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브뢰겔 ‘익명의 민중’ 향한 복합적 시선

  • 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입력2003-02-25 17: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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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세기 들어 재발견된 북방 르네상스의 대가 브뢰겔. 자연과 농민에 대한 현실밀착적 묘사, 권력을 향한 거침 없는 조롱으로 사실주의 화풍의 선조가 됐다.‘농민의 브뢰겔’, ‘자연의 브뢰겔’로 불린 한 이단적 르네상스인의 궤적.
    브뢰겔 ‘익명의 민중’ 향한 복합적 시선
    최근 미술에 관한 제대로 된 책이 많이 출간돼 기쁘다. 대부분 번역서이기는 하나,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화가들을 소개하고 있어 책읽기가 한결 즐거워졌다. 특히 보스, 브뢰겔, 뒤러 등 내가 좋아하는 북방 르네상스 화가들을 각각 소개하고 있는 책들이 그렇다. 대체로 서양의 유명 미술출판사가 내는 시리즈를 번역한 것인데, 그들이 속한 시리즈를 선택한 이유는 잘 모르나(대체로 상업적일 것이겠으나), 그 동안 나온 프랑스 중심의, 그것도 그림 중심의 ‘잘 팔리는’ 미술 책, 달력에 흔히 나오는 아름다운 그림 중심의 책들과는 분명 다르다.

    한 권을 몽땅 할애해 화가를 비롯한 예술가들, 학자들, 사상가들을 조명하는 책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 나아가 번역서가 아닌 저서가 늘어나야 한다. 번역된 책은 당연히 그 나라 독자를 전제로 하므로 우리 독자를 충분히 배려했다고 할 수 없다.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처음 소개돼 독자들이 잘 모르는 작가의 경우, 역자는 그 소개의 의의를 우리 현실에 비추어 상세히 설명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외국 문화를 우리 문화에 접목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서는 ‘번역’이라는 기술에 그치고, 저서라 하는 것도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다못해 기술적으로 완벽한 번역이라도 많이 나왔으면 한다. 엉터리 번역서를 읽기란 실로 고문에 가깝지 않은가.

    그러나 어려운 출판계 형편을 생각할 때 적은 수이지만 제대로 된 번역서들이 쉼 없이 출간되고 있다는 점에 나는 감격한다. 마찬가지로 나 같은 아마추어가 쓰는 책을(잘 해봐야 몇천 권 이상 팔리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여전히 내겠다는 소규모 출판사에도 감격한다. 4000만 인구 중 1만분의 1도 읽지 않는 책 아닌가. 특히 내 주변 사람들 중 일부러 사서 읽는 이는 한두 명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얼마 전부터 읽지 않을 사람에게는 책을 주지 않기로 했다. 특히 교수들에게.

    북방 르네상스 화가들에 대해 언젠가 책을 쓰겠다는 욕심으로 부지런히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책도 사 모았다. 그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위대한 화가들인데도 그 동안 소개가 미미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미술사 차원뿐만 아니라 지성사 차원에서도 그들은 반드시 소개되어야 한다. 특히 일본이나 미국을 통해 프랑스 중심 미술만 소개된 데 말미암은 지적 공백을 메우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이제 그런 책들이 나왔으니 나로서는 쓸 필요가 없어져 다행이라 생각했으나, 출간된 책들의 내용과 내 생각은 아무래도 달라 여기 몇 자 적고자 한다.



    ‘세계 4대 화가’ 브뢰겔

    2001년 번역된 ‘브뢰겔’과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모두 미국의 월터 S. 기브슨의 저작이다. 그는 전문가답게 두 사람의 삶과 그림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특히 그림에 대해서는 미술 분야에서 도상학이라 불리는 엄밀한 방법론이나 활기찬 유머의 강조로 독자를 매료시킨다. 나는 여기서 기브슨이 이미 훌륭하게 지적한 바들을 되풀이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런 점에 흥미가 있는 독자들은 기브슨의 책을 보면 된다. 그러나 그런 미시적 엄밀성에도 불구하고 거시적 관점, 특히 사회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왜 지금 브뢰겔이냐 하는 문제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기브슨은 브뢰겔로 불리는 대(大) 피테르 브뢰겔(그의 아들을 소 피테르 브뢰겔이라고 한다)을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반 고흐와 함께 세계 4대 화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프랑스인이라면 찬성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유럽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인의 평가이니 믿도록 하자. 꼭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나로서는 정말 공정한 평가라고 본다.

