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지뢰 피해! 주한미군도 한국정부도 나몰라라

  • 글: 조재국 KCBL 집행위원장·안양대 교수 jkcho@anyang.ac.kr

    입력2003-02-25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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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월15일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Korea Campaign to Ban Landmines·이하 KCBL)는 ‘한반도 내 주한미군 매설지뢰와 그 피해현황 조사결과’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2002년 한해 동안 실시한 조사를 바탕으로 작성된 이 보고서의 내용은 충격적이다. 주한미군이 기지를 철수하는 경우에도 주변에 매설했던 지뢰를 제거하거나 관련정보를 한국군에 이양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아 상당한 민간인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양국 정부가 부정하고 있는 ‘미군 매설 지뢰피해’에 대한 KCBL의 직격 고발.
    지뢰 피해! 주한미군도 한국정부도 나몰라라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금파리에 살고 있는 이덕준(85)씨는 1979년 지뢰사고로 왼쪽 발목을 잃었다. 미군부대 부근에서 소와 말에게 먹일 건초를 모으던 중 매설돼 있는 지뢰를 밟았던 것. 오른쪽 다리 또한 파편이 박혀 감각을 느낄 수 없고 잘 움직일 수도 없다. 의족을 한 채 걸어다닐 수는 있지만 오래 움직이는 것은 무리다. 이씨는 “아직도 가끔씩 잘린 부분이 저릿저릿한데 그럴 때는 밤에 잠도 이룰 수가 없다”고 한다.

    사고 이후 이덕준씨는 아무런 피해보상도 받지 못했다. 치료비는 작업을 지시한 관리자가 부담했지만 이후 생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이씨도 생계대책을 요구하지 않았다. “작업중 일어나는 사고에 대해서 일절 항의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썼던 데다, 어떻게 해야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슬하에 6남매를 둔 이씨는 “다른 가족들에게 부담이 될까봐 죽으려고 했다”고 당시의 답답했던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씨는 “그때 사고를 낸 지뢰는 미군이 설치한 게 분명하다”고 말한다. 사고가 나기 십수 년 전 이씨 본인이 미군부대에서 군속으로 일하면서, 미군 병사들이 사고지점 부근에 지뢰를 매설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것이다. 지뢰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던 ‘USA’라는 글자 또한 이씨가 확신할 수 있는 근거였다.

    이덕준씨와 같은 동네에 사는 조만손(71)씨도 1965년 미군부대 내에서 나뭇가지를 잘라내던 중 지뢰를 밟아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당시 민간인 접근을 막기 위해 지뢰 근처에 설치한 철조망은 이미 쓰러져 풀숲에 파묻혀 있었고, ‘지뢰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미군 측 사전경고도 없었다는 것이 조씨의 증언이다.

    사고가 나자 한국인 노무자를 관리하는 미군들이 급히 헬기를 동원해 조씨를 병원으로 옮겼다. 조씨는 부평에 위치한 미군병원에 입원해 미군 부담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보상은 받지 못했다. 조만손씨는 “치료해준 것만 해도 다행인데 생계까지 어떻게 말하겠냐”고 이야기한다. 조씨의 부인은 “그동안 내가 날품팔이를 해서 겨우 먹고 살았다. 밥 한끼로 이틀을 끓여먹어야 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전한다.



    조씨 또한 이덕준씨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밟은 지뢰는 미군이 설치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조씨는 “직접 미군이 매설하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당시 사고지점 근처에 한국군 부대는 없었다”고 말했다.

    民軍, 전후방 안 가리는 지뢰사고

    두 사람의 사례를 수십 년 전 이야기라고 쉽게 넘길 일은 아니다. 지뢰피해의 악몽은 최근에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KCBL의 조사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0년간 지뢰피해자 숫자는 총 164명. 민간인 53명(사망 15명, 부상 38명)과 군인 111명(사망 47명, 부상 64명)이 목숨을 잃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1997년은 특히 피해가 심각한 해였다. 한해 동안 강원도 고성, 철원, 양구 등에서 무려 12명이나 되는 20대 군 장병이 목숨을 잃었고 세 명의 장병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또한 민간인의 지뢰피해도 적지 않아서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도창리에서 수해복구중이던 김영진 최이환씨가 지뢰사고로 사망하는 등 모두 다섯 명의 주민이 사고를 당했다.

