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권을 몽땅 할애해 화가를 비롯한 예술가들, 학자들, 사상가들을 조명하는 책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 나아가 번역서가 아닌 저서가 늘어나야 한다. 번역된 책은 당연히 그 나라 독자를 전제로 하므로 우리 독자를 충분히 배려했다고 할 수 없다.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처음 소개돼 독자들이 잘 모르는 작가의 경우, 역자는 그 소개의 의의를 우리 현실에 비추어 상세히 설명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외국 문화를 우리 문화에 접목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서는 ‘번역’이라는 기술에 그치고, 저서라 하는 것도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다못해 기술적으로 완벽한 번역이라도 많이 나왔으면 한다. 엉터리 번역서를 읽기란 실로 고문에 가깝지 않은가.
그러나 어려운 출판계 형편을 생각할 때 적은 수이지만 제대로 된 번역서들이 쉼 없이 출간되고 있다는 점에 나는 감격한다. 마찬가지로 나 같은 아마추어가 쓰는 책을(잘 해봐야 몇천 권 이상 팔리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여전히 내겠다는 소규모 출판사에도 감격한다. 4000만 인구 중 1만분의 1도 읽지 않는 책 아닌가. 특히 내 주변 사람들 중 일부러 사서 읽는 이는 한두 명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얼마 전부터 읽지 않을 사람에게는 책을 주지 않기로 했다. 특히 교수들에게.
북방 르네상스 화가들에 대해 언젠가 책을 쓰겠다는 욕심으로 부지런히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책도 사 모았다. 그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위대한 화가들인데도 그 동안 소개가 미미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미술사 차원뿐만 아니라 지성사 차원에서도 그들은 반드시 소개되어야 한다. 특히 일본이나 미국을 통해 프랑스 중심 미술만 소개된 데 말미암은 지적 공백을 메우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이제 그런 책들이 나왔으니 나로서는 쓸 필요가 없어져 다행이라 생각했으나, 출간된 책들의 내용과 내 생각은 아무래도 달라 여기 몇 자 적고자 한다.
‘세계 4대 화가’ 브뢰겔
2001년 번역된 ‘브뢰겔’과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모두 미국의 월터 S. 기브슨의 저작이다. 그는 전문가답게 두 사람의 삶과 그림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특히 그림에 대해서는 미술 분야에서 도상학이라 불리는 엄밀한 방법론이나 활기찬 유머의 강조로 독자를 매료시킨다. 나는 여기서 기브슨이 이미 훌륭하게 지적한 바들을 되풀이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런 점에 흥미가 있는 독자들은 기브슨의 책을 보면 된다. 그러나 그런 미시적 엄밀성에도 불구하고 거시적 관점, 특히 사회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왜 지금 브뢰겔이냐 하는 문제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기브슨은 브뢰겔로 불리는 대(大) 피테르 브뢰겔(그의 아들을 소 피테르 브뢰겔이라고 한다)을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반 고흐와 함께 세계 4대 화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프랑스인이라면 찬성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유럽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인의 평가이니 믿도록 하자. 꼭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나로서는 정말 공정한 평가라고 본다.
기브슨은 그런 평가로부터 브뢰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나, 우리말 번역서는 책의 표제에 ‘16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화가’라는, 원저에 없는 수식어를 붙였다.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인지, 브뢰겔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그렇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래서는 기브슨이 브뢰겔을 세계 4대 화가의 하나로 치는 것보다는 격이 낮다. 어쩌면 브뢰겔을 세계 4대 화가의 하나로 보는 기브슨의 평가가 우리나라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아 그렇게 명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에게 브뢰겔은 그 동안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화집이 나온 적도 거의 없다.
그러나 보기 나름으로는 나머지 세 사람보다 브뢰겔이 우리에게 훨씬 진한 감동을 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가 그리는 자연이나 농민생활이란 주제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연과 농민의 나라였던 우리에게는 더욱 절실한 친근성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밀레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개된 서양미술이라는 것이 이미 그런 농민사회를 예전에 그만둔 근대 서양에서 나온 것이기에 브뢰겔은 전혀 주체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런 보기는 물론 브뢰겔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