    기브슨은 그런 평가로부터 브뢰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나, 우리말 번역서는 책의 표제에 ‘16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화가’라는, 원저에 없는 수식어를 붙였다.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인지, 브뢰겔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그렇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래서는 기브슨이 브뢰겔을 세계 4대 화가의 하나로 치는 것보다는 격이 낮다. 어쩌면 브뢰겔을 세계 4대 화가의 하나로 보는 기브슨의 평가가 우리나라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아 그렇게 명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에게 브뢰겔은 그 동안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화집이 나온 적도 거의 없다.

    그러나 보기 나름으로는 나머지 세 사람보다 브뢰겔이 우리에게 훨씬 진한 감동을 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가 그리는 자연이나 농민생활이란 주제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연과 농민의 나라였던 우리에게는 더욱 절실한 친근성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밀레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개된 서양미술이라는 것이 이미 그런 농민사회를 예전에 그만둔 근대 서양에서 나온 것이기에 브뢰겔은 전혀 주체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런 보기는 물론 브뢰겔만이 아니다.

    브뢰겔 ‘익명의 민중’ 향한 복합적 시선

    브뢰겔 작 ‘농민들의 춤”. 농촌축제의 이모저모가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미술사만이 아니라 모든 문화사, 아니 역사 자체가 19세기 자본주의 서양의 소산이다. 즉 19세기 자본주의의 시각으로 꾸려진 서양의 역사이다. 그것이 일제에 의해 급수입되어 일제시대를 거쳐 우리에게도 강요 또는 이식되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그대로 먹히고 있다. 물론 최근에 와서 서양으로부터 직수입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으나, 그 수입품도 여전히 19세기 이래의 진부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고 있다. 이제는 서양 문화를 우리 현실에 맞게 주체적이고도 다양하게 수용해야 한다.

    브뢰겔은 왜 세계 4대 화가에 속할 정도로 위대한가? 기브슨은 이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마치 상식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상식이 아닌 만큼 그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미켈란젤로와 렘브란트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다르나, 생전부터 지금까지 위대한 화가로 평가된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반면 반 고흐는 생전에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 세계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에 반해 16세기 후반기의 브뢰겔은 당시에는 상당한 평가를 받았으나 그 후 300년 이상 잊혀졌다 20세기에 와서 세계적 화가로 부활했다는 점에서 반 고흐보다 더 극적이고 역사적이다. 기브슨은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나는 매우 중요한 점이라 생각한다. 브뢰겔은 당대의 영웅·성인·지배자 숭배나 이후의 부르주아 사조, 또는 낭만주의적으로 이상화된 자연관의 미술과는 전혀 맞지 않아 19세기까지 철저히 망각됐다. 그 후 색을 중시한 인상주의에 의해 특이한 색채가 빛을 보다가, 인간의 모습을 변형시킨 표현주의와 입체주의에 의해 비로소 각광 받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엽에 와서야 재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19~20세기 미술에서 그런 브뢰겔 재발견은 사실 피상적인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브뢰겔이 인간·사회·자연에 대해 지닌 태도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특히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라 부른 20세기에 충격을 준 것은 다리가 절단된 거지들을 그린 만년의 작품들이다. 거지들은 각각 당시의 지배계층을 상징한 것이었으나, 그런 도상학적 해석 이전에 밑바닥 인생에 대한 화가의 철저히 냉정한 시선이 20세기에 비로소 주목을 끌게 되었다. 16세기는 물론 그 후에도 그토록 현실을 철저하게 그린 화가는 다시없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브뢰겔의 시선이 체념이나 연민의 감정이라기보다도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비극의 20세기를 산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었다는 점이다. 브뢰겔은 거지들에 대해 어떤 감상도 표현하지 않았다. 인간은 신처럼 완벽한 존재가 아닌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즉 인간은 신이 흙덩이에 숨결을 불어넣어 만든 존재가 아닌 흙덩이 그 자체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는 자연사상을 표현했다. 농민 생활의 묘사에서도 감상적 농민 예찬과는 달리 철저한 리얼리즘으로, 또 인간과 현실에 대한 회의정신을 보여주는 태도로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브뢰겔은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농민 화가, 노동 화가로 재발견되었다.