    지뢰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은 물론 민통선 주변지역. 과거 지뢰가 대량 살포되거나 매설된 지역으로 원래는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었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정부는 농민들이 이 지역 전답을 경작하도록 허락했고 나아가서는 군데군데 민통선 안에 거주할 수 있도록 입주촌을 건설해,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과 같이 면 단위의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지뢰에 희생당한 사람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한다. 현재 민통선 안에 거주하는 주민은 2533가구 8135명. 민통선 내의 유일한 면단위 부락인 해안면의 경우 주민 668명 가운데 지뢰피해자가 50명으로 알려져 있어, 단순 계산으로도 8%의 높은 피해율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철원읍 대마리가 649명 중 29명, 생창리가 349명 중 20명, 마현리가 884명 중 20명 등으로, 모두 세계 최대의 지뢰피해국인 앙골라의 수치(200명당 1명)와도 비교할 수 없는 높은 피해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지뢰피해가 최전방지역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999년에는 충남 청양군 대흥리에서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인 김유정양이 지뢰사고를 당해 발목을 절단하는 부상을 입었다. 이 해의 군인 피해자는 총 13명으로 사망 1명, 부상 12명으로 집계되었다.

    2001년 8월12일에는 경기도 화성시 고포4리 어도 해변에서 가족과 함께 피서를 즐기던 차철호씨가 지뢰를 밟아 왼쪽 발목을 절단하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2002년에도 10월말까지 모두 14명이 지뢰사고를 당해 2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러한 지뢰사고와 민간인 지뢰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및 보상 책임은 그 지뢰를 묻은 사람에게 있다. 그렇다면 그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현재까지 지뢰피해자에 대해 한국정부는 국가의 책임을 최소한도에서 인정한 국가배상법에 의하여 배상을 용인하고 있지만, 복잡한 절차와 재판을 통해 배상을 받은 피해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더욱이 위로금 형식의 인도적 보상은 한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특히 미국정부는 한국의 지뢰피해자들에게 배상이나 보상을 한 적이 없고,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의하여 한국정부에 배상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미국정부는 공식적으로 “한국 내에 있는 모든 지뢰는 한국군의 책임 하에 매설된 것으로 미군은 이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또한 지뢰에 대한 모든 정보는 한국군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과연 사실일까.

    KCBL의 조사에 따르면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미군은 한국전쟁 당시 지금의 휴전선 인근에는 물론 전쟁 이후 후방지역에서도 지뢰를 설치해왔고, 미국이 주도적으로 체결한 특정재래식무기금지협약(CCW)에 명시되어 있는 지뢰의 사후관리 및 제거책임 또한 준수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지금부터 그 세부사항을 하나하나 확인해보자.

    지난 1월15일 KCBL이 발표한 ‘한반도 내 주한미군 매설지뢰와 그 피해현황 조사결과’ 보고서는 2002년 2월부터 12월까지 벌인 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KCBL은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부터 수십 곳의 주둔기지주변에 지뢰를 매설했으나 이후 기지를 이동하거나 철수하면서 이를 완벽하게 제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철원군 대마리와 생창리, 양구군, 파주시 등에서 사고를 일으킨 대인지뢰는 대부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작전 통제권하에 매설되었거나 공중 살포된 것들이었다고 주민들과 군 관계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미군대위 존 웹스토버는 1955년 출판한 ‘한국에서의 전투지원(Combat Support in Korea)’이라는 저서 여러 대목에서 주한미군이 대인지뢰를 매설한 사실은 물론 매설과정이 불합리하게 진행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 당시 군사고문단으로 한국에 와있던 데이비드 F. 캠벨 소령은 경기도 연천 신녕전투에 관한 증언을 통해 “그날 저녁 추가로 두 개의 지뢰지대를 가설했다. 이들 중 하나인 제4지뢰지대는 요덕동 후방에 설치했는데…(중략)…이 지뢰지대에는 90개의 대인지뢰에 인계철선을 연결했다”며 지뢰매설 사실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버렸거나 지도 없이 묻은 것이 10만 발”

