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DJ정권, 빅딜 약속 안 지켰다”

6년 만에 물러난 ‘재계의 입’ 손병두 전 전경련 부회장

  • 글: 이나리 byeme@donga.com

    입력2003-02-25 13: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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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파선’ 전경련의 선장 없는 항해사로 고투한 6년 시원하지도 섭섭하지도 않다 빅딜 당시 재계·정부, 양쪽으로부터 오해받기도 환란 주범 재벌 아니다 법치·사유재산권 지켜지지 않고 있다 소액주주운동, 방법에 문제 있다 반도체 빅딜, 무산될 줄 알았다 자상한 DJ에 미움보다 애정 많아 새 정부, 동북아 프로젝트보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 열기’ 주력해야 친북 사회주의 세력 큰 문제 종교생활·시장경제 전도사 역할 전념할 것
    “DJ정권, 빅딜 약속 안 지켰다”
    지난 6년 간 재계의 대변자 역할을 해온 손병두(孫炳斗·62) 전경련 상근부회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이 급작스런 결정은 재계 안팎에 적지 않은 파문을 던졌다. 손부회장은 “50년 지기인 손길승 전경련 회장과 함께 일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그만두기로 했다. 회장단이 손회장을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키로 한 이후부터 줄곧 생각해온 일”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전경련 주변에서는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말이 조심스레 흘러나오고 있다. 실제로 손부회장은 지난 2월7일 기자간담회에서 “친구인 손회장과 함께 일하는 것이 껄끄럽지 않겠냐”는 질문에 대해 “상근부회장은 그가 누구든 회장을 제대로 보좌할 의무가 있다. 직책에 맞게 처신한다면 문제없을 것”이라는 답변을 한 바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꼭 4일 후, 정반대의 이유를 앞세워 돌연 사의를 밝힌 것이다.

    이에 재계 일각에서는 정권 압력설, 재계의 대(對)정부 ‘백기항복설’, 빅딜 청문회 대비 부담 덜어내기 등 다양한 추측이 나돌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손길승 회장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전경련에 대한 삼성의 전폭적 지원을 약속하는 의미로 현명관 삼성회장(일본담당)을 상근부회장에 추천했다는 이야기가 그 중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손부회장은 전경련 40년 역사의 뒤안길로 한 발짝 물러나게 됐다. 정권교체-외환위기-빅딜-회원사 무더기 도산-재벌개혁 등 전경련 사상 유례없는 시련기를 ‘선장 없는 항해사’로 힘겹게 이끌어 온 6년이었다.

    지금의 심경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묻고자 손부회장에게 만나기를 청했다. 애초 거절의 뜻을 밝혔던 손부회장은 요청이 거듭되자 민감한 사안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지난 2월15일 아침 8시, 대치동 자택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정오 안양골프클럽으로까지 이어졌다.



    선장 없는 난파선의 항해사

    -다소 피로해 보입니다. 건강은 어떻습니까.

    “그동안 너무 무리했습니다. 새벽부터 조찬, 오찬, 만찬, 다시 상가 들렀다 집에 오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죠. 만성 수면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이제는 차 안에서 토막잠을 자는 데 익숙해졌어요. 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 이를 세 개나 잃었고 건강도 좀 나빠졌습니다. 참, 나는 이렇게 몸바쳐 일했는데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정말 정직하게 일했습니다.”

    -6년 내내 격무였지요.

    “그렇죠. 노동법 개정 파문부터 IMF경제위기, 소위 ‘빅딜’, 노사정위원회까지, 정말 지난 6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제가 전경련 부회장으로 취임한 게 1997년 2월20일입니다. 넉 달쯤 지나 당시 최종현 회장이 폐암 수술차 미국으로 떠났죠. 그때부터 전경련의 실질적 운영을 떠맡게 됐습니다. 이어 취임한 김우중 회장도 중도하차하고, 뒤의 김각중 회장대행은 고령이신 데다 아주 젠틀한 분이셔서 제게 권한을 많이 주셨고요. 그렇게 6년 동안을 안간힘을 다해 버텨,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때아닌 폭풍우를 만나 난파된 배를 선장도 없이 항해사가 되어 이리저리 몰아 겨우 항구에 도착한 심경이랄까요. 이제 새 선장도 모셨으니 제가 할 일은 다 끝난 느낌입니다.”