    이는 인간은 자연에 뿌리를 내린 존재라는 것, 즉 자연으로부터 그 생명력을 얻는다는 사상이기도 하고, 나아가 인간이나 동식물을 존재케 하는 자연을 더욱 중시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심각한 자연 파괴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가 그린 광대한 자연은 우리가 상실한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브뢰겔은 단순히 ‘농민의 브뢰겔’이 아니라 ‘자연의 브뢰겔’로서 더욱 강한 호소력을 갖는다.

    브뢰겔 ‘익명의 민중’ 향한 복합적 시선

    브뢰겔 작 ‘동방박사의 경배’

    미술의 역사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브뢰겔이 노동미술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미술과 노동은 별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 미술은 그 자체가 노동에서 나온 것이다. 노동은 그 최초의 도구 생산으로부터 창조적이었다. 노동은 자연을 변화시킴과 동시에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킨다. 인간의 육체에 대한 자연의 작용이 감각이고, 감각은 육체 자체의 활동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려 하지 않으면 사물은 보이지 않고, 보려 해야만 보인다. 즉 행동에 의해 감각이 발달하며, 예술은 곧 인간이 창조한 자연의 이미지로부터 나온다. 그런 예술을 통해 인간은 다른 인간과 교통한다. 이로써 예술은 사회적 공유재산이 된다. 인간의 창조물인 동시에 사회생활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미술은 원시사회에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물리적 유용성을 갖는 사물인 도구나 무기로서 그 대표격은 도자기다. 도자기는 종자와 물의 저장에 이용된 것으로 당시 사회생활인 농업의 중심이었다. 다른 하나는 마법신앙에 근거한 의례로서의 예술이다. 수렵 의례의 하나인 동굴화나 매장을 통한 분묘나 사원이 그에 속한다. 인류 최초의 회화인 동굴화가 수렵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그려진, 노동의 소산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원시미술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 즉 공동체에 사는 모든 구성원의 경험과 지혜가 응축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 예컨대 도자기는 죽은 사람을 화장하고 난 뒤 그의 뼛가루를 보존하는 그릇으로도 사용되었다. 또한 동굴화에서는 식용에 사용되는 부분이 특별하게 강조되었다. 이처럼 원시미술은 인간 생활의 일부이니 만큼 그 주제는 어디까지나 인간과 자연이다. 미술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 또한 그 주제가 인간과 자연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 속에 사는 자연스러운 존재이니 만큼 자연을 모방한다.

    그렇다고 원시미술이 그 유용성이나 마법적 신앙 속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현대 추상미술에서는 기능적 형태라는 것이 하나의 표어가 되어 그 재료를 물신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나, 그것이 어떤 기능을 하는가에 대한 검토 또한 필요하다고 본다. 즉 미술의 기능이란 사회를 향해, 그 사회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의식을 부여하고 그 사회의 진실한 모습과 가능성에 대한 의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원시사회에서 도자기나 동굴화 등이 미술일 수 있는 이유는, 당시 그것들이 사회의 중심적 임무를 수행하고 인간의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사회의 필연적 발전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술은 본래 사회적이다.

    반면 오늘의 추상미술이나 공예에서 표현되는 기하학적 디자인은 원시미술의 그러한 기능과는 궤를 달리한다. 기능 혹은 순수형식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추상작품을 생산하는 미술가는 삶에 대한 사유의 소산으로서의 미술 형식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초현실주의나 상징주의적인 현대미술도 원시미술이 노동에서 비롯된 사회적 미술이었던 점과는 달리, 세계를 단순히 혼돈과 신비로 보는 점에서 역시 그런 포기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자연과 농민, 인간 현실

    원시공동사회의 말기에 이르면 노동을 둘러싼 사회의 재편이 이루어진다. 즉 부족의 우두머리와 마법사가 등장하고, 노예 소유를 포함한 사유재산제도가 발생한다. 이와 동시에 노예 미술가들에 의한 거대한 미술이 등장하여 지배계급의 생활을 장식하는 것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그 장식의 일부로 제작된 왕의 조각상이 형식적인 것에 그친 반면 평민의 조각상은 현실 인간의 모습, 특히 집단적 노동을 재현한 것으로 주목된다. 그 전형은 이집트 미술에서 나타나나, 더욱 더 인간적인 미술이 형성된 것은 그리스에서였다.

