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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가고 그림이 뜬다

디카족, 뽀샵족의 세상 바꾸기

  • 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언어는 가고 그림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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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가고 그림이 뜬다

그림 6. 2002 월드컵 기간 사이버 공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임자텐 엔터테인먼트 월드컵 시리즈 중 ‘국가대표 이야기’편

차씨가 맨처음 했던 뽀샵은 동아리 친구들과 찍은 사진의 ‘밝기’ 조절. 그러나 지금은 실력이 일취월장해 지난해 10월에는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무명연극배우의 인형에 갖가지 의상을 입혀 수십 장의 브로마이드를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친구는 물론이고 일본배우 본인도 뛸 듯이 기뻐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일이 차씨에게는 최고의 기억이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동료의 사진을 ‘매만져’ 인스턴트 메신저를 통해 생일선물로 보낸 적도 있다.

그러나 차씨는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 사용법을 한번도 배운 적이 없다. 그냥 쓰다 보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처럼 재미삼아 작업하는 사람 가운데 전문가는 많지 않을 거라는 게 차씨의 추측이다.

“누가 워드프로그램을 배워서 쓰나요? 그거랑 마찬가지예요. 물론 전문가들 눈에는 수준이 낮겠지만 상관없죠, 어차피 재미로 하는 일인걸요. 처음에는 펜 마우스를 많이 사용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냥 마우스가 더 편해요. 지금은 연필보다 마우스로 그림을 그리는 게 더 쉬우니까요. 언제부터 실력에 만족했냐고요? 글쎄요, 그건 ‘언제부터 영어를 잘했느냐’는 질문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갖가지 사이트를 통해 이들 ‘디카족’ ‘뽀샵족’이 내뿜는 메시지의 주제는 다양하다. 자신이 싫어하는 연예인이 고양이에게 물리는 장면을 익살스럽게 합성해 놀리는 사진이 있는가 하면, 정몽준 의원과 가수 싸이의 공연모습을 합쳐 지난 대선 이후 정의원의 처지를 풍자한 ‘나 몽준이 새 됐어’라는 사진처럼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도 있다.

형식도 다양하다. 한 장짜리 사진이 많지만 플래시 애니메이션이나 애니GIF 파일, 캠코더로 촬영한 동영상도 있다.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형태는 별개의 사진들을 이어 붙여 새로운 스토리를 만드는 방식. 인터넷에서 다운받거나 직접 찍은 사진에 ‘말풍선’을 집어넣어 연결한 이들 작품은 대개 만화의 형식틀을 빌리고 있다. 지난해 월드컵 기간에 관련 사이트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렸던 ‘임자텐 엔터테인먼트’의 ‘월드컵 시리즈’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만든 이가 확인되지 않는 이 시리즈물은 히딩크 감독이나 월드컵 대표선수들의 사진을 포토샵 작업으로 다듬어 매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그림 6).



이미지로 강의를 한다?

이처럼 젊은 세대에게도 이미지를 다루는 일은 아직까지 취미생활이나 유희에 가깝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일고 있는 변화의 조짐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공적인 영역에서 이미지언어가 문자언어를 대체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서버 구축을 전문으로 하는 벤처업체 새눈테크의 박성률(30) 사장은 지난 연말 단합대회를 겸한 직원들과의 워크숍 에서 사진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프레젠테이션 자료로 ‘2003년 사업목표’를 발제했다. 매출액이나 수익 같은 수치는 어쩔 수 없이 글자로 들어갔지만, 시장상황 묘사나 향후 비전 등은 합성사진으로 만들어 표현했다. 영업팀의 분발을 촉구하기 위해 영업담당자의 얼굴과 경쟁업체 담당자의 얼굴사진을 따서 복싱장면에 붙이는 식이었다.

“딱딱해지기 쉬운 회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어요. 앞으로의 전망을 얘기하는 자리이니 만큼 유쾌하고 희망적인 분위기가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은 많이 들었지만 효과는 좋았어요. 목표수익을 제시하는 화면에서 돈방석 위에 제가 앉아 있는 사진을 만들어 붙였더니 직원들이 다들 환호성을 지르던데요. 단순히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공감하는 것 같았습니다.”

본인 또한 ‘디시폐인(디시인사이드 사이트에 자주 드나드는 마니아를 일컫는 은어)’ 중 하나라는 박사장의 말이다.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도 일인지 취미활동인지 모를 만큼 즐거웠기 때문에 더 좋았다는 것. 박사장은 앞으로도 종종 이런 방식으로 회의를 진행할 생각이다.

대학 강의실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찾을 수 있다. 연세대학교 심리학과의 황상민 교수는 지난 학기 ‘현대사회와 청소년 심리’라는 과목을 강의하면서 과정 대부분을 이미지로 이루어진 파워포인트로 진행했다. 칠판에 판서를 하거나 인쇄물을 나눠주는 전통적인 방법 대신 강의마다 빔 프로젝터를 사용해 준비해둔 이미지를 보여주며 설명했다(그림 7). 자아정체성 변화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한 개의 얼굴이 끊임없이 변해 다른 얼굴이 되는 연속 이미지를 사용하는 식이었다.

53명의 수강생들에게는 글이 아니라 이미지와 동영상을 주축으로 리포트를 만들라고 주문했다. 때문에 학생들은 종이가 아닌 CD-ROM에 리포트를 담아 제출했다. 처음에는 버거워하던 수강생들도 통통 튀는 생각이 담긴 그럴 듯한 리포트를 금세 만들더라는 게 황교수의 경험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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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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