    -전경련에서의 생활은 보람 있었습니까.

    “정말 보람 있었습니다. 30개 회원그룹 중 16개 그룹이 파산·도산·워크아웃 등으로 사라졌는데, 그렇게 폭격 맞아 반이 날아간 위기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조직을 이끌어올 수 있었으니까요. 그 정도면 정말 하나의 큰 보람으로 생각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손길승 회장과 친구사이라 했는데,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되나요.

    “제가 시골 촌놈입니다. 지금은 경남 진주시지만 그 때는 진양군 정촌면이라고, 거기가 제 고향이지요. 동네 초등학교에서 딱 3명이 진주중학교로 진학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저였어요. 손회장하고는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습니다. 저는 서울 경복고로 진학하고 손회장은 진주고로 갔는데 서울대 상대에서 다시 만났죠. 제가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한 해 늦게 입학하는 바람에 손회장이 저보다 1년 위가 됐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오랜 우정을 이어왔죠.”

    -처음에는 의과대학을 지망했다지요.

    “의사가 꿈이었어요. 경복고에서 고3 올라갈 때 수석을 해 다들 무난히 합격할 줄 알았죠. 그런데 수학시험 시간에 안 풀리는 한 문제를 놓고 너무 길게 씨름하는 바람에 그만 서울대에 낙방하고 말았어요. 2차로 가톨릭의대에 합격했는데 등록금이 없어 입학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고학으로 어찌어찌 재수해 서울대 상대에 들어갔지만 취직 전까지 늘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지요.”

    -의사의 길을 가지 못한 것이 아쉽지는 않은지요.

    “의사가 되고자 한 것은 몸 약한 어머니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됐는데, 경제학 또한 사회의 병, 기업의 병을 고치는 역할을 하는 학문 아닌가 싶어 후회는 없습니다.”

    -새 전경련 회장을 추대하기까지 진통이 많았던 걸로 압니다.

    “처음에는 회장단의 뜻이 이건희 회장으로 모아졌습니다. 말씀드리니 고사하시더군요. 그런데 그 이유가 납득할만한 것이었어요. 그럼 다음으로 누가 좋으냐, 손길승 회장이 좋겠다 해서 이렇게 된 겁니다. 손회장도 처음에는 “전문경영인인 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고사했는데 오너 회장들, 특히 이건희 회장이 아주 열심히 설득을 했습니다. 책임감 때문이었겠지요.”

    -이건희 회장이 고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굳이 밝히지 않으렵니다.”

    -명분도 좋고, 적절한 시기에 잘 그만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사실 제겐 회장 모셔오는 게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지난 6년 동안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전경련 회장님들께 불미스러운 일도 많았고, 제대로 된 회장이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음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때문에 4대 그룹 회장 중 한 분을 꼭 모셔오는 것이 제 가장 큰 과제가 된거죠. 그래야 새 정부와 교감하면서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대화할 것은 또 대화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회장 새로 모시는 것이 간단치 않은 일입니다. 각 그룹 회장님들을 일일이 찾아 뵙고 뜻을 들어 의견을 조율해야 하고, 원로 고문단도 만나야 하고…. 그런 컨센서스를 이루는 과정이 전화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어쨌든 노심초사 끝에 새 회장을 모시고 나니 그 때서야 제 거취 문제가 고민이 되더군요.”

    -시원섭섭하신가요.

    “시원하지도 않고 섭섭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맘이 편해요.”

    -손회장을 옆에서 도울 수도 있었을 텐데요.

    “친구간에 상하관계가 된다고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손회장 입장에서 보면 불편한 점도 있겠다 싶었어요. 또 새 지도체제를 출범시키는데 프리 핸드를 주는 것이 도리일 수도 있겠고. 솔직히 말씀드려 온몸을 던져 6년 동안 난파선을 이끌다 보니 심신이 정말 피로했어요. 또 종교활동, 제가 하는 봉사생활에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고요(손부회장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제가 하는 봉사활동 중에 부부일치운동(ME·Marriage Encounter)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 및 아시아 ME 대표를 맡고 있는데 그간 전경련 일로 바빠 최선을 다하지 못했어요. 이제 자유로워졌으니 주어진 소임을 잘 완수하고 싶습니다.”