    이집트나 그리스 벽화에서는 언제나 노동이 주제이나, 이는 주인이 바라보는 완벽한 노동의 모습에 불과하다. 우리의 고대벽화도 마찬가지다. 바로 사회가 신분과 계급에 따라 예정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표현한 그림들이다. 그러한 태도는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 지속되었다. 근대의 양치기는 플루트를 불고 춤을 추며 지배자에게 맛좋은 술과 과일을 바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흥겨운 농민을 그린 우리들의 근대민속화도 마찬가지다. 현실의 농민이 처한 모순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농민반란을 잊기 위한 마취적 수단으로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중세까지 이름 없는 노동자였던 미술가가 하나의 공적 존재로서, 또 삶에 대해 사유하는 인간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때가 르네상스기였다. 르네상스 미술의 위대함은 사회의 위기와 모순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 시대에 미술가들이 비판자의 기능을 가졌으며, 그때까지의 종교미술을 변혁한 점에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을 연 지오토나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끝낸 미켈란젤로 모두 종교를 주제로 삼았으나, 그들은 자기만의 주제와 표현법을 선택해 당시 사회의 도덕성을 비판했다.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기의 유럽 대륙 또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 르네상스 화가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과 달리 삶에 대한 사랑, 감각과 자연에 대한 예찬, 아름다움과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가능성의 탐구와는 거리가 먼 작업을 한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네덜란드의 보스(1450~1516)는 빈민의 비참함을 환상적 필치로 보여준다. 이미 화가가 아니라 지식인인 그는 희화풍의 왜곡이나 이교적이고 원시적인 부족적 마술과 의례에서 비롯된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악마와 악령의 전설과 연결지어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당시의 부·권력·사치·악덕을 비판했다. 보스는 흔히 현대 초현실주의의 원조로 추앙 받으나, 보스가 창조한 사회적 상징과 초현실주의의 몽환적 환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보스가 표현한 것은 그 시대에 어떤 현실적 방법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사회적 비참이었으나, 초현실주의의 그것은 단순한 환상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그뤼네발트(1455~1528)도 이젠하임의 제단화에 고문당하고 고통에 휩싸인 십자가의 예수를 미술사상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보스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식 고전미가 아니라 도리어 중세적 고딕에 가깝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주제는 역시 노동하는 빈민과 농민의 희생이라는 점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비판적 태도를 함께하고 있다. 그의 제자인 뒤러(1471 ~1528)는 당시 독일 화가 중 이탈리아적인 경향이 가장 짙었으나, 그 어두운 인물 묘사에는 시대의 공포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 시대의 노동화가로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이는 브뢰겔이다. 그는 보스와 마찬가지로 중세적 화풍을 가졌으나, 그 주제는 노동민중의 고뇌였다. 특히 대조적인 두 장면으로 구성된 판화는 거지를 내쫓는 부자의 향연과 비만한 집달리에 쫓긴 걸인의 기아를 통해 당시 사회의 모순을 폭로한다. 또한 그의 자연은 과장된 환상이나 멋진 정원이 아니라, 그 속에 사는 백성들의 눈에 비친 자연 그 자체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자연과 인간의 진실에 대한 노동민중의 경험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탈리아 여행이 남긴 것

    브뢰겔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라블레처럼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불분명하다. 대체로 1525년에서 1530년 사이에 태어나 1569년, 즉 40세 전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플랑드르 르네상스의 전성기와 일치한다. 그의 생애에 특기할 점은 없다. 여느 화가처럼 20대까지 그림을 배우고 1551년에는 화가조합에 들었으며,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판화와 유화를 제작했다. 지금 남아 있는 브뢰겔의 그림 45점은 모두 1556년부터 1568년까지의 12년 사이에 그려졌다. 그 생애가 짧았다는 점에서 반 고흐와 비슷하다.

    농민화를 많이 그린 까닭에 농민 출신으로 여겨져 왔으나, 최근에는 당시 교우관계로 보아 일찍부터 휴머니즘 교육을 받은 교양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그런 시각에서 브뢰겔 그림을 도덕적·철학적으로 난해하게 해석하는 경향도 있으나 반드시 그런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이는 휴머니스트는 도덕인 또는 철학인이라는 획일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르네상스 휴머니즘 또는 휴머니스트를 그렇게 좁게 보아서는 안 된다. 도리어 가장 철저한 사회적 리얼리스트로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브뢰겔이 그렇다.

