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인물 연구

“힘 있을 때 굽혀라” ‘실속 변신’ 주도하는 현실주의자

손길승 전경련 회장

  • 글: 이명재 mjlee@donga.com

“힘 있을 때 굽혀라” ‘실속 변신’ 주도하는 현실주의자

2/4
손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수락하는 전제 조건으로 전경련과 재계를 향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의 도덕적 의무)’를 주문한 것이 첫 장면이다. 전경련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불만이 담겨 있다. 전경련과 재계가 국민의 신뢰를 잃고서는 존재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두 번째 장면은 2월7일 전경련 회장 취임식에서 연출됐다. 손회장은 취임 일성(一聲)으로 “재계와 전경련이 새 정부 정책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새 정부의 재벌정책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혀온 전경련의 입에서 ‘협력’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사흘 뒤인 10일 손회장이 노무현 당선자를 찾아가 전경련 김석중 상무의 ‘사회주의’ 발언에 대해 사과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자리에서 손회장은 새 정부의 동북아 구상 등에 대해 적극 협력하겠다는 뜻도 전했다.

“재계는 국가 발전을 위해 힘써야 하고, 정부의 정책과 전략이 성공하도록 일조해야 한다. 정책 입안자들의 목표는 국가 발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기업은 새 정부의 개혁과제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재계와 정부가 머리를 맞대면 풀어나가지 못할 것이 없다.”

새 정부에 대해 분명하게 화해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새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전경련과 재계의 시각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손회장의 개인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됐을 때 손회장이 완강하게 고사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가 이처럼 적극적인 발언을 한 것은 예상 밖이다. 지난 1월 말 손회장은 차기 전경련 회장으로 오너 출신보다 전문경영인인 자신이 더 적합하다는 ‘대안론’이 급부상하자 이를 피해 서둘러 해외 출장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손길승 회장이 추구하는 변화가 이미 재계의 컨센서스를 얻고 있음을 입증하는 의미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손병두(孫炳斗·62) 전경련 상근 부회장의 사의 표명이 그것이다. 손부회장은 지난 6년간 전경련을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인물로, 재계의 강경 입장을 대변해왔다.

손길승 회장과 경남 진주중학 동기인 손부회장의 퇴진은 신임 손회장의 뜻이라기보다는 재계의 변화 기류를 읽은 손부회장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결심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손회장이 제시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재계가 수용한 것으로 해석된다는 얘기다. 거꾸로 재계가 손회장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란 시각도 있다.

손회장은 처음엔 마지못해 전경련 회장직을 떠맡은 듯했지만, 일단 회장에 취임하고 나서는 이런 분위기를 등에 업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마치 ‘준비된 회장’의 면모를 보여주는 듯하다.

정부에 협력해야 실리 챙겨

손회장이 전경련의 변화를 역설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는 그간 전경련이 보여준 활동에 대한 우려다. 손회장은 회장에 취임하기 전에도 전경련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경영인이다. 부회장, 경제정책위원회 위원장, 중국위원회 위원장 등도 맡은 바 있다. 그러나 최근 전경련이 노무현 당선자측과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자 이를 상당히 우려했다.

손회장은 재계와 정부의 갈등이 초래하는 부작용을 누구보다 잘 안다. 1993년부터 전경련 회장을 연임했던 고(故) 최종현(崔鍾賢) SK 회장이 정부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가 김영삼(金泳三) 정권과 불편한 관계가 된 적이 있다.

이때문에 최회장이 YS 정권 내내 가슴앓이 하는 것을 지켜봤던 손회장은 그로부터 반면교사의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또 하나의 배경은 재벌과 정권 간의 역학관계 변화다. 지금 대기업 집단의 힘은 5년 전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돼 ‘재벌개혁’이라는 대세에 순응해야 했던 때와는 다르다. 재벌의 힘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정부와 재계의 대립구도에서 칼자루를 쥔 것은 얼핏 보면 정부 같지만, 역학관계를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대기업의 논리가 사회 구석구석에서 보이지 않게 여론을 움직일 만큼 대기업의 힘은 총체적이다.

따라서 이제는 대기업이 사사건건 정부와 충돌하기보다는 협력하는 형세를 취하면서 실리를 챙겨야 한다는 게 손회장의 복안인 듯하다.

특히 전경련이 재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로 낙인찍혀 국민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되면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게 마련이다. 그러니 변화된 상황에 맞는 업그레이드된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4
글: 이명재 mjlee@donga.com
목록 닫기

“힘 있을 때 굽혀라” ‘실속 변신’ 주도하는 현실주의자

댓글 창 닫기

2019/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