    손부회장은 지난 1월4일 평화방송의 한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해, 대기업과 재벌의 분리, 상속세와 증여세의 완전포괄주의, 구조조정본부 해체 등 노무현 당선자 쪽의 재벌정책에 대해 반대의견을 나타냈다. 특히 “대기업과 재벌은 다르다”는 노당선자의 당선 기자회견 발언과 관련, “대기업과 재벌을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전경련이 새 정부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 아니냐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 날 제가 언급한 내용은 이미 5년 전부터 재계의 스탠스가 정해져 있는 것들입니다. 특별히 새로울 게 없어요. 전경련의 입장은 확고합니다. 느닷없이 나온 말들이 아닌 거죠.”

    -시기가 문제였겠지요.

    “당시 인수위에서 이런저런 말이 나왔기 때문에, 뭐 그게 정책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언론에 보도가 되고 하니 재계도 어떤 입장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인터뷰가 그렇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제가 가톨릭 신자로서 평화방송 시청자위원이에요. 다른 도움은 못 줘도 몸 품 드는 거야 괜찮겠다 싶어 인터뷰에 응했죠. 또 토요일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이라 누가 들을까 했는데 그만 평화방송에서 크게 PR을 하는 바람에…. 야, 거참 내 의도와는 달리 언론이 이렇게 보도하고 확대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혹 그런 것들 때문에 ‘더 있다간 피곤해지겠구나’하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는지요.

    “저는 전경련에 몸담은 동안 참으로 험난한 시기를 겪었습니다. 심지어는 단체를 해체하라는 공식적 얘기까지 들어야 했고요. 건물 앞에서는 연일 민노총이 데모를 하고…. 하지만 전 대화를 통해 풀지 못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는 ME 운동이 결국은 대화법 훈련이에요. 노조와도 맘 터놓고 대화를 하면 뜻이 통한다는 걸 노사정위에 참여하면서 절감했어요. 서로 윈윈을 해야지요. 재벌 정책에 대해서도 비록 정부와 우리 입장이 다르다 하나 대화를 하면 하나의 컨센서스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런 문제 때문에 일을 그만둔다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지요.”

    “DJ정권, 빅딜 약속 안 지켰다”

    서울 대치동의 임시 거처에서 기자와 대담 중인 손병두 전 부회장

    -전경련을 이끌면서는 회장단의 지시에 따랐나요, 아니면 리드를 한 편이었나요.

    “저는 일을 창조하고 발굴해 왔습니다. 지금 재계나 국가에 필요한 것이 무어냐, 또 시대 변화에 맞춰 전경련이 바뀌어야 할 부분은 무어냐를 항상 생각해 왔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글로벌 스탠더드, 그 다음에는 IT 지식정보산업, 최근에는 투명경영·윤리경영의 정착에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또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위원회 창설이나 워크숍 개최, 가진 자의 사회공헌을 위한 1%클럽 창설에도 열성을 쏟았고요. 민간경제외교도 매우 중요합니다. 외자유치를 위해 해외 현지 투자설명회를 개최한 것이나 양자간 경제협력에 관여한 일 등이 기억에 남는군요. 그렇게 저는 사회의 니즈(needs)를 찾아 우리 회원사들을 그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에는 전경련이 자기 목소리만 내는 걸로 비치고 있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 경제를 위해 많은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전경련에 대한 국민의 인식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니 열심히 노력해야죠. 솔직히 우리나라처럼 반기업 정서가 강한 나라도 없습니다. 가진 자에 대한 질시도 강하고요. 또 정부의 힘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무슨 문제만 터지면 정부와 민간이 공동책임져야 하는 부분도 민간에만 그 책임을 지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적인 예가 IMF 경제위기 논란에 있어 그 주원인을 재벌들의 과잉투자로만 몰고 간 것 아닙니까. 재벌에 분명 책임은 있지만 주범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지요.