    브뢰겔이 농민 출신이 아님을 증명할 근거는 없다. 농민 출신이라 해서 휴머니스트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굳이 농민 출신이어서 자연이나 농민 생활을 그토록 절묘하게 묘사했다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겠지만, 농민이나 농촌 출신이 아니었다면, 아니 최소한 농촌에서 살지 않았다면 그런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브뢰겔의 그림을 결코 상상력의 소산이라고만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브뢰겔 ‘익명의 민중’ 향한 복합적 시선

    브뢰겔 작 ‘바벨탑’

    브뢰겔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또한 불분명하나, 그림 공부나 화가조합 생활을 비롯한 상당 기간을 보낸 앤트워프와 브뤼셀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였으며, 화가들도 매우 많았다. 1569년 당시 앤트워프 인구 약 9만명 중 화가는 360명으로, 인구 250명 중 1명이 화가인 셈이었다. 그런 만큼 화가들은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브뢰겔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것도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배우고자 했다기보다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다른 화가들처럼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품을 공부해 북방에 전하고자 한 것이 아니어서, 바로 앤트워프로 돌아왔다. 이 점이 그를 당대의 르네상스 모방자들과 다르게 만든 요인일지도 모른다. 물론 기브슨 등이 밝히듯 르네상스의 영향을 과소 평가할 수는 없으나, 굳이 그 관련을 강조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도리어 나는, 브뢰겔이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알프스의 웅대한 산악풍경을 보았고 그 웅장한 자연의 묘사가 평생동안 그의 그림에서 끝없이 되풀이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경험이었다고 본다. 그 여행이 없었다면 그는 산악이 없는 플랑드르에서 들판의 그림만 그렸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풍경화는 당대 네덜란드의 그것과 같은 소박하고 안온한 맛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특히 어느 풍경에나 인간이 그려져 있는 점, 그것도 언제나 개인이 아닌 민중의 일상적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권력을 한껏 조롱하다

    그러나 브뢰겔은 그 어떤 풍경이나 인간도 이상화하지 않았다. 도리어 1563년 성서에서 저주받은 도시를 상징하는 바벨탑을 세 번이나 그려, 자신이 산 당시 유럽의 최대 도시 앤트워프를 절망적으로 묘사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노아의 자손들이 하늘에 이를 탑을 세우고자 하나, 신의 노여움을 사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게 돼 전세계로 흩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앤트워프는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는 국제도시였지만, 종교개혁으로 인해 온갖 교파가 혼재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브뢰겔은 바벨탑에 비유한 것이다. 브뢰겔은 에라스무스나 몽테뉴, 또는 모어와 같이 당시 휴머니즘에 따라 여러 종파의 외적인 의식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신앙을 주장했고 편협한 종교 충돌에 반대해 그 자유를 옹호한 것이었다.

    동시에 바벨탑은 당시 융성하기 시작한 자본주의의 악폐를 상징한 것이기도 하다. 브뢰겔은 세속적이고 상업적인 사회에 내재된 도덕적 위험, 특히 탐욕과 사리사욕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인식했다. 그러나 당시의 약육강식이라는 현실을 가장 절묘하게 묘사한 작품은 1557년 ‘큰 고기가 작은 고기를 먹는다’는 작은 판화다. 여기서 큰 고기란 황제와 국왕, 대상인 등이며 작은 고기란 그들의 ‘밥’이 되는 민중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화가들이 권력에 복종한 것과 달리, 민중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브뢰겔의 남다른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당시 민중에게 가장 큰 고통은 전쟁이었다. 불타는 탑과 해골 괴물의 군대로 상징되는 지옥도인 ‘죽음의 승리’는 당시 세상을 말세라고 본 브뢰겔의 시대 비판을 가장 첨예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브뢰겔은 전통적인 종교적 해석인 인간의 죄와 어리석음에 대한 처벌이라는 관점을 벗어나 신앙이나 사회적 지위, 또는 경제적 부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게 닥치는 죽음의 운명으로 전쟁에 의한 파괴를 형상화해 전쟁을 통렬하게 고발했다. 그 점에서 이 그림은 고야의 ‘전쟁의 참상’이나 피카소의 ‘게르니카’의 선구다.