    65야전 공병대대의 샘 D. 스태로빈 중위의 말을 인용한 대목에서는 “적에게 지뢰를 뺏기는 두 번째 방법은 단순히 버리는 것이다. 전방으로 너무 많은 지뢰를 옮겨놓았다가 전황이 바뀌면 대량의 지뢰를 손실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떤 지휘관들은 지뢰를 폭파하려고 했으나 이것도 접적지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고 밝히고 있다. 스태로빈 중위는 또한 당시 지뢰매설과정의 불합리성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특히 지뢰지도를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 한국전에서 심각한 문제였다. 무분별하게 지뢰지대를 설치한다는 것은 이미 매설된 지뢰지대에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거나 우군지역 주민과의 친선을 도모할 생각이 전혀 없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록을 하지 않고 지뢰를 매설했던 여러 부대의 사례를 들을 수 있었다. 또 급히 서둘러 철수하는 바람에 상관이 명령하면 이동중인 트럭 위에서 장전된 지뢰를 내던져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중략)…미군지뢰전 교리는 흠잡을 데가 없지만, 8군은 12만 발의 지뢰를 부대에 보낸 후 불과 2만 발만을 보유하고 있거나 매설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나머지 10만 발은 버렸거나 기록 없이 매설된 것이다.”

    스태로빈 중위는 또 아군의 지뢰피해에 대하여 “나는 최소한 150대의 사용 불가능한 북의 탱크를 보았는데 이들 중 한 대도 지뢰에 의해 파괴된 것은 없었다. 또한 수많은 미군 탱크와 트럭들이 우리측 지뢰에 의하여 파괴된 것을 볼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같은 당시 미군 관계자들의 증언은 전쟁중 주한미군이 대인지뢰를 마구잡이로 취급했고, 매설과정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특히 당시에 지뢰가 어디에 몇 발이나 묻었는지 정확한 지뢰지도를 작성해 보관하지 않은 것은 오늘날 적잖은 지뢰사고의 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필요한 지뢰를 제거하는 일에 결정적인 어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조사과정에서 확인된 또 하나 놀라운 점은 이 문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무성의한 태도다. 과거 미군기지의 지뢰매설 정보는 고사하고, 철수한 미군기지의 위치에 대해서도 한국정부는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이는 SOFA 3조, 4조가 각각 규정하고 있는 통고불이행과 원상복구불이행 조항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규정에 따르면 미군은 사용하고 있는 기지의 지뢰매설 정보를 한국정부에 제공할 의무가 없으며, 한국정부는 이를 요청할 권리가 없다.

    KCBL은 2001년 7월26일 발표한 ‘후방 36개 대인지뢰 매설지역 실태조사’ 보고서에 후방지역의 지뢰사용 및 관리실태를 정리한 바 있다. 지뢰가 매설돼 있는 이들 후방 36개 지역은 대부분 오래 전에 미군으로부터 이양받아 현재는 모두 한국군이 사용하거나 관리하고 있는 방공포기지 주변이다. 이들 가운데 지뢰사고로 인한 피해자 발생이 확인된 곳만 12개 지역으로 모두 31명이 피해를 당했다.

    그 가운데 미군이 지뢰를 매설한 것으로 보이는 지역은 모두 15개. 울산 무룡산, 성남 검단산, 파주 개명산, 평택 고등산과 된박산, 김포 장릉산, 의정부 호명산, 진천 문안산, 태안 백화산, 홍성 지기산, 서천 옥녀봉, 김해 불모산과 화산, 하동 금오산과 용산, 춘천 대륭산 등이다. 이들 지뢰지대는 미군이 기지를 이양한 1975년 이전에 주한미군이 매설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 주둔하고 있는 한국군 부대 관계자들은 지뢰지도와 매설된 지뢰의 수, 매설연도 등의 정보를 인계받지 못해 그 관리 및 제거에 큰 어려움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다른 14개 지역의 지뢰지대에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국군에 의해 약 6만 발이 매설된 것으로 밝혀졌다. 매설지뢰는 모두 대인지뢰로서 미국제 및 한국제 M14 혹은 KM14 플라스틱 지뢰이기 때문에 금속탐지기로는 찾을 수 없다. 더구나 이들 지뢰지대는 모두 경사지 혹은 계곡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제거작업이 매우 어렵다.