    “환란의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정부에도 있고 기업에도 있고 낭비를 일삼은 국민에게도 있는거죠. 그 부분은 논의 하지 않고 재벌이 과잉투자, 중복투자 해서 그렇다고 몰아가면 쉽기야 쉽죠. 쉬울지는 몰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또 일부 기업의 잘못을 전체의 잘못으로 몰아가고, 기업인의 잘못을 그 기업 자체의 도덕성 문제로 끌고 가고요. 사실 기업이야말로 국부 창출의 원동력 아닙니까.

    우리사회가 자유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여 그 혜택을 누리면서도 정작 장점과 고마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경제교육을 철저히 시켜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작년부터 시도한 것이 초등학생 대상 경제교육이에요. 대학에서는 만날 자본주의 시장경제 비판론만 가르치니 인식이 바로 서지 않을 밖에요. 또 정경유착, 관치금융, 정부의 지나친 간섭, 각종 규제 문제 등도 해결해야죠. 규제가 많으면 부패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강한 권력이 있을 때 부패가 창궐하는 거죠. 선진국처럼 경영환경적인 요소를 많이 도입해야 합니다.

    전 사실 이번 선거를 지켜보면서 희망을 느꼈어요. 돈 안 쓰는 선거가 됐잖아요. 제도가 바뀌었나요? 아니죠. 국민들의 의식이 높아진 겁니다. 우리나라의 시장경제도 역사가 깊어갈수록 더욱 낙관적으로 바뀌어가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전경련은 지금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시장 그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요. 소액주주운동을 하건, 진보적 의견을 제시하는 학자건, 다 시장론자 아닙니까.

    “사람마다 시장을 보는 개념이 다 다른 것 같아요. 스스로는 시장경제론자라 하지만 뜯어보면 시장에 개입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장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질서예요. 한마디로 교환의 메커니즘인데, 시장을 움직이는 건 천재적 사상가가 아닌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그 자체입니다. 1970년대 중반까지는 정부의 시장 개입이 당연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정부의 정책실패가 시장실패보다 훨씬 피해가 크다는 게 속속 증명되고 있지 않습니까.”

    -소액주주운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그것은 좋은 운동입니다. 소액주주의 권익을 보호하자는 논리에 반대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운동의 방식과 내용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어요. 예를 들어 삼성전자만을 집중 공격한다거나…. 뭐 문제가 많은 기업에 대해 그런다면 아무 말 않겠어요. 그나마 국내에서 제일 잘 되고 있는 기업들에 대해 그렇게 집요한 공격을 퍼붓는 건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해외 여론 형성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개혁 과제를 제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좋은 일이죠. 하지만 특정 기업을 들어 사외이사로 누굴 앉히라거나 주주총회장에서 소란을 피우고 하는 것은 건전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빅딜 쪽으로 돌렸다. 손부회장은 최근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퇴임하면 빅딜 비화를 담은 책을 써볼 생각”이라는 뜻을 밝혔다. 이에 대해 손부회장은 껄껄 웃으며 “아무리 중립적으로 쓴다 해도 누군가의 불만을 살 수 밖에 없는 주제다. 자료는 모아놓고 있지만 앞으로 20년은 더 지나야 집필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손부회장은 DJ정권의 최대 경제이슈였던 빅딜의 핵심고리 역할을 한 인사다. 재계 쪽 간사로서 정부 쪽 간사인 강봉균 당시 경제수석과 함께 빅딜의 전 과정에 깊이 개입했다. 빅딜 아이디어가 처음 나온 것은 정치권이 분명하지만, 사업구조조정이란 새 방식으로 중복투자 문제를 풀려는 아이디어 자체는 전경련과 5대 재벌의 작품이었다. 당시 손부회장이 공개한 구조조정 방법은 인수합병, 단일법인 설립, 사업양도·이관 등이었다. 이 때문에 손부회장은 당시 언론에 거듭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이란 말보다는 사업구조조정이란 말이 더 정확하니 그렇게 써달라”는 주문을 했다.

