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전경련 주변에서는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말이 조심스레 흘러나오고 있다. 실제로 손부회장은 지난 2월7일 기자간담회에서 “친구인 손회장과 함께 일하는 것이 껄끄럽지 않겠냐”는 질문에 대해 “상근부회장은 그가 누구든 회장을 제대로 보좌할 의무가 있다. 직책에 맞게 처신한다면 문제없을 것”이라는 답변을 한 바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꼭 4일 후, 정반대의 이유를 앞세워 돌연 사의를 밝힌 것이다.
이에 재계 일각에서는 정권 압력설, 재계의 대(對)정부 ‘백기항복설’, 빅딜 청문회 대비 부담 덜어내기 등 다양한 추측이 나돌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손길승 회장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전경련에 대한 삼성의 전폭적 지원을 약속하는 의미로 현명관 삼성회장(일본담당)을 상근부회장에 추천했다는 이야기가 그 중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손부회장은 전경련 40년 역사의 뒤안길로 한 발짝 물러나게 됐다. 정권교체-외환위기-빅딜-회원사 무더기 도산-재벌개혁 등 전경련 사상 유례없는 시련기를 ‘선장 없는 항해사’로 힘겹게 이끌어 온 6년이었다.
지금의 심경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묻고자 손부회장에게 만나기를 청했다. 애초 거절의 뜻을 밝혔던 손부회장은 요청이 거듭되자 민감한 사안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지난 2월15일 아침 8시, 대치동 자택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정오 안양골프클럽으로까지 이어졌다.
선장 없는 난파선의 항해사
-다소 피로해 보입니다. 건강은 어떻습니까.
“그동안 너무 무리했습니다. 새벽부터 조찬, 오찬, 만찬, 다시 상가 들렀다 집에 오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죠. 만성 수면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이제는 차 안에서 토막잠을 자는 데 익숙해졌어요. 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 이를 세 개나 잃었고 건강도 좀 나빠졌습니다. 참, 나는 이렇게 몸바쳐 일했는데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정말 정직하게 일했습니다.”
-6년 내내 격무였지요.
“그렇죠. 노동법 개정 파문부터 IMF경제위기, 소위 ‘빅딜’, 노사정위원회까지, 정말 지난 6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제가 전경련 부회장으로 취임한 게 1997년 2월20일입니다. 넉 달쯤 지나 당시 최종현 회장이 폐암 수술차 미국으로 떠났죠. 그때부터 전경련의 실질적 운영을 떠맡게 됐습니다. 이어 취임한 김우중 회장도 중도하차하고, 뒤의 김각중 회장대행은 고령이신 데다 아주 젠틀한 분이셔서 제게 권한을 많이 주셨고요. 그렇게 6년 동안을 안간힘을 다해 버텨,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때아닌 폭풍우를 만나 난파된 배를 선장도 없이 항해사가 되어 이리저리 몰아 겨우 항구에 도착한 심경이랄까요. 이제 새 선장도 모셨으니 제가 할 일은 다 끝난 느낌입니다.”
-전경련에서의 생활은 보람 있었습니까.
“정말 보람 있었습니다. 30개 회원그룹 중 16개 그룹이 파산·도산·워크아웃 등으로 사라졌는데, 그렇게 폭격 맞아 반이 날아간 위기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조직을 이끌어올 수 있었으니까요. 그 정도면 정말 하나의 큰 보람으로 생각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손길승 회장과 친구사이라 했는데,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되나요.
“제가 시골 촌놈입니다. 지금은 경남 진주시지만 그 때는 진양군 정촌면이라고, 거기가 제 고향이지요. 동네 초등학교에서 딱 3명이 진주중학교로 진학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저였어요. 손회장하고는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습니다. 저는 서울 경복고로 진학하고 손회장은 진주고로 갔는데 서울대 상대에서 다시 만났죠. 제가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한 해 늦게 입학하는 바람에 손회장이 저보다 1년 위가 됐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오랜 우정을 이어왔죠.”
-처음에는 의과대학을 지망했다지요.
“의사가 꿈이었어요. 경복고에서 고3 올라갈 때 수석을 해 다들 무난히 합격할 줄 알았죠. 그런데 수학시험 시간에 안 풀리는 한 문제를 놓고 너무 길게 씨름하는 바람에 그만 서울대에 낙방하고 말았어요. 2차로 가톨릭의대에 합격했는데 등록금이 없어 입학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고학으로 어찌어찌 재수해 서울대 상대에 들어갔지만 취직 전까지 늘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지요.”
-의사의 길을 가지 못한 것이 아쉽지는 않은지요.
“의사가 되고자 한 것은 몸 약한 어머니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됐는데, 경제학 또한 사회의 병, 기업의 병을 고치는 역할을 하는 학문 아닌가 싶어 후회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