    이런 점은 그가 그린 전통적 종교화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1564년부터 몇 번이나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나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를 비롯한 성화는 성서에 나오는 그 주인공들을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성서 장면을 작품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묘사한 점은 당시 가톨릭이 요구한 성화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이는 그가 권력과 결탁한 가톨릭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점, 특히 그 제도나 성직자 및 세속권력에 대해 비판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의 세속권력은 외국 지배자이자 자본가였다.

    브뢰겔의 마지막 작품인 ‘교수대 위의 까치’는 교수대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그렸다. 이는 당시 지배자이던 가톨릭에 저항한 프로테스탄트 목사를 처형하기 직전, 권력을 조롱하며 춤추는 사람들을 묘사한 것이다. 브뢰겔은 가톨릭에 반대하고 프로테스탄트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 아니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을 교수형에 처하는 권력을 조롱하고 있다. 위에서 설명한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기브슨은 이 그림도 단순히 서정적 풍경화로 보고 있으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브뢰겔 ‘익명의 민중’ 향한 복합적 시선

    브뢰겔의 시대 비판 의식이 날카롭게 살아 있는 작품 ‘죽음의 승리’

    현존하는 브뢰겔의 작품 45점 가운데 30점 이상이 자연, 시골, 무명의 하층 농민을 그린 것이어서 흔히 그는 ‘농민 화가’로 불린다. 이 점에서 또한 그는 회화사에서 독특한 존재가 됐다. 그 전에는 농민이 회화의 소재가 되지 않았으며 설사 그렇다 해도 조롱의 대상인 어리석은 무리에 불과했다. 브뢰겔의 농민 묘사에도 그런 관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그의 그림에서 그런 점은 부차적인 것이고, 어디까지나 농민을 살아있는 인간 그 자체로 그렸음이 두드러진다. 시골 생활 또한 브뢰겔 이전에는 그 자체로서 그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농민 묘사는 바로 살아있는 현실의 농민이다. 예컨대 당시 그림에서 주로 그려진 성인이나 귀족 또는 상류계급은 식탁에 자리한 경우에도 식사를 하는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인간을 이상화해 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리려는 예술에선 식사를 비롯한 인간의 일상생활이 경원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뢰겔은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며 즐겁게 노는 인간을 즐겨 그렸으며, 심지어 배설하는 모습까지 그렸다. 이는 몽테뉴나 라블레를 연상시킨다.

    대부분의 르네상스 화가들은 인간과 동식물의 이질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브뢰겔은 동질성, 즉 자연으로서의 동질성을 강조해 인간을 본능적 존재로 부각시켰다. 농민의 춤을 그린 작품에서 브뢰겔은 생명력으로 충만한 농민을 그리면서 특히 남성 성기 부분을 강조했다. 이는 다산과 자손의 번영을 축하하는 그림이며,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는 본능의 인간을 강조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브뢰겔이 본능의 활력만을 그린 것은 아니나, 르네상스 화가들처럼 인간을 고귀한 표정만으로 그린다든가 어떤 정신적 관념에 근거해 미화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는 문명화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영역도 인간의 본질에 속하며 인간 존재의 토대임을 보여준다. ‘육체 없이 정신 없다’는 르네상스시대 인간 몸의 발견이 이탈리아에서는 나체의 찬양으로 나타난 반면, 브뢰겔에서는 본능의 찬양으로 나타났음에 주목해야 한다.

    만년의 브뢰겔은 화면에서 풍경보다 인간을 더 크게 그리고, 특히 그 행동을 강조하는 전환을 보여준다.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많아 기브슨처럼 ‘유쾌한 브뢰겔’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기브슨은 이를 유희적 요소로 강조하나, 몽테뉴나 라블레의 경우처럼 그냥 유쾌한 것이 아닌, 풍자의 홍소처럼 비웃음의 유쾌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런 경우에도 자연 속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림으로써 캐리커처로 나아가지 않는다.