    -빅딜의 핵심은 반도체와 유화였습니다. 특히 LG반도체와 현대전자의 통합이 핫이슈였는데요. 조정하는 입장에서 마음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유화 때는 이미 정부의 의지가 약화된 다음이었고, 반도체 때는 그게 안되면 큰일나는 분위기였어요. 컨설팅 결과 경영권을 현대전자가 갖는 쪽으로 결론이 나자 LG는 이를 수용하지 못하겠다며 버텼죠. 정부는 정부대로 결론이 났으니 승복하라고 압박을 가했고. 결국 1999년 1월6일 구본무 회장이 청와대에 다녀온 뒤 반도체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때 사실 구회장이 청와대에 들어간다기에 일이 잘 풀리려나보다 했어요. 그 좀 전에 김중권 비서실장이 반도체 빅딜에 대한 전경련의 입장을 묻더군요. 김우중 당시 회장에게 어찌 처리할까 물으니 ‘종이 한 쪽에는 현대 주장을 쓰고, 다른 쪽에는 LG 입장을 쓰고, 그런 다음 우리 전경련은 무조건 정부 입장을 따르겠다고 쓰라’는 거였어요. 한마디로 입장이 없다는 거죠. 그만큼 민감한 문제였거든요. 어쨌거나 저는 그런 일도 있고 또 경기도 조금씩 호전되는 분위기라 정부 태도가 좀 달라지지 않았겠느냐, 그렇게 추측했어요. 하지만 결론은 구회장이 100% 던지고 나오는 것으로 끝이 났지요.

    제 딴에는 중립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그런 결과가 나오니, LG 쪽에서 섭섭해하지는 않을까 싶어 걱정이 됐어요. 제가 현대로부터 무슨 복덕방비를 받은 것도 아니고…. 곤혹스러웠지요.”

    그렇다면 빅딜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역시 비슷합니다. 저는 재계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려 노력했기 때문에 정부와 늘 부딪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더라도 기업은 또 기업대로 자신들의 뜻이 100% 반영 안되니 섭섭해하고. 그렇게 양쪽 다 만족을 못 시키니 괴로웠죠. 정부의 입장에서는 민간 목소리를, 민간입장에서는 정부 목소리를 강요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빅딜을 성사시키는 데에 가장 보탬이 된 건 인간관계였습니다. 제가 삼성 회장비서실 출신이고, 손길승 회장과는 동창이고, 구본무 회장과는 동향, 정몽구 회장과는 또 고등학교 동기고요. 합의문 하나도 인간적인 신뢰가 없으면 못 쓰는 겁니다.”

    -기업, 특히 오너들 입장에서는 이런저런 정부의 뜻을 수용하기 어려웠을 법도 한데요.

    “당시에는 ‘독자생존은 어렵다’는 논리가 비등했습니다. 나중에야 반도체 경기가 좋아지고 하니 꼭 그럴 필요 있었나 하는 얘기가 나오지만, 그 때로서는 ‘국가 부도의 위기 상황이니 합리화하라’는 정부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어요. 또 분명 구조조정할 필요도 있었고요. 재계도 동의하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즘 들어 ‘빅딜은 실패했다’는 평가가 많이 나오는데요.

    “뭔가 잘못됐을 때는 원인이 있습니다. 빅딜과 관련해서는 정부의 책임이 커요. 지원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당시 정부 당국은 ‘빅딜만 완성되면 무대 위에서 춤이라도 추겠다. 세제·금융상의 모든 지원을 해주겠다. 금융상으로는 출자전환·단기차입금 장기 전환·금리 인하, 그 모든 것들을 다 해주겠다. 또 합치고 줄이는 사이에 세금 탕감해 주고 액수도 낮춰주겠다. 고용 조정도 쉽게 할 수 있게 해주겠다…’며 그렇게 온갖 협조를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일이 시작되자 구조본에 떠넘기고, 여신은 금융단 회의 통해 결정한다 하고, 그렇게 자꾸 시간을 끌었습니다.

    뭐랑 같은 거냐 하면, 수술을 한 거예요. 집도를 하긴 했는데 산소도 피도 공급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 실패할 수밖에요. 당시 정부가 신속하게 각종 조치를 취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겁니다. 외국인 투자자들도 그걸 기대하고 있었어요. 출자전환만 되면 우리도 투자를 결정하겠다고 했는데 자꾸 시간만 끄니까 결국 워크아웃이란 제도가 나오고….