    군측이 지뢰를 제거했다고 주장하는 지역은 부대가 이전한 지역이 네 곳(충남 제기산, 대구 최정산, 의정부 호명산, 하동 금오산), 부대 이전 없이 지뢰만 제거한 한 곳(서울 서초구 우면산)이다. 군은 이들 지역의 지뢰를 완전히 제거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중 철망펜스 및 윤형 철조망, 지뢰경고 표지판이 남아 있고 여전히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지뢰가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는 2001년 2월13일 발표한 합동참모본부의 ‘후방지역 대인지뢰제거 중장기 계획’에 따라 그 해 한해동안 연인원 1만3900명을 동원하여 다섯 개 시설(경기 성남, 부산 영도, 부산 해운대, 경기 광주, 경남 하동)에서 4700발을 제거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는 별개로 KCBL은 미군이 한국전쟁 이후에도 전방 주둔지역에 다량의 지뢰를 매설하여 사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62년 쿠바사태를 전후해서는 전방부대 주변에 급하게 지뢰를 매설한 까닭에 지뢰지도를 작성할 여유가 없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들 지역은 최근 민간인 통제선에서 해제되면서 다른 지역의 민간인들까지 지뢰사고를 당하는 위험지역으로 변했다.

    KCBL의 조사에 따르면 주한미군이 설치한 것으로 파악되는 지뢰로 인한 피해는 확인된 것만 해도 21개 지역 100명에 이르며, 김포·파주·연천·철원·고성 등 5개 지역 주민들은 집단적인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주한미군 병사들조차 5명이 지뢰사고를 당한 사실도 확인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에 지뢰가 매설되어 민간인 피해자가 발생한 주요 지역과 매설주체, 매설연도, 미군철수연도, 피해자수는 앞 페이지 그래프와 같다.

    KCBL이 발표한 지뢰실태 보고서가 몇몇 일간지를 통해 보도되자 주한미군사령부는 보고서 발표 닷새 후인 1월20일 간략한 해명자료를 배포하고 “주한미군은 한국 내에 지뢰를 설치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주한미군과 지뢰에 관련된 부정확한 언론보도

    목적 : “시민단체, 주한미군의 지뢰에 대한 비난”과 관련된 최근의 보도에 대한 정보 제공

    논의 : 최근 한국의 몇몇 언론매체가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Korea Campa ign to Ban Landmines)에서 주한미군 시설물에 지뢰가 묻혀 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한 데 대한 한국의 몇몇 언론매체의 보도에는 부정확한 정보들도 포함되어 있다.

    보도된 정보들은 외교통상부 문서, 한국전쟁 기록들, 증언자들과 목격자들의 진술, 기지요원들과의 면담에서 나온 것이라고 대책회의측은 밝혔다.

    주한미군은 한국 내에 매설되어 있는 지뢰에 대한 책임과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한국 내에 설치된 모든 지뢰들은 한국정부의 관리하에 설치된 것들이다.

    주한미군은 안전한 장소에 보관되어 있는 사용되지 않은 지뢰들을 관리하고 있다. 수년동안 주한미군은 한국정부에 지뢰밭에 관한 모든 가용한 역사적인 정보들을 공유해왔다.

    요약 : 주한미군은 한국 내에서 지뢰들을 설치한 적이 없다.’

    이에 대해 KCBL은 1월20일 당일 답변문을 통해 주한미군사령부의 해명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우선 KCBL은 보고서 발표 한 달 전에 보고서 전문을 주한미군에 보내 잘못된 사항이나 군사기밀이 있으면 지적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지만, 주한미군은 이에 대해 성의 있게 응하지 않았다. 더욱이 주한미군사령부의 해명자료 어디에도 KCBL 보고서가 제시한 증거자료에 대한 신빙성 있는 설명은 없다.

