 아니라 당 수습하다가 9, 10, 11월 3개월을 보냈죠. 당 대표가 노무현 후보 지지한다는 게 신문기사가 되는 형편이었습니다.”

    대통령의 꿈 버리지 않았다

    ―어려운 시절도 겪었지만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탄 것 같아요.

    “노무현 당선자는 부담을 덜 안고 탄생한 대통령이기 때문에 그가 국민을 위해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도록 옆에서 도와줘야 합니다 나는 얼마 전에 한나라당 이부영·김덕룡 의원과 ‘화해와 전진’이라는 클럽을 만들었습니다. 이회창씨 이후의 당권에 관심이 있는 것같아서 두 분에게 내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당신들이 당권을 잡으면 노무현 정권은 편안하게 간다. 그러나 5년 후에는 우리가 다시 정권을 잡을지 불투명하다. 그러나 반대로 민정계 강경파들이 정권을 계속 잡으면 우리는 참 뻑뻑하게 가겠지만 5년 후에는 정권 재창출하는 데 그렇게 힘들지 않을 것이다.’(웃음)

    내가 올해 60입니다. 나이 들어서 제대로 정치 졸업을 못하는 선배들을 너무도 많이 봤습니다. 국회의원(정치)을 한 지 26년째인데 킹메이커도 해봤고 이제 마무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킹이 돼볼 생각은 없나요.

    “대통령이라는 것이 국민적 선택과 당원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100% 배제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르익어야 됩니다.”

    아파트의 집기는 단출했다. 정의원 부부는 삼성SDI에 다니는 큰아들 호준씨와 함께 산다. 딸 혜준은 출가했고 막내아들 세준은 미국 미주리주 웨스트미니스터 칼리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있다.

    인터뷰가 끝나고 아파트를 나서자 보좌관이 따라 나와 한국야구협회 총재 시절에 만든 기념품이라며 야구선수들의 사인이 담긴 야구공을 하나 주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둘째아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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