    ‘유쾌한 브뢰겔’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측면은 250여 명에 달하는 아이들의 유희를 그린 작품이다. 이 또한 회화사에 남을 만한 일이다. 그가 그린 것은 아이다운 아이들, 귀여운 아이들이 아닌 ‘어린 어른’으로서의 세계다. 필립 아리에스가 ‘아동의 탄생’에서 18세기 이후 탄생한다고 본 ‘어린 아이’가 나타나기 전이다. 브뢰겔의 아이들은 부모와 같은 복장으로 인형놀이가 아닌 어른들의 놀이를 한다.

    아이들의 유희 그림은 아이들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에 대한 경고, 즉 아이들처럼 삶을 허송하지 말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그는 또한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그리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의 과도한 교육열을 풍자한 것이다. 100가지가 넘는 당대 속담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업도 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당대에 대한 브뢰겔의 회의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회의 정신은 그가 그린 친근한 악마에서도 나타난다. 르네상스는 악마와 악령이 사람들에게 친근한 시대였다.

    생존 당시 이미 상당한 이름을 얻은 브뢰겔이었으나 그는 주문을 받아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고, 나체화도 그리지 않았다. 그가 그린 유일한 초상화는 입을 벌리고 있는, 조금은 기형적이고 또 지극히 가난했을 농촌 여성의 두상이다. 그녀가 브뢰겔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주문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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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뢰겔 ‘익명의 민중’ 향한 복합적 시선

    브뢰겔 작 ‘이카로스 추락의 풍경’. 그림 오른쪽 하단에 허우적대는 이카로스의 두 다리가 보인다

    이는 르네상스 화가로서 브뢰겔을 가장 특이하게 보이게 하는 요소다. 그는 악마만을 나체로 묘사했고, 인간은 언제나 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렸다. 그것도 몸의 선을 알 수 없는 형태로였다. 르네상스 화가들이 자주 그린 균형 잡힌 몸매는 그의 그림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개인의 중시는 브뢰겔에 와서 철저히 무시됐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를 인간 경시로 보아서는 안 된다. 브뢰겔의 익명적 묘사 방식은 도리어 당대 민중의 실존을 표현하는 가장 절실한 표현방식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흔히 ‘농민의 브뢰겔’이라고 하나, 더 중요한 것은 ‘자연의 브뢰겔’이다. 그가 그린 풍경은 장식이 아니라 힘찬, 인간의 삶터로서의 자연이다. 그는 미술사에서 풍경화의 시대를 열었다. 그 전까지 풍경은 인물의 배경에 불과했다. 그것도 천국이나 지옥 같은 상상의 세계였다. 귀족이 읽는 책에 풍경이 삽화로 그려지기도 했으나, 그는 귀족 소유 토지나 실용 가치가 있는 토지, 예컨대 수렵용 숲이나 농지에 불과했다. 그런 전통은 미술사에서 19세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브뢰겔의 풍경화는 그런 장식적 배경 삽화로 그려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연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린 것도 아니며, 인간은 물론 동식물도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에 적응해야 하는 존재라고 본 스토아 사상을 잇는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표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풍경화에 등장하는 인간이나 동식물은 모두 같은 색조로 매우 작게 그려졌다. 특히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미리 예정된 사명을 수행하는 자연 속의 익명적 존재로 표현됐다. 그림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광대한 자연이고 인물은 너무나도 작다. 화가는 지극히 높은 장소에서 자연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우주의 축도를 연상하게 한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유일한 신화의 주인공 이카로스는 흔히 지식의 경계를 넓힌 탐구자로 찬양되나, 브뢰겔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카로스를 화면 구석에 작게 그려 그를 비웃고 있다. 지식에 대한 과도한 물신화를 비판적으로 본 것이다. 대신 화면의 전면에 묵묵히 일하는 농부를 크게 배치해 그를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 역시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당대 휴머니스트들이 자연과 농민을 찬양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브뢰겔의 농부는 자연의 법칙에 순종하는 실존이다.

    브뢰겔이 사계절의 변화를 그린 것도 풍경화 역사에서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전에도 그런 그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중심에는 인간이 있었던 데 반해, 브뢰겔의 사계절 그림은 자연 그 자체의 변화를 주제로 삼는다. 인간이나 동식물은 자연에 그저 순종할 뿐이다.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눈 속의 사냥꾼’이다. 화면은 눈의 흰빛, 그리고 하늘과 얼음의 옅은 청록색으로 덮여 있고, 인간을 비롯한 생물은 모두 어둡게 그려져 있다. 흔히 생물을 그리는 데 쓰이는 찬란한 색조란 찾아볼 수 없다. 사냥꾼은 이 그림의 주인공이 아니다. 계절이 겨울임을 말하는 것은 사냥꾼이 아니라 자연, 즉 하늘과 얼음과 눈의 색조다. 인간은 그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점일 뿐이다.