    또한 답변문을 통해 KCBL은 주한미군 시설물 인근에 지뢰가 매설돼 있음을 확인한 공식 자료들을 다시 한번 언급하고, 한국전쟁 당시의 지뢰매설에 대해 미군 관계자들의 충분한 증언이 있었음을 강조했다. 1962년 쿠바사태 직후의 미군기지 주변 지뢰매설에 관해서는 “미군부대에서 노무자로 일하면서 미군이 보름 정도나 길가에 지뢰를 매설하는 동안 식사를 날라다주었다”는 지뢰피해자 이덕준씨의 증언, 연천군 대광리의 지뢰피해자와 주민들의 진술 등 다양한 근거도 제시했다.

    특히 지뢰정보의 한국군 제공문제에 대해서는 “이 사실은 우리가 국방부나 일선부대에서 확인한 내용과 전혀 다르다”고 반박했다. 국회 국정감사자료에는 “평택 팽성의 방공포대에 대한 지뢰제거 작업을 시범적으로 실시했으나 매설지도 등 정확한 정보가 없어 안전 제거에 실패했다”는 국방부 보고내용이 남아 있다. 후방지역 지뢰제거를 담당할 예정인 부대 관계자들도 한결같이 “미군으로부터 지뢰매설 정보를 이양받은 적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지뢰매설 표지판이 발견된 미군기지 주변지역의 지뢰매설 여부에 관해 KCBL측이 요구한 사실확인에 대해 한국군은 답변하지 않았다. 만일 주한미군사령부의 해명처럼 한미 양국이 지뢰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면 대한민국 국방부가 자료를 폐기했거나 은폐하고 있는 것일까.

    주한미군사령부의 해명자료를 반박하며 “보고서에 기록돼 있는 지뢰매설지역과 관련정보에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근거 있는 설명을 하라”고 요구한 KCBL의 답변문에 대해, 2월10일 현재까지 주한미군사령부는 물론 그 어떤 유관기관에서도 책임 있는 해명을 보내온 바 없다.

    지뢰 피해! 주한미군도 한국정부도 나몰라라

    방치되어 있는 대인 지뢰. 강원도 철원군 대마리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KCBL이 보고서 발표 전에 주한미군사령부 공보실의 확인을 거치고자 했던 것은 이 자료가 향후 국제대인지뢰금지캠페인(ICBL)과 UN에 제출돼 공신력 있는 자료로 남기 때문이다. KCBL이 오랜 시간을 들여 보고서를 작성한 목적은 무책임한 폭로나 반미선전이 아니라, 명확한 현황 파악과 이를 바탕으로 한 대책 마련이었다.

    그러나 주한미군은 해명자료에서 나타나듯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하는 데 급급했고, 한국정부는 아무런 대책이나 의견도 없이 미국만 바라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인지뢰의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한 오타와대인지뢰금지조약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미국이 한반도 예외안 및 유예안을 들고 나왔을 때도, 한국정부는 지뢰정책에 대한 명확한 자기입장을 표명하지 못하고 미국을 따라가는 태도로 일관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정부의 공식 입장은 ‘대인지뢰의 무차별적이고 무책임한 사용으로 인하여 비극적인 희생과 고통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도적인 관심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특수한 사정으로 인하여 방어무기인 대인지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정부가 1993년부터 2002년까지 10년간 국무성 지뢰대책반을 통해 ‘인도적인 지뢰제거와 피해자 구원사업 실행’에 투자한 예산 규모는 총 10억달러였다. 미국은 2001년부터 베트남에 165만달러를 투입해 베트남전 기간 중 미군이 매설한 지뢰를 제거하고 있으며, 베트남 내 지뢰피해자 구원을 위한 프로젝트도 실행하고 있다. 그 밖에도 아프카니스탄, 앙골라, 모잠비크 등 세계 26개국에 지뢰피해와 관련해 막대한 예산을 집행하고 있다.