    그래서, 그럼 한시적으로 구조조정 특별법을 만들자고도 했어요. 법과 제도를 통해야 가능하다고요. 그런데 그걸 금융기관, 채권단 합의제로 하니 쉽게 결론이 날 리가 없지요. 시간은 자꾸 가는데 사후 조치가 잘못된 겁니다. 수술도 중요하지만 사후처리도 중요하잖아요.”

    “친북 사회주의 세력 우려스러워”

    -빅딜 협상을 하는 동안 그 어떤 이보다 청와대에 자주 들어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어떤 인물입니까.

    “김대통령은 자상한 분입니다. 출자총액제한 제도에 대해 제가 반대했을 때도 ‘나는 감이 부족하니 공정거래위원장이랑 이러저러하게 얘기해 합의하라’ 하며 제 손을 꼭 잡고 얘기하시고, 외국 나가서도 큰 일에 대해서는 전화로 직접 챙기는 열성을 보였어요. 무척 세심하고, 통계 같은 것을 어쩌면 그리 잘 기억하는지…. 또 자신이 할 말은 꼭 직접 메모해와 하지, 남이 적어놓은 걸 그냥 보고 읽는 법이 없었어요.

    물론 김대통령이 추진한 ‘5+3원칙’(8가지 재벌개혁 정책)은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일일이 토론하고 부당함을 지적하면 들어주고 하는, 대화를 중시하는 분이었어요. 저는 그 분한테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저도 미움보다 애정이 많고요. 대북 문제, 그런 것은 요즘 사태를 보면 좀 그렇지만,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정말 눈물겹도록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창업주들과 2세, 3세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창업주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입니다. 어려운 가운데 자수성가했기에 일단 대단히 짭니다. 결단력이 강하고요. 그에 비해 2세들은 연약해요. 고생을 많이 하지 않아 그렇겠죠. 험한 바다가 유능한 선원을 만든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거기 비춰 볼 때 창업주의 자손이라는 것만으로 경영권을 물려받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은지요.

    “시대가 달라졌으니까요. 지금은 그런 고생이 없는 시대입니다. 지식정보화 사회고요. 이런 시대에는 공부 많이 하고 국제화된 오너가 필요합니다. 미국 록펠러에도 가보면 창업주의 재능을 물려받은 건 2세가 아니라 3세였어요. 그렇게 보면 3세들 중 훌륭한 경영인이 더 많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도 할 수 있지요. 저는 가족 중에서 훌륭한 경영자가 나올 수도 있고, 비가족 중 전문경영인을 발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계의 입’ 노릇을 하면서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회한은 없습니까.

    “제게는 우리나라에 자유시장경제, 자유기업주의를 제대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신념과 사명감이 있습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시장경제를 적극 수용하고, 재산권을 보장하고, 경제적 자유가 많은 나라일수록 번영했어요. 저의 언행이 오직 재벌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국가경제 전체를 위한 것이지요. 저는 그런 제 철학과 신념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언제든지 토론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시장경제 전도사로서 주어진 몫을 다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우리나라는 ‘법치’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해 온 걸로 아는데요.

    “법치, 사유재산권 보호, 이런 것들이 아직 잘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는 아직도 개인 재산 출연하라, 이래라 저래라 하며 요구합니다. 노사 현장에 가보세요. 사용자의, 아니 뭐 주주의 공장을 근로자들이 다 때려부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적어도 남의 재산을 침해하지는 말아야지요. 그런 것들이 법으로 잘 다스려질 때 비로소 법치가 완성됐다 할 수 있을 겁니다.”

    손부회장은 시장경제의 중요성과 우수성을 역설하면서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이들에 대한 우려와 그로 인한 불안감을 감추지 않았다.

    “대학생들이나 젊은 층을 보면 북한을 찬양하고 사회주의적 성향에 물든 이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들이 지금 인터넷을 통해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있어요. 이래서는 안됩니다. 남북통일도 자유시장경제라는 기본 틀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민족 번영은 없습니다.”

    끝으로 새 정부에 바라는 바를 말해달라고 했다. 손부회장은 ‘동북아 프로젝트보다 국민 소득 2만달러 시대를 여는 것이 더 급하다. 성장 없이는 분배도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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