    그를 ‘자연의 브뢰겔’을 넘어서, 우리 시대의 자연파괴를 선구적으로 예언하거나 자연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보여준다는 의미로 ‘에코 브뢰겔’로까지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인다. 그러나 그가, 자연을 인간이 지배하는 대상으로 보고 자연 정복이나 파괴를 통한 생산력 발전의 근대적 진보사관을 긍정하지 않은 점은 분명하다. 또 작품 ‘바벨탑’에서 보여지듯 그가 권력의 지배와 전쟁, 그리고 종교적 독단을 부정하고, 관용과 다원의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통해 자연 속에서 자연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자연 유토피아를 나름의 관점에서 그린 점은 분명하다.

    브뢰겔 ‘익명의 민중’ 향한 복합적 시선

    브뢰겔의 대표작 중 하나인 ‘눈 속의 사냥꾼’. 겨울 풍경이 생생히 살아 있다

    브뢰겔이 그린 인간과 사회, 자연에 대한 철저한 리얼리즘과 유토피아적 비전은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오면 예컨대 같은 플랑드르 화가인 루벤스(1577~1640)에서 보듯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다. 기브슨은 루벤스가 브뢰겔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했다고 평가하나, 그 조형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 사람의 세계관은 상이하다고 본다.

    도리어 브뢰겔의 유산은 렘브란트나 고야, 도미에, 밀레, 그리고 반 고흐를 거치면서 다시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농민 출신의 밀레는 1848년 혁명을 지지했고 자본주의세계의 농업노동을 노예노동과 같이 가증할 비인간화의 형식으로 묘사했다. 브뢰겔이 성장하는 시민의 눈으로 본 객관적 농민의 모습을 밀레는 농민의 눈을 통해 그 음울함과 비참, 절망감까지를 방관자가 아닌 그 자신의 모습으로 그렸다. 그가 그린 농부는 누추하고 볼품없이 저주받은 인간의 유령처럼 서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등을 구부린 채 머리를 거의 땅에 처박고 손으로 흙 속을 파헤치는 모습이다. 인간성은 철저히 상실되고 오직 타락한 모습뿐이다. 고야의 ‘마녀’나 도미에의 ‘3등열차’에서도 우리는 그런 농민과 노동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반 고흐는 농민을 더욱 절망적인 모습으로 그린다. 졸라의 ‘제르미날’과 ‘대지’에 감동을 받은 반 고흐는 밀레보다 더 철저히 브뢰겔의 그림을 벗어난다.

    반 고흐가 그린 젊은 농부는 노동에 의해 몸이 뒤틀린 채 겨우내 언 땅을 힘겹게 파고 있다. 오직 먹고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황폐한 모습일 뿐이다. 그 자신의 초상도 삶에 지쳐 극도로 피로한 모습을 보여준다. 반 고흐의 자연은 브뢰겔이 그린 정태적 옥수수의 물결이 아니라 공포와 전율로 뒤흔들리는 삭막한 들판이다. 그의 의자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으며 풍경 속에는 더 이상 사람이 없다. 그의 해바라기나 태양은 위대한 혁명을 바라는 것이나, 그것은 현재의 빛이 아니다.



    밀레나 반 고흐의 농민은 이후 다시 혁명화가 디에고 리베라를 비롯한 멕시코 민중화가들의 작품에 혁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그는 도미에와 같은 격렬한 증오심으로 농민을 착취하는 식민지 지배자를 분명하게 그렸으며, 나아가 해방된 토지를 서로 분배하는 새로운 사회의 농민을 활기차게 묘사했다. 이제 화가는 노동자를 인간의 얼굴을 한 살아 있는 존재로 묘파한다. 이제야 르네상스 화가로는 유일하게 브뢰겔이 그린 익명의 농민, 민중이 제 얼굴, 제 이름을 갖게 된다. 그를 위해서 400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이 필요했다. 르네상스의 자유, 인간의 존엄은 비로소 민중의 그것으로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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