    또한 미국정부는 지뢰피해자를 위한 기금(War Victims Fund·WVF)을 창설해 1989년부터 2001년까지 15개국의 피해자들에게 7100만달러를 제공했다. 이는 1997년 클린턴 정부가 “2010년까지 전세계의 모든 지뢰를 제거하겠다”며 발표한 ‘디마인 2010 이니셔티브 프로젝트’에 의한 것이다. 당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이는 지뢰의 위협에서 모든 국가의 민간인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은 예외다. 한국의 지뢰문제는 그 상당수가 미군에 의해 발생한 것임에도 미국정부의 인도적인 지뢰제거 및 피해자구원 프로그램에서 한국인 피해자들은 철저히 소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바탕에는 앞에서도 밝혔듯 “한국에는 지뢰문제가 없다”고 되뇌는 한국정부의 가식적 형식논리와, 비합리적인 SOFA 규정이 자리하고 있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 3조에 따르면 주한미군은 기지관리에 필요해 취한 조치를 한국 쪽에 통고할 의무가 없다. 또 동 협정 4조에 따르면 기지 반환시에도 미군이 행한 조치에 대해 원상복구하거나 보상할 책임 또한 없다. 이 두 조항은 미군이 주둔장소에 지뢰를 매설해 두고도 철수하면서 지뢰를 제거하지 않거나 지뢰매설정보를 한국군에 넘기지 않아도 될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으로 반드시 개정되어야 할 조항이다.

    국민의 안전 외면하는 정부?

    1997년 9월 오슬로에서 개최된 대인지뢰금지조약 초안작성회의에서 외교통상부의 이성주 대표는 “한반도에는 비무장지대 주변에서만 지뢰를 사용하고 있고 24시간 지뢰지대를 감시하고 있어서 민간인 피해자는 없다”는 한국정부의 공식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다음해 일본을 방문한 클린턴 미국대통령도 “한국에서 민간인 지뢰피해자는 보고된 바 없다”고 말했다.

    거듭 밝혀두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수많은 사실과 증거, 피해사례와 증언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양국 고위 인사들의 이런 발언은, 실로 수많은 한국의 민간인 지뢰피해자들은 물론 지금도 지뢰피해에 노출돼 있는 한국인들의 안전을 기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대한민국 정부, 세계의 인권을 말하는 미합중국 정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뢰 피해! 주한미군도 한국정부도 나몰라라
    ① 철원군 대마리 백마고지 전투지-부대명 미상, 1962년, 1960년대초, 6명.

    ②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미1기갑사단 9기병대 및 미 제2사단 23연대, 1962년, 1971년, 2명.

    ③ 연천군 신서면 도밀리 야월산-부대명 미상, 1962년, 1960년대초, 4명.

    ④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미1군단 보병부대, 1962년, 1971년, 15명.

    ⑤ 포천군 문암리 불무산-미1사단 포병대, 1960년대 중반, 1970년 11월, 미 장병 3명.

    ⑥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미 제2사단 38연대 및 미 제2사단 503보병 2대대, 1962년, 1971년, 2명.

    ⑦ 파주시 진동면-미 제2사단 38연대, 1962년, 1971년.파주시 광탄면-캠프 피터슨, 1960년대, 1970년대, 9명.

    ⑧ 파주시 군내면 백련리-캠프 그리브스 및 캠프 워리어, 캠프 두지, 1962년, 현재 주둔중, 2명.

    ⑨ 파주시 적성면 20여개 훈련장-미 제24사단 48야포대, 1960년 전후, 1971년, 1명.

    ⑩ 인천 문학동 문학산-방공포대명 미상, 1960년대, 1977년 5월, 군인 2명.

    ⑪ 김포시 사우동 장릉산-방공포대명 미상, 1960년대 중반, 1982년 5월, 13명(군인11명).

    ⑫ 충북 진천읍 사선리 문안산-방공포대명 미상, 1960년대 중반, 1977년 5월, 군인 1명.

    ⑬ 경남 하동군 금오산 및 용산-방공포대(부대명 미상), 1960년 미군 주둔시 1971년, 1명.

    ⑭ 부산 영도구 동삼동 중리산-미군 미사일기지 부대명 미상, 1964년 6월(미군 통제하에 한국군이 매설), 1964년, 소방대원 1명.

    ※ 이외에도 피해자가 확인되지 않은 지뢰지대 가운데 1960년대 이후 미군에 의해 매설된 것으로 보이는 지역은 파주시 군내면 캠프 보니파스를 비롯해 15곳에 이르고, 현재 미군이 사용하고 있는 시설 가운데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지역도 연천군 야월산 ATC를 비롯하여 아홉 곳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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